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로그를 찾아주신 분께 알려드립니다. 다음(daum) 블로그의 지속적 편집 에러로 제대로 된 교정/편집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같은 제목/내용의 '네이버 포스트'를 권장합니다.
머리말
George Floyd의 경찰 폭력에 의한 사망으로 야기된 시위는 아직도 진행형으로 미국뿐만 아니라 뉴질랜드를 포함한 전 세계 각지에서 이에 대한 동조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이런 다른 국가의 동조 시위는 이번 사건이 미국이란 나라의 고질적 인종 차별 관행에 대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지원하는 시위 성격도 물론 있지만 최소한의 상식도 집어던진 채 지배계급의 이익 추구를 안하무인격 독재적 행태로 대변하는 트럼프와 그 트럼프와 기본적으로 궤를 같이하는 전 세계의 신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정권들에 대한 불만을 종합적으로 표출하는 느낌이다.
뉴질랜드의 BLM(Black Lives Matter) 시위는 명백히 1미터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코로나바이러스 Level 2 지침을 어긴 것이다. 그러나 이에 관련 그 누구도 체포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경찰 담당 장관 Stuart Nash는 그것은 일선 경찰의 결정 사항이라며 뒤로 발뺌했으며 시위 참가자들이 이후 14일 자가격리를 해야 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보건부 장관은 두리뭉실 원칙적 답변으로 둘러댔다. 이는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대처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 - 수상 제신다 아던과 지휘자 Ashley Bloomfield - 모두 레벨 2에서 거리두기를 하지 않은 사례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처럼 윗물이 맑지 않은 상황에서 국민들을 맑지 않다는 이유로 혼낼 염치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 경찰로서는 비록 딴 나라지만 자신들과 같은 경찰 때문에 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법대로 한다며 체포하기에는 아무 소득 없이 엄청남 리스크만 짊어질 상황을 자초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서 우리 사회에서 ‘경찰(police)’라는 조직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좀 더 깊은 이해를 하고 싶다는 생각과 더불어 현 사태의 진원지인 미국 경찰의 역사와 더 나아가 우리가 사는 뉴질랜드의 경찰에 대해서도 더 알고 싶어졌다. 기본적으로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이는 현대와 같은 형식 국가 조직으로서 경찰은 19세기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등장한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특히 미국은 오늘날과 같은 사태가 결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듯 탄생 과정부터 경찰의 ‘계급적’ 그리고 ‘인종적’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경찰이 1838년 처음 창설된 Boston의 경우 무역항으로 상업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재산과 상품을 이민자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집단이익(collective good)”이란 이름으로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경찰 조직을 원했고 반면 흑인 노예 노동에 크게 의존하던 남부지역은 도망가는 흑인 노예를 추적해서 잡아오거나 반란을 예방/진압할 목적의 경찰이 필요했다. 즉 북부는 자본가 계급의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질서 유지에 경찰이 필요했고 남부는 흑인 노예제의 유지를 위해서 경찰이 필요했던 것이다.
일단 이번 회는 미국 경찰의 역사를 피상적이고 일화식이나마 연대별로 서술한 INSIDER 기고문이 있어 이를 번역해보았다. 그리고 번역에 앞서 어제 뉴스 중 시선을 끄는 두 기사가 있어 간단히 코멘트 남긴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정부의 상업용 렌트 대책
뉴질랜드 정부는 그동안 블로그에서도 두차례 언급한 록다운 기간 상업용 부동산 임대차 관련 rent에 대한 정부의 무대책에서 벗어나 마침내 정부가 직접 개입하여 국민의 세금 4천만 불을 투입해 랜드로드와 테넌트 간 합의를 이루지 못한 케이스에 대해 조건을 충족시킬 경우 강제 조정 절차를 개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 5월 16일엔 이와 관련 랜드로드와 테넌트가 서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협상하고 만약 잘 안되면 (‘정부를 찾지 말고’) 변호사를 찾으라고 공식 발표한 정부였다. 이를 의식한 듯 법무장관 Little은 너무 대책이 늦게 나와 ‘진심으로 유감스럽다(genuinely regret)’도 사과까지 했는데 이렇게 대책이 나오는데 두 달 걸린 이유가 연정 파트너인 뉴질랜드 제일당과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데 기가 막힌다. 지난 5월 16일 발표를 보고 이 정부에 대한 기대를 접고 불리한 조건을 수용했을 많은 소규모 영세 세입자를 생각하면 화가 치민다.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변명의 여지 없이 제신다 아던 정권의 불성실과 무능함이 여실히 드러났다고 본다.
이승헌, 명상센터 설립 강행의지를 보이다
단 요가 및 명상수련 등의 창시자로 알려진 한국인 이승헌(Seung Heun Lee, 일명 이일지)의 뉴질랜드 출현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들은 바 있었다. 이승헌이란 인물과 단 요가는 내 관심의 대상은 아니지만, 어제 미디어의 기사 한 부분을 차지하였기에 뉴질랜드에서 그의 행보에 대해 기본적인 인식은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아 간단히 살펴본다.
2015년 투자이민 카테고리로 영주권을 취득한 그는 Kerikeiri 근처에 땅을 구입한 후 그곳을 전 세계 신도들을 위한 명상 센터 - Earth Village라 불리는데 한국어로 지구촌인지 모르겠다 - 설립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이 명상센터 설립과 운영을 위한 회사가 고용법과 이민법을 위반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영주권 박탈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사전 콘센트를 받지 않은 채 건축되어 운영되던 명상 센터는 올해 OIO(Overseas Investment Office)가 콘센트의 소급 발행을 거부함에 따라 폐쇄 위기에 몰렸는데 그의 측에서는 이승헌이 영주권자이므로 OIO의 승인이 필요 없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어제(6월 4일) 기사를 따르면 관계 부서가 대지를 매각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음에도 명상센터 운영을 강행하겠다는 태도를 밝혔다고 한다. 그의 뇌 교육은 사이비 과학이라는 비판과 더불어 상업적이란 비판을 받기도 하고 그의 조직은 사교집단(cult)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
경찰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퍼지다. 미국의 경찰은 1600년대 시작부터 어떻게 진화해왔는가 (Protests against police have broken out across the country. Here's how policing has evolved in the US since its beginnings in the 1600s)
Frank Oilto
Jun 3, 2020
미네소타 주의 조지 플로이드 사망에 따라, 미국의 경찰과 시민, 특히 유색인, 에 대한 경찰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 경찰은 1900년대 초에 창설되었지만, 그 기원은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찰은 누가 말한 것처럼 인종차별적 정서 위에서 만들어졌다: 일부 지역에서 경찰은 새로운 이민자 감시를 위해서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는 노예를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경찰은 부패와 잔인함으로 비난받기도 했지만, 총기 난사와 테러 공격과 같은 큰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칭찬받기도 했다. 아래는 미국 경찰의 역사다.
공식 경찰 시스템이 구성되기 전 식민지는 1630년대 이후 “야경단(night watch)”에 의해 보호받았다.
야경단은 자원봉사 남자들로 구성되었다. 때로 죄를 지은 사람들이 처벌 방편으로 야경단에 들어오기도 했다. 이 야경단은 근무 중 자거나 술을 먹은 것으로 알려졌다. 첫 번째 야경단은 1630년대 보스턴에서 구성되었으며 뉴욕이 뒤를 이어 1650년대 구성했다. 이 시기 식민지 부유층은 신변보호를 위해 사람을 고용했는데 대부분 범죄자였다.
남부지역의 경찰 역사는 노예제 탓에 다른 지역과 다르다
남부지역의 첫 번째 경찰 형태는 1704년 캐롤라이나 주에서 시작된 노예 순찰대(salve patrol)였다. 이 순찰대는 통상 3~6명의 기마대 형식으로 채찍, 밧줄 그리고 심지어 총을 휴대했다. 노예 순찰대의 주 역할은 탈출한 노예를 추적해서 사냥하는 것, 폭동을 예방하고 농장주를 보호하기 위해 노예 공동체에 테러를 가하는 것 등이 포함되었다. 이 노예 순찰대는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1861년 발발했다:역자 주)이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KU Klux Klan(KKK)(1865년 최초 결성되었다: 역자 주)에게 그 역할을 넘겼다.
북부지역은 1860년대 중반까지 더 많은 이민자가 이주하면서 시민은 공식적 질서 유지를 원했다.
1820년과 1860년 사이에 독일과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보스턴과 뉴욕 같은 도시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 이민자는 기존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정착민들과 충돌했다. 이들 기존 정착민은 새로운 이민자들로 때문에 범죄가 증가하면서 미국 사회가 망가진다고 주장했다. 도시들에서 폭도들, 공공 외설, 무질서 행동 그리고 매춘이 목격되었다. 도시들은 질서를 유지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야경단은 유명무실했다. 이에 대응하여 1838년 보스턴에서 첫 공식 경찰이 탄생했다. 곧이어 1845년 뉴욕도 자체 경찰을 창설했으며 시카고, 뉴올리언스 그리고 신시내티가 뒤를 이었다. 1880년대까지 대부분 도시는 경찰 시스템을 갖추었다. 각 도시 경찰은 대부분 유사한 구조를 가졌으며 주 임무는 범죄 예방과 질서 유지였다. 각 도시의 경찰은 공적 관료 조직으로 풀타임 경찰로 구성되었으며 정부 부처에 보고하게 되었다. 1850년대가 되면서 범죄 수사를 주 임무로 하는 형사반이 탄생했다.
1800년대에 일부 경찰에게서 부패(corruption)가 보고되었다.
당시 미국은 정치적 유기체로 지역 비즈니스와 지역 경찰이 한 정치 지도자 관할에 있게 되면서 상호 유착되었다. 이는 정치인들과 경찰의 부패를 의미했다. 예를 들어 일부 경찰은 특정 그룹의 불법행위를 눈감아주는 대가로 정치인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다. 이는 Pinkerton National Detective Agency와 같은 사립 경찰의 탄생을 야기했다. Allan Pinkerton은 스코틀랜드 이민자로서 사립 탐정으로 구성된 Pinkerton National Detective Agency를 창설했는데 이들은 기차 도둑과 파업을 예방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00년대 초에 August Vollmer에 의해 경찰은 극적 변화를 맞았다.
1900년대 초는 새로운 경찰 시스템의 시작을 알렸다. “현대 경찰의 아버지”라 불리는 August Vollmer는 경찰 임무에서 사회학, 사회복지, 심리학 그리고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시스템에서 경찰은 자신이 사는 동네를 도보로 순찰했다. Vollmer는 또 고등학생들을 위해 별도의 시스템을 만들어 그들이 어른과 같이 처벌받지 않도록 했다.
연방 그리고 주 차원의 경찰이 1900년대에 탄생했다.
금주령 기간(1919~1933년:역자 주), 경찰은 알코올의 판매와 유통을 막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 당시 경찰은 불법 알코올을 압수하여 하수구에 버렸다. 이 기간 조직범죄가 등장하고 시위, 폭동 그리고 작은 범죄들도 증가했다. 지역 경찰은 이를 막을 수 없었다. 이에 대응하여 연방 정부는 금주령을 감시할 4천 명의 남자로 구성된 “T-Men”을 창설했다. 또 주 정부도 도시의 범죄 확산을 막기 위해 1900년대 초에 자체 경찰을 만들었다.
1920년대, Edgar Hoover는 FBI를 창설하고 주 경찰 임무를 바꾸었다.
사회복지와 심리학에 초점을 맞춘 Vollmer 모델을 따르는 대신 Hoover(FBI 초대 국장:역자 주)는 지역 경찰이 길거리 범죄와 싸우는 방식을 택했다. 이 새로운 시스템에서 경찰은 자신이 아는 동네를 도보로 순찰하는 대신 차량을 통해 순찰하게 되었다.
1960년대는 경찰의 전환점이 되었다.
1960년대에 흑인(African Americans)은 경찰이 자신들의 커뮤니티를 대하는 방식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이런 대우와 인종차별 관행에 항의하는 폭동, 보이콧 그리고 평화적 시위가 남부를 중심으로 전국에 퍼져 나갔다. 이에 대응하여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경찰은 최루가스, 고압 살수 그리고 전투견 같은 강경책을 사용했다. 이런 대처는 티비를 통해 중계되기도 했다.
민권운동과 더불어 1969년 뉴욕의 Stonewall 폭동은 새로운 운동을 야기했다.
당시 경찰은 또 미국 전역에 걸쳐 LGBTQ (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and queer:역자 주) 커뮤니티를 검문하기 위해 바와 나이트클럽의 방문자를 조사했는데 Stonewall Inn이 대표적 사례다(이 블로그 '뉴질랜드의 동성애'에서도 언급된 유명한 사건이다). 1969년 6월 28일 뉴욕 경찰은 Stonewall Inn을 급습하여 사람들을 체포했다. 이에 대응하여 고객들과 주민은 엿새 동안 폭동을 일으켰다. 이 경찰에 대한 대항은 동성애 운동을 촉발했다.
1970년대 경찰 임무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평가에 따라 정부는 1900년대 후반 변화를 시도했다.
많은 연구가 동네 차량순찰은 범죄를 줄이지도 주민의 두려움을 줄이는데도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오히려 지역사회의 경찰에 대한 불신을 증가시켰다. 이 지적에 대응하여 일부에서는 다시 동네순찰(community policing)로 회귀했다. 이에 따라 소수민족의 집중 거주지역은 소수민족 경찰관이 순찰하게도 되었다. 이 모델은 또 지역사회가 경찰에 협조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1990년대 경찰관은 지역사회 주민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이 권장되었다. 2000년대 초반에 미국 경찰력의 2/3가 지역순찰 임무를 수행했다.
1990년대에 미국의 범죄율은 하락하기 시작해서 2015년에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이 범죄율 하락의 정확한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 연구에 따르면 경찰관의 확충이 한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다른 연구는 범죄 추적시스템 같은 1990년대 기술 발전이 경찰로 하여금 더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했다고 지적했다.
1999년 컬럼바인(Columbine) 학교 총기 난사에 대한 경찰의 대처는 이후 정책을 바꾸었다.
1999년 4월 20일, 2명의 학생이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기 난사를 해서 13명의 사람을 죽였다. 당시 경찰은 용의자를 진압하기 위해 교내에 진입하기 전 주변을 봉쇄했다. 이 대응 방식은 경찰이 학교로 진입하는 데 걸린 시간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 사건 이후 경찰은 대량 살상에 대한 대응 방식을 바꾸었다. 지금 경찰은 총기 난사 현장에 1~4명의 경찰관이 뛰어들어 총성을 따라 용의자를 진압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 방식은 지난 수년간 학교 총기난사 사건에 성공적으로 적용되었다. 실제 컬럼바인 학교 총기 난사 사건 이후 총기 난사 사건의 75%는 경찰이 용의자를 현장에서 사살했다. 의회 경찰은 2017년 공화당 의원 농구연습장의 총기 난사에 대한 신속한 대응으로 칭찬받기도 했다.
2001년 9/11 이후 경찰은 초점을 테러 방지 대책에 맞추었다.
2001년 9월 11일 2천 명의 경찰은 뉴욕 세계무역센터에 두 대의 비행기가 충돌했을 때 초기 위험을 무릅쓰고 대응한 것에 대해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이 테러공격은 이후 경찰의 대응방식에 영향을 미쳐 연방 정부와 주 정부를 위해 직접 일하는 테러방지 부대를 만들게 하였다. 9/11 이후 일부 커뮤니티는 경찰의 인종차별적 감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1세기 내내 경찰은 흑인과 소수민족에 대한 부당한 대우로 문제가 되고 있다.
2002년 John Conyers 의원은 “9/11 이후 미국은 제도화된 인종차별적 검문 정책을 도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ACLU)도 이 의견에 동조했다. “연방, 주 그리고 지역 차원에 행해지는 경찰의 인종차별적 검문 행위는 흑인, 아시안, 라티노, 남아시안, 아랍 그리고 무슬림 공동체의 수백만 명에게 영향을 미치며 미국사회 전체의 문제”라고 ACLU는 보고했다.
미국 경찰은 뉴욕 경찰처럼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 중 수상하다고 생각하면 멈추게 하고 몸수색을 하는 불심검문(stop-and-frisk) 방식을 도입했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이 불심검문 대상의 대부분이 흑인과 라티노 남성임을 지적하며 인종차별적 검문 형식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많은 증거는 경찰이 불균형적으로 소수민족을 타겟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에 대해 뉴욕 시장은 2013년 이 정책을 개혁하겠다고 발표했다.
2014년 뉴욕 경찰관은 체포할 때 목조르기(chokehold)를 함으로써 Eric Garner를 숨지게 했다.
2014년 7월 17일 뉴욕 경찰관 Daniel Pantaleo을 불법 담배를 팔았다는 혐의로 Eric Garner를 체포하려 했다. 경찰관은 용의자를 쓰러트린 후 목을 졸랐다. Garner는 “숨을 쉴 수 없어요”라고 11번 말했다. 이후 병원에서 사망선고를 받았다. 모든 과정이 비디오로 찍히면서 전국적으로 격렬한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경찰의 흑인에 대한 차별적 대응을 집중 성토했다. 시위자들은 경찰관 Pantaleo의 해고와 체포를 요구했으나 심의위원회는 그를 기소하지 않았고 연방 기관도 기소하지 않았다.
일부 경찰 부서는 신체카메라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Eric Garner의 사망과 그 해 다른 사건 - Michael Brown 총격 사망 - 과 더불어 대중은 경찰 신체카메라의 의무화를 요구했다. 경찰의 인종차별적 검문의 축소와 그들 행동의 책임감을 높이려는 목적이었다. 한편 경찰 처지에서도 신체카메라가 투명성을 높이고 신속한 범죄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을 기대했다. 2016년 미국 경찰력의 거의 절반이 신체카메라를 장착했다. 네바다와 사우스 캐롤라이나는 모든 경찰관의 착용을 의무화했다. 그러나 Pew에 따르면 신체카메라가 경찰관의 행동을 현저하게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2020년 미니애폴리스에서 경찰관이 George Floyd를 무릎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 비디오로 찍혔다.
2020년 5월 25일 조지 플로이드는 $20 위조화폐를 사용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경찰관 Derek Chauvin은 용의자가 저항했다고 말했는데 그는 플로이드의 목을 8분가량 무릎으로 찍어 눌렀고 플로이드는 “숨을 쉴 수 없다”고 계속 말했다. 그는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결국 사망 선고를 받았다. 이 과정을 담은 비디오는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Chauvin은 3급 살인과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되었다.
미국 전역에 걸쳐 경찰 업무의 제도적 변화 심지어 경찰의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는 플로이드가 사망한 미네소타 주에서 시작해서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 시위는 방화, 약탈 그리고 폭력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경찰은 최루가스, 차량 돌진 그리고 폭동진압용 총기로 대응했지만 일부는 시위대와 대면 대처하기도 했다. 긴장이 고조되면서 사람들은 미국 경찰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뉴질랜드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뉴질랜드 경찰은 신뢰할 수 있을까? (上)- 경찰 이야기 2 (0) | 2020.06.16 |
---|---|
뉴질랜드 경찰의 인종차별 - 경찰 이야기 1 (0) | 2020.06.12 |
뉴질랜드에 단체관광 온 한국인 '아줌마'의 전형적 모습? (0) | 2020.06.03 |
직장 동료를 존중해서 항상 영어를 사용하기 바랍니다 (0) | 2020.06.01 |
영어는 내 모국어: 뉴질랜드에서 아시안으로 산다는 것과 글 쓰는 것에 관하여 (0) | 2020.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