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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사회주의 관점에서 사회민주주의를 뛰어넘으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해 오랜 기간 많은 다른 대답들이 있었다. 주요 대답 중 하나는 레닌주의에 영감을 받은 것으로 “전위(vanguard)”당의 건설과 육성이다. 이 전위당은 “민주집중주의(democratic centralist)”의 노선에 기반을 단단히 두면서 생산 시점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다른 모든 긴장 지점에서의 일상적 계급투쟁에 관여한다. 이 전위당은 자본주의 위기는 궁극적으로 통제될 수 없는 시점에 반드시 도달할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현 정치 시스템의 영역 내에 대중의 분노를 가두어 두는 것이 불가능할 것을 기대한다. 그 시점이 되면 혁명적 상황은 도래할 것이고 “전위”당은 기회를 잡고 노동계급을 이끌면서 권력을 잡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 믿는다. 부르주아 국가는 전복되어 프롤레타리아의 권력, 노동자 평의회 그리고 다른 진정한 민주적 형식들에 기반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로 대체될 것이다.
이 전략을 제안한 사람들도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가까운 장래에 이 “시나리오”가 실현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물론 그들은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다: 이 “시나리오”의 실현은 시간문제다; 위기는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지만 계속 진행 중이다; 노동계급은 아직도 사회민주주의의 “개혁주의(reformist)” 환상(illusions)에 사로 잡혀 있다; 사회적 사건이 발생하면 그 충격으로 더 성숙한 계급의식을 가질 것이다, 등 등. 이와 같은 믿음의 일부는 1917년 - 러시아 혁명의 해 - 이후 오랜 기간 모든 선진 자본주의 국가 그리고 다른 국가에서도 강경파와 혁명가들을 중심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헛된 기대라 할 수 있다. 앞으로 도래할 오랜 기간, 사회주의자들은 많은 위기와 충돌을 직면하겠지만 결코 혁명적 상황은 아닐 것이다; 역사적 기록은 이 노선을 추종한 당과 조직들은 전부 주변부로 밀려나는 무력함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문제는 ‘대중’의 지지를 끌어 모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활동가’와 ‘사회주의’ 지지자들의 지지를 제대로 끌어 모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단단히 조직된 민주집중주의 조직은 매우 쉽게 상명하달과 교활한 지도부라는 비민주적 중앙집권주의로 변질하면서 조직 내 진정한 논의의 억제, 심각한 분열 그리고 마지막엔 조직으로부터 추방이란 수단에 의존한다. 또 조직 멤버의 교체가 매우 잦아 새 멤버의 순수와 열정이 환멸과 씁쓸함으로 변하는 캠프가 되었다. 오직 지도부만 영구적으로 자리를 견고히 하면서 항상 바뀌는 멤버들을 상대로 지도력을 행사하는 내부의 어떤 변화도 이들을 제거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런 당과 조직은 사회주의 프로젝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대처하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채 대신 주문과 슬로건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들은 종종 사회주의 사상에 중요한 기여를 한 재능 있는 인물들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조직 자체는 신선하고 혁신적인 어떤 것도 생성한 적이 거의 없다.
두 번째로 “전위(vanguard)”당 개념 자체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 다른 그리고 상반된, 혹은 최소한 이질적인, 성향을 가진 노동운동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거만하고 “제국주의적(imperialistic)” 냄새를 풍긴다. 전위당은 말 그대로 유일하고 지배적이다: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전위당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한 정당이 자신에게 “전위” 혹은 “선도(leading)”당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인위적일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조직, 이해관계, 목적, 성향 그리고 열망이 고밀도로 혼재된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경우 사회주의 정당은 이 동맹(alliance)의 한 부분만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사회주의 정당의 행동, 명확한 전망 그리고 지지 덕분에 독단적이고 억압적인 지배 시도 없이 이 동맹 내에서 주 거점 역할을 수행하기를 희망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투쟁 전략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사회주의 사회에 적당한 정치 제도에 관련된 보다 큰 이슈다. 역사는 “선도당(the leading party)”(실질적으로 독점 정당)이 권위주의와 불만에 대한 억압 - 모든 불만을 반혁명적이고 따라서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해석하는 - 을 초래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다양성, 다원주의 그리고 이해충돌을 관리하는 것이 매우 위험한 상황이 있다: 그러나 이것들을 관리하는 것에 실패하는 것은 사회주의 원칙의 심각한 퇴보로 간주되어야 한다. 1921년 10차 전당대회에서 “분파(factions)”를 금지시킨 이후 볼셰비키 당에서 벌어진 일은 이와 같은 금지가 혁명 정당의 생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교훈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혁명 단체로서 “막스-레닌주의(Marxist-Leninist)”의 소외와 상대적 비효율성의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활동하는 자본주의 민주주의 환경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은 것과 연관되어 있다. 이 단체들은 자본주의 민주주의를 가짜(sham)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들은 선거를 통한 투쟁을 매우 경멸하면서 경시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의회 크레틴병(parliamentary cretinism)” - 의회에서 바라는 만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의회 정당으로 성장하지 못한 것을 발육부전 증상을 가진 크레틴병에 비유 - 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면 이 단체들은 “반 의회 크레틴병(anti-parliamentary crentism)”에 시달리고 있다. 진실은 자본주의 민주주의의 한계가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자본주의 민주주의 환경 속에서 활동하는 어떤 정당 혹은 단체는 특히 지역 단위에서 일정 수준의 유권자 지지를 결코 외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선거 때 갑자기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막스-레닌주의 그룹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대안으로 무엇이 있었으며 또 무엇이 대안으로 되어야 하는가? 이미 이 에세이에서 전술했듯이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현실적으로 그 대안이 될 수 없다. 대안은 자본주의 사회를 사회주의 사회로 바꾸기 위한 총체적 변혁을 할 수 있는 견고한 사회주의적 헌신을 동반해야 한다. 또 한편으로 대안은 “개혁주의적(reformist)” 약속을 포함해야 하는데 이 ‘개혁적’ 약속은 보다 높은 차원의 ‘혁명적’ 목적을 위한 부분이어야 할 것이다.
이런 “혁명적 개혁주의(revolutionary reformism)”는 사회의 모든 충돌 현장, 특히 노동 현장, 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에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적 개혁주의는 선거를 계급투쟁의 중요한 부분으로 이해하면서 선거주의와 의회주의에 매몰됨 없이 모든 단계의 선거 투쟁에 참여한다; 또 혁명적 개혁주의는 정치 무대와 정치 문화에서 사회주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항구적 노력을 의미한다.
더불어 “혁명적 개혁주의”는 유권자 지지와 의회 다수당 방식을 통해서 매끄럽게 충돌 없이 사회주의로 이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혁명적 개혁주의는 자본주의 민주주의 환경에서 이와 같은 전이는 대규모 대중의 지지와 헌신을 필요로 하며 이를 위한 한 방편은 선거에서의 승리와 의회 진출(물론 이 방편이 유일하다거나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이다. 그러나 “혁명적 개혁주의”는 지배계급에 대한 모든 심각한 도전은 불가피하게 이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이 저항에 대해 대중 동원을 포함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대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 “혁명적 개혁주의”를 지향한 정당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 (그리고 다른 국가도 마찬가지)의 공산당(Communist parties)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게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1914년 - 1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각 국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쟁 참여를 선언함으로써 각국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연합체이자 지도 조직인 2차 인터내셔널이 붕괴했다 - 이후 그 이름에 붙은 경멸적 함의를 생각하면 놀랍지 않게 공산당은 “개혁주의(reformist)”를 항상 극력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산당에서 이 ‘개혁주의’ 명칭은 전적으로 정당하되고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혁명적” 부분일 수 있다.
이처럼 개혁주의 명칭이 정당화된다고 말하는 이유는 볼셰비키 혁명과 공산당의 설립에 뒤 이은 ‘Sturm und Drang(질풍노도)’의 시기가 끝난 후 자본주의 전복은 각국 공산당의 의제에 포함되지 않았다; 각국 공산당은 자국의 정치 지형에서 잘 자리 잡았으며 (부르주아 정부가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궁극적으로는 혁명적 소임을 간직한 채 계급투쟁에 적극 관여하고 선거에 참여하면서 장단기적 승리와 개혁을 위해 압력을 가하는, 당 이름과 달리 “개혁주의” 정당이 되었다.
코민테른 정책의 전환 (예를 들어 1929년과 1934년 사이 “제3기”, “계급 대 계급’,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사회적 파시스트”) 혹은 소비에트 대외 정책의 전환 (1939년과 1941년 사이의 “제국주의 전쟁”) 시기에 공산당은 보다 “혁명적” 입장을 취했었다. 그러나 이는 예외적인 것으로 1945년 이후 한 번도 그 입장으로 돌아간 적이 없다.
이 공산당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스탈린의 정책과 지향점에 대한 절대적 복종; 두 번째, 첫째와 밀접히 관련된 그들 조직의 방식. 1920년 대와 1950년 대 초기 각국 공산당이 당연시 여겼던 스탈린주의에 대해서는 충분히 논의가 되었지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스탈린주의를 특징짓는 파벌주의와 기회주의의 조합이 모스크바로부터의 지시에 의한 갑작스러운 정책 전환과 더불어 각국 공산당의 정치를 망쳤고 그들의 유효성을 약화시켰다.
공산당의 조직 방식으로 스탈린주의가 본질적으로 지상 목표인 그들이 도입한 “민주집중제 (democratic centralism)”는 위에서 서술한 공산당의 모든 악습을 키웠으며 이들 조직을 심각하게 비민주적 기관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일탈(deviation)”은 허락되지 않았고 지도부의 말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그리고 그 말이 이전 말과 상반되어도 법이 되었다. 지도부에 민주적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전당대회는 “일반(ordinary)” 당원에게 진정한 권한 혹은 영향력을 부여하지 못하는 조작된 쇼에 불과했다.
각국 공산당의 소비에트 유니온에 대한 맹목적 복종은 각국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소비에트의 정책과 행동에 대한 비판에 보다 유연한 정책으로 바뀌게 되었다. 다른 한편, “민주집중제”는 조직의 원칙으로 유지되었으며 과거 무효화 관습을 고착화하였다. 오래된 습관은 특히 그 습관이 지도부에 편리하게 여겨지면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건 심각한 취약점이다: 그 외에도 운영 방식, 정책 그리고 공산당의 지위 등에서도 가혹한 비판을 받을 것들이 많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좌파 “막스-레닌주의자”가 공개 비판하는 “개혁주의”에 비할 바는 아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민주주의 환경에서 혁명적 정당은 정도에서 벗어난 “개혁주의자”라고 매우 쉽게 비난받을 수 있는 정치에 항상 참여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질문은 혁명적 소명 의식을 확고히 가지고 있는 어떤 종류의 “개혁주의” 정당이 존재할 수 있는가이다. 결국엔 위에서 논의한 “혁명적 개혁주의”가 남게 된다. 다른 한쪽에서는 사회민주주의에 갈수록 경도되어 개혁이 궁극적 혁명의 한 부분임을 갈수록 망각하는 “개혁주의”가 있다. 이 개혁주의는 선거의 득표율에 필사적이며 계급투쟁보다는 계급 간 조정에 더 관심을 가지고 당 지도부의 기회주의적 행태에 따라 그들 정책이 분열되고 바뀌는 것을 용인한다. 프랑스 공산당은 이 “개혁주의”의 매우 좋은 예다. 한편 이탈리아 공산당은 두 종류의 “개혁주의” 간 투쟁을 잘 보여준다.
만약 이처럼 ‘혁명적 개혁주의”가 사회민주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면 가장 중요한 질문은 누가 이를 추진하냐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사회민주주의가 이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공산당은 이런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과거의 행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공산당의 좌파 “막스-레닌주의” 그룹은 그들의 협소한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프레임 때문에 주요 정당으로 변신하기 힘들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며 각 나라마다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공산당이 그들의 부정적 면을 가리면서 좌파 내 사회주의 재편성의 기반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곳에선 이 재편성이 좌파 내 다른 소스로부터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가 되었든 이 과정은 긴 시간이 될 것이다: 진정한 사회주의 정당은 무에서 갑자기 탄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사회주의적 동기는 정치적 표현이 ‘필요’하며 이 정치적 표현은 오직 정당에 의해서만 제공되는 것은 아니지만 정당이란 에이젼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정당이 할 수 없고 또 하지 못하는 많은 임무들 - 말과 행동으로 “사회주의 조류의 흐름”을 정치 제도와 문화에 투입하는 - 은 노조, 여성운동가, 흑인 운동가, 환경운동가, 평화 행동가와 같은 많은 유용하고 효율적인 다른 압력 단체들이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당은 물론 당장의 불만과 요구와 같은 현안에도 관심을 가지지만 이것을 뛰어넘어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 구조 해체와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 질서로의 이전에 관심을 가진다. 이 새로운 사회질서는 사회적 소유권과 경제활동의 주요 수단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포함하며 협동의 원칙, 시민 자유, 평등주의 그리고 현 자본주의 민주주의의 계급에 기초한 협소한 협의체보다 월등히 우월한 민주적 협의체에 의해 통치될 것이다.
좌파의 많은 정당들은 이 원칙을 오랜 기간 지지해왔다. 그러나 전술한 이유에서 이 정당들은 그들의 유효성을 감소 혹은 무효화했던 많은 취약점들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취약점들을 일찍 직면하고 극복할수록 사회주의로의 진보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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