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세상 이야기

인종차별주의자 간디, 힌두 민족주의 그리고 인도 이민자의 국수주의 간 연결고리

김 무인 2021. 4. 12. 17:25

 

** 블로그를 찾아주신 분께 안내드립니다.  다음 블로그 수정/편집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더 나은 교열과 가시성/가독성을 갖춘 '네이버 포스트(링크)' 를 권장합니다.

 

 

 

조심스러운 접근, 하지만 …

 

이전 포스트에서 특정 그룹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 스테레오 타입을 고착화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특정 그룹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마음속으로만 간직해야 한다고 쓴 적이 있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뭔가 찝찝함이 가시지를 않는다. 그 찝찝함의 근원은 과연 100%  전수 조사를 마치지 않은 까닭에 일반화되어 공표될 수 없다는 이유로 일종의 사회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스테레오 타입을 터부시하면서 쉬쉬하는 것만이 과연 긍정적이기만 할까 하는 의구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특정 그룹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이 ‘왜’ 형성되었을까 발원을 추적해보기도 하고 그 스테레오 타입이 과연 나름 ‘개연성’을 가질 수 있는 스테레오 타입인지를 논의해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포스트는 조심스럽지만 그런 맥락에서 주제를 잡아보았다.

 

오클랜드의 아시안 숫자는 10명 중 3명 가까이 될 정도인데 이 비중은 앞으로 더 증가할 예정이다. 이 아시안 숫자의 증가는 두 에스닉 그룹이 주도하고 있는데 다름 아닌 에스닉 중국인과 인도인이다. 이 두 그룹의 숫자는 거의 대등한데 앞으로 인도인이 추월할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그룹은 개인적으로는 또 다른 면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오는데  다름 아니라 그들의 ‘강한’ 민족주의 성향이다. 일단 ‘강한’이란 중립적인 용어를 골랐지만 뉘앙스 적으로는 ‘배타적’ 혹은 ‘선민의식적’이란 측면이 강하다. 중국인의 이런 배타적 민족주의는 ‘중화사상(中華思想, Sinocentrism)’ 혹은 ‘화이사상((華夷思想)’으로 불리며 인종주의적 성격을 가지는 반면 인도인의 배타적 민족주의는 종교(힌두교) 근본주의적 성격을 지니며 ‘Hindutva(Hindu nationalism)’로 불린다. 

 

개인적으로 이 두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과 일상적 교류를 하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대화 과정에서 이들 중 일부는 모국 이야기가 나올 때면 갑자기 딴 사람이 된 것처럼 공격적으로 방어막을 친다는 느낌을 받는다. 두 국가 모두 면적이나 인구 면에서 큰 나라이지만 이들의 가시 돋친 접근불허같은 국수주의 성향은 필사적이라 안타까울 정도다. 그러면서 이들의 이같은  공세적 방어막 이면에 어떤 사회적 역사적 배경이 있을까라는 궁금증이 든다. 



인디언 이민자는 모국에 대해 왜 그렇게 자부심이 강할까?

 

이런 생각을 평상시 하던 차에  최근 aljazeera에서 흥미있는 기고문을 발견했다. 다름 아니라 지난 1월 미국의 작은 도시에 세워진 간디(Gandhi)의 동상이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었다는 뉴스에 대해 인도인 기고가가 그 사건의 의미를 짚어본 글이다. 그 기고문은 나에게 처음으로 인도인의 민족주의 그리고 간디 삶의 속살을 들여다보게 해 준 글이었다. 무척 흥미로웠을 뿐만 아니라 왜 일부 인도인들이 그토록 ‘국뽕’에 가까운 우월적 민족주의적 성향 - 또 다른 이름은 국수주의일 것이다 - 을 가지고 있을까에 대한 답을 어렴풋이 암시해주는 듯해서 다른 관련 기사들을 찾아 읽어보았다. 

 

사실 간디에 대한 나의 기억과 지식은 국민학교인지 중학교인지 세계사 시간 교과서에 아래 사진처럼 상체를 노출한 채 물레질하는 흑백사진의 이미지와 비폭력 저항으로 인도의 독립을 이끌었던  사람 정도가 정말 과장없이 전부다. 이번 포스트를 준비하기 전까지 그만큼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이번 포스트는 내가 몰랐던 그리고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행적으로 점철된 간디의 삶을 중심으로 내가 겪은 일부 인도인의 국수주의의 배경에 대한 첫 단계 이해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는 충격적이기까지 했던 내가 몰랐던 간디의 삶이지만 이전부터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분들에게는 뭔 호들갑을 떨면서 뒷북 치냐는 핀잔을 받아도 할 말 없을 뒤늦은 발견이다.

 

 

 

 

지난 1월 Davis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Davis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인구 7만 명이 안 되는 작은 도시인데 유명한 공립 명문대학인 캘리포니아 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의 11개 캠퍼스 중 하나가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이 작은 도시에 간디의 동상이 있었는데 아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누군가에 의해 지난 1월 고의적으로 훼손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동상은 2016년에 설립이 되었는데 당시에도 지역 사회에 과연 이 동상이 필요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그해 말 동상은 설치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간디의 동상을 금전적으로 후원하고 주도적으로 추진한 집단은 Davis시 주민이 아니라 저 멀리  2014년부터 집권하고 있는 인도 집권당, Bharatiya Janata Party(이하 BJP)이었다. 인도의 이 힌두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이 (극)우파 집권당은 단지 이 도시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 간디의 동상 설립을 국가 프로젝트 차원에서 지원하고 있다.  중국 집권 공산당이 세계 각지에 중국의 문화를 전파할 목적의 국책사업으로 추진하는 공자학원과 비슷한 취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021년 훼손된 간디의 동상

 

이 사건에 대해 인도의 현 집권당 BJP와 우파 미디어는 간디의 동상 훼손은 인도 국민에 대한 공격이라며 미국 정부에 엄정 조치를 요구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인도 당국은 관련 증거 없이 이 사건이 인도에서 시위를 계속하고있는 농민들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고 우파 미디어는 한발 더 나아가 이 사건은 캘리포니아의 Sikh 공동체 -터번을 쓴 사람이 있긴 있다 - 가 현재 인도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Sikh 농민들을 지지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고 역시 근거 없는 주장을 하게 된다. 현재 시위를 벌이는 농민들은 펀잡(Punjab) 주의 농민들이며 펀잡 주는 인도 Sikh교도가 밀집된 지역이다. 

 

2016년 당시 이 동상 설립에 반대한 사람들은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바로 미국에 거주하는 인도인들이었다. 간디가 모든 인도인의 절대적 추앙을 받을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과는 다른 장면이다. 그런데 이들이 간디 동상 설립에 반대한 이유는 피켓을 보았을 때 인도 정부의 주장과 달리 Sikh 공동체 혹은 펀잡주에 거주하는 농민의 이해관계 때문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들이 들고 있는 피켓에는 이와 관련 없는 또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주장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GANDHI THE RACIST’.  

 

2016년, Davis시 간디 동상 설립에 반대하는 인도인들

 

또 시위 참가자 중 한 명은 “간디는 평화랑은 관계가 먼 사람입니다. 폭력을 신봉했으며 성차별주의자(sexist)이자 인종차별주의자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영국 식민 지배로부터 인도를 독립으로 이끈 간디가 인종차별주의자에다가 성차별주의자라니. .. 또  간디를 총으로 암살한 Nathuram Godse가 속했던 극우 힌두 민족주의 조직(Rashtriya Swayamsevak Sangh:RSS)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이어받은 현 인도 정권 BJP는 왜 간디 동상의 훼손을 자신들과 전 인도 국민에 대한 공격으로 몰고 갈까?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인종차별주의자 간디

 

관련 자료 몇 개 달랑 읽고서 한 사람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단정 짓는 것은 무모할지 모르지만, 간디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는 혹은 그가 후에 자신의 인종차별적 언행을 후회했다는 어떤 증거를  내가 아는 한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백 년이란 시간이 지난 2018년에 아프리카 가나의 대학교 교수들이 캠퍼스에 설치된 - 어떤 연유에서 그 동상이 설립되었는지 모르겠다 - 간디 동상 철회를 요청했다는 것은 21세기 현재도 간디의 인종차별주의적 행적은 반박되거나 부인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임을 보여준다. 만약 간디가 말년에라도 자신의 과거 인종차별주의적 언행을 반성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행동을 보였다면 2018년에 아래 사진과 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8년 아프리카 가나의 한 대학교에서 ‘인종차별주의자’ 간디의 동상이 철거되고 있다. 

 

 

간디를 인종차별주의라고 단정 지을만한 명백한 증거들은 그가 1893년부터 1914년까지 21년 동안 살았던 South Africa(남아공)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던 그의 언행들이다. 간디가 1869년생이니까 그의 나이 24세부터 45세까지 인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청장년기를 남아공에서 보낸 셈이다. 간디의 손자이자 그의 전기를 쓴 Rajmohan Gandhi는 간디의 남아공에서의 행적에 대해 당시 24세의 젊은이로서 간디는 남아공 흑인에 대해 무지했었고 편견이 있었다며 너그럽게 이해되어져야한다고 주장하지만, 문제는 남아공 도착 초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후에도 같은 언행이 반복되었다는 점이다.  

 

남아공 체류 기간 그는 지속해서 영국 식민정부를 상대로 남아공 거주 인디언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했는데 그의 이 노력은 남아공 거주 백인과  유색인종 간의 차별을 없애달라는 형식이 전혀 아니었다. 그의 남아공 인디언 권익 향상 시도는 남아공 원주민 흑인과 인디언 간의 차별 계층화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가령 그는 초기 Durban의 우체국 출입구가 백인과 흑인으로 분리되어있는 것에 불만을 표시했는데 불만의 출발점이 분리 자체가 아니라 ‘왜 인디언이 흑인과 같은 계층으로 구분되어 흑인들과 같은 출입구를 써야 하는가’였다. 1903년에도 “흑인은 문제를 일으키고 매우 더럽고 동물처럼 산다”며 흑인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이어갔던 간디였다. 

 

그는 더 나아가 인디언은 유러피안과 같은 ‘Indo-Aryan’ 조상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프리카 흑인인 ‘kaffirs’  - negro처럼 남아공 흑인을 일컫는  멸칭 - 보다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고 아프리카 흑인은 인디언보다 열등하다는 주장을 남아공 체류 내내 한다.  그러면서 인종에 기반을 둔 거주지역 그리고 사회적 분리는 계속돼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영국 식민주의자들과  자기의 입장을 일체화했다. 1905년 전염병이 Durban에 유행했을 때도 간디는 인디언과 아프리칸이 “무차별적으로 병원에 함께” 있는 한 전염병은 계속될 것이라고 미디어에 기고하기도 했다. 2021년으로 시간 여행을 한다면 코로나바이러스 인디언 감염자는 흑인 감염자와 분리해서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같은 Indo-Aryan 뿌리의 조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백인 영국에 충성하는 한편 아프리카 원주민을 경멸하는 간디의 이런 태도는 현대 학자들로 하여금 간디는 아파르트헤이트의 최초 반대자(opponent)가 아닌 최초 지지자(proponent)라고 정의할 정도다. 그는 백인 소수 권력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인디언이 이 백인 권력에 기생하는 쥬니어 파트너(junior partner)가 되기를 바란 것이다. 

 

개인적으로 간디의 이런 언행은 나로 하여금 일부 뉴질랜드 인디언 이민자들이 다른 아시안 이민자들을 대할 때 내려다보듯 대한다는 내 느낌이  틀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과 더불어 이들이 왜 이런 태도를 보이는지 그 배경의 한 부분을 보여준다는 생각이다.  이전까지 나는 인디언 이민자들의 다른 아시안 이민자들에 대한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가 1858년부터 1947년까지 근 100년에 걸친 영국 식민지배 탓에 조상 때부터 영국 문화 그리고 언어에 익숙하다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이런 상대적 우월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다른 말로, 인디언으로서는 가령 ‘내가 영국 백인보다는 못하지만, 영국 문화도 모르고  영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너희랑은 다르지, 암!’ 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나름 상상에 가까운 추측을 했었다. 

 

지금도 이런 나의 주관적 추정이 100% 허구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간디가 들고 나온  같은 ‘Indo-Aryan’ 인종 뿌리 카드는 나로 하여금 새로운 시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할 것을 요구하는 허를 찌른 한 수(?)였다.  만약 다수 인디언 이민자들이 ‘건국의 아버지’ 간디의 이런 생각 - 우리 인디언은 유러피안과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을 그대로 따른다면 그래서 자신을 피부가 약간 검은 유러피안 정도로 자기 정체성을 규정한다면 황인종 아시안들이 자신들을 같은 유색인종 이민자로 동급 취급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여기에 전술했듯이 근현대사를 통해 영국 문화와 언어에 익숙한 자신들과 이 둘 모두에 서툰 다른 아시안 이민자 - 가령 한국이나 중국과 같은 동아시아 출신 - 에 대한 우월의식이 겹쳐질 경우 내가 관찰한 일부 인디언 이민자의 선민주의적 태도가 나름 이해된다. 100여 년 전 백인 식민 통치하에 있던 남아공에서 백인과는 최대한 가깝게 그리고 흑인과는 가능한 거리를 두려 한 간디의 스탠스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가?  

 


호색한(好色漢) 간디?

 

간디가 인종차별주의였다는 사실과 더불어 나의 혀를 차게 만들었던 것은 ‘위대한 영혼’까지 갈 필요가 없이 일반인으로서도 수긍하기 힘든 변태적 그리고 위선적 성생활을 했다는 사실이다. 관련 기사를 읽어보면 간디의 비정상적 성생활은 공공연한 비밀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간 몰랐던 내가 비정상이란 의미로도 읽힌다. 아무튼, 간디 생전 그의 성적 기행은 사후 그를 ‘건국의 아버지(Father of the Nation)’로 추앙하려는 움직임으로 인해 왜곡되거나 억압되었는데 누구 말마따나 간디는 ‘아주  위험하지만 약간은 억제된 색정광(a most dangerous, semi-repressed sex maniac)이었는지 모른다.

 

간디는 당시 기준으로는 빠르지 않은 13세 나이에 1살 연상의 여성과 결혼을 했다. 30대에 들어 그는 인격의 완성을 위해서는 궁핍(poverty)과 순결함(chastity)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궁핍은 비교적 받아들이기 쉬운 덕목인데 반해 순결함을 대하는 간디의 방식은 대단히 ‘내로남불’식이다. 그는 추종자들에게는 Sex를 금욕적으로 대하라고 가르치지만 - 이 가르침은 인도의 초대 수상 Jawaharlal Nehru에 의해서도 ‘비정상적이고 부자연스럽다(abnormal and unnatural)’는 혹평을 듣는다 - 정작 자신은 70대 후반의 나이에도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한다는 핑계로 여성들과 같이 목욕하고 잠자리를 같이 하는 - 심지어 복수의 여성과 - 성 탐닉 행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 비서의 여동생이자 주치의인 Sushila Nayar와 함께 목욕과 잠자리를 같이 하곤 했다. 그녀와의 관계에 대해 비판을 받자 간디는 그녀와 함께 있을 때 품위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자신이 한 노력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그녀가 목욕할 때 나는 눈을 꼭 감는다. 그녀가 벌거벗고 목욕을 하는지 아니면 아직 속옷을 입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난 소리로 그녀가 비누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걸 해명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당황스럽다. 그는 또 남자 정액의 힘에 대한 무한한 믿음을 가졌다: ‘이 생명력 넘치는 액체(vital fluid)를 보존(conserve)하는 자는 지치지 않는 힘을 얻게 된다’고 그는 말한다. 

 


Sushila Nayar

 

 

아내 Kasturba가 1944년 죽자 간디는 주변에 더 많은 여자를 끌어들이는데 그 여자들은 그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남편과 잠자리가 금지된 여자들이었다. 그는 이런 그의 행위를 여전히 자신의 금욕을 위한  ‘브라마차리아 실험(brahmacharya experiment)’ - 힌두교의 금욕적 생활방식을 위한 실험 - 이라고 합리화하곤 했다. 1947년 33살인 Sushila를 대신하여 10대 소녀가 대신 77세 간디와 함께 잠자리를 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종손녀인 18살 Manu였다. 간디는 그의 종손녀에게 “우리의 순수함을 시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알몸으로 자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 종손녀와 알몸으로 침대에서 뒹굴던 1947년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종교 갈등 -힌두교와 이슬람교 - 으로 수만 명이 학살당하면서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되던 해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섹스 실험이 국가적 중요성이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가에 대한 진정한 봉사는 이 관습을 요구한다고 믿는다”. 간디는 한 발짝 더 나아가 그해 8월 말에  종손자의 아내인 18살 Abha를 자신의 침실에 끌어들여 Manu와 Abha 그리고 간디, 이 세 명은 잠자리를 같이 한다.  



1948년의  Manu, 간디 그리고 Abha (왼쪽부터). 간디는 이 사진이 찍힌 뒤 몇 시간 뒤 암살당한다. 

 

 

간디 사망 이후에도 의사로서의 삶을 이후 계속 살던 Sushila는 1970년대 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간디의 이런 제 멋대로의 성생활을 ‘브라마차리아 실험(brahmacharya experiment)’ 이라고 칭한 것은 젊은 여성들과 잠자리를 계속하는 것에 대한 질문이 주변에서 이어지자 이에 대한 답변을 위해 개발된 명분에 불과했다고 실토한다. 결국, 간디는 소위 ‘위대한' 사람 - 위대한 영혼이 아니라 - 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걷는 길에 맞춰 규정을 만들었을 뿐이다. #MeToo 운동가가 아니더라도 일반인 눈에도 이는 명백한 ‘위계에 의한 간음’에 불과한 것이다. 



힌두 민족주의

 

1948년 1월 30일 간디를 총으로 쏜 암살범 Nathuram Goose는 현 인도 집권 정당 BJP의 이데올로기 모태가 되는 극우 힌두 민족주의 조직 Rashtriya Swayamsevak Sangh(이하 RSS)의 오랜 멤버였다. RSS는 대외적으로는 암살범  Nathuram Godse와는 암살 수년 전에 관계를 끊었다고 주장하지만 모든 증거와 정황은 암살 직전까지 RSS와 교류를 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간디의 암살은 무슬림과의 공존을 주장하는 간디에 불만을 품은 힌디 민족주의자들의 테러로 봄이 합당할 것이다.  

 

‘영화’ 속 Godse가 간디를 암살하는 장면. 일부 미디어(한국 미디어 포함)는 이를 실제 암살 현장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RSS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암살범 Nathuram Godse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분열적이고 폭력적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고수하고 있다. 2014년 집권한 RSS의 정치적 아바타인 현 집권당 BJP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노골적인 힌두 민족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다. 2019년 8월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잠무카슈미르주의 특별자치권을 보장하는 헌법 370조를 폐지했고, 불법 이민자들에게 시민권을 주면서도 무슬림은 대상에서 제외하기도 했다. 또 일부 공립 교과서에서는 간디의 암살 사실을 아예 삭제하기도 했다. BJP에는 Godse를 여전히 애국자(patriot)라고 공식석상에서 지속적으로 칭송하는 국회의원들이 있는데 2019년 선거에 당선된 Pragya Singh Thakur가 그 중 하나다.


Pragya Singh Thakur

 

그러나 2014년 이후 인도의 정치 권력을 장악한 힌두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조직 RSS와  정당 BJT는 그들의 정통성을 위해 간디를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인다. 대부분의 힌두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식민 기간 인도 국민이 독립 쟁취를 위해 투쟁할 동안 영국 식민 정부에 빌붙어 지냈었기에 이들은 어떻게든 대중적 지지를 받는 간디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흑인은 인디언보다 열등한 인종이라고 남아공에 체류할 때 공언한 간디이지만 ‘같은 인디언 인종’끼리는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BJP처럼 이들을 ‘이등 시민(second-class)’으로 간주하여 차별하고 억압해서는 안된다는 서구의 리버럴 입장을 견지했었던 그였다. 힌두 민족주의자들은 이전부터 지금까지 인도를 힌두 민족국가로 만드는 것을 목표 - 인도 인구의 80%가 힌두교도이지만 14%인 1억 8천만 명은 무슬림이다 - 로 하지만 간디는 서구의 다원적 민주주의 정착 - 카스트 제도는 인정한 채 - 을 목표로 한 것이다. 

 

수면 밑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여전히 이런 패권적 힌두 민족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그리고 '있기에' 대외적으로는 화합의 상징으로 간디를 열심히 세일즈하고 있는 것이다. 힌두 민족주의자들과 집권당 BJP에게 간디는 자신들의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힌두 민족주의 정책을 은폐하고  비폭력 저항의 아이콘으로서 세계 무대에 인도라는 국가 - ‘간디 보유국’으로서 - 의 이미지를 홍보하기 위한 가장 완벽한 수단인 것이다. 간디는 세계 무대에 자랑할 수 있는 인도 역사상 최고 히트 수출 상품이 되었다.  



BJP의 수장인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간디 세일즈에 열심이다. 사진은 2019년 한국 방문 시 연세대에서 열린 간디 흉상 제막식

.



맺음말

 

머리말 부분에 서술했듯이 이번 포스트는 내가 평소 인디언과 중국인 이민자의 과도할 정도의 강한 모국에 대한 자부심, 국수주의, 이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이느냐는 궁금증을 갖고 있던 차에 발견한 미디어의 한 기고문에서 발단이 되었다. 이번 포스트의 상당 부분이 간디의 인종 차별주의적 언행과 소아성애에 가까운 변태적 여색 밝힘에 할애되었는데 이런 결함투성이 간디라는 인물이지만 그가 인도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그의 인종차별주의 - 백인보다는 열등하지만 다른 유색인종보다는 우월하다는 계층적 인종차별 - 인식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많은 인도 국민들에게 스며들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 결론처럼 든다. 또 다른 귀결적 생각은  힌두 민족주의의 산실 RSS와 그 정치적 아바타인 현 집권당 BJP의 힌두 민족주의가 일정 부분 뉴질랜드 일부 인디언 이민자의 국수주의 성향에 영향을 미쳤을것이라는 점이다. RSS가 1925년에 설립되었으니까 1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졌고 더구나 2014년부터는 인도의 정치권력을 장악했으니 이데올로기적으로 정치적으로 명실상부 현 인도를 이끌고 있는 이들인만큼 뉴질랜드로 이민 온 인디언 이민자가 이들의 영향력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뉴질랜드 인디언 이민자는 힌두 민족주의 지지자가 아니더라도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아 호불호를 거론조차 하기 힘든 존재 간디가 다른 유색인종에 대해서만큼은 내려다 보는 것을 당연시 여긴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점에서 간디를 따라 다른 유색인종 이민자를 내려다 보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겠다는 결론에 유감스럽게 도달한다. 근본주의적 힌두 민족주의는 당연히 비 힌두교 다른 인종을 배척적 시각으로 대할 것이고 이들과  대척점에 있었던 서구식 다원주의의 지지자였던 간디마저도 다른 유색인종에 대해서는 인디언과 백인은 같은 조상에서 유래했다는 인식에 기반을 둔 인종차별 태도를 유지했으므로 인디언 대중들은 여기를 보나 저기를 보나 인디언은 최소한 다른 유색인종들보다는 우월한 인종이다는 결론적 인식에 도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본 포스트의 주제와는 관계없는 사족을 붙인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교과서의 위력 덕분에 ‘마하트마 간디 (Mahatma Gandhi)’라고 습관적으로 그를 불렀다. 그런데 ‘마하트마(Mahatma)’는 ‘위대한 영혼(great soul)’이란 뜻으로 마치 우리가 이순신 장군을 부를 때 성웅(聖雄)을 앞에 붙여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듯이 성인처럼 우러러보는 사람에게 붙이는 호칭이 ‘마하트마(Mahatma)’다. 인종차별주의자에 여신도를 성적으로 농락하는 사이비 교주도 울고 갈 궤변을 늘어 놓으며 78세 총격으로 사망할 때까지 10대 소녀의 몸을 탐한 간디에게 이 호칭은 절대 불가라는 생각이다. 그가 이룬 정치적 업적이 무엇이고 얼마나 위대한지 모르고 알고 싶지 않다. 위대한 정치인이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가 이 ‘위대한 영혼(Mahatma)’이란 호칭을 처음 받은 곳이 인종차별주의자로서 활동했던 1914년의 남아공이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참고문헌

 

Coming to terms with Gandhi’s complicated legacy

Gandhi Is Deeply Revered, But His Attitudes On Race And Sex Are Under Scrutiny

An odd kind of piety: The truth about the Gandhi’s sex life

Was Mahatma Gandhi a racist?

Gandhi statue proposal sparks debate in Davis

Controversial Gandhi statue in Davis vandalized, had head sawed off, police say

Fact Check: Is this a photo of Mahatma Gandhi's assassination?

인도 교과서에 ‘간디 암살’사라져… 모디 총리 ‘역사 왜곡’논란

힌두 민족주의 대두에 인도 ‘간디 암살범’ 기념도서관도 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