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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관료제(bureaucracy) 전반에 대한 이론적 접근을 위해서 내가 고른 책은 David Beetham의 ‘BUREAUCRACY (second edition)’이다. 과문한 탓에 저자의 이름도 처음 들어보았지만, 관련 서적 몇 권을 도서관에 빌린 후 나로 하여금 흥미를 잃지 않게 하면서 관료제 전반에 대해 이해를 하게 해 줄 적당한 입문서를 그 중 고른 결과다. 100여 페이지 남짓에 특정 주제에 너무 깊숙이 파고들지 않으면서 새로운 지역을 탐사하는 여행객에게 해당 지역에 대한 깔끔한 조감도를 제공해 준다는 느낌의 책이기에 선택했다. 한 서적 리뷰사이트에서 5점 만점에 3점을 받은 그저 그런 평가를 받은 책이지만 나 같은 입문자에게 5점 만점에 5점을 받은 책이 더 좋은 책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나를 매료시킨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우리가 관료제 하면 자동으로 떠올리는 막스 베버(Max Weber)의 이론 - 그리고 이후 그의 학파 베버리안(Weberian) - 과 그의 리버럴 스탠스의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칼 막스(Karl Marx) - 그리고 이후 그의 학파 막시스트(Marxist) - 의 관료제에 대한 이해를 비교, 설명한 점이다. 이전에도 실토했는데 갈수록 독서와 사고의 호흡이 짧아져 가는 것을 느끼기에 대하 혹은 장편소설 보다는 이런 단편소설 형식에 쪽집게식 내용을 담은 글을 자주 찾게 된다. 그들 주장의 요점만 비교하여 서술한 책인데도 이전 포스트에서 다룬 오클랜드 시청과 AT의 관료주의적 상황을 대입해가면서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더불어 140여 년 전에 사망한 칼 맑스 그리고 100여년 전에 사망한 막스 베버이지만 그들의 통찰력이 2021년 뉴질랜드에서도 여전히 찬란하게 빛을 발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따라서 이후 포스트는 이 책의 막스 베버(그리고 베버리안)와 칼 맑스(그리고 막시스트)의 관료제에 대한 이해를 다룬 챕터들의 요약 번역과 내 느낌을 주석처럼 다는 형식이 될 것이다. 관료제를 처음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이 책의 내용을 번역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번 포스트는 베버의 관료제 이론을 먼저 살펴본다.
관료제를 강추한 베버
오늘날 우리는 관료주의(bureaucratism)라는 용어를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이고 빈정거리는 뉘앙스를 담아 얘기하곤 한다. 즉 독선적 권위주의, 관료적 형식주의(red tape), 복지부동, 규칙 만능주의(officiousness), 관청 용어(officialese)와 같은 관료주의적 병폐 (pathologies)와 같은 함의가 이 뉘앙스에 포함될 것이다. 나 역시 오클랜드 시청과 AT의 행태를 이런 뉘앙스를 담아 비판적으로 바라보곤 한다.
하지만 베버는 기본적으로 관료제(bureaucracy)를 처음부터 이처럼 불가피한 사회악처럼 이해하지 않았다. 그는 관료제를 통해 노동의 합리적 분배가 피라미드 계층과 같은 구조를 통해 이루어짐으로써 조직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근대 산업화 과정에서 ‘반드시’ 채용되어야 할 통과의례 같은 제도로 인지한다. 베버의 이 기계적 계층관료제는 그 경직성과 비 인격성으로 말미암아 조직의 효율성(efficiency)이 오히려 떨어지는 경향이 발견되면서 이후 발전된 조직사회학(organizational sociology)은 조직구성원 상호 간 수평적 커뮤니케이션과 의사 결정권의 분산을 강조하는 유기적 모델을 강조하기도 한다. 즉 베버는 조직구성원의 개인적 특성(personality)이 배제된 비 인격성(impersonality)을 기계처럼 돌아가야 할 조직에 필요한 덕목으로 이해했지만 이후 연구는 조직구성원 개인은 자신이 보다 ‘인간적’으로 대접받을 때 자발적으로 효율성을 높일 수 있으며 또 수직적 피라밋 계층 구조는 상명하달에는 적합하지만 하의상달(下意上達)에는 비효율적이라는 연구 결과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를 베버가 역설한 계층적 관료제의 중요성을 후세 조직 사회학자들이 부정했다고 이해하기보다는 조직이 처한 환경에 따라 기계적이고 계층적인 관료제 모델이 효율적일 수도 있고 유기적이고 수평적인 관료제 모델이 더 잘 작동할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 이 두 모델이 한 조직 내에서 혼용되는 것이 이상적일 수 있다는 기술적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베버가 제시한 기계적 계층적 관료제 모델의 가치가 훼손된 것도 또 유기적 수평 모델이 관료제 이후(post-bureaucratic) 모델인 것도 아니다. 그러하기에 근대(modern)와 현대 (contemporary)의 대규모 행정조직 - 오클랜드 시청과 AT도 포함될 것이다 - 은 여전히 베버의 최초 기계적 피라미드 계층화 모델을 채용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없는 민간기업 관료제, 문제 되는 정부 관료제?
따라서 관료제를 한 조직의 효율성을 위한 구조(structure)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관료제는 민간기업과 국가 행정부서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개념인데 민간기업(firms)의 관료제는 시장환경(market environment)에서 존재하는 반면 후자는 비시장 환경(non-market environment)에서 존재한다. 이런 환경적 차이의 다른 의미는 전자가 이익으로 운영되는 반면 후자는 세금과 같은 grant로 운영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결정적 차이 탓에 우리가 사용하는 부정적 함의의 관료제는 민간기업에 적용되지 않고 오로지 ‘관공서’에만 적용된다.
민간기업의 경우 조직의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비용을 축소하는 한편 매출을 증가시켜야 자신의 이익을 기대할 수 있지만, 관공서에는 이런 식의 운영 환경도 따라서 압력도 없다. 대신 자신이 속한 조직이 방대해질수록 운영 자금규모가 커지기 때문에 효율성 제고를 통한 조직의 슬림화에 오히려 역행하는 방대화를 통해 이익을 도모하는 경향이 생기게 된다. 이에 따라 정부 관료는 조직의 방대화를 위한 ‘의도적’ 노력의 하나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면서 그들에게 갖게 되는 스테레오타입인 게으름(shirking), 필요없는 일 만들기(making work) 그리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고객(시민)에 대한 무관심(indifference to consumer) 등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 대목이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자들이 목소리를 높여 작은 정부, 정부 서비스의 사유화 그리고 사회 전반에 걸친 시장화를 외치게 하는 배경 중 하나가 된다.
관료제를 바라보는 두 시각
머리말에 썼듯이 근대화와 더불어 등장한 관료제 - 사실 이 진술은 서구에만 적용된다고 해야 맞을 듯하다. 가령, 중국은 서구식 개념의 근대화 이전부터 방대한 관료제가 발전해 있었기 때문이다 - 에 대해 서로 약 40년이란 시차를 두며 19세기와 20세기에 활동했던 막스(그리고 막시스트)와 베버(그리고 베버리안)는 자신들의 관점 -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 에 걸맞은 통찰력을 관료제에 대해서도 보여주었다. 이 두 진영은 관료제와 같은 사회적 그룹과 제도의 권력은 진화하는 역사적 과정에서 그들이 수행하는 사회적 기능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는 입장이 일치한다. 하지만 베버 진영은 관료제를 권력체계와 행정 그리고 산업사회 내 기술지식의 역할과 조직이라는 보다 폭넓은 이론 틀 속에서 관료제를 이해하면서 관료제의 권력은 근대화(modernization)라는 역사적 과정의 산물로 규정한다. 이에 반해 막스 진영은 관료제를 계급 지배와 계급 충돌이라는 프레임에서 이해하면서 관료제 권력은 계급 사회 내에서 수행하는 그 기능의 산물로 규정한다.
따라서 비대해지고 강력해지는 관료제의 권력에 대한 이 두 진영의 대처 방식도 리버럴과 사회주의자라는 그들의 입장을 극명하게 반영한다. 베버는 관료제의 팽창은 개인의 자유와 같은 리버럴 가치를 위협하므로 비관료 엘리트들이 ‘위로부터(from above)’로 이를 통제할 것을 주문한다. 이런 주문은 21세기 현재 뉴질랜드 정치 시스템에서도 선거를 통해 당선된 정치인이 해당 부서의 장관으로 취임하여 부서 관료들에게 정책 방향을 지시하고 또 통제하는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반면 막스 진영에서 보았을 때 베버의 이런 비관료 엘리트를 통한 관료제의 견제/통제는’에고! 의미 없다’로 다가간다. 왜냐하면, 이들은 결국 계급 지배라는 시스템 속 같은 지배 계급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료제의 권력화 문제는 탈 계급 사회에서 행정구조의 재구성을 통해 해결해야 하며 이는 베버 진영과 달리 ‘밑으로부터(from below)’의 민주적 통제를 통해야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베버 진영은 리버럴 엘리트주의(liberal elitism)를 그리고 막스 진영은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proletarian socialism)를 노골적으로 표방한다.
베버의 관료제에 대한 우려, 쇠창살 우리(iron cage)
베버가 살던 당시 프러시아는 산업 자본주의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민간 기업 내 관리직이 대규모로 증가하고 국가 역시 복지 제공과 경제 통제에 개입하게 되면서 유럽에서 관료주의적 행정부가 가장 발달했다. 이를 목격하고 경험한 베버는 관료제는 자본주의를 통해 산업화하는 모든 국가에 등장하는 불가피적 비가역적 제도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또 공채를 통해 관료를 모집함으로써 특권층 시비로부터 자유로울뿐더러 과거의 비과학적 전통을 물려받은 것이 아닌 근대화의 핵심 개념인 ‘합리화(rationalization)’를 현실화시킨 제도로 간주한다. 이렇게 완벽한 합리적 조직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는 관료제는 사회적으로 가공할 권력을 가지게 되는데 위 권력층에 대해서는 ‘전문성(expertise)’으로 이들에 도전하고 아래 대중들에게는 막강한 ‘권위(authority)’구조로 다가간다.
이처럼 비대해져 가는 관료제와 그 권력의 확대는 베버 같은 리버럴에게는 우려 가득한 주객전도 상황으로 다가온다. 개인주의(individualism)에 기초한 자유주의(liberalism)가 자본주의(capitalism)의 탄생과 성장을 이끌어 왔는데 이렇게 성장한 산업 자본주의(industrial capitalism)는 국가 행정부 내 관료제를 숙명적으로 필요로 했고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관료제가 이제 역으로 개인의 자유주의를 위협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전 포스트에서 AT의 관료들과 그 관료들의 업무 방향을 지시하고 감독하는 카운슬 이사 간의 역학 관계를 언급했는데 베버 역시 정책의 수립 과정에서 해당 부서 관료의 어드바이스는 중요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조직의 ‘목표’ 선정과 그 목표 실현을 위한 기술적 ‘수단’은 명확한 위계가 있는 관계였다. 그는 관료제가 조직의 선출직 리더 - 요새로 말하자면 중앙정부의 선출직 장관 혹은 시 카운슬 시장 및 카운슬러 - 의, 특히 그가 해당 업무에 전문 지식이 부족할 경우, 역할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목적보다 수단의 가치가 더 대접받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팽배해지는것을 우려했다. 그의 이런 우려는 21세기 뉴질랜드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시민이 투표로 뽑은 선출직 정치인보다 그들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 관료들의 급여가 몇 배나 더 많은 상황이 보편화하여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료주의적 풍조가 사회를 지배하는 것에 대한 베버의 우려는 그 유명한 ‘쇠창살 우리(iron cage)’ 표현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희망 있게 삶의 총체적 관료제화는 경향(tendency)일 뿐 불가피성(inevitability)은 아니라고 단언하면서 ‘대항권력(countervailing power)’의 육성을 통해 관료제 권력을 견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대항권력은 관료적 기관의 다원화라는 방식과 더불어 지금 뉴질랜드 사회에서도 실행되는 조직 수장의 독립적 리더십을 통한 관료 권력의 통제다.
베버의 관료제 이론, 강력한 사회주의 비판의 무기가 되다
베버에 의하면 관료제는 근대화의 비가역적(irreversible) 산물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이 꿈꾸는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Herrschaft)가 없는 미래 사회는 환상(illusory)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막시스트와 달리 베버리안에게 있어 사회 내 소수의 지배는 단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 계급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전된 산업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술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관료들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사유재산 제도를 철폐한다 하더라도 산업의 발달과 이를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한 행정구조와 인력의 팽창은 여전히 관료제를 요구할 것이므로 혁명 이후 사회는 노동자들의 독재 국가가 아닌 ‘관료들의 독재국가(the dictatorship of the official)’가 될 것이라고 베버리안은 결론짓는다.
더구나, 베버에 의하면, 사회주의 국가는 계획경제 원칙에 따라 계획시스템의 창조와 법적 정치적 권리를 사회적 경제적 영역으로 확장해야 하는데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중앙집중 관료제의 대폭적 확대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나마 이 관료제의 권력 팽창을 견제하기 위한 대항권력 구조를 만들 수 있지만, 사회주의 체제하에서는 이런 구조 자체가 불가능하다. 또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부 관료와 산업 자본가들은 서로 견제할 수 위치에 있지만,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관료들이 부와 복지 모두를 관장하기 때문에 ‘시장의 무질서(anarchy of the market)’는 제거되었을지 몰라도 더 단일화되고 위계적인 관료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베버는 1920년에 죽었기 때문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이후의 행로를 보지 못했지만 베버리안들은 베버가 사회주의 국가의 운명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고 주장한다. 이들 노동자 계급은 계급 지배를 폐지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계급을 만들었을 뿐이라고 조롱하면서 산업자본주의가 미발달한 국가 - 소련을 포함한 - 의 경우 일정 경제개발 단계에서 관료는 시장의 확대와 사회적 특권들의 철폐를 통해 경제발전의 주력이 되기도 하나 이후 경제에 대한 개입이 지속할 수록 경제 침체의 주범이 된다고 주장한다.
즉 베버리안에게 소련의 관료독재는 단순히 한 개인 - 가령 스탈린 - 의 권력 추구의 산물이 아니라 계획경제 자체가 내포한 관료제라는 사회적 기능의 불가피성, 그리고 이 기능 덕분에 축적된 권력과 특권이 아무런 견제 권력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관료주의적 구조의 지배인 것이다. 이는 당시 소련을 둘러싼 비우호적 국제 환경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내재적이고 본질적인 원인이다. 따라서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보다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나마 관료제에 대한 견제가 이루어질 수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우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베버였지만 이 견제 과정이 결코 녹녹치 않음을 내내 강조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관료제의 견제는 어떻게?
베버가 관료제에 대한 이론을 정립할 당시 프러시아는 빌헬름 2세(소위 카이저)의 통치(1888년~1918년)하에 있었는데 당시 정부 관료들은 임명직이었으며 의회 대신 왕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베버에게 이들 관료는 ‘행정’을 해야 할 사람들이 어울리지 않는 ‘정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비쳤다. 이들에게서는 정치인들에게서 발견되는 정책에 대한 개인적 책임감, 정책 선택과 실행을 위한 대중의 지지 확보, 반대 세력을 설득하고 반박하기 위한 논리 준비 그리고 정책 실패 시 직책에서 물러날 줄 아는 책임감 등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베버가 보기에 완벽한 관료제이더라도 정치는 관료들이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니며 따라서 내재적으로 위험한 것이다. 이와 유사한 위험한 장면이 2021년 오클랜드시 산하조직 AT에서도 벌어지지 않나 생각한다. 기술 관료들로 이루어진 AT는 카운슬과 시민과의 제대로 된 정책 합의 과정없이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교통 정책을 시행하되 어떤 책임도 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관료의 월권행위 - 정치 행위 - 는 정치보다 행정의 가치를 더 높게 여기는 이데올로기에서 기원한다. 즉 전문적 지식을 가진 프로페셔널한 행정가로서 관료는 정치인들의 아마추어리즘을 얕잡아 본다: 자신들은 행정업무를 통해 성과를 남기는 동안 의회에선 말 잔치만 하고 있다; 행정관료들이 사회와 국가의 이익을 위해 일을 하는 동안 정당과 이해 그룹은 싸우기만 한다, 등. 이런 관료들의 우월적 이데올로기는 실제 무늬만 의회주의 시스템(token parliamentary system)그리고 실질적 효과 없이 시늉만 하는 정치(ineffectual gesture politics)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이런 관료제 권력의 팽창이란 위기 상황에 대해 베버는 선거를 통한 정당 정치의 활성화 그리고 정당 지도자의 리더십 부각을 통해 대항 권력을 형성할 것을 주문한다. 베버는 당시에도 의회만능주의를 포기했다. 예를 들어, 특정 이해 그룹이 의회 대표를 거치지 않고 로비를 통해 고위 행정 관료에 직접 접촉할 수 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그는 남아있는 의회의 기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의회를 통한 대중 논의와 정책 점검 그리고 위원회를 통한 각 부처 행정 이행 사항에 대한 공개적 점검 등. 이처럼 정당의 인지도 높은 지도자 선출을 통해 제한된 기능이라도 관료제에 대한 대항마로서 관료들을 원하는 정치적 방향과 통제 밑에 두려는 그의 주장은 ‘리더십 민주주의(leadership democracy)’라고 하며 이후 경제학자 슘페터에게 영향을 미친다.
맺음말
관료제 논의에서 베버의 중요성은 첫째, 21세기인 지금까지도 강력하게 지속하고 있는 관료제와 그 확대를 탄생 초기에 그 누구보다 일찍 간파했다는 점. 둘째, 리버럴로서 관료제가 개인의 자유와 비관료 엘리트 - 가령 정당 정치인과 선출직 정부 부처장 - 의 독립성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예측했다는 점. 셋째, 사회주의 비판과 리더십 민주주의 이론을 통해 관료제 권력의 과도한 팽창에 대한 나름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점: 가령 복수의 관료조직을 통한 상호 견제 및 경쟁 유도 그리고 선거 과정에서 대중의 지지를 얻는 정당 지도자를 통해 관료제와 별도의 권력 축을 구축.
100년 전에 사망한 베버이고 그의 통찰과 주장은 그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의 관료제에 대한 이해와 예측은 놀라울 정도로 2021년 뉴질랜드 사회에도 적용된다. 특히 리버럴로서 그의 우려 - 비대해진 관료제와 그 권력으로 말미암은 시민 개인의 자유 침해 그리고 선출직 비관료 엘리트(가령 의회 의원)들의 목표 설정 역할보다 철밥통 관료들의 목표 달성을 위한 기능적 수단의 우대 경향 - 는 뉴질랜드에서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고 보인다. 또 선출직 비관료 엘리트들이 과연 관료 엘리트들을 제대로 통제하고 있는지 아니면 시늉만 하고 있는지 더 나아가 베버가 말한 관료제를 견제하기 위한 복수의 관료조직을 통한 이이제이 전략이 과연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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