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뉴질랜드 이야기

좌파는 자본주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을까? - 대안시리즈 15

김 무인 2020. 8. 12. 17:43

 

** 블로그 찾아주신 분께 안내드립니다.  더 나은 가시성/가독성을 원하는 분은 같은 제목/내용의 '네이버 포스트(링크)' 를 권장합니다.

 

 

역자 머리말

 

길지 않은 아래 에세이 내가 궁금해하는 두 역사적 상황에 대한 궁금증에 대해 적정하게 짚고 넘어가기에 번역한다. 하나는 오늘날 좌파에게 악마처럼 묘사되기도 하는 신자유주의가  1970,80년대에 비합법적 쿠데타로 등장한 것도 아니고 오롯이 다수 유권자라는 대중의 선택을 받아 등장했을 때 과연 좌파는 무엇을 했는가? 다른 하나는 30,40년이 지나 ‘enough is enough’를 반복해서 외칠 만큼 신자유주의의 악랄함을 성토하는 지금 대안을 목소리 높여 외치는 좌파는 과연 어느 정도까지 대안을 준비하고 있는가? 

 

저자는 현 상황을 희망적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 듯한데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아래 글의 논조와는 방향이 다르기에 언젠가 별도의 포스트를 통해 다루고 싶은 주제이기도 한데 뉴질랜드 경우 노동자 계급의 구성 특질이 노동자 권익을 위한 정치 세력의 등장을 어렵게 한다고 본다. 일례로 이번 선거에서 정당 투표를 위해 등록된 정당 명부를 보아도 노동자 계급의 대표를 표방하는 새로운 정당이 없다. 내가 말하는 뉴질랜드 노동자 계급의 구성 특질은 구성원의 인종적 에스닉 구성 특징이다. 객관적으로 뒷받침할 수치를 갖고 있지 않기에 조심스럽지만 주관적 관찰에 의하면 2020년 현재 뉴질랜드의 노동자 - 가령  블루 콜라,  육체노동, 단순 노동 그리고 서비스업 노동 - 의 상당 부분 - 내가 보기엔 압도적 다수다 - 이 유색 인종의 이민자 혹은 웍 비자 소지자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자신의 사회 경제적 지위의 향상과 노동 환경 개선에 대해 관심과 의지가 부족한 것처럼 나에겐 보인다. 환경적인 요인이 크지만 그들을 조직하려는 세력도 미약하다.  많은 경우 이들은 뉴질랜드보다 경제적으로 못 사는 국가 출신이므로 본국보다 월등한 급여조건에 상대적으로 만족하거나 웍 비자 소지자의 경우 영주권자 전환 이후 복지 혜택 등이 본국보다 낫기 때문에 만족할만한 노동 조건이 아니더라도 영주권을 받을 때까지 임시 비자 기간을 참고 견디려는 성향이 관찰된다. 또 이들은 이전 포스트 ‘직장 동료를 존중해서 항상 영어를 사용하기 바랍니다’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같은 직장 내에서 다른 인종/에스닉 그룹의 노동자들끼리 연대하지 못하고 같은 인종/에스닉 그룹끼리만 뭉치는 분열상을 보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변화에 대한 열망과 세력화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 현재로서는  부정적이다.

 

더욱 솔직해지자면 노동계급이 억압받고 있다고 하지만 현실에서 부딪치는  일부 노동자들은 기피하고 싶을 만큼 거칠다. 이들과 내가 연대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은커녕 가깝게 다가서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게 현실이다. 깨어있는 교양 있는 노동자는 내 주변에 많이 없는 듯하다. 모든 노동자가 AOC(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 같지 않다. AOC는 보스턴 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한 학사 출신이다. 즉 그녀는 세상을 이해하는 안목과 지혜 그리고 교양을 갖춘 서비스업 노동자(식당 웨이트리스/바텐더)였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많은 노동자는 이런 지혜와 교양을 갖지 못한 채 하류 계층의 거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다. 

 

미래를 위한 변화는 결코 낭만화될 수 없는 현실적 과제다. 이 블로그를 통해 대안을 찾기 위한 탐구를 나름 흉내내지만 결코 녹록치 않은 여정임을 다시 한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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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는 자본주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을까? (Does the Left know how to fix Capitalism?)

 

Thursday, 6 August 2020

 

Chris Trotter

 

 

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사람들이 그 시스템을 고치려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에 이르러  모든 이들에게 전후 경제 기적은 끝났으며 통상적인 치유책은 모두 실패했다는 것이 명백하게 다가갔다. 시장의 유권자들은 이전까지 시도되지 않은 새로운 것을 원했다. 그들은 대안에 굶주렸다. 

 

낮은 인플레이션, 미약한 사기업 노조 그리고 정체된 임금 성장에 익숙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성장한 젊은 뉴질랜더 - 이는 1990년대 초반 이후 이민 온 한국 이민자에게도 공히 적용된다 - 에게 연 14%의 인플레이션과 이에 대응하는 임금 성장을 상상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지난 35년간 경제 정책이 변한 게 거의 없기 때문에 걷잡을 수 없는 물가와 임금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수상과 재무상의 대책들이 이들에게는 기괴하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들에게는 실패한 전후 경제를 대신할 대안의 탐구와 논의에 얼마나 뉴질랜드 사회가 열정적으로 매달렸는지도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심지어 글로벌 금융 위기 - 우리를 파괴로 몰고 가는 신자유의적 사고와 행태를 보여주는 사건 - 를 겪은 20대에게도 제4기 노동당 정부 - 1984년 노동당 David Lange (데이비드 랑기) 수상 집권과 함께 Rogernomics로 상징되는 뉴질랜드의 신자유주의 시대를 연 정권 (역자 주) - 의 개혁 이전에 있었던 장기간의 대중의 토론과 논쟁과 비교될 만한 것은 없었다. 

 

아주 많은 대중 토론이 있었다: 신문의 많은 지면, 잡지의 장문의 기고문 그리고 티브이 황금시간대 다큐멘터리(가장 유명한 것은 밀튼 프리드만 (Milton Friedman)의 통화주의에 충실한 “Free to Choose” 시리즈)가 이 토론에 할애되었으며  변화에 대해 가장 큰 목소리를 낸 것은 당연히 우파였다.

 

 

Free to Choose: Part 1 of 10 The Power of the Market (Featuring Milton Friedman)

 

1945년 이래 서구의 정책을 크게 좌우한 케인지언 경제 정책은 자본주의가 불황과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사회민주적 열망과 타협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대중들은 더 나은 삶을 원했으며 서구 정치인들은 만약 그들이 시민들의 이런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소비에트가 그 공간을 재빨리 차지할 것을 알고 있기에 유권자들이 원하는 것을 해 줘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문제는, 특히 영어권 자본주의자들에게, 전후 타협 체제가 너무 잘 작동했다는 것이다.

 

노조의 힘이 커지고 수익률이 하락하면서 자본주의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시작해서 1970년대까지 지속한 “증가하는 기대의 혁명(revolution of rising expectations)”은 이전까지 소외되고/되거나 억압된 그룹들 - 흑인, 여성 그리고 동성애자 -로 하여금 경제적 정치적 무대에서 그들의 적정한 자리를 요구하고 나서게 만들었다. 보수적 지식인들에 의하면 자본주의가 해체되어야만 충족시킬 수 있는 것들을 사회민주주의는  요구하는 것이다. 반격의 시간이 도래했다.

 

대단한 반격이었다. 자본가들의 이 성공적인 반동적 혁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특권을 오랜 기간 열등한 그룹 - 특히 노동자 계급과  유색 인종 - 였던 이들에게 헌납해야 할지 모른다는 중산계급의 공포였다. 사회민주주의의 가장 급진적 문화로 여겨졌던 전투적 노조와 흑인 인권 운동은 중산계급이 자본가들의 반격을 지지하는 주 기반이 되었다. 그 대가로 중산계급은 인종 혹은 성별과 관계없이 중산계급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평등을 약속받았다.

 

그렇다면 전후 케인지언 정책에 대한 대안이 좌파에게 있었을까? 물론 있었다. 그들의 대안은 보수 지식인들과 우익 싱크 탱크가 제시한 대안만큼 격려와 지지를 받았을까? 당연히 아니다!  대안 논의 중 “큰 시장(More market)” 주장은 자본가들의 입맛을 맞추려 노력했다. 이런 무모한 시도는 결국 매우 나쁜 상처만 남기며 역효과를 낳게 된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10년이 지난 지금 신자유주의의 결함과 실패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다. 대안적 경제 이론들이 세계 각지의 사상가와 정치인들로부터 제기되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1970,80년대의 케인스주의에 대한 비판이 이룩한 성과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다. 변화를 위한 지적 환경 창조에 대한 공들임; 마가렛 대처, 로널드 레이건 그리고 로저 더글라스의 혁명적 정책 발표를 위한 정치적 토대 마련에 대한 예외적 사전 준비; 이런 어떤 것도 현재 좌파는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개인/그룹들과 보다 평등한 대안을 지지하는 개인/그룹들 간의 자원 측면에서 극심한 불균형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억만장자를 후원자로 가지는 것은 정말 힘이 된다!

 

코로나바이러스(그리고 급격한 기후 변화)라는 강력한 원군이 있음에도 현 상태에 대한 확신에 찬 대안의 개발은 여전히 처참할 정도로 느리다,

 

오늘날 좌파가 수적으로 소수라고 주장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현 시스템 실패에 대한 대중의 자각과 행동적 대응의 실패를 이들 좌파의 활동 에너지와 지적 능력 부족 탓으로 돌려야 할까? 아니면 단순히 좌파의 사상들이, 거의 전부, 역사적으로 타협한 중산 계급의 사상들로 바뀌었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