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뉴질랜드 이야기

(1) 뉴질랜드 럭비 이야기 : 건장한 영국신사와 마오리 전사와의 만남

김 무인 2019. 11. 1.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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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뉴질랜드가 무난히 3연패를 할 것이라고 예상되었던 2019년 럭비월드컵이었다. 왜냐하면 2011년 자국 뉴질랜드에서 열렸던 럭비월드컵에서 7연승 그리고 영국에서 열렸던 2015년 럭비월드컵에서의 또 다른 7연승을 포함해서 올 해 일본 럭비월드컵 준결승에서 잉글랜드에 패하기 전까지 18연승을 질주했던 뉴질랜드 럭비 국가대표팀 All Blacks였기 때문이다. 

 

경기와 별개로 흥미로운 해프닝이 있었다. 바로 Tattoo에 대한 일본 조직위의 입장이다. 조직위는 이번 럭비월드컵에 참가하는 선수들과 임원들에게 공공장소에서 Tattoo를 가려줄 것을 요청했다. Tattoo가 문화의 한 부분으로 정착된 뉴질랜드와 사모아의 경우 당혹스러울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두 팀 다 쿨하게 일본의 관습을 존중한다면서 이 방침을 순순히 따름으로써 큰 문제없이 넘어갔다. 물론 경기장에서는 팔다리의 Tattoo를 드러낼 수 밖에 없었지만. 

 

 

일본 조직위의 설명으로는 Tattoo(문신)가 일본 조폭인 야쿠자를 연상시킴으로써 자국  대중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이유였는데 이전에 일본을 방문한 David Beckham이나 Johnny Depp의 경우 심하게 문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모습이 일본의 방송에서 여과없이 전파를 타고 일본 대중에게 전달되었던 것을 고려하면 시대역행적 행보로 보인다. 더 나아가 자국의 관습과 문화는 존중받아야 한다는 포지션이라면 반대로 타국의 관습과 문화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기본적 원칙에도 어긋난다. 더구나 일본은 대회 개최국이다. 즉 손님들을 초청한 호스트임을 감안했을 때 그 누구도 야쿠자를 연상하지 않을 외국인들의 문신에 대해 왜 그렇게 오버스러운 요청을 했는지 의문이다. 

 

 

럭비의 탄생 배경

 

잉글랜드 중세시대의 사람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할 정도로 야만적인 민속경기가 19세기  빅토리아 왕조시대에 진화하여 현재의 럭비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당시 고등학생인 William Webb Ellis가 1823년 현대 럭비 형식을 만들었다. 럭비월드컵의 공식 트로피도 그의 이름을 따 Webb Ellis Cup이다. 이후 야만적 민속경기는 사라지고 럭비는 19세기 후반 잉글랜드 남자 공립학교를 중심으로 확산되게 된다. Rowe and McKay에 따르면  이전 야만적 민속경기에 비해 상당히 제도화되었지만 여전히 폭력적인 럭비가 잉글랜드의 부르조아-귀족 계급에 의해 스포츠 경기로 정착하게된 배경을 단순히 남성의 폭력에 대한 선천적으로 잠재된 기질의 표현이라고 설명할 수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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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gby School

 

현재 럭비(Rugby)라는 이름을 갖게 한 Rugby School의 당시 교장 Thomas Arnold는 럭비를 통해서 학생들이 건장한 기독교인(muscular Christian)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했다. 이는  빅토리아 시대의 스포츠맨쉽을 반영했는데 이 때의 스포츠맨쉽은 단순한 공정, 겸손 그리고 준법같은 덕목 외에 남성적이고 공격적이며 씩씩한 것을 포함한다. 이 같은 스포츠맨쉽의 정의는 영제국주의의 정점을 달리던 19세기 후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영제국주의의 지배엘리트 계급은 과거 대제국들이 몰락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지배계급이 사치스러워지고 나약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당시 해가 지지 않는 영제국주의 식민지 통치를 위해서는 다소 폭력적일 수 있는 럭비가 미래의 엘리트들을 단련시키기에 적합한 운동이라고 이해했다. 

 

 

간략한 뉴질랜드 럭비 역사

 

뉴질랜드에 럭비는 1870년 넬슨의 청년 Charles Monro에 의해 소개되었으며 1892년 뉴질랜드럭비유니온(NZFU: New Zealand Rugby Union 당시는 NZRFU: New Zealand Rugby Football Union)이 결성된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럭비의 교육적 가치가 강조되면서 뉴질랜드에서 럭비는 남자공립학교를 중심으로 활성화된다. 초창기 뉴질랜드에서 럭비의 활성화에는 위 건장한 기독교 이미지와 유사한  건장한 신사(muscular gentlemen) 이미지가 파케하를 중심으로 뿌리내림과 동시에 럭비의 육체적 부딪힘에서 Warrior로서의 본능을 느끼는 마오리들의 참여가 큰 몫을 차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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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riginal All Blacks

 

이렇게 뉴질랜드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 럭비는 신생 국가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our national game’이 되는데 여기에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 1905년 현 All Blacks의 최초 팀에 해당하는 ‘The Original’이 매우 성공적으로 모국인 영국과 유럽의 투어를 마치면서 부터이다. Haka를 통해 영국인들의 시선을 끌어들임과 동시에 모국을 이긴 식민지 국가가 되면서 뉴질랜드라는 나라를 국제무대에 처음으로 알린 사건이다. 이 1905년 ‘The Original’의 성공은 신생 국가의 국가정체성 확립에 목말라하던 당시 파케하 위정자들에 의해 럭비는 국민적 스포츠로 단숨에 격상되면서 중등학교부터 의무교육이 된다.

 

이후 파죽지세로 ‘our national game’으로서의 절대적 지위를 만끽하던 뉴질랜드 럭비는 1970년대 후반의 전세계적 사회변화, 가령 인종차별, 여성해방운동 그리고 반전운동 등,에 직면하면서 그 동안의 신화적 지위에 금이 가기시작한다.이 균열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것이 1981년 남아공화국 럭비대표팀인 Springboks의 뉴질랜드 투어 경기에 대한 전국적인 반대 시위였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1970년대 전 세계적인 인종차별반대에 직면하면서  남아공을 세계 무대에서 배제시키자는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1973년 집권한 노동당은 애초 계획된 Springboks의 뉴질랜드 초청투어를 취소하기에 이른다. 이 투어 취소에 불만을 가진 유권자들이 많음을 간파한 국민당은 1975년 선거에서 남아공과의 럭비 교류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공약을 내세움으로써 대승, 집권하게 된다. 집권하자마자 곧 바로 All Blacks의 다음 해 남아공 원정투어를 승인한다. 그런데 All Blacks의 1976년 뉴질랜드 남아공 원정투어 시작 2주일 전에 남아공 Soweto에서 대규모 학생봉기가 일어나면서 700명으로 추산되는 흑인들이 백인 경찰의 잔인한 진압에 의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런 비극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All Blacks는 백인들로만 구성된 남아공 럭비대표팀 Springboks와의 원정 경기를 정상적으로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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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weto 봉기

 

All Blacks의 이런 움직임을 뉴질랜드가 아파르트헤이트를 지지한 것으로 간주한 다른 아프리카 22개국은 2년 뒤에 있을 영연방대회(Commonwealth Game)의 보이콧을 결의한다. 이에 사태의 심각함을 느낀 영연방대회 주최 측은 1977년 가입 국가들에게 남아공과의 스포츠 교류를 자제할 것을 결의하게되는데 1975년 이후 계속 집권하던 국민당은 이 결의를 무시한 채 1980년에 그 다음 해 남아공 럭비대표팀 Springboks의 뉴질랜드 투어를 승인한다. 이로 인해 1981년 혹자의 표현대로 1860년대 파케하와 마오리 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가 뉴질랜드에서 발생하며 럭비 지지자와 반아파르트헤이트 지지자간 시위 충돌이 발생한다.

 

 

이전까지 이주민 파케하와 원주민 마오리를 전 세계에서 가장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던 ‘our national game’ 럭비가 엄청난 사회적 문화적 함의를 지니고 있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럭비로 인해 ‘our nation’이 분열에 휩싸임을 목도, 경험하게 된 뉴질랜드 국민들은 이 때 이후부터 럭비를 더 이상 그 이전의 럭비로 볼 수 없게 된다. 그러면서 그 동안 당연시하게 여겼던 백인 남성 주도의 럭비에 의해 지배되었던 뉴질랜드의 사회질서 자체에도 의문을 품기시작하게 되면서 그 동안 럭비가 뉴질랜드의 다른 사회적 문제들 - 가령 동성애, 여성해방운동, 인종차별 등- 을 가리는 역할을 해왔음을 인지하게 된다. 이런 인지는 뉴질랜드 국민들로 하여금 반인종차별 뿐만 아니라 반럭비 성향을 띠게 만들었다.

 

Springboks 투어지지자와 반대시위대간의 충돌

 

이에 위기 의식을 느낀 뉴질랜드 럭비유니온(NZRU)은 옆 나라 호주와 더불어 럭비월드컵의 창시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1987년 호주와 함께 제 1회 럭비월드컵을 개최하고 또 최초 우승을 하게 된다. 이 우승으로 어느 정도 뉴질랜드 대중의 관심을 다시 확보한 뉴질랜드 럭비유니온은 그 간 유지되어온 건장한 신사(muscular gentlemen)의 이미지로부터 보다 복합적이고 원만한 이미지로 전환을 도모하면서 여성과 어린이들을 상대로 한 마켓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그리고 1995년 다국적 기업 Adidas와 스폰서 계약을 체결함과 동시에 All Blacks를 통한 민족주의 정서를 팔면서 한 동안 정체성 위기를 겪었던 뉴질랜드 럭비는 다시 위상을 회복하게 된다.

 

Captain David Kirk hoists the Webb Ellis Cup in the air, following the All Blacks' victory over France in the first Rugby World Cup final.

 

 

뉴질랜드 럭비 현황

   

위상을 회복했다고는 하지만 뉴질랜드에서 럭비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크지 않을 수 있다. 매주 토요일 오전이 되면 10만명이 넘는 인원이 뉴질랜드 전국 곳곳의 럭비 파크에서 학교와 클럽 럭비 경기를 한다. 2016년 자료에 의하면 유니온에 등록된 럭비 선수들은 155,934 명으로 인구의 약 3%를 차지하는데 이 중 대부분은 어린이와 십대 학생이며 성인 선수는 28,318명에 그친다. 즉 6명 중 5명 가량은 학교를 졸업하면서 럭비를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이다. 

 

Just 2065 fans were at Westpac Stadium to see Wellington lose to Waikato last Saturday.

지역팀 Waikato와 Wellington간의 경기. 관객이 별로 없다.

 

또한 럭비 경기를 직접 관람하는 숫자도 줄어들고 있다. SANZAAR (남아공, 뉴질랜드, 호주, 아르헨티나 럭비유니온 연합체)가 주관하는 4개국 클럽팀 대항인 Super 15같은 대회가 아닌 국내 지역 팀간 대결의 경우 관람객이 수 천명은 고사하고 수 백명에 불과한 상황이다. 스카이 티비를 통해 시청하는 인구까지 통틀어 최대한 추산해도 뉴질랜드 전체인구의 20%가 되지 않는다. 이런 숫자들을 종합해볼 때 뉴질랜드를 마치 럭비에 미친 국가로 치부하는 것은 많이 과장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작은 나라 규모에 비해 압도적인 국제 대회 성적을 유지하는 All Blacks로 인한 착시 현상이거나 아직도 럭비를 National Identity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유지하고 싶은 그룹의 의도가 깔린 바람일 수 있을 것이다. 

 

 

뉴질랜드 럭비와 마오리 

 

전술했듯이 마오리는 럭비가 잉글랜드로부터 뉴질랜드에 전해진 19세기 후반부터 적극적으로 이 식민지배자의 경기에 참여했다. 이유 중 하나는 파케하 지배하에서 자신들의 권위(mana)를 확인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영역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한편 파케하 위정자들 입장에서는 마오리의 파케하 중심의 뉴질랜드 사회로의 동화가 불가피하다는 전제 하에 파케하와 마오리들을 통합할 수 있는 방편으로 마오리의 육체적 능력과 Warrior로서의  전투적 태도를 잘 활용할 수 있는 럭비에 주목한다. 19세기 영국에서 축구가 활성화된 배경에는 제조업 프로레타리아들의 여가시간을 잘 통제하기 위한 브루조아의 의도가 깔려있듯이 19세기말 마오리들의 럭비 활성화 이면에는 이들의 저항정신을 럭비를 통해 발산케하려는 파케하 위정자의 의도가 깔려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파케하의 건장한 기독교인(muscular Christian)과 마오리의 Warrior 문화는 럭비를 통해 성공적으로 융화되면서 100년을 넘게 세계 럭비를 호령하는 뉴질랜드 럭비의 강점 중 하나가 되었다. 허나 마오리의 이런 럭비에의 적극적 참여가 긍정적인 효과만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실제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마오리 공동체들의 럭비경기에의 참여는 성공적인 동화와 협조의 증거로 인용이 되면서 식민군에 저항하는 마오리 부족들은 반대로  ‘반군’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또한 파케하에게 럭비는 건장한 기독교인 혹은 건장한 신사라는 슬로건에서 보여지듯 그들에게 지적 능력과 육체적 능력의 겸비라는 이미지를 남길지는 몰라도 마오리에게는 지적 능력은 빠진 채 야만적이고 전투적(savages and warriors)이라는 이미지만 남기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의미에서 럭비가 파케하와 마오리라는 두 ethnic group에게 가져다 준 결과적 이미지는 평등문화(egalitarian culture)와는 관계가 멀다고 봐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