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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민주사회주의자의 필수 덕목, '동료애(fellowship)' - 민주사회주의 이해하기 (9)

김 무인 2021. 7. 24.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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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머리말

이번 에세이의 저자 Geoffrey Kurtz는 뉴욕에 있는 Borough of Manhattan Community College(BMCC)에서 정치이론과 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교수로서 그에 대한 평가가 궁금해서 RMP(Rate My Professors)을 검색해보니 4.3이다. 평균 rate가 얼마인지 모르지만, 절대적 평가 기준으로서는 상당히 높은 점수다.

이번 그의 에세이는 이전 에세이와 달리 민주사회주의의 이론- 저자의 표현을 따르면 청사진(blueprint) 혹은 프로그램(program) -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이 이론과 신념을 따르는 사회주의자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접근 방식 그리고 일상에서 이를 실천하는 방식을 다룬다.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롭게 읽은 짧은 에세이다. 이는 단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주의자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의 관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자 사이에서(Between Socialism and Socialists)

Geoffrey Kurtz

1995년 어느 여름날, 친구 몇 명과 나는 미국민주사회주의자 청년 계급( Democratic Socialists of America Youth Section:DSA-YS)으로 불리는 컨퍼런스에 참석차 플로리다 대학에서 시카고까지 20시간 동안 덜컹거리는 차를 몰고 갔다. 그날 저녁 도착해서 시카고 동지들의 아파트 현관 입구에서 마셨던 차가운 맥주를 기억한다. 비록 자의식적 당황스러움이 있었지만, 나의 동지(comrades)라 불리는 사람들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때 DSA-YS 컨퍼런스에서 만났던 사람 중 몇 명과는 지금도 여전히 연락하고 지낸다. 일부는 기자 혹은 음악가 혹은 (나처럼)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노조, 지역사회 조직 혹은 민주당의 산하 조직의 직원들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 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정기적으로 거리 유세, 전화 혹은 방문 유세에 참여한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나의 오랜 동지들은 중도좌파 정치권에서 실용적인 일을 찾았다. 내가 알기로 그들 대부분은 여전히 자신을 사회주의자(socialists)로 자칭하고 있다. 그들의 정치 원칙과 일상 활동 간에 어떤 관계가 있을까? 다른 말로,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자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사회주의자들은 이 질문에 두 가지 방법으로 대답했다. 한 가지 대답은 사회주의는 우리가 아직 가져보지 못한, 하지만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사회의 청사진이라는 것이다. 이 대답은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활동을 사회주의를 향한 수단(means)으로 간주한다; 원칙적으로 이 수단적 활동들은 매우 다른 수단적 활동들로 대체될 수 있으며 사회주의 프로그램 실현의 실효성에 따라 평가될 것이다.

사회주의를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생각하는 것은 매력적일 수 있다. 건축가는 계획부터 시작한다. 사회의 모습을 바꾸려는 사람들도 똑같이 해야 하지 않을까? 프로그램은 목적의 명확성과 비전의 강력함을 전달하는데 이는 프로그램의 매력적 특성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회주의를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간주하는 것의 문제는 이 프로그램이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 나거나 혹은 그 타당성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 승리가 연기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내가 헌신한 프로그램이 결국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면 나에게 영감을 주었던 그 모든 자신감은 증발할 것이다. 성공 혹은 성공의 가능성에 의존하는 자신감은 그것이 가장 필요할 때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자신감이 아니다.

설사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지속한다 하더라도 다른 문제가 있다. 만약 내가 사회주의를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본다면 나는 특정 사상에 충실한 정치적 태도를 고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사상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찾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른 말로, 나의 인간관계는 그 사상의 실현을 위한 부차적 고려 사항, 즉 도구(instruments)가 된다.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면 나는 오직 내가 실현되기를 원하는 프로그램을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 특정인들과의 정치적 유대관계를 소중하게 여길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이 내 프로그램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나는 그들을 기껏해야 개종자(converts-in-waiting)로 취급하고, 많은 경우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것도 마다치 않을 것이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우리는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자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두 번째 방법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사회주의가 사회주의자의 정치적 활동에 형태(shape)와 힘을 부여하는 헌신과 가치의 집합체(cluster), 즉 기풍(ethos)이라고 주장이다. 만약 우리가 사회주의를 기풍으로 본다면 우리는 노동조합, 지역 사회단체 그리고 협력 단체들의 조직, 연합 구성 그리고 시민교육 행위들(practices) 안에서, 혹은 이들을 통해서, 지금 사회주의를 보거나 느낄 수 있다. 이런 행위들이 정확히 사회주의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행위들 안에서 혹은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한 감각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분명 사회주의자는 제도적 변화를 원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기풍은 이 제도적 변화를 사회주의 행위들 안에 내재한 가치들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적합한 수단이 필요한 목적(ends)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기풍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이제 정치 생활에서 인지할 수 있는 하나의 특질(quality) 혹은 차원(dimension)이다.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자의 행위들로 암시되는 그 무엇인 것이다.

 

“Internationale”

이런 사고방식이 누군가에게는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19세기 사회주의의 사람을 듬뿍 받았던 국가 “Internationale”은 세계를 형성하고 지배하고 싶은 충동을 표현했다: “과거를 깨끗이 정리해라… 세상은 아래부터 위로 바뀔 것이다… 쇠가 뜨거울 때 쳐라!” “Internationale”은 프로그램으로서의 사회주의의 전형적 프로메테우스적(Promethean) 특성(제우스로 상징되는 기존 질서에 대항한 원조 혁명가로서 프로메테우스를 지칭:역자 주)을 가지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하나의 기풍으로서 사회주의는 세계를 지배하라고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 머물 곳을 찾을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기풍으로서 사회주의의 감성은 예언자 예레미야로부터 들은 것과 비슷하다: 네가 머무는 도시의 선(the good)을 찾아라. 이런 종류의 사회주의는 성공에 대한 전망이 아니라 헌신(commitment)의 깊이에 의존한다. 기풍으로서 사회주의가 패배보다 오래가는 자신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이유이다.

기풍으로서 사회주의를 인식하는 것은 프로그램으로서의 사회주의의 우선순위를 뒤집고 변화를 위한 프로그램을 정치적 관계 육성을 위한 잠재적으로 유용한 수단으로 간주한다는 의미이다. 프로그램으로 시작해서 그 프로그램을 지지할 것 같은 정도에 따라 특정 사람들과의 정치적 관계 형성 여부를 판단하는 대신, 기풍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직장 혹은 이웃 혹은 다른 공공 영역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의 경험 공유 관계로 시작한다. 그런 다음, 프로그램 혹은 정책 아이디어 혹은 제도 비전 등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사람들을 함께 끌어모으고, 이들을 집단행동으로 이끌고 그리고 더욱 포용적 혹은 포괄적 공동체와의 정치적 관계를 긴밀히 하는데 얼마나 유용한지에 따라 판단한다. 프로그램으로서 사회주의는 정치적 관계를 사상을 위해 봉사하는 위치에 놓지만, 기풍으로서 사회주의에서는 프로그램과 사상은 정치적 관계를 위해 존재한다.

한 일화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해 줄 것이다. 민주사회주의 저널 Dissent의 1972년 겨울 판을 위해 편집진의 Irving Howe와 Emanuel Geltman은 오랜 노동조합원인 Brendan Sexton과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진행자들은 1930년대에 성년이 된 Sexton을 비롯한 많은 다른 노조 조직가와 지도자들이 사회당원이었다는 사실에 관심이 있었다. Howe가 Sexton에게 물었다: “사회주의자였다는 것이 당신이 시작한 일에 영향을 미쳤습니까? 도움이 되었나요 아니며 방해가 되었나요?”

 

민주사회주의 저널  Dissent

 

Sexton은 대답한다: “사회주의에 이념적으로 헌신했던 사람들은 열심히 일할 준비가 되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후 나는 내 인생에서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루에 열두 시간, 열네 시간, 열여섯 시간 - 헌신으로 이것이 가능했습니다. 물론 젊기도 했었지만, 이상(ideal)에 대한 헌신 그리고 이 노조 운동이 우리가 꿈꾸는 이상에 우리를 더 가깝게 데려다줄 것이라는 감정도 있었습니다. [산업별 노동조합 회의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CIO)]을 조직할 때 나는 진짜로 내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믿음에 아무런 의심이 없었습니다. 유일한 의심은 언제 그리고 어떻게 그 세상에 도달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산업별 노동조합 회의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CIO)

 

여기에서 우리는 Sexton이 사회주의를 우리가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목적지, 즉 프로그램으로 보면서 그의 노조 경력을 시작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마음을 바꾼 것 같다. (아마 그의 정치적 경험은 미래에 대한 전망과 관련하여 그에게 겸손(modesty)을 가르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새 세상”의 도래에 관해 35년 전에 그가 가졌던 자신감에 당혹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이어서 자신의 사회주의적 헌신이 조직가로서 자신이 노조원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말했다: “나는 그들의 권리가 보장되고 참여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진정으로 노동자들은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노동자들에게 파업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여기 대안이 있고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노동자들에게 파업하라고 촉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회주의자에게 해당하는 상황이 아니며 또 사회주의자에게만 해당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행동은 사회주의자로서 나의 감정의 결과로써 나온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희생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나에게 없다고 느꼈습니다 - 그것은 그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할 부분입니다.”

Sexton이 묘사했듯이 노조에서 사회주의자의 역할은 직장 내 결정에서 노동자들이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것은 목표 더 나아가(Sexton이 강조하듯) 전술에 대한 처방과는 사뭇 다르다. 평상시라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노동자들로 하여금 민주적 참여를 촉진하는 것이 초점이다. 다른 말로, 사회주의자 노동조합원은 무엇보다도 좋은 노동조합원이 되어야 한다.

Sexton은 바람직한 것은 특정 조직이 아니라 민주적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의 Howe와 Geltman과의 대화는 무엇이 “좋은” 노조인지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드러낸다. 좋은 조합원은 서로를 위해 단호히 헌신하고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 좋은 노조는 “사람들을 참여시켜 이들로 하여금 “지역공동체” 내 “지역 노조를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이용하도록 노력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 결속력은 인종을 초월하며 광범위하다. 좋은 노조는 연금이나 고충처리와 같은 “제한된 목표”를 달성하는 동시에 덜 가시적인 목표 -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그들이 아이디어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설득하기 위한 그리고 그들의 필요를 분명히 표현하기 위한” -를 지향한다.

Sexton의 좋은 노동조합에 대한 비전은 사회주의 프로그램에 제대로 들어맞지 않는다. 우선, 그가 언급했듯이 사회주의자가 아닌 노조원도 때로는 좋은 노조 건설을 위해 일을 한다. 또, 일부 사회주의자는 노조 활동에 다르게, 보다 실용적으로 혹은 규범적으로 접근한다. 만약 그의 노조활동에 특별히 사회주의적 특성이 있었다면, 그것은 좋은 노조 활동이란 목표와 별 상관이 없다고 그는 말한다. 차라리, 그 사회주의적 특성은 좋은 노조활동이 가지는 느낌 혹은 성격 - 노조활동의 이질적 요소들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가치와 도덕적 추진력 - 과 관련이 있다. 그를 사회주의자로 특징 지우는 것은 프로그램과의 연관보다는 기풍에 보다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Dissent 편집자, Irving Howe

“당신은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이 노조원이 되는 것에 특별한 유리함(edge)과 치열함 (intensity)을 준다고 말하고 있다”고 Howe는 상기시킨다. Sexton은 이에 동의하며 그와 그의 친구들이 노조원으로서 “특별한 임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특별한 치열함 그리고 특별한 임무: Howe와 Sexton은 일부 사람이 특정 활동을 하는 방식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독특한 색채 - 다른 가치 혹은 감성을 가진 사람들이 활동할 때 이 활동들이 가진 색채와 다른 -를 전달할 방법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조 혹은 공동체를 조직하는 일은 그 자체만의 역학 관계, 그 자체만의 내부 법칙과 적합 기술(fitting techniques)을 가지고 있다. 그런 종류의 일을 잘하는 사람은 일의 본질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일을 할 수 있는 정신(spirit)은 하나 이상이 있다.

이 특별한 치열함에 대해 사회주의자는 무엇인가? 인터뷰 도중 아무도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Dissent의 같은 겨울 판을 통해 Howe는 답을 제시한다. 막시스트의 개념에 매료된 소위 좌파 지식인은 “노동 계급을 구성하는 개별적 인간들의 실제 경험에 대한 관심 혹은 공감”을 결여할 수 있다고 그는 쓴다. 현실 인간들에 대한 공감은 진정으로 급진적 정치의 원천이라고 Howe는 주장한다. 우리는 또 이것이 제한된 정치의 근원임을 주목해야 한다. 사람들의 개별성(discreteness)은 중요하다: 나는 오직 제한된 범주의 사람들에게만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잘 알 수 있다. 원칙적으로, 모든 사람은 동등한 가치와 존엄성을 가질 자격이 있지만 나에게 있어 그 존엄성에 대한 열망이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은 나와 가까운 사람들뿐이다.

모든 진정한 공통점(commonality)은 특별하다(particular). 따라서 사회성(sociality)에 뿌리를 둔 정치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사회성의 경험으로 암시되는 것에 뿌리를 둔 정치는 단순 이데올로기 정치가 가지지 못하는 치열함(intensity)을 가질 것이다. 우리의 사회적 삶의 범위에 의해 정해진 한계, 별개의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공적 공간의 한계는 깊이 느껴지는 사회성의 기반이다. 그리고 깊이 느껴지는 사회성은 Sexton이 사회주의 정치의 열망으로 보는 것 - 사람들이 자율적이 되도록 돕는 것 -에 가장 적합한 설정이다.

Sexton의 좋은 노조에 대한 비전과 Howe의 개별 인간에 대한 공감의 언급은 14년 전 Dissent에 독일인 이민자 사회주의자 Henry Pachter가 그의 에세이를 통해 아름답게 표현했던 그의 생각을 반영한다: “우리는 사회주의의 원래 의미 - socii, 동료 -로 돌아갈 수 있을까?” 사회주의의 최고 유산은 공통 경험에 기반을 둔 상호 존중의 동료애(fellowship)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반복되는 재발견이다. 동료애는 Howe가 말한 특별한 치열함(intensity)을 만든다. Sexton의 노동운동에 대한 그의 설명에는 동료애 정신이 깃들어 있다; 이 동료애 정신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직장 내 결정과 그들 공동체의 폭넓은 문제에 대한 참여를 장려하고, 집단행동과 상호지지의 새로운 입장을 향한 새 시각을 구축하려는 그의 헌신에서 잘 드러난다.

 

1970년대 말 Henry Pachter

올바르게 이해된 사회주의 프로그램은 같은 정신을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동료애의 경험을 더 큰 스크린에 투사하려고 할 때 우리는 굳건한 복지국가 혹은 직장 민주주의 혹은 공공 기업 혹은 공공 정책의 참여 메커니즘을 구상할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사회주의자들 간 동료애, 비록 자주 너무 편협하고 이데올로기에 물들었지만, 도 동료애 느낌에 유용한 교육 그리고 더 깊고 풍부한 동료애의 예고편과 이를 향한 추진력이 될 수 있다. 동료애는 사회주의 전통보다 훨씬 오래된 개념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표현을 찾는 동료애에 대한 갈망(hunger)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갈망은 사회주의자들에게 민주적 삶의 실천에 임할 수 있는 치열함(intensity)과 동기부여 기풍을 제공한다.

사회주의자들이 그들의 사회주의를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동료애 기풍이다.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자 간의 이 관계가 본질상 민주적이기 때문이다: 동료애에 대한 갈망은 인간관계에 대한 관심을 훈련하고 사회주의자들의 헌신에 아이디어와 프로그램을 제공해 준다. 왜냐하면, 기풍으로서 사회주의가 희망의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기풍으로서 사회주의는 패배뿐만 아니라 승리 상황에서도 사회주의자들의 일상적 정치활동을 지향하게 한다. 사회주의 기풍은 메마른 현대 정치의 갈증 해소에 대한 갈망이다. 그리고 이 사회주의 기풍의 핵심인 동료애가 자주성(autonomy) 그리고 더 충만한 인간성(personhood)을 지향한다면 우리는 그 반대도 사실임을 기억해야 한다. 자주성은 그것이 동료애를 지향할 때 적절한 목적을 발견한다 - 정치적 삶 내에서 그리고 희망적으로 뛰어넘는 동료애.


역자 후기

목적(ends)으로서 그리고 그 목적의 구체적 형식인 프로그램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여러 면에서 종말론적 종교 - 많은 경우 천박한 자본주의에 순응하는 문화적 상품 - 와 비슷하다. 가령, 첫째, ‘지옥 같은’ 현세가 하루빨리 종식되고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는 마음. 둘째, 이제나저제나 오기를 기다리지만 오지 않는 ‘그날’ 때문에 지쳐가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현실에서 실천하기는커녕, 아예 뒤편에 젖혀둔 채 구원의 대상인 비종교인들처럼, 일부는 이들보다 훨씬 더, 속물화되어가는 모습. 셋째, 관심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종교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사람은 바쁜데 붙잡고 전단을 건네주며 침을 튀기며 불신 지옥을 외치는 사람들보다는 텅 빈 넓은 주차장에서도 뒤에 올 사람들을 생각해서 교회 건물에서 가능한 먼 쪽에 주차하는 사람들이라는 점.

이처럼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주변인 그리고 주변 일상생활의 가치를 무시한 채, 그런 것들은 자신의 원대하고 고귀한 신념과는 별개의 존재 혹은 영역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떠올릴 수 있는 유명한 성경 구절이 있다.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이 구절의 메시지는 이번 에세이의 메시지와 정확히 일치한다. 아무리 크게 새벽마다 ‘믿습니다’를 외쳐도 일상에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종교인은 그분이 보기엔 ‘유익이 없는’ 사람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눈에 불을 켜고 자본주의자들의 간악함을 ‘아직’ 깨닫지 못한 우매한 노동자들의 멱살을 잡고서라도 끌고 가야겠다는 태도를 가진 사회주의자들은 고립되고 경원시 되거나 설사 성공적으로 된다 하더라도 20세기 초 러시아 무정부 사회주의자들처럼 ‘인민’은 사라지고 ‘인민을 지향하는’ 사회주의자들만 남아 ‘인민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닌 ‘그들만을 위한’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런 입만 살은 종교인 혹은 사회주의자가 21세기에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생존력을 생각할 때 우리는 역사가 쉬이 사회적 변혁을 허락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은 미래를 꿈꾸는 이들은 현재의 일상을 공유하는 내 주변인들에게 ‘사회주의적 인간’ - 저자의 표현을 인용하면 기풍으로서 사회주의를 인식하는 인간 -으로서 모범을 몸으로 보여주길 저자는 기대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궁극적 목표는 여전히 자신의 머릿속에 간직하되 섣부르게, 어쩌면 절대로, 밖으로 꺼내지 않고 주변인들에게 현실적으로 그들이 자기 삶을 자율적으로 결정하고 개척해 나아갈 수 있는 노동자와 이웃이 되도록 돕는데 헌신하는 인간이 저자가 기대하는 사회주의를 기풍으로 여기는 사회주의자일 것이다. 나의 표현으로 옮기자면, 21세기 민주사회주의를 꿈꾸는 자들은 사회주의자(Socialist)가 되기보다는 ‘사회주의적(Socialistic)’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입으로만 살아있는 종교인(religionist)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몸으로 실천하는 ‘종교적(religious)’ 인간이 필요한 것처럼.

이런 ‘인민 속으로’가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택하는 전술적 차원의 행동이 아님을 저자는 글 후반에 명확히 제시한다. 키워드는 ‘동료애(fellowship)’이다. 사회주의자는 어린아이 사탕 주듯이 노동자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그들을 ‘돕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자발적으로 들기 때문에 돕는 것이다. 사회주의 슬로건 중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 중 하나가 연대(solidarity)인데 이 연대는 단순히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전술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주의가 탄생한 자궁 같은 개념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저자가 지적했듯이, 동료애는 사회주의 이전부터 존재했던 개념이고 19세기 이후 사회주의 운동은 이 동료애를 구현하기 위한 시행과 착오의 역사인 것이다.

어쩌면 못 배우고 땀 냄새나는 노동자들 혹은/그리고 이웃에 대해 이런 동료애를 ‘느끼지’ 못하는 자는 사회주의 운동가가 되지 말고 사회주의 ‘이론가’로 자기 역할을 제한하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