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한국 이야기

혈연 민족주의와 시민 민족주의 - 한국의 다문화주의에 대한 담론들 5편

김 무인 2019. 10. 20.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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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말

아래 에세이는 2013년에 처음 쓰였다가, 2019년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숫자 중심으로 일부 정보를 업데이트한 후 번역해서 올린 글입니다. 따라서 에세이에서 인용한 정보와 사례가 2022년 현시점을 반영하지 못할 수 있음을 미리 양해 구합니다. 제대로 된 리비젼을 생각하던 중, 2021년 하반기에 한국의 북저널리즘과 인연이 닿아 대폭으로 보완한 후, 책(종이/온라인)으로 출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출판 계약에 따라 새로운 버전은 블로그에 공개할 수 없음을 안내드립니다. 시중에 출판된 책의 제목은 ‘다문화 쇼크’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링크를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한국의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에 대한 담론들(discourses):

자유주의적 보편주의 (liberal universalism), 글로벌 자본주의(global capitalism)

그리고 민족국가(nation states) 간의 복합적 충돌

논 의

한국 정부의 이민 및 이민자 정책, 한국 학계의 한국 정부의 이민/이민자 정책에 대한 담론들 그리고 반이민 그룹의 주장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우리는 그것들을 둘러싼 핵심 개념들 - 가령, 인종차별(racism), 민족주의(nationalism), 다문화주의 (multiculturalism), 글로벌 자본주의(global capitalism), - 과 그들 간 관계에 대해 고찰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 개념들에 대한 고찰 후, 과연 한국 사회는 다문화/인종 사회가 변화할 것이 가라는 질문에 답하도록 한다.

반이민은 인종차별주의?

첫 번째로 한국 대중의 정서와 담론에는 ‘반이민 혹은 반 다문화주의는 인종차별 아니면 최소한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이다’라는 단순 논리가 아직도 발견된다. 일견 이 논리는 그럴듯해 보인다. 왜냐하면, 반이민은 유럽의 극우정당 - 독일의 국가민주당(NPD)이나 영국의 브리튼 국민당(British National Party: BNP) -의 주 정책이며, 이 정책의 출발점 자체가 인종 민족주의(ethno-nationalism)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한국의 반이민 그룹은 다른 인종 혹은 다른 문화 소지자이기 때문에 외국인 이주자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으로서 이민을 반대한다; 따라서, 이 두 이슈를 분리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독일 국가민주당(NPD)

 

영국 내 극우파 지지자들의 투표 행태를 분석한 Rydgren은 이민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외국인 혐오자 이거나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더 나아가, 유럽 극우정당들이 인종차별적 인종 민족주의자들이기는 하지만, 독일 국가민주당(NPD)은 현재의 노동 이주가 근본적으로는 글로벌 자본주의 때문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이들의 상황 인식은 한국 내 반이민 그룹의 인식과 정확히 궤를 같이한다. 바꿔 말하면, 한국 내 반이민 그룹은 전혀 인종차별이나 외국인 혐오 성격이 그들 주장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친이민(자) 세력 - 정부, 기업, 미디어 그리고 일부 시민단체 -으로부터 글로벌 자본주의로 야기된 국가 간 노동자 이주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셈이다.

이 반이민 그룹을 인종차별주의자로 낙인찍는 행태는 우리로 하여금 글로벌 자본주의와 인종차별 간의 역학관계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지젝(Zizek)에 의하면, 과거 제국주의 시절 자본주의는 식민지 주민에 대한 인종적 차별화(열등 인종화)가 전략적으로 필요했지만, 다국적 기업이 국가 간 경계를 초월하여 이익을 실현하는 현재와 같은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는 오히려 이 인종차별이 장애물로 작용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글로벌 자본주의는 반인종차별 혹은 다문화주의라는 슬로건을 높게 드는 것이다. Melamed도 미국 정부가 어떻게 반인종차별(anti-racism)을 다문화 이데올로기의 한 파트로 수용하게 되었는지를 분석하면서 지젝과 유사한 지적을 한다. 그녀를 따르면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식민지 원주민으로부터의 저항 그리고 미국 내 흑인 인종차별에 대한 구 소련의 비판에 직면하여, 반인종차별을 앞세워 다문화주의를 도입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미국이 도입한 다문화주의는 그 간 외모나 피부 색깔을 기준으로 구분했던 사회구성원들을 대신 이데올로기,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기준에 의해 재 분류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후 다문화주의의 한 부분으로서 반인종차별은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적(neo-liberal) 글로벌 자본주의를 위해 지역 별 인종 간 갈등을 관리하기 위한 중추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 이데올로기 하에서 다문화주의를 반대하는 집단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고 한국도 예외가 아니게 된다. 반이민 그룹의 방어적 태도를 고려했을 때, 반 다문화주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라는 단순 논리가 여전히 한국에서는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민족주의의 패러독스(paradox)

한국 내 다문화 담론에서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할 두 번째 개념은 민족주의(nationalism)이다. 개요에 언급되었듯이 역사적 경험의 공유와 순수 혈통이 당연스러이 여겨지는 한 민족으로서 한국은 원초주의적 관점(primordial perspective)에 의해 더 적합히 이해될 수 있는데,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도 중국 일본과 더불어 한국을 예외적 민족이라면서 이 관점을 지지했다. 이런 한국 민족의 특수성은 한국인들의 폐쇄적 배타성을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 배타성은 외부 세계의 새로운 Others와 조우했을 때 종종 경계와 배척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한국인의 인종 민족주의(ethno-nationalism)는 심지어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도 영향력을 미친다. Globalization을 한국의 국가 정체성을 세계적 민족국가로 변모시킬 수 있는 방편으로 이해한 한국의 위정자들은 외국 자본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한국민들의 정서를 이용하여 경제적 민족주의를 추구했다. 그 결과, 한국 정부는 외국 다국적기업보다는 한국다국적 기업에게 유리한 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정리해보면, 머리말에 나온 ‘리틀 싸이’를 튀기라고 모독한 그룹이나, 한국의 다국적기업/정부, 둘 모두 같은 인종 민족주의의 입장인데, 전자 그룹은 반이민을 지지하는 반면 후자 그룹은 이민을 적극 추진하는 아이로니컬한 상반된 태도를 보인다.

이민을 둘러싼 민족주의의 이 같은 패러독스(paradoxes)와 어정쩡함은 대부분 유럽 국가에서도 유사하게 발견된다. 19세기 유럽에서는 두 형태의 민족주의가 공존했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반대하는 우파의 인종 민족주의(ethno-nationalism)가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 주권을 완성하고 시민권을 공유하려는 좌파의 시민 민족주의(civic nationalism)였다. 이 두 형태의 민족주의는 이후 유럽에 공존해 왔으나, 20세기 후반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만나 인종 민족주의는 외국인 혐오 과격 극우 민족주의로 변형되면서 이주노동자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반면, 국제주의와 반제국주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시민 민족주의는 민족국가의 자결권에 대한 요구와 자본주의의 전 세계적 압력에 저항하는 체제로 변모했다. 이는 시민 민족주의가 민족국가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들 - 문화적 동질성, 경제발전 그리고 부의 재분배와 사회정의를 위해 자본가들의 권력을 제한하는 정치적 시민권 - 이 글로벌 자본주의에 의해 위협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이주노동자를 둘러싼 인종 민족주의와 시민 민족주의 간의 입장 차이는 매우 애매해지는데, 이 들 모두 외국인 노동자 이주 원인에 대해 인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한 예로, 독일의 반세계화(anti-globalization) 운동에 있어 극우파인 NPD와 좌파 간에 두드러진 차이점이 없다.

그럼에도, 인종 민족주의와 시민 민족주의 간 본질적 차이점을 글로벌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그들의 동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종 민족주의는 글로벌 자본주의가 그들 사회의 ‘문화 인종적 동질성’ (ethnic homogeneity)을 위협하기 때문에 반대하는 반면, 시민 민족주의는 글로벌 자본주의가 한 사회 내에서 경제적 불평등과 빈곤을 초래하기 때문에 반대한다. 종종 상반된 입장을 취하긴 하지만 막시즘의 시민 민족주의에 대한 가장 위대한 공헌은 민족주의를 고정된 원초적(primordial) 현상이 아닌 경제 발전에 관련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예를 들어, Munck에 의하면 과거 서구의 고전적 민족주의는 본국과 더불어 식민지 자본주의 시장의 개척과 개발을 위한 필수적 요소로 작용했는데, 이제 자본주의의 세계화로 인해 자국 사회의 통제권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국 시장을 사수하기 위한 형태로 변형을 요구받는다. Zizek도 이런 맥락에서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은 전 세계적 시장 사회(global market-society)도 아니고 새로운 형식의 문화 인종적 근본주의(ethnic fundamentalism)에도 속하지 않는, 제3의 지대(domain)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들을 고려했을 때, 한국 반이민 그룹의 민족주의는 시민 민족주의 카테고리에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다문화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다문화 담론에 있어 고려해야 할 다음 개념은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그 자체이다. 특히, ‘다문화주의’라는 용어 자체는 한 사회 내 문화 인종적 관계(ethnic relations)를 단순히 문화적(cultural) 관계로 잘못 인식시킬 수 있다. 이 용어는 전술한 Melmed의 설명처럼 자국 내 인종적 문제를 문화적 문제로 치환시키려는 미국의 다문화주의에서 출발했다고 알려진다: 따라서 ‘다문화(multicultures)’가 아닌 ‘다문화/인종(multi-ethnicities)’이라는 용어가 현 문화 인종 관계의 실제 상태(state)를 보다 정확히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우리는 다문화주의가 ‘상태(state)’라는 측면과 더불어 ‘관점(perspective)’이라는 측면(dimension)을 지니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 주의(.. ism)’를 특정 개념에 붙이는 많은 경우가 이 개념을 ‘규범적(normative) 이데올로기’로 간주할 때임을 고려한다면, 고개를 쳐드는 의문점은 과연 다문화인종(multi-ethnic) 사회가 문화 인종적으로 단일 사회 보다 본질적으로 보다 ‘더 바람직한가’이다. 그 대답은 의문의 여지없이 명백한 것처럼 보인다. 현재의 다문화주의는 이미 다문화/인종화된 사회에 대한 사후적 관리 정책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 어떤 국가도 다양성(diversity)이 단일성(homogeneity)보다 좋다는 명목하에 자발적으로 자국의 문화 인종 구성을 다양화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다문화주의가 여전히 유효한 개념(notion)일까? 다문화주의는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유럽의 많은 국가에서 도입한 이민자 정책인데 1990년대 후반부터 그 위기가 목도되었다. 한 예로, 2010년 이후 이민자 관련 잦은 폭동을 겪은 스웨덴도 1970년대에는 다문화주의의 모범 사례로 손 꼽혔던 나라임을 상기해볼 때 다문화주의의 흔들리는 위상을 엿볼 수 있다. ‘상상 속 단일문화 국가의 신성화’.’도덕적 다수’. 다문화주의의 사망’,’신동화주의의 필요성’ 등은 이 위기를 반영하는 문구 들 중 일부인데, 2010년 독일 메르켈 총리에 이어 2011년 영국 캐머런 총리가 연이어 다문화주의 실패 선언을 함으로써 다문화 공존을 위한 정치적 공간은 최소한 유럽에서는 없어 보인다.

유럽 다문화주의의 실패는 다문화주의 비판자들에 의하면 예견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유럽의 다문화주의는 그 간 이주자들의 현지 사회 참여를 독려하는 대신 분리를 권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다문화주의가 실패했다는 표현보다는 통합을 단념케하려는 시도가 성공했다는 표현이 더 적확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독일과 네덜란드는 초창기 guest worker들이 본국에 돌아갈 것이라고 예상하고 그들만의 거주지(enclaves)를 권장했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의 반이민 그룹의 관점에서는 한국 사회가 유럽의 실패한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즉, 호스트 국가의 원주민과 새로 유입된 이주자들이 다문화주의라는 슬로건 하에서 조화로운 공존을 한다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미 증명된 다문화/인종 사회(multi-ethnic society)로 한국이 향해 가고 그 들은 믿는다.

이처럼 다문화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다문화주의의 대안처럼 떠오른 것이 ‘융화 정책(integration policy)’이다. 융화 정책은 한편으로는 正 (theis)에 해당하는 동화(assimilation) 그리고 (antithesis)에 해당하는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의 변증법적 合(synthesis)으로 해석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통합(social cohesion)을 유지하려는 민족국가와 국가 간 경계를 초월하는 글로벌 자본주의 간 대외 포장용 타협의 결과물이라고도 평가된다. 후자의 평가를 다른 말로 바꾸면, 자유주의적 다원주의(liberal pluralism)에 기반한 ‘수평적’ 다문화주의는 이주노동자들로 하여금 호스트 민족국가 자본주의의 ‘수직적’ 시스템 최하단부에 이들을 위치시킴으로써, 이들이 불가피하게 주류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분리될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글로벌 자본주의와의 본질적 모순 때문에 유지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후자의 주장이 좀 더 설득력 있게 들릴 이유가 있다. 융화 정책은 사회통합이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같은 가치와 규범이 이민자에게도 공유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 측면에서 동화의 특질을 가지고 있으나 동화와 달리 이민자들에게 호스트 민족국가의 가치와 규범을 공유할 것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이 맥락에서 드는 의문은 그 가치와 규범의 정체이다. 合(synthesis)으로서 융화 정책이기 때문에 융화 정책의 가치와 규범은 이전 동화주의처럼 다수 원주민의 규범과 가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주민과 이민자가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핵심 가치들(core values)을 창출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회통합(social cohesion)을 위한 핵심 가치들을 찾기 위한 시도는 ‘우리는 누구인가 (who we are)’라는 근본적 질문에 봉착하면서 ‘우리 (us)’는 여전히 공허한 지칭 대명사로 남아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