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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최근 지인으로부터 초중고교 뉴질랜드 역사교육 의무화에 대한 설명회가 있으니 관심 있으면 참가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선약이 있어 참가는 못했지만, 과연 무슨 내용을 가르칠지 궁금해서 이후 관련 소식들을 팔로우업을 했다. 내년 2022년부터 뉴질랜드 초중고(Y0 ~ Y10)에서 뉴질랜드 역사(즉, 국사)가 ‘필수’과목이 된다는 발표는 사실 2019년에 이미 났고 올해 2021년 2월 3일부터 학계 및 일반 대중으로부터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커리큘럼 초안이 온라인으로 공개되었었는데 내가 몰랐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개인적으로 흥분할 정도로 기뻤으며 당연히 무척 기대하고 있다. 그동안 제신단 아던의 리더십을 가식적이고 쇼맨쉽에 가깝다고 보는 한편 노동당의 정책이 진보정당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친 자본가와 부자 성향을 보인다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이번 초중고 뉴질랜드 역사교육의 필수과목화 결정에 대해서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내게는 지난주에 발표한 경제적 불평등 해소와 아동 빈곤퇴치라는 명목임에도 제한된 의미를 가진 복지금액의 인상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역사적인 결정이라고 본다.
뉴질랜드 역사교육 의무화를 내가 환영하는 이유
지인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대뜸 물어본 게 가르칠 내용 중에 19세기 식민정부와 마오리 간 토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뉴질랜드 전쟁’이 포함되느냐는 것이었다. 왜냐면 일명 토지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 때문에 마오리는 자신들 소유 토지의 엄청난 부분을 뺏김과 동시에 자치권 역시 박탈당하면서 21세기 뉴질랜드의 모든 사회 지표에서 다른 그룹들에게 뒤처지는 열등 에스닉그룹으로 전락하였기 때문이다. 이 뉴질랜드 전쟁 관련해서는 이 블로그에 번역되어 포스팅된 ‘약속의 땅에서의 약탈 (Plunder in the Promised Land)’과 ‘Rangatiratanga (자주권), Kawanatanga(통치권) and the Constitution (헌법)’을 참조하기 바란다. 식민정부와 파케하 정착민의 마오리 토지약탈 덕분에 파케하들은 현재와 같은 뉴질랜드의 낙농/축산자본주의 틀을 갖추게 되었으며 반면 마오리는 경제적 빈곤계층으로 추락함과 동시에 원주민임에도 정체성과 자존감에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된다. 관련하여 다른 포스팅 ‘뉴질랜드의 자본주의는 어떻게 형성이 되었는가?’를 참조하기 바란다.
내가 박수를 보내고 싶은 이유 중 하나는 이런 추한 역사적 과정을 거친 파케하들의 부의 축적 그리고 그 결과 구축된 현재와 같은 파케하의 상류층 계급화가 작금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맞물려 파케하는 열심히 노력한 결과로 현재와 같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고 마오리들은 그런 노력이 부족해서 지금처럼 문제가 되는 에스닉 그룹으로 전락하였다는 그간 파케하들 - 어쩌면 마오리들 중에서도 많은 수가 이런 열등의식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 의 패권적 인식을 깨트리는 첫 단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풍요로운 땅의 빈곤(Poverty in a Land of Plenty)’을 참조하기 바란다. 저명한 역사가 James Belich는 파케하들의 이런 자기 조상의 추악한 과거에 대한 선택적 외면 혹은 역사적 기억장애를 ‘문화적 자가-전두엽 절제술(self-lobotomy)’ (전두엽을 제거함으로써 감정을 제거하는 시술)로 비유했는데 그는 그 원인 중 하나가 파케하들이 19세기 뉴질랜드 전쟁에 대해 제대로 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마침내 뉴질랜드 역사교육을 통해서 지금까지 많은 파케하 - 단순히 자녀뿐만 아니라 부모 세대도 포함 - 들이 당연스럽게 받아들인 자신들과 자신들 조상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마오리들 땅의 박탈을 통해 이루어진 ‘백인 특권(white previllage)’임을 깨닫게 되는 진실의 문이 열리는 순간으로 다가온다. 백인특권과 관련해서는 ‘파케하의 Ethnicity (Pakeha Ethnicity)’ 포스트를 참조하기 바란다.
민족(nation)에 대한 정의는 학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이들 정의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특성 중 하나는 ‘역사의 공유’다. 뉴질랜드는 지금도 민족의 형성(nation building)이 현재진행형인데 그 이유의 상당지분을 파케하와 마오리의 관계가 아직도 정리가 안 된 불안정한 상태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와이탕이 조약에 대한 계속되는 재해석 시도가 마오리 측으로부터 여전히 있는 상태고 오클랜드 공항 근처의 Ihumātao 땅의 사용에 대한 마오리의 저항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현실은 파케하(그리고 식민정부)와 마오리 간 과거사가 아직도 해소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뉴질랜드 역사가 Steve Watters가 지적한 것처럼 초중고에서 필수과목으로 자국의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나라가 몇 나라나 될까 궁금하다. 뉴질랜드는 왜 지금까지 초중고에서 자국의 역사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을까? 말로는 nation building, nation building 하면서 민족공동체 의식 형성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를 왜 가르치려 하지 않았을까? 답을 위한 복잡한 생각과 긴 시간은 필요 없을 것 같다.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패권을 잡고 있는 파케하가 가리고 싶은 게 많기 때문이었다. 특히 마오리 토지에 대한 약탈과 몰수, 이와 동반된 전쟁을 통한 마오리 자치권의 박탈 그리고 사회 전반에 걸쳐 전개되는 노골적인 인종차별은 파케하 ‘어른’들이 자기 자녀는 알기를 원하지 않는 치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뉴질랜드에서 자국의 역사는 소수의 관심 있는 학생이 대학교를 진학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공부했을 뿐 결코 장려되는 학습분야가 아니었으며 필수과목 선정은 언감생심이었다. 자신을 포함한 조상의 추악한 면을 보여주기 싫었던 파케하 학부모, 수업시간 학생들 사이 혹은 학생과 교사 간 감정적 논쟁으로 이어질 민감한 주제를 피하고 싶어했던 교사들 그리고 집권 기간, 별 잡음 없이 현 상태(status quo)를 유지하기 바랐랬던 그간 집권당의 이심전심 결과이기도 하다.
그 결과 뉴질랜드 학생들은 자국의 역사보다 다른 나라 역사를 공부하는 것을 더 편안해하고 선호한다고 오클랜드 Pakuranga College의 역사교사 Martyn Davison은 지적한다. 2005년 뉴질랜드 역사교사협회(New Zealand History Teachers’ Association:NZHTA)의 서베이에 의하면 뉴질랜드 학생들은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이나 베트남전쟁 같은 먼발치에 있는 역사적 사건들은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데에는 열성적이나 정작 이런 다양한 관점을 뉴질랜드의 역사적 사건에 적용하려는 것에 대해서는 불편해한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미성년 학생들은 역사를 공부하면서 ‘도덕’을 적용하려는 성향이 있어 누가 ‘good guy’가 누가 ‘bad guy’인지를 판별하려고 하는데 멀게는 19세기 살았던 조상일 수 있지만 가깝게는 자신의 조부모 심지어 부모가 불공평과 불평등의 주역일 수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뉴질랜드 역사교육 의무화에 대한 우려
이처럼 어쩌면 당연한 ‘국사’ 과목인데도 필수과목이 되지 못한 데에는 뉴질랜드의 ‘비틀린’ 역사가 존재했기 때문에 실행을 앞두고 뉴질랜드 사회, 특히 파케하,에는 각종 우려와 기대가 공존하고 있다. 파케하, 마오리, 중국인, 무슬림 학생이 섞여 있는 한 교실을 상상해보자. 파케하 학생은 19세기인 1881년 자신들의 토지 몰수에 평화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만든 마오리 정착마을 Parihaka에 1,600명의 무장경찰대/자원병으로 구성된 자신의 조상이 마을을 침공하여 마오리 거주민을 쫓아냄과 더불어 여자를 강간하여 임신까지 시켰다는 역사적 증거에 직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몇십 년 뒤, 20세기인 1905년에 백인우월주의자가 웰링톤 시 한복판에서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은퇴한 중국인 광부를 총으로 살해한 사건 그리고 백 년이 지난 21세기인 2019년,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무려 51명을 살해한 사람도 역시 자신과 같은 ‘하얀’ 피부색을 지극히 자랑스러워하는 또 다른 백인우월주의자라는 사실을 직면해야할 것이다.
또 1920년부터 1960년대에 오클랜드 남쪽 Pukekohe의 학교에서는 마오리 ‘급우’는 분리된 화장실을 써야 했으며 ‘더러운’ 마오리 학생이 쓰고 난 후에는 수영장 물을 빼고 새로운 물을 채워야 했기 때문에 마오리 학생은 주의 마지막 날인 금요일에만 수영장을 사용해야 했으며 마오리 가족에게는 렌트집을 빌려주지 않아 맨땅의 농장 헛간에서 생활해야 했기에 200명의 마오리 어린이들이 이와 관련된 질병으로 사망했다는 사실 역시 직면할 것이다. 20세기 초 자신의 조상이 뉴질랜드 최고의 대학 오클랜드 대학교에 다녔고 역시 20세기 후반 같은 대학에 다닌 증조할아버지가 했던 행동들이 찍힌 아래 사진들을 봐야 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사면초가와 같이 결코 ‘친백인’은 아닌 역사적 사실에 둘러싸인 ‘백인’ 학생은 이런 상황에 서 어떻게 표정관리를 해야 할까?
2022년부터 초중고에서 의무적으로 실행될 뉴질랜드 역사교육에 대해 Act 당은 히스테리컬하다시피 한 반응을 보였는데 당수 David Seymour는 자신이 받은 제보를 인용해서 다음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한다. “초등학교의 학생이 반 급우들 앞에 서서 자신의 ‘백인특권(white previlage)’를 인지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를 발표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면서 초중고, 특히 초등학교, 단계에서의 뉴질랜드 역사교육은 ‘인종차별적 교육(racialised education)’ - 이에 대해 뉴질랜드 역사교육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이는 인종차별적인 것이 아니라 ‘탈식민화(de-colonise)’ 교육이라고 반박한다 - 이며 ‘분열적(divisive)’이라고 비판한다. 이처럼 일부 뉴질랜드 정치인들과 대중들 - 대부분, 모두가 아니라면, 파케하 - 은 자신과 같이 기득권층이 된 ‘어른’들은 괜찮지만, 뉴질랜드 역사교육이 학교 필수과목으로 선택될 경우 ‘미래 파케하’들에게 닥칠 수 있는 정체성 혼란 내지 트라우마(trauma) 그리고 그들의 잠재적 경제적 기회손실을 우려한다.
개인의 선택과 능력을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자유 의지론자 집단인 David Seymour로 대표되는 Act 당의 이런 반응은 어쩌면 예상했던 반응일 것이다. 왜냐면 그동안 자신, 파케하,의 의지대로 움직여왔던 국가(state)가 뒤통수 치듯이 식민지 시절 자신들이 행한 추악한 진실을 들춰냄에 따라 자신들 그리고 자신들 조상의 성과에 대해 자랑스러워 할 자녀에게 불편하기 짝이 없는 변명의 시간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자신이 막연히 알고 있었든 혹은 관심이 없었기에 전혀 알지 못했던 자신의 파케하 조상이 마오리에 대해 행했던 ‘나쁜 짓’에 직면한 파케하 학생들은 충격과 함께 자신의 정체성과 자존감이 일시에 무너질 수 있는 위기에 직면하면서 이를 막기 위한 방어기제를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가 그런 일을 했냐고? 19세기 나랑 관계없는 백인들이 행한 일을 나에게 보여주는 이유가 뭔데?” 등. 처음으로 자신 조상들 - 가깝게는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 의 상상치 못할 추악함을 알게된 학생들은 큰 충격에 직면하면서 소위 ‘비탄의 5단계(Five stages of grief)’ - 부정(denial) → 분노(anger) →타협(bargaining) → 우울(depression) → 수용(acceptance) - 를 거쳐야 할지 모른다.
이런 학생- 대부분 파케하 학생일 것이다 - 들의 충격을 예상해서인지 대부분, 전부가 아니라면, 관련 학자들은 내년부터 시행될 뉴질랜드 역사교육에 앞서 교사들의 충분한 준비를 요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이번 커리큘럼의 초안에 대해 교육부로부터 공식적 리뷰를 요구받은 Royal Society of New Zealand의 전문가 어드바이스 패널도 리뷰 보고서를 통해 큰 환영과 더불어 이 같은 우려를 표명했다. “History can hurt (역사는 상처를 줄 수 있다)”. 왜냐면 과거 사건에 대한 발견 그리고 이 사건들을 사람들과 장소에 연계시키는 것은 현재 삶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역사교육이 학생들로 하여금 더 깊은 이해와 협력으로 이끌 수도 있지만, 상처와 분열로 이끌 수도 있기 때문에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라는 교수 기법(pedaoggogical challenge)의 과제를 현장 역사교사에게 안겨 준다. 뉴질랜드 역사를 배운다면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어두운 면 - 가령, 살육, 박해, 약탈, 몰수 등과 같은 단어로 상징되는 - 을 학생들로 하여금 직시하게 하는 동시에 그들이 다치지 않도록 또 서로 반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수적인 만큼 NZHTA 회장 Graeme Ball 말처럼 역사교사는 훈련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교수 기법 관련하여 오클랜드 Pakuranga College의 역사교사 Martyn Davison은 유용한 팁을 전달한다. 그동안 부모도 학교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탓에 마오리 박해의 역사를 처음 ‘구체적으로’ 접한 파케하 학생들은 기존 자신의 지식과 선입견을 흔드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혼란에 빠진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학생들은 ‘history is merely a matter of opinion…(역사는 단지 해석의 문제야)’라면서 역사를 주관의 세계로 밀어 넣으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역사교사는 특정 사건에 대해 엄선된 핵심 증거를 학생에게 보여주면서 학생으로 하여금 그 증거에 반박 혹은 동조하는 추가 자료를 찾아볼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런 교수 기법을 활용할 경우 Act 당수 David Seymour가 우려하는 것 같은 주입식 교육이란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자국 역사교육의 긍정적 효과와 기대
위 같은 우려 상황이 분명 있지만, 자국의 과거에 대한 ‘솔직한’ 교육은 이런 우려를 거뜬히 뛰어넘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자신들의 과거사에 대한 준엄하고 단호한 비판의 모범사례로 손꼽히는 독일의 예를 참조할 수 있는데 1995년 뉴욕타임스의 기사는 이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독일도 처음부터 자기의 과거에 대해 치열하게 솔직한 것은 아니었다. 서독은 2차 대전 직후 학교 역사책에서 과거에 대한 묘사는 억제되었는데 이는 이 역사책들이 과거 나치 시대의 교사들에 의해서 쓰였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이나 뉴질랜드 더 나아가 비슷하게 식민지에서 벗어난 신생독립국의 비슷한 행적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런 은폐 시도의 기간을 거쳐 독일은 대낮 천지에 알몸을 드러내듯 자아비판에 나서게 되면서 독일의 모든 학교에서 모든 학생은 의무적으로 과거 자신의 할아버지 혹은 증조할아버지가 선거로 뽑은 나치정부가 6백만 명의 유태인을 잔인하게 학살한 역사를 배워야만 한다. 하지만 이들 학생이 배운 것은 자신의 독일인 정체성에 대한 창피함(shame)이 아니다. 물론 이 학생들이 자신의 (증)조부모에게 당시 나치 정권을 지지하였었느냐고 물어보면 그들로부터 답변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홀로코스트란 역사적 비극은 한 개인이 죄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 아니라 당시 유럽과 독일의 시대적 상황과 함께 발생한 과거란 점도 같이 배우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학생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홀로코스트에 대해 난 내가 책임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한다면 나는 책임을 져야겠죠.”
이번 초중고에서의 ‘뉴질랜드’ 역사교육 실행은 결코 19세기와 20세기에 마오리를 상대로 한 파케하의 인종차별적 행위에 대해 ‘살아있는’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줄 알아라’라고 질타하거나 ‘개인적’ 차원의 대리 사과를 기대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이번 역사교육의 목적은 과거 파케하 조상이 당시의 사회적 시대적 상황 속에서 행했던 인종차별 행위들이 21세기인 지금도 표현 방식을 달리하지만, 여전히 존속하고 있으므로 이런 행위들을 가능하게 했던 ‘시스템’이 지금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 시스템에 대해 19세기 과거사와 연계시키면서 입체적 이해를 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번 교육의 목적은 파케하 학생들에게 평소 자랑스러워 하던 자신의 조상에 대해 ‘네 조상의 죄를 이제야 알겠니? 너와 네 가족이 지금 누리고 있는 편안한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마오리의 눈물과 피 위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고 부끄러워할 줄 알아라” 가 ‘아니다’.
이번 역사교육은 현 뉴질랜드 사회구성원 ‘모두’의 미래를 위한 과거 돌아보기다. 역사의 무대에 가해의 주역처럼 등장하는 파케하뿐만 아니라 가장 큰 피해자로 등장하는 마오리, 그리고 더 나아가 과거 아예 투명인간처럼 취급받았던 파케하도 마오리도 아닌 다른 에스닉 그룹들 - 가령 중국인과 인도인들 - 도 ‘그때는 그랬지!’ 공감하면서 역사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같이’ 보는 것이다. 가해자의 후손도 피해자의 후손도 ‘왜 우리 조상은 저렇게 행동했지? 왜 우리 조상들은 저렇게 당했어야 했지?’라는 질문을 서로 자유로이 던지며 그 답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후손이 같이’ 찾는 작업이다. 이렇게 같이 답을 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때 과거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존속하는 불평등과 불공평한 사회 현상에 대한 시스템적 이해 그리고 그에 대한 해결을 위해 ‘같이’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NZHTA 회장 Graeme Ball의 표현대로 역사적 뿌리를 가진 오늘날의 이슈에 대해 모든 뉴질랜더들이 ‘informed judgement(관련 정보를 충분히 가지고 내리는 제대로 된 판단)’ 능력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누구도 가르치지 않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가해와 피해의 실상을 아는 것은 물론 이번 역사교육의 주 목적 중 하나다. ‘과거 마오리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대’ 정도로 막연하고 중립적으로 포장된 과거 사건들이 사실은 아주 잔인한 실체를 가지고 있었으며 마오리 개인/가족에게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음을 ‘체감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같은 실체폭로 위주의 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또 마오리가 부당하게 피해를 당하였다는 내용이겠지’라는 선입견 속에서 역사교육은 역시 지루하다는 인식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다.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와 연결된 사건이 아니라 대상(object)으로만 존재하는 사건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역사교육의 다른 그리고 어쩌면 더욱 본질적인 목적은 과거에 저질러졌던 일부 파케하와 식민정부의 행위가 평범한 뉴질랜드 파케하 대중에 의해 어떻게 수용되고 대를 이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반복되어 주입식으로 각인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과정의 노출을 통해 2022년의 학생들은 19세기의 역사적 사건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공동체에 어떻게 여전히 살아 있는가를 확인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당연히 여겨지는 자신의 지금 일상이 19세기부터 시작된 인종차별과 불공평 심지어 약탈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더나아가 이후 이런 것들에 대해 언급을 아예 안 했거나 유체이탈 화법처럼 그저 역사의 흐름이라는 제3자적 힘을 인용하기도 했을 자신의 조부모 혹은 부모의 입장마저 헤아리는 과정이 포함될 것이다. 이런 과정에 대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 학생이라면 과거는 과거이고 가해자는 조상이고 자신은 무관하다는 입장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거창한 사회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아도 자신의 안락함이 옆자리 마오리 학우의 불우한 가족사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음을 역사교육을 통해서 충분히 연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더 나아가 뉴질랜드는 파케하와 마오리 간 경제적 사회적 격차가 벌어지면서 이 갭을 줄이기 위한 사회적 비용이 갈수록 증가하는 상황이다. 문제는 이 그룹 간 격차의 원인과 해소책에 대해 파케하와 마오리 그룹 간 인식의 격차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격차를 줄이기 위한 마오리의 지원 정책에 대해 일부 파케하는 ‘퍼주기’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아니, 과거에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하지만 언제까지 퍼줘야 하는겨?’ 식의 반응이 그것이다. 마오리 입장에서도 자신들의 조상이 당한 ‘객관적’ 피해와 억울함을 파케하가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아 피해의식이 쌓이지만 파케하가 이 문제를 대놓고 거론하지 않기에 먼저 문제 제기는 못하지만 속으로는 꿍한 상황이다. 이렇듯 자칫 인종차별 프레임으로 쉽게 넘어갈 수 있기에 파케하는 파케하 나름대로 터부시하면서 마오리의 과거 박해 역사와 현재의 ‘마오리 특혜’를 공적 공간에서 논하는 것을 꺼리는 현실이다.
하지만 학교라는 ‘공적 공간’에서는 ‘학문적 탐구’라는 명목으로 비록 어린이와 청소년기의 학생이지만, 아니 어쩌면 ‘학생이기에’ 객관적 증거에 기반을 둔 역사적 사실을 직시함과 동시에 이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자신의 조상을 통해 자신의 ‘에스닉 정체성’을 담담하게 조감도적으로 바라볼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또 역시 같은 상황에서 자신의 에스닉 정체성을 조감도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반대편 에스닉 그룹 학생과 주관과 객관을 섞어가면서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기를 우리는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정 사회적 지위와 틀 속에서 존재하는 기성세대와 달리 아직 잠재성과 가능성으로 특징지어지는 학생들은 소위 계급장 떼고 알몸으로 맞짱 토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런 토론을 통해 ‘하, 듣고 보니 네 입장도 이해가 간다’라는 말이 상대방 입에서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적 균형은 결국 사회적 그룹 간 ‘힘’의 균형이지만 이런 긴장감 높은 균형보다는 이렇게 대화를 통한 힘의 균형이 바로 위정자들이 겨냥하는 nation building을 통한 사회적 융합(social cohesion)의 이상적 형식일 것이다.
이런 공개적 민낯 토론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결과물 중 하나는 한 에스닉 그룹이 다른 에스닉 그룹을 타자(other)로 바라보지 않고 우리(we)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는 단초가 제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nation은 많은 이질적 others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we가 존재하는 것이다. 마오리에게 친절하고 동정적인 파케하라도 그 출발은 마오리를 불쌍한 other로 바라보는 온정주의(pertanalism)일 수 있는데 역사교육 시간을 통해 다양한 에스닉 그룹 - 더 나아가 다양한 배경을 가진 그룹을 포함해서 - 은 서로 조감도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서로의 존재를 숲에 존재하는 각각의 개별적 나무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조감도적 인식을 통해 파케하 학생이 자신의 ‘백색(whiteness)’이 더는 ‘살색’이라는 default가 아닌 흑색,황색 등 여러 피부색 중의 하나로 인지하는 ‘eye-opening’의 시간을 갖게 된다면 이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진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현재도 이어지는 불평등과 불공평의 두 당사자가 이 시스템 창출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자신들 조상의 행적에 대해 ‘같이’ 돌아보는 작업이 없을 때 발생할 ‘치유되지 않는 상처’는 뉴질랜드뿐만 아니다. 미국은 자신의 흑인 노예 역사에 대한 뼈를 깎는 성찰의 부재 탓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오늘날도 여전히 흑인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과 폭력에 몸살을 앓고 있다.
미국 흑인 문제를 통해 본 역사교육 부재의 결과
2019년의 워싱턴포스트의 취재기사는 최근의 BLM운동에서 보이는 미국 백인사회의 흑인을 향한 인종차별을 불편하다 못해 외면하고 싶을 정도의 고통스러운 실체를 가진 흑인 노예 역사를 아예 외면하거나 어떻게든 합리화와 정당성으로 미화하려고 했던 백인 기득권층으로부터 그 원인을 찾는다. 시기적으로 비슷한 1863년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선언( Emancipation Proclamation)과 1840년의 뉴질랜드 와이탕이 조약(Treaty of Waitangi)을 따르면 이후 미국 흑인과 뉴질랜드 마오리는 백인들과 평등하게까지는 아니어도 유사 동등한 사회적 경제적 삶을 살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미국의 흑인도 뉴질랜드 마오리도 과거와 질적인 차이를 보여주지 못한 채 여전히 차별적 삶을 살고 있으며 두 그룹 다 수입과 부에서 백인과 커다란 격차를 보이고 또 사법제도에서도 불균형적으로 높은 형사처분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은 지금까지의 뉴질랜드처럼 전국 단위의 통일된 역사교과서와 커리큘럼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주 혹은 학교의 재량권으로 학교에서 실시할 미국 역사교육의 내용을 결정한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미국 공립학교에서 노예제에 관한 교육은 낙제점에 가까울 정도로 교사도 꺼리고 교과서 내용도 겉핥기 식으로 구성되었을 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 죄책감을 유발하고 외면하고 싶고 부정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불과 4년 전 미국 교과서도 성인남녀는 물론 어린이까지 쇠사슬로 묶어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미국으로 강제로 끌고 온 것을 ‘노동자(workers)를 아프리카로부터 들여왔다’로 표현하고 2019년에는 노예경매(auction) 재현이 학생들이 노예제를 배울 수 있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교사가 있을 정도다. 또 1970년대 버지니아 주의 교과서는 미국 노예제가 ‘니그로(Negroes)에게 아프리카에서 부족 간 싸움하고 있을 때보다 나은 문명화된 삶을 제공해주었다고 서술할 정도였다. 미국 백인들이 흑인 노예의 실상에 대해 처음으로 접했던 것은 학교도 교과서도 아닌 한국에서도 방영되었던 1977년 티비 미니시리즈 ‘뿌리(Roots)’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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