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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책을 번역하는 중에 정부에서 공공부문(public sector)에서 일하는 노동자 - 단순히 정부 직원만이 아니라 국립병원의 간호사, 의사와 같은 의료 인력, 경찰 그리고 교사 등도 포함되어 그 인원이 429,500명이나 된다 - 그중 연봉 6만 불 이상 그리고 10만 불 이하가 되는 사람들은 예외적 사유가 없는 한, 그리고 연봉 10만 불이 넘는 사람들은 앞으로 3년간 임금을 동결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는데 일주일 가까이 지난 지금도 노조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좌파 논객들 그리고 중립적 미디어에서도 정부의 이번 계획에 대한 비판을 이어가고 있다.

마침 관료제를 공부하던 중 ‘관료’들의 임금을 동결한다는 것처럼 들려서 관심을 두고 관련 기사를 찾아보았다. 6만 불 미만은 저임금 노동자 - 공공부문 노동자의 약 ¼ - 로 간주하여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매년 일정 수준의 임금을 인상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는데 과연 뉴질랜드 급여노동자들은 한 해 얼마를 벌며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얼마를 벌길래 저런 연봉 구분의 기준이 나왔는지 궁금해서 간단하게 살펴보고 이전 포스팅에 이어 막시스트 관료제 이론 그리고 베버리안 이론과의 비교 결론 부분 요약번역으로 넘어간다.
뉴질랜드 공무원들은 얼마를 받을까?
공공부문의 숫자는 2020년 6월 말 기준이고 뉴질랜드 노동자 전반의 숫자는 2021년 3월 말 기준이며 풀타임 기준이다.
뉴질랜드 노동자 평균(average) 임금: $69,078/년 ($1,328/주, $33.2/시간)
뉴질랜드 노동자 중간(median) 임금: $56,160/년 ($1,080/주, $27/시간)
공공부문 노동자 평균(average) 임금: $84,500/년 ($1,625/주, $40.6/시간)
공공부문 노동자 중간(median) 임금: $72,600/년 ($1,396/주, $34.9/시간)
평균임금이 중간임금보다 높은 것은 초고소득자를 정점으로 저소득 노동자가 피라미드 구조로 아래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소수의 고소득자로 인해 평균임금은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나지만, 현실 내부를 들여다보면 저소득자의 숫자가 많으므로 중간임금은 이보다 훨씬 뒤처진다. 2018년 센서스에서 한국 교민 중 연 7만 불 이상을 버는 사람이 8%, 그리고 4만 불 ~ 5만 불 밴드에 가장 많은 소득자가 포진한 것을 고려했을 때 이후의 임금 인상률을 참작하더라도 뉴질랜드의 많은 한국 교민이 뉴질랜드 노동자의 중간임금에 못 미치는 소득을 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공부분의 수치들은 행간을 잘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중앙정부 혹은 지방정부의 많은 임무가 외주업체에 아웃소싱 - 예를 들어, 이전 포스트에서 언급했지만, 오클랜드 전역의 시설물/공원 관리 및 청소업무는 호주 민간업체 Ventia에게 대행계약이 되어있다 - 이 되어있기 때문에 이 외주업체에 일하는 노동자들은 위 공공부문 노동자 임금통계에 포함되지 않았으리라 추정되기 때문이다. 오클랜드 청소부는 시간당 $22 미만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만약 이들이 위 통계에 포함되면 공공부문 노동자의 평균임금과 중간임금 모두 상당폭 떨어질 것이다.

아래는 Public Service Commission이 밝힌 공공부문 직무별 평균 급여다.
Managers ($145,000)
Policy analysts ($105,000)
ICT professionals and technicians ($99,400)
Legal, HR and finance professionals ($97,600)
Information professionals ($92,900)
Social, health and education workers ($73,800)
Inspectors and regulatory officers ($67,200)
Clerical and administrative workers ($62,500)
Contact centre workers ($56,500)
참고로 careers를 따르면 훈련을 마친 경찰은 $61,000으로 시작해서 4년 차가 되면 $68,000을 벌고 이후 $129,000까지 벌 수 있다. 교육을 마친 간호사는 $54,000으로 시작해서 3년 ~ 7년의 경력 간호사는 $62,000 ~ $77,000을 번다. 중등학교 교사는 첫해 $52,000 ~ $57,000로 시작해서 2년 ~ 5년 경력의 교사는 $58,000 ~ $71,000을 벌고 이후 $80,000까지 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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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관료적 타락(Bureaucratic degeneration of the proletarian revolution)
관료집단이 계급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계층(political stratum)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이 집단에게는 지배계급의 결정적 특징인 재산권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에 의하면, 생산수단과 연관된 재산은 공식적으로는 인민(people)의 소유이기 때문에 관료들이 사적으로 이를 이용하는 데는 명백한 한계가 있으며 이마저도 비밀리에 해야만 한다. 더 나아가, 그런 특권도 관료가 특정 직위에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고 그 직위에서 물렀났을 때는 사라진다; 이 외에도 관료의 직위는 자녀에게 물려줄 수 없으므로 지배계급의 특징인 세대에 걸친 영속성이 이 계층에는 없다.
게다가 이 집단을 계급이라고 한다면 경계를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 모호하다. 만약 모든 공무원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기술직, 연구직, 공장관리자 등 중앙 관료와는 매우 다른 이해관계가 있는 이들마저 포함하게 돼 엄청난 규모가 된다. 좀 더 축약한다면 어느 선에서 혹은 어떤 기준으로 제한해야 하는지 명확치 않다. 결론적으로 관료집단은 지배계급이 보여주는 재산소유권에서 기인하는 일관성과 견고함이라는 특성을 결여하고 있다.
이 주장에 대해 관료집단이 지배 혹은 통치계급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재산 소유로 인해 가질 수 있는 결정적 힘은 잉여생산물과 그 추출과정에 대한 장악력인데 관료집단은 정치적 행정적 권력의 독점을 통해 이를 장악했다. 관료들의 이런 권력이 단지 정치적인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국유화 재산 시스템에서 행정적 혹은 정치적 지위의 경제적 중요성, 그리고 정치적 영역이 잉여추출의 각 역사적 단계에서 행사했던 다양한 역할을 간과한 것이다. 직접생산자 입장에서는 얼마나 많이 혹은 적게 잉여생산물이 착취계급에 의해 뺏기는가는 그들이 자신의 생산물에 대해 어떤 통제권을 가지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상관없는 일이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관료와 당 간부의 특권 그리고 자기 자녀의 출세를 위해 자신의 직위와 인맥을 사용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이 계급에는 재산 소유 계급에서 보이는 것 같은 세대를 이어가는 응집력은 보장되지 않지만, 당의 조직 그리고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시스템을 이용해서 영속성을 꾀할 수 있다. 바로 이 제도적 응집력 때문에 관료제를 대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혁명적 운동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계급 착취라는 측면에서 서구 자본주의보다 소련을 선호할 이유가 원칙적으로 없다.

그렇다면 트로츠키가 처음 제기했던 관료집단은 역사적 역할(historical function)이 없으므로 계급이 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 대목에서 통치계급 이론(rulling class theory) 지지자들은 현저하게 갈린다. 한편의 Burnham과 같은 신계급이론가들은 관료제의 지배 근거를 발전된 생산시스템이 필요로 하는 기술적 조직적 기술에서 관료들이 수행한 역할에서 찾았다. 이 입장을 따르면 프롤레타리아는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없다는 베버리안의 비관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기껏해야 중앙 관료와 생산관리자 혹은 기술지식인 간 계급 내 충돌이 있을 뿐이며 이들은 프롤레타리아에게 자신들의 지지를 아마 호소할지 모른다.
다른 한편의 Rudolf Bahro같은 이들은 관료제는 서구의 자본가들이 수행했던 것과 같은 결정적 역사적 기능 - 산업도약(industrial take-off)에 필요한 강제적 축적 -을 수행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을 따르면 신계급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관료제는 발전된 생산시스템에 필요한 자본가 이후 계급(post-capitalist class)이 아니다. 관료제는 자본주의가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사회에서 산업화 과정에 필요한 자본가 대체 계급(substitute-capitalist class)인 것이다.
Bahro의 주장은 확실히 맑스의 역사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계급착취는 필요한 것이고 역사적으로 진보를 의미한다. 미성숙한 경제발전 탓에 사회구성원 모두를 위한 정치적, 과학적 그리고 문화적 성과의 공유가 불가능한 역사적 단계에서는 직접생산자로부터 강제적으로 잉여를 추출함으로써 착취계급이 육체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문명화는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민주적 절차로 사회는 절대로 진보할 수 없다. 산업도약을 위해 필요한 수준의 잉여 축적은 그 누구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한 세대의 미래를 위한 희생을 의미하기 때문에 민주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계급착취는 따라서 경제적 저개발의 대가이자 저개발을 극복하기 위한 필요조건인 것이다.
그러나 원시적 강제축적 작업이 끝나고 노동의 생산성이 산업화를 통해 잘 진척이 되면 자본가가 되었든 관료가 되었든 착취계급은 역사적으로 더는 필요 없게 된다. 왜냐하면, 모두에게 공유될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으로 말미암아 민주적 동의 절차에 의해 추가적 사회적 진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착취계급이 필요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착취계급은 그 권력과 특권이 정당화될 수 있는 역사적 역할이 소멸하면서 사회적으로도 퇴보를 의미한다. 동시에 일반 대중의 에너지들은 그들의 착취에 대한 항거 그리고 이들의 권력을 전복시키거나 최소한 체제(regime)를 일정 수준 용납할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결집한다. Bahro 이론의 목적은 소련 유형의 사회가 맑스가 말한 자본주의 사회와 같은 모습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원시적 축적의 과정을 마친 시스템은 경제적 발전이 진척될수록 사회적 에너지가 고갈되고 따라서 대체될 시기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러나 1989년 ‘벨벳 혁명(velvet revolution)’으로 이 대체의 순간이 도래했을 때 공산주의 시스템은 상대편 자본주의 시스템보다 내부 압력에 훨씬 더 취약함이 드러나면서 막시스트들이 기대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었다: 사회주의의 개혁적 민주적 형식을 향한 진보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향한 퇴보의 방향으로.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구공산권 시민은 이전에 시도해본 적이 없는 계획경제와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중간 형태인 제 3의 길 대안을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이들에게 자본주의로의 이전 과정에서 많은 관료가 국가행정부에 존속하는 형식으로 혹은 그들의 사회적 인맥을 통해 기업가로 변신하는 형식으로 기존 특권을 계속 이어간다는 사실은 시민의 일상적 삶에 대한 당 관료의 강압적 통제가 이제 선거를 통한 정당 간 경쟁 그리고 생산수단의 사유화라는 두 가지의 조합을 통해 완전히 부서졌다는 것보다 중요한 것으로 다가가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막시스트들은 공산주의의 종말 그리고 자본주의 ‘일상(normalcy)’로의 복귀가 어떤 사회주의 대안도 경제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억압적인 체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는 지배적 시각에 대해 반박한다. 그들이 배운 교훈은 다르다: 실효적이고 민주적인 책임 절차(accountability) 없이 중앙집중 계획경제를 운영한다는 것은 공공재산에 대한 행정력의 독점 그리고 이 행정력에 대한 노동의 종속으로 인해 새로운 착취계급을 탄생시켰다. 이들에 의하면 계급사회의 종식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로 형성된 계급 권력 ‘그리고’ 생산과정에 대한 행정적 독점 권력이 ‘모두’ 종식되었을 때 가능하다. 제도적으로, 이 조건은 시장경제 내에서 노동자가 생산단위를 직접 담당하고 시민이 민주적으로 중앙 정부를 통제하는 사회적 소유의 시스템을 통해 충족시킬 수 있다. 오직 이와 같은 탈 계급사회에서만 경제와 국가에서 행정이 사회적 통제수단으로서 ‘관료적’ 특성을 상실할 것이다.
관료제 이후?
지금까지 살펴본 베버리안과 막시스트의 관료제에 대한 이해로부터 우리는 관료제 권력 이론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사회적 기능으로서 관료제 권력에 대한 설명과 관료제 권력이 조직되는 방식이다. 막시스트 이론은 관료제 권력을 산업사회에서의 단순 조직 기능만이 아닌 계급통제 기능 측면에서 설명하면서 계급 분화(class division)를 벗어난 사회주의 사회질서에서는 ‘비관료적’ 행정 형식이 가능할 것으로 주장한다. 다른 하나는 관료제를 견제하고 대항할 수 있는 사회적 힘(social force)에 관한 것이다. 베버리안의 이론에서 이 사회적 힘은 산업 그리고 선거 지역구 경쟁 과정을 통해 선별된 개인 지도자이고 막시스트 이론에서 이 사회적 힘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다. 소련에서 관료제의 등장을 설명한 트로츠키에 의하면 당과 국가에서 행정권력의 증가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내림세와 겹친다. 탈 계급사회에서 비관료주의적 행정의 가능성은 민주주의 일상화와 제도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어떤 형식을 취할 것이며 어떤 유형의 행정을 필요로 하는가? 막시스트들은 오직 미래 세대만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알 수 있다는 이유로 미래 사회주의 사회의 청사진에 대해 항상 말을 아껴왔다. 그럼에도 대안 사회에 대한 몇 개념은 현재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유추해낼 수 있다. 맑시즘 내에서 사회주의 국가의 행정 형식에 대한 논의들은 대략 둘로 압축될 수 있는데 둘 다 맑스로부터 기원한다.
첫째, 생산자 민주주의는 어떤 종류의 위계구조 혹은 노동의 전문화 분업 - 개인들에게 영구적으로 한 역할만 하라고 요구하는 것 - 형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이런 전문화 분업은 자신들을 다른 생산자들 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하는 엘리트 그룹의 등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간 분리를 초월적으로 극복하는 다재다능(all-round)한 개인이라는 이상과도 배치된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행정은 모든 사회구성원이 시민 의무의 한 부분으로써 모두에 의해 공유되거나 (‘모두가 관료(everyone their own bureaucrats)’) 혹은 순환베이스로 운영(‘대중 속으로(back to the mass)’)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노동분업의 급격한 제거는 발전된 산업생산의 특성상 있을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적대적 계급이 없는 사회 그리고 적극적 참여민주주의에 필요한 생산력 수준을 떨어트릴 것이라는 입장이다. 조직이 속해있는 상부 공동체의 대표들 그리고 노동자 카운슬에 의해 정책이 결정되는 사회 소유 기업은 정책에 대해 자문을 해 줄 수 있는 전문적 지식을 갖춘 노동자와 이후 결정된 정책을 조율하며 실행할 수 있는 훈련된 행정가 조직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 조직은 베버리안의 관료제와 어떻게 다른가? 몇 특징들 - 가령, 명확히 한정된 권한과 규정에 따른 업무 - 은 물론 같다. 그러나 같은 행정시스템이더라도 이 경우 행정권력의 대상이 되는 조직구성원이 정책 결정과정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이런 과정이 없는 행정시스템과는 차별화된다. 근무규정도 외부로부터 강제되는 것이 아니며; 비밀 혹은 정보의 독점이 없고; 조직구성원이 직접 혹은 선거를 통해 뽑은 대리인을 통해 조직의 운영에 참여하기 때문에 영구적인 업무 차이로 발전할 가능성이 적다.
맑스와 엥겔스의 초기 저작들이 위 두 입장 중 전자에 기울었다면 후기 저작들은 두 번째 입장에 기운다. 이는 부분적으로 근대 기업에서 전문가의 기술적 행정적 필요를 현실적으로 인정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는 또 노동분업의 두 측면 - 기술적 분업 그리고 사회적 분업 - 의 보다 선명한 차별화가 진척된 결과이기도 하다. 노동의 기술적 분업은 어떤 재산 시스템 -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 이 되었든지 간에 산업공장에 필수적인 전문적 기능들로 이루어졌지만, 사회적 분업은 자본주의 계급사회에 특화된 역할들로 구성되어있다. 모든 노동분업의 급격한 제거를 하려는 시도들은 이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다.
그러나 맑스의 후기 저작들에서도 발견되듯이 적극적 민주주의가 없다면 기술적 분업 역시 새로운 사회적 분업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파리 코뮌(Paris Commune)에 대한 논평을 통해 맑스는 행정관료들은 생산노동자 수준의 급여를 받아야 하며 시민대표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산업 생산과정에 불가피한 전문화와 행정적 위계구조에 내재하여 있는 불평등의 잠재성에 대한 맑스의 해결책은 노동의 기술분업을 해체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술분업으로 인해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는 불평등이 새로운 사회적 계급 분화로 굳어지는 것을 민주주의 시스템을 통해 초월적으로 극복하자는 것이다.

막시스트 민주주의의 결함과 한계
맑스의 이런 기대와 맑스-레닌주의라는 이름으로 통치된 역사상 사회들 간 괴리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크다. 이 엄청난 간극의 원인을 혁명이 발생했을 당시의 적대적 주변 환경 그리고 미성숙한 조건 등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막시스트의 민주주의 이론과 실천 자체에 대해 고려를 해야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 될 것이다. 급진적 민주주의라는 의도에도 맑스 본인으로부터 기원한 막시스트의 민주주의 이론은 많은 결함이 내포되어있다. 우리는 막시스트의 민주주의 개념에서 최소한 세 가지 한계를 찾아낼 수 있다.
첫째, 비록 풀뿌리 단계에서의 왕성한 민주적 참여를 지지하지만 (코뮌, 카운슬, 소비에트 등의 형식으로) 의회 대표제를 부르주아 제도라고 적대시하였지만 막시스트는 정부 차원에 인민이 참여할 수 있는 신뢰할만한 대안적 제도를 발전시킨 적이 없다. 이런 제도가 없는 탓에 갈수록 중앙정부에 기능이 집중된 것이다. 의회주의에 대한 적대감은 다당제에 대한 의구심 그리고 사회주의 변혁에 대한 기여가 의심스럽거나 자본주의로의 복귀를 기도할 것 같은 사람들과의 권력공유를 거부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 같은 폐쇄성이 사회주의 프로젝트의 본질적 속성인지 여부는 토론할 여지가 있지만 맑시즘의 경우 유독 두드러진다.

둘째, 이 폐쇄성은 프롤레타리아를 다른 사회적 계급보다 우월한 지위에 그리고 ‘계급’ 자체를 다른 형식의 ‘피지배 사회계층’보다 특별한 지위에 두는 것으로 강화되었다. 이런 경향은 노동자 계급이 무계급사회에 대해 가장 강력한 열망을 하고 있으므로 이 노동자 계급 - 특히 사회주의로의 전이에 관여했던 이들- 의 목소리가 민주주의 내에서도 특권을 누려야 한다는 맑시즘의 전제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역사는 개인의 민권과 정치적 권리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 없이 미래 목적에 대한 수단적 가치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의 권리는 설사 그들이 대중의 다수를 차지한다 해도 쉽게 침식당했음을 보여준다.
셋째, 맑시즘의 밑으로부터의 인민통치라는 주장에도 맑시즘은 역사 전개 과정은 객관적으로 알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 전제로 말미암아 공공 정책의 바른 방향은 자유롭게 조직된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교육받은 사람들이 찾아낼 수 있는 ‘진리’의 문제가 된다. 사회적 선(social good)은 과학적으로 찾아질 수 있다고 믿는 이론들은 모두 의사 결정 과정이 엘리트주의 형식으로 종결된다.

이런 결함들은 관료제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만약 관료제 권력은 민주주의의 강건함과 반비례한다는 막시스트의 이론이 맞는다면 그 민주주의의 이론적 기반과 실천적 제도 그리고 이 민주주의를 위한 가용한 인적 자원 역시 막시스트들이 반드시 관심을 둬야 할 문제가 아닐까?
결론
베버리안과 막시스트가 관료제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는 부분이 있다: 관료제 권력은 더 넓은 사회적 역사적 과정과 관료제가 수행하는 사회적 기능을 통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역사적 사회적 위치와 사회적 기능이 바로 관료조직의 구조 그리고 관료제 이데올로기와 이해관계의 특징을 결정하게 된다. 이 공통된 출발점으로부터 두 이론은 갈라진다.
베버리안의 분석을 따르면 관료제는 근대화이론 틀 속에서 그리고 대량 산업사회에서 그 조직적 기능 측면을 통해 이해가 가능하다. 관료제의 구조는 한편으로는 근대권력과 기술적 합리성의 기본 원칙들로부터 기인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와 국가 내 복잡한 노동분업을 조화시키기 위한 위계적 필요성에서 기인했다. 이 기본 원칙들과 위계적 필요성이 합해져서 한 사회 그룹으로서 관료제 권력의 근원이 되는 인상적인 조직 능력이 창출되었다. 이 권력은 그 사회적 기능의 필요성과 근대 사회의 기술적 합리성과 전문성이라는 폭넓은 공감대를 통해 정당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정당성은 관료제의 행정적 기술적 역할이 목표를 설정하고 가치를 결정하는 개인 지도자라는 대리인(agency)에 종속되어 스스로 지배적 위치가 되지 않을 때에만 유효하다. 그러나 이런 대리인의 관료제에 대한 지배는 사회적 삶의 여러 부분에 걸쳐 단일 관료제의 광범위한 집중 그리고 통치 권력을 가지게 될 개인 지도자들이 등장하는 경제와 선거 경쟁 구조의 부재 혹은 약화로 위협받게 된다.
막시스트 이론은 베버리안이 꼽은 관료제 특성 중 일부분을 수용한다. 특히, 막시스트는 근대 사회에서 노동의 기술적 분업의 필요성과 이 분업된 노동을 조화시킬 권위의 위계를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관료제의 권력과 관료제 통제의 어려움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막시스트는 주장한다. 그러면서 기술적 행정적 측면보다는 산업 그리고 산업화하여가는 사회의 계급 분화(class division) 그리고 잉여생산물 추출을 직접 통제하고 계급 충돌을 억제하는 관료제의 기능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관료제를 분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버리안의 ‘조직의 정치사회학(political sociology of organization)’보다는 ‘계급의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 of class)’이 필요하다는 것이 막시스트 입장이다.

이들에 의하면 관료제로 하여금 가공할만한 권력을 갖게 하는 구조와 역할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베버리안이 지적한 기술적 기능이 아니라 관료제의 사회적 기능과 이 관료제가 속한 계급 사회의 전반적 영향이다. 관료제 권력의 문제는 행정시스템의 광범위(extensive)한 ‘확산’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확보하는 데 필요한 권력의 강도 높은(intensive) ‘집중’의 문제다. 관료제 이데올로기는 이 권력의 사회적 기능 측면을 가리는 대신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 질서유지의 필요성 때문에, 기술적 필요성 때문에 혹은 효율성 때문이란 이유를 들어 관료제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따라서 베버리안의 이론은 관료제에 대한 비판적 측면에도 사회적 혹은 계급 분화의 요구를 마치 기술적 필요의 결과물인 것처럼 그래서 관료제로부터 노동의 해방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며 결과적으로 관료제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일견 이 두 이론은 명백히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일견 모순되는 이 이론들이 본질적으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사회과학에서 종종 발생하듯 부분적 시각을 마치 전반적 진리인 것처럼 과장된 것은 아닌지 여부다. 나의 대답은 두 이론은 확실히 상호 배척적이 아니라 보완적이며 따라서 우리는 각 이론이 간과하거나 부정한 것보다는 긍정해 준 것들에 보다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베버리안의 정치사회학은 직업적 행정의 조직력, 그 조직력의 광범위한 집중의 위험 그리고 과학적 세계관으로 지배되는 사회에서 기술적 합리성이 우월적 지위를 차지할 가능성을 규명했다. 그러나 이들의 조직의 정치사회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관료제 기능의 계급 측면과 이 계급 측면에서 기인한 관료제 권력의 강도 높은 집중을 외면했다. 막시스트의 정치경제학은 관료제의 계급통제 측면을 분석의 중심에 두었지만, 전문가의 지식으로 무장된 행정권력의 광범위한 집중의 위험성을 심각하게 과소평가했다.
관료제 권력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위해서 우리는 베버리안의 근대사회 이론 ‘그리고’ 계급 분화 이론 모두 필요하다: 조직의 정치사회학 그리고 계급의 정치경제학. 이 두 이론을 통해 우리는 관료제의 권력에 이바지하는 요소들이 단일 인과적이 아닌 다측면적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두 이론 모두 각각 특정 사회적 관점과 가치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강점과 한계를 노출할 수밖에 없는 선별적 개념을 채용한다: ‘리버럴 엘리트주의’와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그리고 각자의 이론을 보편적 세계관이라는 유일한 진리의 반열의 올려놓음으로써 상호 배타적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근대 서구의 문명화의 근원을 ‘개인주의’의 힘에서 찾는 베버리언의 이론은 ‘비관료적 엘리트’를 관료제 시대에 이 핵심 가치의 독점적 소지자로 인식한다. 그리고 이 엘리트들이 번창할 수 있는 환경 조건들,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시장(선거)에서의 경쟁, 을 모두의 자유를 위한 조건들로 규정한다. 그러나 이 베버리안 통찰의 유효성은 불확실하다. 20세기 역사는 강력한 지도자가 관료들에게 명확한 방향을 제시했을 때가 전반적 자유가 가장 위협받는 때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개인의 자유가 가장 잘 보장받은 때는 개인적 엘리트들이 노력할 때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집단적’ 방어 노력이 있을 때였다. 그러나 이런 집단적 민주주의가 엘리트들의 결정권과 경제적 특권을 위협했기 때문에 대중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집단적 방어 노력과 개인 자유와의 연결고리는 베버리안 이론에서 부인돼야 했으며 민주적 제도들은 단순히 지도자를 뽑기 위한 수단으로 전환되었다.
맑시즘은 한편 부루주아 시대의 개인주의적 가치가 아닌 미래 보전과 산업 사회의 추가 발전에 필요한 집단적 가치를 지향한다. 이 가치의 소지자로서 프롤레타리아는 사회 전반의 미래 이익을 대변한다고 이해한다. 결과적으로 맑시즘은 베버리안 이론과 비교하면 훨씬 풍부한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이 민주주의의 주체를 프롤레타리아에 국한함으로써 그리고 리버럴리즘의 물질적 그리고 과학적 성취는 인정하지만 리버럴리즘의 가치 - 가령 민주주의 자체에 필요한 개인의 권리와 권력의 제한에 관한 관심 - 에 대해서는 완전히 등을 돌림으로써 맑시즘은 프롤레타리에게마저도 그들이 약속한 사회적 해방을 건네줄 수 없었다. 베버리안 이론과 마찬가지로 맑시즘 관점 역시 관료제 권력의 문제를 온전히 짚어내고 납득할만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에 한계를 보여준다.
역자 맺음말
저자 David Beetham이 이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주장하고 싶은 부분은 이 챕터 뒤에 이어지는 마지막 챕터에 나오는 ‘Democratic Theory’이다. 이 자신의 이론을 통해서 저자는 관료제의 병폐를 극복할 대안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제시하는데 속독 형식으로 선별적으로 읽어본 느낌으로는 크게 매력을 못 느껴 저자의 노고에 대한 감사를 베버리안과 막시스트의 관료제 이론에 대한 비교,분석 선에서 그치고자 한다. 묵직한 주제인 만큼 관료제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은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보는 것이 순리라는 생각도 작용했다.
저자의 두 이론 비교 분석이 학계에서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나같이 관료제 공부 초보자에게는 두 이론의 윤곽을 감지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진짜 도움이 되려면 이 책의 내용에 뉴질랜드 현실을 대입시켜가며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나의 언어로 재서술하는 과정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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