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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신다 아던, 상상력과 간절함의 부재

김 무인 2020. 4. 20.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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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신다 아던, 정치적 상상력과 간절함의 부재 



나만 프로불편러가 아니다

 

제신다 아던 노동당 정권의 코로나바이러스에 사태 대처를 바라보면서 실망스러움을 느끼는 사람은 나만이 아닌듯 싶다. 이전 포스팅(3월 27일)에서도 현 정권의 초기 대처가 미흡했고 현재의 록다운도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라고 비판했었다. 그런데 3월 31일자 온라인 미디어 stuff의 기고문을 통해 오클랜드 대학 전염병 전문가  Simon Thornley도 심지어 비슷한 표현- 벼룩잡으려다 집을 부순다- 을 쓰면서 현 제신다 아던 정권이 불필요하게 과도한 조처를 했다고 비판했다. 

 

웰링톤의 Victoria 대학교수 Grant Guilford는 그의 newsroom 기고문에서 정부가 당시 록다운 조처를 내릴만한 근거를 나름 가지고 있었으며 대중의 정서도 이를 따랐지만, 뉴질랜드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추세 그래프는 록다운이 시행되기 이전부터 눕기 시작했음을 지적했다. 제신다 아던은 현재의 록다운이 단기적으로는 힘들지만, 장기적으로 뉴질랜드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수차례 밝혔지만, Grant Guilford를 따르면 덜 엄격한 조치보다 전면적 록다운(complete lockdown)이 경제에 유익하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어떤 결정적 증거도 없으며 오히려 장단기적으로 사회구성원의 건강과 행복(wellbeing)에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 이어 그는 나중에 뉴질랜드 대중이 현 정부의 코로나바이러스 대처를 놓고 판단을 할 때 얼마나 빠르고 강하게 록다운 조처를 했는가를 고려하는 대신 정부의 조치가 얼마나 균형 잡혔는가를 알고 싶어할 것이다고 주장한다. 그는 록다운을 연장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담아 록다운 연장은 비용보다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을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정부는 현행 레벨 4의 시행 기간 4주가 4월 22일 만료됨에 따라 이번 주 중에 레벨 3으로 단계가 내려갈 수 있음을 지난주 언론을 통해 흘렸다. 뒤이어 발표된 세부사항들은 나로 하여금 ‘이게 뭐하자는 건지’ 혼잣말을 하게 만들었다. 최근 포스팅에서도 다룬 바 있는 중소 리테일 자영업자의 상업용 렌트에 대한 정부의 대응 그리고 접근 자세는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4월 17일 자 newsroom의 뉴질랜드 프랜차이즈 협회장 Robyn Pickerill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많은 교민이 종사하고 있는 상가 임대를 통한 리테일 비즈니스에서 렌트 구제가 생각만큼 쉽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Robyn Pickerill은, 이 기사를 따르면, 분노와 실망을 담아 제신다 아던에게 편지를 보냈다. 3만 7천 개의 프랜차이즈 비즈니스 - 뉴질랜드 GDP의 11% - 를 대표해서 그녀는 정부가 4월 15일 발표한 소규모  비즈니스를 위한 30억 달러 세금 우대(tax breaks) 조치는 현실적으로 패밀리 비즈니스가 많은 소규모 자영업에 혜택이 없다는 비판한다. 왜냐하면 패밀리 비즈니스 특성상 많은 이익을 기록할 수 없어 실질적으로 이 세금 우대 조치를 통해 누릴 혜택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임대 건물에 대한 렌트비 구제 조치임을 그녀는 역설한다. 그녀를 따르면 정부의 이전 조치에 따라 랜드로드는 30일을 기다려야 했지만, 이번 중소비즈니스 구제 패키지에서 렌트 항목이 빠진 것을 발견한 이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렌트를 받으려고 벼르고 있다. 

 

 

출처: NEWSROOM Photo: Lynn Grieveson

 

 

문제가 되는 상업용 렌트에 대한 newsroom의 질문에 대해 법무장관 Andrew Little은 정부로서 추가 고려가 없다는 태도를 밝혔는데 금요일(4월 17일) 재무부 장관 Grant Robertson은 렌트 구제에 대해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고 다른 견해를 밝혔다.  그런데 그의 인터뷰 내용 중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우리는 위험에 처해있지만(velnerable) 생존 가능한(viable) 비즈니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계속 고려할 것이다”. 이 발언에서 유추할 수 있는 해석은 첫째, 상업용 렌트에 대한 정부의 구제방안이 언제 발표될지 모른다는 것과 둘째, 생존 가능한 비즈니스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것은 그렇지 않다고 판단하는 비즈니스에 대해서는 렌트 구제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기준이 궁금하며 봉쇄 4주차가 끝나가는데도 여전히 상업용 렌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

 

급기야 4월 17일 미디어의 한 기사를 보면 록다운은 수상의 정치적 동기에 의해 단행된 것이며 그 때문에 자신의 자유가 부당하게 제한당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의해 제신다 아던이 고소당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Fair enough!



같은 4월 15일, 하지만 전혀 다른 두 나라

 

뉴질랜드 제신다 아던 정권이 레벨을 낮출까 어떨까 언론플레이를 통해 국민 여론의 반응을 지켜보던 그 시기에 한국은 총선을 실시했다. 한국 총선을 보면서 제신다 아던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직도 일일 신규  확진자가 20명이 넘는 나라 - 당시 기준이며 4월 19일 현재 한국은 8명이고 뉴질랜드는 9명을 기록했다 - 에서 오버하는 짓이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거기는 의료인프라가 좋으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갈까 아니면 아시아 국가는 검토할 가치가 없다고 아예 처음부터 외면했을까? 

 

 

 

 

신기할 정도로 제신다 아던이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극복 관련 세계에서 가장 롤모델이 될 수 있는 국가 중 하나인 한국을 언급한 기사를 볼 수 없다. 이는 상당 부분 서구의 우월 의식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대표적 예가 마스크다. 많은 유럽국가가  마스크 착용이 불필요하다는 기존 태도를 극적으로 전환해서 전 국민 마스크 착용을 권장하는데도 제신다 아던과 이번 팬데믹 대처를 총괄 지휘하는  Ashley Bloomfield는 전혀 고려치 않고 있다.  제신다 아던은 뉴질랜드는 1천8백만 개의 마스크 비축분과 8만 개의 마스크가 매일 생산되고 있다고 발표한 바 있지만 마스크를 쓴 제신다 아던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이전 포스팅에서도 밝힌 것처럼 뉴질랜드의 의료 인프라는 구매력 기준 인당 GDP가 비슷한 한국과 비교  많이 열악하다. 십만 명당 중환자실 병상이 한국은 10.6인데 반해 뉴질랜드는 4.7 에 불과하며 인구 천 명당 병상 수(2017년)도 한국은 12.27인데 반해 뉴질랜드는 2.71에 그치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한국은 매년 이 숫자가 증가하는 반면 뉴질랜드는 매년 감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인프라의 취약성이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전면적 록다운을 처음부터 실행한 제신다 아던의 결정을 옹호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록다운 레벨 3을 앞둔 이 시점, 제신다 아던은 한국의 총선을 보고 여전히 아무런 느낌이 없는지 궁금하다. 우리가 보았듯이 많은 사람이 결집하고 접촉하는 투표를 안전하게 진행하는 데에는 중환자실 병상과 인공호흡기 숫자가 필요 없다. 다만 시민의 마스크 착용, 세정제 사용, 발열 체크, 일회용 비닐장갑 사용 그리고 사회적 거리두기, 이뿐이었다. 이것은 의료 인프라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의 의지와 상상력의 문제다.

 

 

출처:newsroom Photo: Lynn Grieveson

 

 

정치적 상상력의 부재

 

내가 제신다 아던에게 실망하는 지점이다. 뉴질랜드 총리는 바이러스를 피해야만 하는 존재로만 취급한다. 그녀에게는 바이러스가 뉴질랜드에서 아예 근절(eradication)되기 위해서는 국민의 상호 접촉을 최소화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국민의 사회경제적 활동의 증가는 바이러스 확산과 정비례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은 총선 실시가 상징적으로 대표하듯 지난 몇 달 동안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 주었다. 생명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비즈니스를 죽이고 있는 뉴질랜드 정부인데 장기적으로 비즈니스가 죽으면 생명도 죽는다. 생물학적 생명도 포함될 수 있지만, 비즈니스 종사자들의 사회적 경제적 생명이 죽는다. 이것을 알기에  한국 정부는 기를 쓰고 단기적으로 국민의 물리적 생명을 보호하는 한편 중장기적으로 다가올 여파에 대비 최대한 비즈니스와 일상생활을 보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런 노력에 필요한 것은 위에 언급했듯이 거창한 인프라가 아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 착용, 손 씻기 및 세정제 사용 등이 다다. 여기에 어쩌면 가장 중요한 국민의 공감된 인식과 그에 근거한  자발적 참여가 필수적으로 더해질 것이다. 이런 면에서 내가 볼 때 현 노동당 정권은 구태의연하다. 예를 들어, 뉴질랜드 국민은 정부의 권고가 없음에도 마스크를 알아서 구해 - 어떤 이는 집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서 그리고 이나마 없는 이는 스카프를 대신 이용하면서 - 착용한다. 정부와 국민의 대처 간 괴리가 목격되는 대목이다. 뉴질랜드 국민은 정부가 언론을 통해서 마스크 무용론을 흘리고 있지만, 인터넷을 통해 밀려 들어오는 외국 소식들은 전부 마스크 구하기에 혈안이 되었다는 소식에  더는 정부 그리고 그 주변 전문가의 말을 듣고 있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정부에 대한 국민 신뢰의 저하 혹은 부재를 보여준다. 

 

역으로 뉴질랜드 정부도 국민에 대한 불신을 하고 있다. 처음부터 국민의 자발적 협조를 유도하는 단계가 아예 없었다. 자국민들을 강제하지 않으면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인식이 처음부터 깔린 것이다. 이런 정부의 강제적 조치에 국민은 일단 따른다. 이는 서구 리버럴 사회의 뼈대가 된 Thomas Hobbes의 사회계약론(social contract)에 따라 자신의 권리를 적법하게 양도받은 국가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속으로는 불만이 있음에도  계약에 따라 강제된 법을 준수하지만, 마음속으로 신뢰를 보내줄지 여부는 다른 문제다. 초기 사재기 발생과 정부 권유가 없음에도 마스크를 알아서 착용하는 현상이 이 신뢰의 취약성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행된 레벨 4를 레벨 3으로 내리는 것은 수상으로선 모험이다. 더는 죽어가는 비즈니스를 내버려둘 수 없어 고려하지만, 만약 레벨 3으로 내린 후 바이러스가 다시 창궐해서 다시 레벨 4로 상향 조정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면 사회 경제적으로 충격이 클뿐더러 그녀의 정치 생명과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레벨 3과 4를 오가는 것은 런던 제국 대학교 리포트에서 이미 예견한 패턴이었기에 그렇게 데미지 먹을 정치적 행동은 아니다. 그러나 제신다 아던의 문제는 이 레벨 기어를 바꾸는 것 외에는 동원할 다른 수단이 그녀의 ‘상상력’에는 없다는 것이다. 

 

4월 16일 미국의 트럼프는 지금까지 봉쇄를 풀고 다시 경제를 재개한다는 발표를 했다. 같은 맥락이다. 경제냐 생명이냐는 이분법적 선택 사고의 결과다. 봉쇄를 통해 제신다 아던은 경제보다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다가올 총선에 대비해 욕먹지 않을 눈앞의 생명을 구한다는 명분을 선택했고 트럼프는 봉쇄 해제를 통해 그의  지원군 자본가들의 비즈니스의 이익을 구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둘의 차이는 제신다 아던은 확진자 증가 추세가 확연히 감소세로 접어들었음에도 망설이고 있지만 트럼프의 미국은 트럼프가 봉쇄를 해제 발표를 하던 4월 16일에도 2,174명이 사망해 4월 19일 현재 누적 확진자 761,379명 그리고 누적 사망자는 40,419를 기록했으며 증가 추세는 꺾이지 않은 상태이다. 한편 지난 4주 최소 누적 2천 2백만 명이 실업자가 발생했는데 이는 노동자 7명당 1명이 실업자라는 의미이며 미국 역사상 최고의 기록이다. 자본가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트럼프 입장이지만 이 숫자들을 무시할 수 없는 것도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실업자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이민자, 유색 노동자들 그리고 가난한 비보험자 노동자들은 봉쇄 후 직장에 복귀해 바이러스의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기에 이들에게 코로나바이러스가 어떤 형식으로 영향을 미칠지 주목할 부분이다.



레벨 3, Are you kidding?

 

레벨 3조치 관련 가장 큰 논란 대상 중 하나는 Year 10까지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등교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알다시피 뉴질랜드에서 집에서 혼자 있을 수 있는 나이는 14세부터다. Year 11이면 정상적이면 다 14세가 넘는다. 레벨 3으로 완화되면서 일하러 나가는 부모가 많아짐에 따라 동반된 조치임은 누구나 다 아는데 이에 대해   재무부 장관  Grant Robertson은 기자회견에서 모든 어린이가 교육을 잘 받을 필요가 있으며 year 10까지로 제한 것은 이 나이대가 사회적 거리두기가 쉽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내게는 눈 가리고 아웅으로 비친다. 17세 고등학생보다 6세 초등학생이 사회적 거리두기가 더 쉽다니… 어떤 방식을 적용할지 모르지만 상상이 잘 안 된다. 그 씩씩하고 잘 준비된 사수 한국도 온라인 개학이라는 전대미문의 방법을 통해서라도 어린이들의 집단 감염을 막기 위해 오프라인 개학을 미루는 상황에서 국가 봉쇄를 마다치 않던 뉴질랜드가 이런 이중적인 조처를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들 상상력의 한계다. 봉쇄하거나 풀거나 둘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한쪽을 풀면 한쪽이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는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출처:newsroom Photo: Lynn Grieveson

 

 

더 나아가 KFC 혹은 McDonald의 드라이브스루는 contactless라 괜찮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드라이브 스루에서 로봇 팔이 음식을 전달하는 것은 아니잖은가? 맥도널드 햄버거 판매가 가능한 시점에 필수 비즈니스로 지정된 슈퍼마켓에서 파는 야채,고기,빵을 전문적으로 파는 소매점에서 못팔게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Face-to-face라서? 그러면 슈퍼마켓 혹은 데어리처럼 사회적 거리두기가 가능한 방식을 통해 영업을 재개토록 할 수는 없는가? 데어리에서 담배는 face-to-face로 살수 있어도 야채는 안된다? 하나씩 캐고 들어갈수록  납득이 안되는 상황들이 계속 머리에 떠오른다. 

 

이런 뉴질랜드 상황을 접하면서 이번 팬데믹 대처에서 잠재된 국력과 국민의식을 세계만방에 드러내며 혜성처럼 등장한 한국을 떠올리게 된다. 한국은 국민에게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한 기본 원리를 이해시킨 후 구체적 상황에 대한 Q & A 없이 이 원칙에 근거, 상식적인 국민의 자발적 대응을 유도하였다. 그러나 뉴질랜드는 지금 초등학교 1학년 입학 첫날의 자녀에게 대하듯 모든 상황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면서 이건 되고 저건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건 자상한 국가가 아니라 일종의 감시국가(surveillance state)이자 경찰국가(police state)다. 한국은 바이러스 확산을 위해 우리가 지켜야 할 원칙은 마스크 착용하기, 손 소독제 사용하기, 사회적 거리두기 이 세 가지입니다라고 안내하면서 모든 사회적 경제적 활동을 평상시처럼 유지하여 달라고  오히려 당부한다. 뉴질랜드는 이 원칙, 특히 마스크 착용, 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환기하면서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기보다는 강압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현하려고 하는 모습이다.  

 

 

섬김의 리더십 

 

이렇게 강제적 거리두기를 시행하다 보니 경제가 죽고 그렇다고 조기에 이 조치를 풀기에는 재확산 가능성이 있어 어느 선택을 해도 불안한 뉴질랜드 현 정권의 처지는 정치적 상상력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이 정치적 상상력의 부재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한국의 4월 15일 총선에서 집권 여당이 대승을 거두면서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현 정부의 대응을 국민은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그 중심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있다. 물론 실무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의 역량도  매우 훌륭하지만, 박근혜 집권 시절 메르스 대처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은 그녀를 직급 서열을 무시하고 지금의 자리에 임명한 사람이 문재인 대통령임을 고려할 때 이번 팬데믹 대처의 총 책임자로서 대통령의 리더십은 찬사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본다. 그러면서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 대처하는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과 뉴질랜드 제신다 아던 수상의 리더십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의 리더십은 ‘섬김의 리더십’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Robert Greenleaf가 주창한 Servant Leadership의 한국 번역 단어가 되지만 이 서구의 개념과는 다른 뉘앙스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문재인 대통령의 국민의 섬김은 Greenleaf가 주로 겨냥한 사적(private) 경영조직의 효율성 제고를 위한 필요한 유형의 리더십이라는 경영학적 측면보다는 공복(public servant)으로서  조직의 효율성이라는 측면보다 자신의 권리를 자신에게 위임한 주권자에 대한 ‘보답과 헌신’이라는 도덕적 정치학적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사에서 섬김의 리더십 등장은 노무현 대통령 때부터라고 생각한다. 그 이전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 현대사에서 첫 민주주의 정권이라고 한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한반도의 첫 탈권위적 지도자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 실행 결과물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난 그가 보여준 ‘탈권위적 섬김의 자세’는 한국 정치사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한국의 정치문화는 노무현 전과 노무현 이후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한국 정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몇백 년 혹은 몇천 년 동안 한국인에게 DNA처럼 자리 잡은 수직적 권위주의 문화의 탈피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건 리버럴리즘과 사회주의 간 이데올로기 이슈가 아니다. 한국 혹은 더 나아가 아시안 사회를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동안 짓눌러 왔던 수직적 권위주의 문화로부터의 탈피가 절대적인 시대적 요구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단기 필마로 한국의 전 분야에 걸쳐 팽배한 권위주의에 도전한 돈키호테였다. 휘하 군사들을 제대로 동반하지 못한 이 장수의 의거는 결국 미완으로 끝났다. 하지만 이 한국 정치의 탈권위주의와 모든 대의  권력은 국민한테서 나왔음을 상기시키는 노무현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어둠의 터널을 지나 문재인에게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많은 면에서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이지만 확실한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국민을 섬긴다’는 점이다. 

 

 

 

 

 

 

 

이 둘의 섬김 리더십은 일반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지도자의 국민을 대하는 방식과 다르다. 서구는 말 그대로 지도자와 국민 간의 관계가 권리를 일시적으로 같은 동료 시민에게 양도했다는 횡적인 관계가 기본 개념이다. 반면 노무현과 문재인은 섬김이란 용어의 물리적 위치가 시사하듯 국민을 위로 모시는 형식의 리더십이다. 한국은 서구 리버럴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했지만, 서구와는 다른 모습의 리더십이 이 두 사람으로부터 탄생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이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대통령들은 말만 대의 민주주의 대통령이었지 그 리더십 형식은 이전 왕정 시대의 왕과 같은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이었다. 노무현은 이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깨트린 사람이었지만 대중들이 그 의미를 깨닫기 전 기득권 권위주의 정치 세력에 희생된다. 하지만 7년 뒤 이 탈권위주의 리더십은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한다. 그리고 그 리더십의 소중함을 깨달은 수많은 ‘깨어있는 시민’ - 콘크리트 40%로 알려졌다 - 으로 인해 반수가 넘지 못한 국회의원 숫자에도 느리나마 꾸준히 그의 공약을 실천에 옮겼으며 이번 21대 총선의 대승으로 마침내 그가 이루지 못한 목표를 이룰 기회를 잡았다. 

 

나는 노무현과 문재인 이 두 사람의 섬김의 리더십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에 대한 논리적 접근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전통적 유교 가르침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수백 아니 수천 년간 ‘높은 분들’ 밑에서 제대로 숨도 못 쉬던 한반도의 민초들에게 밀린 보답이라도 하듯이 그들을 상전으로 모시려는 두 사람의 개인적 성품 덕분인지 알지 못한다. 그 기원과 관계없이 분명한 것은 이 섬김의 리더십이 코로나바이러스 관련 오늘 한국을 가장 위대한 극복 사례 국가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모범적 극복 과정에서 보여준 한국의 대처방식은 치밀한 사전 준비부터 많은 부분 ‘창의적’이었다는 점이다. 잘 알려진 드라이브 스루(drive-thru), 웍킹 스루(walking-thru) 그리고 추적 앱 등이 그것이다. 



간절함은 상상력을 낳는다

 

이런 창의적 방식들의 출현은 코로나바이러스를 대처하는 한국 정부 관료와 민간 협력업체의 ‘상상력’에 기인한다. 즉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이 사태에 대처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상상력을 발휘한 가운데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 상상력은 지도자의 ‘간절함’에 기인한다. 어떻게 하면 한 명의 국민이라고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국민이 감염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국민의 일상생활과 경제적 활동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방역조치를 유지할 수 있을까? 등등.  즉 국민의 총체적 안녕(well-being)에 대한 ‘간절함’ 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간절함은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대책 책임관료로서 긴 일과가 끝난 다음에 들어선 침대에서도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밤잠을 설치게 하는 것이다. 왕정식 표현으로 치면 ‘애민정신(愛民精神)’이다. 

 

 

브리핑 때마다 사망자들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는다

 

한국 문재인 대통령과 제신다 아던의 리더십은 이 간절함에서 차이가 있다. 제신다 아던의 리더십은 Thomas Hobbs의 사회계약론에 의거, 국민들로부터 양도받은 권력을 계약에 의거 자신의 권한을 사무적으로 행사한다. 자신이 받은 급여만큼 그리고 계약에 명시된 권한과 의무만큼만 생각하고 행동한다. 즉 한 국가의 수장이라도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희생해가면서 국민의 안녕을 위해 extra mile을 가지 않는 전형적 서구 정치인이다. 따라서 나는 제신다 아던의 이번 팬데믹 대처를 보면서 이런 ‘간절함’을 느끼지 못한다. 전 세계 모든 국가가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 직면한 현재이지만 많은 서구 국가의 지도자들에게는 이런 ‘간절함’이 없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국민을 상대로 일정 명분을 갖추면서 선거에서 자신들의 재집권에 어느 전략이 필요한가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