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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사회민주주의를 뛰어넘어 (上) - 대안시리즈 13

김 무인 2020. 7. 24. 15:40

 

** 찾아주신 분께 안내드립니다. 다음 블로그의 수정/편집 어려움이 있읍니다. 보다 나은 가시성/가독성을 위해 같은 제목/내용의 '네이버 포스트(링크)' 를 권장합니다.

 

 

역자 머리말

 

대안 시리즈의 관심 중 하나는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와 민주사회주의 (democratic socialism)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명확히 함으로써 21세기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이후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의 모습과 그 정치적 실현 과정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는 방점이 뒷 글자 민주주의에 찍힘으로써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일반인들에게 거부감이 덜 들고 덜 과격하다는 이미지를 줄 수 있는 반면 민주사회주의는 비록 앞에 민주라는 글자가 있지만 뒷글자 사회주의에 방점이 찍힘으로써 과연 괜찮은 걸까 라는 조심스러움을 유발한다. 

 

아래 에세이는 jacobin에서 발췌하였지만 애초 이 에세이는 35년 전인 1985년에 발간된 책 ‘Socialist Register 1985/1986’의 한 챕터였다. 따라서 저자들도 인정했듯이 에세이의 내용이 최근 35년의 변화는 담고 있지 못하다. 그럼에도 2018년에 jacobin에서 이 에세이를 별도로 올린 이유는 최근의 대안 논의에서 여전히 이 에세이가 다루는 주제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한다. 다소 길지만 두 번에 나누어 번역을 할 가치가 있다고 느낄 만큼 사회민주주의와 민주사회주의의 관계 이해에 큰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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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민주주의를 뛰어 넘어 (Beyond Social Democracy)

 

BY

MARCEL LIEBMAN RALPH MILIBAND



이 에세이에서 우리는 서로 긴밀히 관련된 두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첫째, 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사회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를 뛰어넘어야 하는가?; 둘째, 이런 움직임의 요구 조건과 의미는 무엇인가? 최근까지도 첫 번째 질문은 부적절해 보였다: ‘물론’ 모든 진지한 사회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주의를 뛰어넘고자 했지만 오늘날 이런 의도 혹은 의지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사회민주주의의 한계와 직무 태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안’에 대한 절망적 불확실에서 기인한 암묵적 수용 역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질문 모두 답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질문 - 왜 사회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를 뛰어넘어야 하는가 - 에 대한 대답은 사회민주주의의 본질과 역사에 대한 고찰을 요구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1914년 이전 사회민주주의와 1차 세계대전 특히 1945년 이후의 사회민주주의 간 구분을 할 필요가 있다.

 

초기 형성 단계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생산, 유통 그리고 교환 수단의 사회적 전용, 정치 시스템에 대한 광범위한 민주화 그리고 사회적 불평등의 급진적 해소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사회질서의 총체적 변혁(transformation) 입장을 명확히 했었다. 이 변혁은 장기간에 걸친 일련의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개혁(reforms)을 통해 달성될 수 있고 유권자와 대중의 지지를 반영하는 의회 다수를 통해 가능할 것이다. 

 

 

Rosa Luxemburg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실현되어야 할 개혁의 정확한 본질과 개혁을 위해 택해야 할 전략을 놓고 많은 이견이 있었다. 당시 지배적 사조였던 유권자 영합주의(electoralism)와 의회주의(parliamentarism)와는 전혀 동떨어진 대중 투쟁 전략을 제안했던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로 대표되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도 이 사회민주주의의 일원이었다. 당시에도 “개혁주의자들(reformists)”은 여전히 그들이 사회주의 프로젝트에 전력으로 헌신하고 있다고 매우 그럴듯하게 주장할 수 있었다. 장 조레스(Jean Jaurès) - 20세기 초 프랑스 사회주의자로서 암살로 사망했다 - 가 한 때 프랑스 사회주의당에 대해 이렇게 말한 것처럼: “정확히 이 정당이 혁명의 정당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당은 가장 적극적으로 개혁적이다. “

 

 

Jean Jaurès

 

“개혁주의(reformism)”가 경멸의 대상이 되고 계급 협조(class collaboration)와 배신(betrayal)의 동의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것은 그들이 사회주의 변혁을 위해 점진적 개혁에 의존한다는 것 때문이 아니다. 1914년 8월 (그리고 이후) 제2차 인터내셔널 지도자들에 의한 전쟁 지지와 레닌(Lenin)으로 대표되는 좌파 인터내셔널주의자들에 대한 격렬한 반대 때문이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Bolsheviks)가 러시아에서 혁명을 성공하면서 레닌의 “개혁주의 반역자(reformist traitors)”들에 대한 비난은 전 세계적 승인을 얻게 된다. 

 

Lenin과 러시아 혁명

 

이 역사적 사건은 좌파 내에서 자본주의-민주주의 정권을 가진 선진 자본주의 국가가 사회주의로 가기 위해서 어떤 전략이 가장 좋을까란 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논의는 사실 종종 혁명적 좌파에 의해 단순한 개념으로 행해졌다: 개혁주의는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과 동일시되는 반면 혁명은 사회주의의 강직함과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선진 자본주의 국가를 위한 적절한 사회주의적 전략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이런 단순 도식적 개념으로는 답할 수가 없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1914년 이후 사회민주주의의 “개혁주의”는 갈수록 애초 목적과 멀어져 갔으며 오히려 잘못된 이해로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를 목적으로 1차 세계 대전 이후 등장한 노동운동과 정당들은 전통적 의미에서 “개혁주의적” 사회주의 프로젝트가 전혀 아니다. 그때 이후 소위 개혁주의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틀 내의 온건한(moderate) 개혁 프로젝트였음이 갈수록 명확해지고 있다. 기껏해야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조직된 노동자와 “저소득 계층”에게 나은 조건을 얻어내기 위해 분투할 뿐이다; 그리고 국가(state)가 자본주의 관리에 보다 효율적으로 개입하기를 바랄 뿐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요구에 갈수록 더 부응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요구가 개혁과 충돌할 때 항상 양보를 하는 것은 “국가적 이해”, “실용주의” 그리고 “현실주의(realism)” 혹은 타협과 퇴보에 대한 변명을 대동한 개혁 쪽이었다. 사회 변혁 프로젝트로서 “개혁주의”는 전당대회같이 필요한 때에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에 의해 인용되는 레토릭으로  남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 레토릭마저 사회민주주의의 실제 행동에 의해 거짓임이 지속적으로 드러났다. 사회민주주의가 지속적으로 달성하고자 추구했던 것의 대부분은 보다 인간 얼굴을 한 자본주의였다: 역사적 기록은 시간, 나라 그리고 대륙을 초월하여 일정했다 - Attlee부터 Wilson과 Callaghan에  이르는 영국, Leon Blum부터 Guy Mollet과 Mitterrand에 이르는 프랑스, Ebert로부터 Brandt와 Schmidt에 이르는 독일에 이르기 까지.

 

 

영국 수상 Harold Wilson과 미국 대통령  Lyndon Johnson 

 

사회민주주의가 지난 시간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룬 개혁적 성과 혹은 정치 일선에서 무시되거나 잘못 핸들링될 수 있었던 이슈와 어젠다를 제대로 다룰 수 있게 한 중요한 역할을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여를 인정한다 해도  사회민주주의의 심각한 부정적 역사적 측면을 가릴 수는 없다.

 

우선 사회민주주의는 그들이 제안하고 수행해 왔던 개혁의 범주와 내용을 자본주의 세력을 달래고 수용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제한’했으며 이 자본주의 세력에게 그들의 반대편 (사회민주주의자)의 “온건함(moderation)”과 “합리성(reasonableness)”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 노력했다; 또 집권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은 항상 보수적 경제 정책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그 경제 정책이 그들에게 부과한 제약에도 기꺼이 따랐다.

 

결과적으로 사회민주주의 개혁은 유익했음에도 제한된 성격과 영향력을 가졌으며 보수 세력의 공격에 매우 취약했다. 심지어 정치 환경이 그들에게 매우 유리했을 때, 예를 들어 2차 대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에서 급진적 변화에 대한 대중의 열기와 지지가 대단히 높았을 때, 에도 이들은 과감하지 못하고 소심했으며 사회민주주의 개혁 수단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혁신적 열정 대신 관행을 따랐다.   

 

 

둘째, 사회민주주의는 정치적 행동의 반경을 조심스럽게 통제된 정당과 의회 채널로 한정하고 풀뿌리 대중운동 역시 정당의 선거에 도움이 될 경우를 제외하고는 제한하고 위축시키는데 깊숙이 관여했다. 사회민주주의의 지도자들은 그들 지지자의 에너지를 제한하고 발산 방향을 돌리며 정당을 통해 이들을 통제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움직임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도 많이 발견되었다.

 

관련해서 세 번째로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가장 활발한 공격력을 노동운동의 좌파 활동가를 향해 사용했다. 사회민주주의의 좌파(the Left)에 대한 적대감은 볼셰비키 혁명 이전부터 이미 격렬하고 광범위하게 퍼졌으며 이는 공산당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소비에트 러시아와 각국에서의 공산당 설립은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에게 더 급진적 정책과 행동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역동성과 합법성을 제공하면서 사회민주주의는 좌파에 대해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정당과 노조의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은 노동운동에서 사회주의 사상과 영향력의 확산을 막기 위한 효과적 감시자 역할을 자처했다: 그 어떤 보수 정치인들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의 이런 노력의 결과는  이후 노동운동 역사에 커다란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

 

네 번째로, 사회민주주의 좌파에 대한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의 반대는 1945년 이후 노동운동을 그들 통제 하에 두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2차 대전 이후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정부들의 전 세계적 반혁명 운동이 동시에 그 배후에 있었다. 다시 반복하지만 이 전 세계적 운동에서 서유럽 노동운동의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은 소비에트의 팽창과 공격으로부터 서방, 자유, 민주주의 등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가장 충실하고 적극적인 협조자가 된다.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은 2차 대전 이후 소비에트 유니온 인접 국가들의 소비에트 타입 정권 등장에 대해 20세기 후반의 가장 큰 허구적 신화 중 하나인 소위 소비에트 팽창이란 카드를 꺼내지 않고도 이들 정권의 등장을 충분히 반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이들은 이 허구적 신화의 공고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 이들은 미국이 핵무기의 숫적 우세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미국의 방위 전략을 지지하고 옹호하는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은 군비확장 경쟁을 누그러 뜨리기 위해 노력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사회민주주의는 전후 그들 국가가 지배했던 식민지의 독립운동을 억누르기 위한 전쟁 수행 혹은 그 전쟁 수행의 지원에 주목할 만한 - 완전히 불명예스러운 - 역할을 했다. 프랑스 사회민주주의 정권은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아의 독립운동을 무력으로 제압하려 했고 영국 사회민주주의 정권은 1940년대와 1950년대 구 식민 영토 말라야, 케냐, 사이프러스 그리고 Aden의 독립운동에 유사한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 기간 제국주의 국가들의 어떤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도 사회주의의 국제주의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보여준 적이 없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줄여말하면,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와 착취 구조에 대해 진정한 위협이 된 적이 없다는 것을 역사는 명확하게 보여준다.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이 원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대체(supercession)가 아니라 관리였다; 그리고 방위와 대외 정책에 있어서 그들은 항상 보수 정치인들과 함께 해왔다.  

 

‘실제’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은 보수 정권의 정책들을 수용함으로써 이들 정책과 상당 부분 일치했다: 몇 특정 이슈들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대치했지만 이 것들이 이들의 동조 관계를 근본적으로 흔들지는 못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에는 그들의 지도자를 반대하고 그들이 더욱 급진적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항상 있었다. 이들은 때로 성공을 거두기도 하면서 그들의 지도자가 타협과 퇴보의 방향으로 가는 것을 막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정당 내 사회주의자들의 반대는 이들 정당이 좌파(the Left)로 정착하여  프로그램과 정책을 다른 방향으로 선회하게 만드는데 실패했다. 때로는 좌파에게 양보를 하기도 했지만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은 여전히 당의 중심에서 그들의 정책과 행동을 결정했다. 

 

이런 상황은 향후 크게 달라질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물론 사회민주주의 당내 사회주의자들이 그들 지도자로부터 간헐적 양보를 얻어낼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향후 상황에 따라 이들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은 미국과 거리를 두는 다른 정책 - 심지어 더 급진적인 - 을 택할 가능성도 있다.  과거 레이건 대통령 시절에 이런 움직임이 있었다.

 

이런 행보는 물론 사회주의 입장에서는 반가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책과 행동의 변화는 철저하게 기존 사회민주주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사회주의자들이 여기서 직면하는 - 직면해야 하는 - 것은 이념적, 정치적, 심지어 심리적인  힘의 사고(construct)인데 이 사고는 우파에게는 개방적이고 유연하지만 좌파에게는 많은 것들을 양보할 의지가 없었다. 다른 말로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은 좌측의 사회주의 비판자들보다는 우측의 보수 반대파와 타협하고 어울리는 것을 훨씬 편하게 여긴다.

 

좌파가 추진하는 정책을 반대할 이유를 찾는 과정에서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은 그 정책들이 아무리 좋은 장점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유권자”들이 “과격하다(extreme)”고 생각하여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는 명분을 댄다.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은 “대중들의 의견”보다 너무 앞서 나가 “대중”이 받아들일 준비가 안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선거의 패배와 정치적 재기불능으로 이어진다는 현실적 이해를 한다. 

 

이 것은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자본주의-민주주의 정권 하에서 “유권자”는 현 정치 체제를 혁명적으로 전복하려는 혹은 전복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실이다: 여기서 “유권자”는 다른 계급들과 더불어 압도적 다수의 노동계급을 포함한다. 이 노동계급 그리고 더 나아가 “저소득 계층”의 현 정치 사회 질서의 전복을 지향하는 정당에 대한 거부는 외면할 수 없는 정치적 현실이다.

 

그러나 이 것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조직된 노동자, 노동계급 그리고 피지배 대중 (대중의 압도적 다수를 구성하는)이 급진적 변화와 개혁을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많은 경우 그들의 선거 공약에서 변혁에 대한 야망을 공표했으며 “새로운 사회 질서”의 창출에 대해 단호한 지지 입장을 견지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선거에서 주목할만한 승리를 쟁취했다. 이런 급진적 변화 공약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는 어쩌면 그들이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대중들이 이런 변화에 혐오감을 가진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유권자”의 상당수, 특히 노동계급, 가 급진적 정책을 거부할 것이라는 생각은 편리한 변명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중요한 점은 이런 정책들과 프로그램은 그 동기의 정당성을 확신하는 단호함과 열정으로 무장한 지도자들에 의해 옹호되고 선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항상 부족한 점이다: 목적의 허약함과 급진적 정책에 대한 두려움은 노동계급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같은 지적이 사회민주주의 정부에게도 적용된다. 노동계급은 이 정부들이 “너무 과격하거나” 급진적이거나 개혁에 너무 열성적이란 이유로 거부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이 정부들은 선거 공약과 달리 계속 퇴보적이었고 공약과 다른 정책들을 도입했으며 그들 지지자들에게 환멸감을 안겨 주고 그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들었으며 이어지는 집권에도 불구하고 이들 정부로부터 기대할 것은 없다는 확신을 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좌파로부터 자주 들려오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대한 노동계급 지지 하락에 대한 한탄은 이런 사회민주주의 정부의 역사적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지지의 하락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이 정당들에 대한 노동계급의 지지가 이어졌다는 점이다.

 

사회민주주의의 퇴보와 직무태만은 노동운동에 재앙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 역시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다. 사회민주주의 정부가 퇴보할수록 사회민주주의 정당 내 분열과 갈등은 증폭되었다. 당내 좌파는 지도부를 공격하면서 이 흐름을 바꾸려 했다: 이에 지도부는 좌파에게 충성심이 없다고 비난했다. 보수 세력은 크게 기뻐했고 노동계급, 혹은 대부분, 은 소외되었고 당의 분열과 내분으로 더욱 소외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리더십을 되돌아보게 된다. 사회민주주의 정부는 진정한 열성과 지지 속에서 광범위한 개혁 프로그램을 들고 의회 선거에서 대승을 거두곤 했으나 집권 이후 곧바로 그 열성과 지지를 잃어버리고 전술한 바와 같은 입장과 정책으로 퇴보했다.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다음과 같은 것도 사실이다: 아주 “온건하고” 타협적 사회민주주의 정부라도 매우 심각한 경제적 금융적 제한에 직면한다; 이 정부는 사회민주주의자 장관을 침략자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 냉담하거나 심지어 적대적인 행정부 환경에서 일을 해야 한다; 절대다수가 보수적인 언론으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지속적으로 받는다; 사회민주주의 정부의 “실험”이 가능한 일찍 끝나길 원하는 모든 보수 세력은 그 날을 앞 당기기 위해 모든 행동을 취한다.

 

위 모든 것들도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반대가 종료되어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이고 지극히 합리적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대부분 사회민주주의 정치인들이 보수파 정적들과의 충돌과 투쟁에 매우 서툴다는 점이다. 

 

이것은 캐릭터의 문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성향(disposition)의 문제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지도부에 올라가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온건하고(moderate)” “합리적이며 (reasonable)” “상식적(sensible) 노선이 기대되는 “안전한(safe)” 사람들이다. 지도부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선별과 선출의 과정을 거치는데 이때 이데올로기적으로 정치적으로 “부적절한(unsound)” 사람은 당의 주변부로 밀린다. 정당 조직 자체가 “온건한” 사람들 통제 속에서 계속 원하는 사람들은 안으로 들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밖으로 밀어낸다. 그럼에도 이 장벽을 극복한 좌파 사회주의자 당원에게 장관직을 부여해야 할 상황이 되면 이들에게 금융, 내무, 외무 그리고 방위 부서 같은 핵심 부서는 맡기지 않는다. 

 

대부분 사회민주주의 정치인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그들도 한쪽에 서야만 하는 두 적대적 계급이 항시 충돌하는 전쟁터로서 인식하지 않고 대신 자주 다투기는 하지만 다양한 그룹들 - 고용주, 노동자, 공무원 등 - 이 자기들의 이익을 관철하려고 하는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한다. 따라서 이들 개별 그룹의 이익을 통제하여 공동의 이익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정부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또한 사회 취약 계층에게 도움이 반드시 제공되어야 하는 공동체다.

 

이런 관점을 가졌기에 사회민주주의 정부는 선의, 이해, 공평, 연민을 제공함으로써 특정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정부의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은 일반적 레토릭 혹은 심지어 정서와 달리 그들의 보수 정적들과 절대적 거리를 두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 사이에는 많은 소통 채널, 이해 그리고 심지어 동의가 존재한다.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의 임무는 중재와 타협이다. 그들의 관심은 개혁을 추진하는 것도 될 수 있지만 또 한편 개혁에 대한 압력을 억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람시(Gramsci)는 지식인들을 “합의의 관리자”라고 말한 바 있다: 합의 형성은 사회민주주의 정치인들에게는 심지어 잘 어울린다. 따라서 그들은 자본주의-민주주의 사회의 안정적 정치에서 주 역할을 수행한다.

 

아옌데의 마지막 모습

 

이런 것들을 고려하면 칠레의 아옌데를 제외하고 왜 사회민주주의 정치인들이 “개혁주의”의 한계를 시험하려 하지 않고 항상 보수세력과의 심각한 충돌에 직면하기 훨씬 전부터 퇴각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자본주의 사회를 사회주의 방향으로 변혁시킬 수 있는 영감과 지도력을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이 변혁은 최소한의 이데올로기적 무장이 필요한데 이들은 이를 갖고 있지 않다.(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