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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머리말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가 동명의 소설/정치 철학서를 통해 만들어 낸 용어 ‘유토피아(Utopia)’는 그리스어의 ou(없다)와 topos(장소)를 조합한 말로서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이라고 한다. 토머스 모어(Thomas More)가 이 책을 쓴 때가 1516년이니까 유럽은 아직 중세 봉건의 터널을 지나는 과정이지만 그 터널 끝에서 자본주의라는 빛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시점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책을 읽은 적이 없는데 위키피디아에 간략하게 소개된 내용을 보니 현재 내가 탐구하는 민주사회주의가 추구하는 미래 사회주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가령, 사회구성원은 하루 6시간만 노동을 해도 생산물이 충분한데 이는 젠더와 계급 관계없이 그 사회는 개로(皆勞)(이 글을 준비하면서 평생 처음 들은 단어인데 모든 사람이 일함을 의미) 사회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화폐도 없고 일을 마친 사람들은 문화센터로 가 자신의 개발에 시간을 투자할 수 있다.
한편, 토머스 모어는 왜 이 사회를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의미의 단어를 붙였을까 궁금해지면서 나로 하여금 ‘상상력’과 ‘현실화’의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게 한다. 이전 포스트에서 인용한 1968년 프랑스 혁명의 대표적 슬로건 중 하나인 “Be Realistic, Dream the Impossible” 역시 이상적 사회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의 상상력과 현실화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한껏 담은 지향적 사고방식(mentality)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나에게는 다가온다.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상상할 수 있을까? 그간 에세이의 저자들이 공통으로 지적했던 것 중 하나가 사유재산의 폐지가 이상적인 사회주의 사회로 이끌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자본주의의 부정이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상상으로 우리를 이끌지 못한다는 점이다(최소한 나에게는). 상상력은 무(無)에서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뭔가 재료가 주어졌을 때 상상이란 요리가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점, 나에게 필요한 것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 대신 사회화 - 20세기 소련식의 국유화가 아니라 - 그리고 생산과정에 있어 민주화라는 대안 사회의 ‘원칙’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완전체가 아니더라도 그 원칙이 실현되는 구체적 방식에 대한 ‘맛보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이번 에세이 후반부 화폐와 상품이 사라진 사회주의 사회에서 분배와 회계 처리 부분에 대한 설명은 짧은 양에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에세이 저자 Paresh Chattopadhyay(‘파레쉬 채토파댜이’정도로 발음될 것 같다)는 이전 포스트 ‘폭력적 전복인가 평화적(?) 정권교체인가?’에도 인용된 적이 있는 맑스 연구자로서 현재 캐나다 몬트리올의 University of Quebec에서 정치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사회주의와 민주주의(Socialism and Democracy)
Paresh Chattopadhyay
“사회주의(Socialism)”란 용어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길드(Guild) 사회주의 (생산자 혹은 소비자 조합과 같은 조합을 중세 용어 길드로 표현하며 이들 길드 간 연합과 협력이 사회주의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사상: 역자 주) , 파비안(Fabian) 사회주의 (사회주의 달성에 혁명적 방식 대신 점진주의와 개혁주의를 지향하며 영국 노동당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Fabian Society의 이념으로 뉴질랜드에도 있다:역자 주), 아나키스트(anarchist) 사회주의 (이전 포스트, ‘Be Realistic, Demand the Impossible. 아나키즘과 민주사회주의’ 참조: 역자 주), 국민(national) 사회주의 (히틀러의 나치즘(Nazism)이 바로 National Socialism의 약자다:역자 주), “중국 특색 사회주의(socialism with Chinese characteristics)”(덩샤오핑이 주창한 이래 현 중국 공산당의 공식 이념이 되었으며,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할 만큼 중국의 생산력이 도달하지 않았으므로 국가 주도하에, 즉 국가자본주의 형식으로 경제발전을 이루겠다는 이념: 역자 주), 시장(market) 사회주의 (시장경제 틀 안에서 생산수단에 대한 국가(public), 조합 혹은 사회적 소유권을 포함하는 경제 시스템: 역자 주), 등등.
그러나 이 에세이에서 사용되는 사회주의 용어는 이런 “사회주의”와 공통점이 거의 없다는 점을 우선 밝히고 이 글을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이후 소련의 경험을 통해 단일 정당(기본적으로 공산당)이 지배하고 생산수단이 “공공 재산(public property)”이란 명목으로 지배적으로 국가에 의해 소유되고, 경제는 중앙 계획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라는 의미로 통용되는 그런 사회주의와도 관련이 거의 없다.
강조하고 싶은 중요한 것은 일반적으로 사회의 사회주의적 성격이 생산의 실질적 관계가 아닌 재산 관계, 즉 법적 관계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이다. (이전 포스트, ‘21세기 사회주의의 관건, 직장 내 민주주의’의 저자도 생산관계에 있어 민주화 - 즉, 직장의 민주화 - 없이 생산수단 소유권의 변화 - 개인으로부터 국가로 이전 - 만으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음을 강조했다: 역자 주)
이와 달리 우리는 사회주의를 집단적 자기 권위(self-authority)로 특징지어지는 사회로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주의는 민주주의 -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통치 - 와 많은 부분 겹친다. 사회주의는 정반대인 자본주의를 그대로 둔 채 같은 사회에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자본주의(capitalism)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본주의란 자본의 지배(rule)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자본(capital)은 무엇인가? 자본은 물건(thing)이 아니다; 자본은 한 사회에서 개인의 생산적 활동이 일어나는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이다.
사회에서 생산 형식(form of production)이 무엇이든지, 노동자와 생산수단은 여전히 중심 요소로 남아있다. 그러나 만약 이 두 요소가 서로 분리되어 있다면 생산은 이루어질 수 없다. 생산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 두 요소가 결합(unite) 하여야 한다. 이 결합이 이루어지는 특정 방식이 특정 경제적-사회적 시대를 구분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특정 시대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생산수단과 노동자가 분리되어 있다. 노동자는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면서 생존/생계를 위해 그들의 육체적/지적 능력을 상품으로서 생산수단의 소유자를 대상으로 처분할 능력을 갖추고 있을 뿐이다. 이 능력 제공의 대가로 노동자들은 보수 - 임금 혹은 봉급 -를 받는다. 생산 과정에서 생산수단과 노동자를 결합하는 작업은 사회에서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는 소수 자본가 혹은 더 적절하게는 자본의 운용자에 의해 수행된다.
사회주의(사회주의 사회)는 이와는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다. 사회주의 사회는 정의상 협동(co-operative) 사회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생산의 조건들(수단과 도구)는 사회 자체에 속해 있어 국가 관료들에 의해 운영되지 않고 자유선거로 뽑은 하지만 언제든지 유권자들에 의해 소환될 수 있는 대표들에 의해 민주적 절차를 통해 운영된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동시에 민주주의이기도 하다. 사회주의의 경제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표들에 의해 계획된 계획 경제(planned economy)이다.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 사회는 돈의 위력으로 인해 진정으로 민주적 절차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자본의 지배 아래 사회주의가 존재할 수 있고 사회주의 아래서 자본주의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지금까지, 이 지구상 어디에도 사회주의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역설적으로, 겉보기에는, 재산 없는 “자유로운” 노동자를 양산하고 생산력의 보편적 발전 성향으로 새로운 사회 창조의 조건을 만들어 내는 것은 자본주의다. 지금까지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시도는 대부분 자본주의 이전 상태로 남아있는 나라들에서 이루어졌다. 이들 나라 국민은 대부분 가부장제 영향력에 놓여 있으며 비과학적 사고방식과 뿌리 깊은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 억압 혹은 식민지 피지배의 경험이 있으며, 더 나아가 민주적 전통은 거의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시도들로 탄생한 새로운 사회는 필연적으로 비민주적(통상 단일 정당 권력)이고 무력으로 통치되었으며 권력 보전을 위해 정치적 반대 세력을 억압하는 소수 정부를 초래했다.
그 결과, 이들 국가에는 국민의 대표를 자유롭게 뽑는 선택권, 언론의 자유 그리고 자유로운 의견을 발표할 여지가 사라진 당 관료에 의한 통치만 남았을 뿐이다. 물론, 이전 정권 그리고 기존 자본주의 정권과 비교했을 때, 적어도 일부 당-국가(party-state) 정권하에서 인민의 복지 상황은 항상 바람직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건강, 교육, 주택 그리고 기본적 인간 필요 측면에서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민주주의는 없었다.
사회주의는 출현에 필요한 적절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을 때만 등장할 수 있는 역사의 산물이다. 자기 자신의 소멸을 위한 물질적 조건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의 창조를 위한 물질적 조건을 만드는 것도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이 물질적 조건을 보편적 생산력 발전 경향 그리고 노동의 사회화 (노동의 개별 형태 (individual form)를 폐지 (suppression) 함으로써)를 통해 창출한다.
자본주의는 앞서 언급했듯이 자본주의 그 자체 안에서 사회주의로 전환되지 않는다. 이 변혁은 자본의 직접적 희생자인 노동자들 자신의 과제이다. 여기에 사회주의 변혁의 특수성이 있다.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훨씬 전부터 생산에 있어 자본주의 이전 관계를 잠식하기 시작했던 자본가 계급과 달리,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임금과 봉급 노동자들이 변혁 과정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권력을 먼저 획득해야 한다. 미래 사회의 근간이 되는 생산자 자신이 생산수단/도구를 집단으로 전유(appropriation) 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생산수단에서 개인 사적 소유권을 법적으로 제거하는 것은 개인 자본 소유자를 축출(expropriating) 하는데 필수불가결하지만, 그 자체가 생산 조건에 대한 사회의 집단적 전유와 자본의 종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승리 직후 다수에 의한 정치적 권력을 획득한 다음, 최종 목적을 향한 첫 번째 조치일 뿐이다.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사회 변혁은 집단적 자기 권위(self-authority)의 창출, 노동자와 생산수단의 재결합, 소수에 의한 다수 지배의 종식을 의미할 것이다. 이 결합은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의 말을 인용하자면 “기계가 노동자를 고용한 것이지 노동자가 기계를 고용한 것이 아닌” 자본주의의 생산 조건으로부터 노동자를 분리한 것과 정반대를 의미한다.
새로운 사회 개요: 기본 특징 (THE NEW SOCIETY IN OUTLINE: BASIC FEATURES)
자본주의는 역사상 존재해왔던 여러 사회 중 하나이지 자연에 의해 창조된 사회가 아니다. 이전 자본주의 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자본주의 역시 일시적 사회로서 자본주의 생산력 -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노동자들 - 이 자본주의 생산관계(자본주의 아래서 생산관계는 본질에서 임금노동관계)와 충돌하고 그 소멸을 위한 물질적 주체적(subjective) 조건이 일정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자체 소멸을 위한 물질적 조건과 주체를 만들어내는 것은 자본(주의) 그 자체다. 자본주의는 과거 그 어느 사회시스템보다도 더 고착된 관계를 모두 파괴하고 생산력의 확장에 대한 장벽을 모두 허물었다.
주체적 조건은 노동자들 -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grave diggers)” - 을 통해 구현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주체적 조건이다. 물질적 생산력이 완전히 발달하여 그 이후 감소하기 시작하더라도, 생산관계로서 자본(capital)은 어떻게든 지속할 수 있다. 여기에서 가장 위대한 생산력인 노동자의 적극적 역할이 대두한다. 자본의 임금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들 자신의 과제이다. 자신의 처지를 바꿀 필요는 직장에서 그들 “사장(Bosses)”과의 매일 부딪힘의 경험을 통해 그들의 의식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의 자기 해방은 자연스러이 인류의 해방을 의미할 것이다.
생산과정의 적대적 관계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법 - 생산자들을 생산 조건으로부터 분리하는 - 과 반대로, 협동 사회로서 사회주의는 노동자들과 생산 조건의 결합에 기반을 두고 있다. 협동 사회에서 개인들은 자본주의 이전 사회처럼 생산관계에서 더 이상 어떤 개인적 의존이 없다는 면에서 자유롭다. 개인을 위한 또 다른 종류의 자유도 있다. 이 자유는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기초한 상품 형태(commodity form)를 취하는 생산물과 관련 있다. 상품 교환에 기초한 관계에서는 개인 간에 직접적 관계가 없으며 개인의 사회적 관계는 사물(생산물) 간 사회적 관계의 도착적 형식(perverted form)으로 나타난다. 자본의 소멸과 함께 이 도착적 관계도 종식되고 개인의 물질적 의존도 사라질 것이다.
이제 노동(labor)은 이전의 의미를 잃는다. 노동은 더 이상 생계를 위한 직업적 일(job)이 아니라 개인이 그들 자신 그리고 그들의 물질적 창조물로부터로의 소외를 벗어남으로써 자유롭고 의식적 활동으로 변모하게 된다.
생산관계의 변혁과 함께 생산수단의 소유관계 역시 따라서 변한다. 당연히 사회주의에서 생산 조건의 소유권은 사회적 차원에서 집단적이다. 노동자들이 정치권력을 획득한 이후 취하는 첫 번째 조치 중 하나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개인 자본가의 생산 수단 소유에 대한 법적 몰수(elimination)이다. 그러나 노동자 권력의 법제화가 “사회주의의 승리”를 의미하지 않듯이, 생산수단을 노동자의 지배하에 두는 즉각적 조치가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곧바로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소유관계의 변혁과 새로운 사회에서 생산 조건의 “사회적 소유”의 확립을 결정하는 것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변혁이다.
이전 시대의 모든 전용(appropriation) 형식이 본질에서 제한된 특성(character)이 있을 수 없던 것에 반해, 사회적 전용은 보편적이고 총체적(total) 특성이 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는 이전 사회 노동자 결핍의 총체적 특성 때문인데 현재 전용되고 있는 생산력의 발전은 이미 자본주의 아래에서 보편적 특성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오직 집단으로 그리고 오직 생산자로서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에 의해서만 전용될 수 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새로운 사회에서 물질 생산의 목표는 자본의 지배 아래에서와는 아주 다르다. 자본주의 기업의 목적은 교환가치(exchange value)에 매개 되는 이익의 극대화이지만 사회주의 생산의 목적은 사용 가치(use value)에 매개 되는 사회 구성원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일상적 필요는 생산품이 생산자를 지배하는 시장을 통해 충족된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가구별 수요 조사가 주기적으로 행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서로 독자적으로) 두 저명한 유럽 사회주의자에 의해 제안되었다: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 (1917) 그리고 안토니 파네쿡 (Anton Pannekoek) (2003) (안토니 파네쿡은 1960년에 사망했으므로 사후 발견된 저작물이 아니라면 2003년은 저자의 오타가 아닐까 생각한다:역자 주). 생산 단위는 노동자의 협동조합으로 당연히 민주적으로 관리될 수 있을 것이다.
소유관계와 마찬가지로 교환관계(exchange relation)도 생산의 사회적 관계 변혁에 상응하는 변혁을 겪을 것이다. 교환관계는 개인들의 자연에 대한 물질적 교류와 개인들 간 사회적 교류 모두를 포함한다. 개인과 자연의 물질적 교류에 있어 자본주의는 이전 시스템에 비해 유례없는 물질적 생산력의 증대를 통해 자연의 힘을 인간 지능에 점진적으로 종속시킴으로써 인간을 자연의 힘에 덜 의존하게 하였지만, 동시에 기술은 인간 생산자와 함께 지구의 자연력을 훼손함으로써 자연환경에 심각한 피해를 주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새로운 사회에서 사회적 개인들은 자연과의 물질적 교류에 대한 이성적 규제를 통해 자연의 맹목적 힘의 종속으로부터 해방됨은 물론, 자연과의 물질적 교류를 그들 인간성에 가장 가치 있고 부합하는 조건 아래에서 수행한다.
개인들 간 교류에서도 위계적으로(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처럼) 규제되거나 상품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모든 노동 교환은 중단된다. 개인들의 사회적 관계도 상품교환이라는 왜곡된 사물 간 사회적 관계 형태로 나타날 필요가 없게 된다. 상품 간 교환은 사람들 간 관계를 완전히 가린다. 대신, 이제 사회적 개인들 간 자유로운 교환, 즉 생산 조건에 대한 사회적 전용과 통제에 기반을 둔 개인들의 집단적 필요와 목적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적 개인들의 행동 교환이 있게 된다.
상품(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의 사회적 특성이 상품 판매 이후를 상정하는 반면, 새로운 사회에서는 생산의 사회적 특성이 생산 과정의 시작, 심지어 생산 전에, 과 함께 상정된다. 여기에서, 공동체는 생산에 앞서 전제가 된다.
마지막으로, 분배(distribution)의 문제이다. 현재, 한 사회에서 분배(경제적 의미에서)는 생산 조건(생산의 도구와 다른 수단들) 그리고 생산품에 대한 분배로 볼 수 있다; 생산 조건에 대한 분배가 생산품에 대한 분배를 결정한다. 다시 말해, 생산 조건의 분배는 단지 생산 수단뿐만 아니라 생산의 각기 다른 영역에서 일하는 사회구성원의 분배도 포함한다. 사실, 생산 조건의 분배는 경제 전반에 걸쳐 총 사회적 노동 시간(total social labour time)의 분배이다. 먼저 생산 조건의 분배에 대해 논의한 후 생산품의 분배로 넘어가겠다.
“사회적 노동 시간(Social labor time)”은 생산을 위해 가용한 사회의 시간을 말한다. 사회의 다른 영역 간 사회의 가용한 노동 시간의 적절한 분배를 통한 생산의 통제는 모든 사회에 공통적이다. 한편, 사회의 가용한 노동 시간 자체의 총체적 규모도 주목해야 한다. 생산을 위한 사회의 전반적 시간을 절약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단지 생산의 효율성 증대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의 각 개인이 그들의 고용과 개인적 발전을 위한 더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모든 경제는 시간의 경제(economy of time)로 귀결된다. 특히 자본주의처럼 이익의 극대화가 아니라 인간 필요의 충족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 생산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시간의 경제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띠게 된다.
사회 노동 시간의 생산 영역 간 배정은 적절한 비율로 사회 노동 시간의 대체 용도에 관한 문제다. 일부 생산 영역에 더 많은 시간이 배정되고 나머지에는 덜 배정된다. 이 배정의 문제는 사회마다 다르게 해결된다. 따라서 자본주의하에서 사회 노동 시간의 분배는 노동 생산품의 상품 형태에 의해 좌우되지만, 새로운 사회에서는 사회적 관계가 사물(things) 간 관계로 나타날 필요가 없이 의식적으로 계획된 방식으로 이 문제가 해결된다.
그리고 자원의 사용과 그 사용으로부터 발생하는 사용 가치 간 시차가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이 시차는 당연히 일부 생산라인이 다른 생산 라인보다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다. 이 시차 문제는 특정 생산 양식과는 무관하다. 자본주의하에서는 짧은 시차를 가진 다른 생산라인에 비해 긴 시차를 가진 생산라인에 자원을 배정하는 문제는 이 어려움을 겪고 난 후에 해결되지만, 사회주의에서는 사전에 의식적으로 운영 규모를 계산하고 계획한 후 자원을 배정할 것이다.
자본주의에 비해 사회주의하에서는 생산 라인 간 노동 시간의 배정뿐만 아니라 물질 생산에 드는 사회의 총 시간 자체의 절약도 다른 성격을 가진다. 총 노동 시간을 최소화하면서 발생하는 여가 시간(disposable time)은 모든 계급 사회에서는 비생산 소수를 위한 비노동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이전 모든 사회와 달리 자본주의는 생산자들의 필요 노동 시간을 넘어 사회의 부라는 명목으로 “잉여 가치(surplus value)” - 사용 가치가 아닌 교환 가치 -의 창출을 위해 생산자들의 잉여 노동 시간을 계속 증가시키려 한다.
초과 노동은 노동자들 자신이 필요를 뛰어넘는 노동이다. 사실 이것은 사회를 위한 노동인데 자본주의하에서 자본가들은 이 초과 노동을 사회의 이름으로 전용한다. 노동자들의 이 초과(잉여) 노동은 사회의 자유 시간과 동시에 사회 다방면 발전의 물질적 기초가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여가시간을 창출하는 동시에 이 여가시간을 초과 노동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과잉 생산과 초과 노동의 비 가치화(non-valorization)를 궁극적으로 초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과정은 모순적이다. 이 모순은 새로운 사회에서 극복된다.
첫 번째로, 생산 조건의 사회적 전용(social appropriation) 조건에서 필요 노동 시간과 잉여 노동 시간이라는 초기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필요 노동 시간은 자본주의에서처럼 최대 이윤을 얻기 위한 가치 증식 관점이 아니라 사회적 개인의 필요 관점에서 측정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가 시간의 증가는 더 이상 소수의 비노동 시간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이중의 의미가 있다. 첫째, 노동 시간의 증가는 생산력의 엄청난 증가로 더욱더 많은 부를 창출하는데, 이는 초기 모순에서 벗어나 부가 모든 사회적 개인의 풍요로움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둘째, 자유 시간 자체가 독특한 면에서 부를 의미하게 되는데, 자유 시간은 다른 종류의 창조의 즐거움 그리고 자연적 필요성 혹은 사회적 의무를 충족시켜야 하는 노동 시간과 달리 자유로운 활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실, 진정한 부는 모든 개인의 발전된 생산적 힘(productive power)이다. 진정한 부는 노동 시간이 아니라 부의 척도가 되는 여가 시간이 된다. 부의 척도로서 노동 시간은 부 자체를 빈곤과 비교되는 개념으로, 여간 시간을 초과 노동 시간의 반대를 통해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한다. 이것은 개인의 시간 전체를 노동 시간으로 규정하고 개인을 노동에 완전히 흡수된 노동자의 특정 역할로 격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자유 시간의 기초가 되는 노동 시간 자체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제 노동(labor)은 그 생산물의 계층 질서 혹은 그 생산물의 교환 가치 형식을 매개로 하지 않는(생산의 이익 측면이 제거된) 사회적인 것이 되면서 초기의 적대적 성격을 상실한다. 노동은 이제 진정으로 사회적 노동이다.
이제 우리는 사회주의 하에서 분배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에 눈을 돌리자. 이 측면은 “사회적 개인들(social individuals)” 간 소비 수단의 분배와 더불어 생산 필요와 소비 필요 간 사회적 생산의 구분에 대한 것이다.
첫 번째 측면으로, 사회적 생산물의 일부는 불확실성에 대비해서 사회보험과 예비 자금으로서뿐만 아니라 생산수단의 대체와 연장을 커버할 수 있는 공통 자금 역할을 한다. 나머지 사회적 생산물은 집단적 소비 - 주로 사회의 보건, 주택, 교육 그리고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의 지원 - 와 개인 소비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모두가 생산자(모든 신체 건강한 사람들은 생산자이다: 프랑스의 위대한 문인 로맹 롤랑(Romain Rolland)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 중 게으름뱅이는 없다(no drones among us)”)인 개인들 간 소비 수단의 분배 양식은 전적으로 생산 조건이 분배되는 방식을 따른다. 사회주의에서 생산자들은 생산 조건들과 결합하기 때문에, 더 이상 임금(wage)/봉급(salary) 노동자가 없을 것이며, 자신의 노동 능력을 파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임금/봉급 시스템은 소멸할 것이다. 우리는 자본의 지배가 종식되면 나라 간 전쟁도 없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전쟁할 이유가 없다). 결과적으로, 군사적-억압적 시스템과 상업적 광고 등 - 자본의 존재에 있어 불가분한 -에 쓰이는 엄청난 낭비도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또한 과학과 기술의 방대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이런 요소들을 고려해 보았을 때 새로운 사회의 구성원들이 그들의 필요를 충족하지 못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사회주의 문헌에서 일반적으로 잘 다루지 않는 사회주의 회계(socialist accounting)에 대해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다.
(일반화된) 상품생산의 종식과 함께 계산 단위로서 화폐가 사라지면서 사회의 생산물을 분배하는 데는 오직 두 가지 방법밖에 없게 된다: 방금 논의했던 것처럼 노동 시간(labour time) 그리고 현물 분배(distribution in kind). 현물 분배 방식은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에 의해 유명해졌다. 현물 계산 방식은 자연스러운 계산 방식이다. 우리에게 사람들의 진정한 부(wealth)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는 것이 없는 자본주의의 돈 계산과는 대조적으로 사회주의 경제는 음식, 의류, 주택, 건강, 교육 그리고 오락의 유용성과 사람들의 필요에 관심이 있다. 이를 위해 사회는 환경과 자원의 비 낭비적 이용에 대한 충분한 고려를 통해 최선의 방식으로 원자재와 기존 기계류-노동 능력을 활용한다. 이런 모든 것의 수행을 위해서는 사용가치 측면에서 현물 계산이 최선의 방식이다.
여기에서 레온티예프(Wassily Leontief)의 유명한 투입산출분석(input-output analysis)은 큰 도움이 된다. 이 분석에서는 경제 시스템의 산출물 생산으로 이어지는 산업 간 거래들(transactions)이 매트릭스 형식으로 배열되는데, 행(raw)에는 각 산업 부분의 산출물이 표시되고 열(column)에는 다른 산업으로부터 유입되는 산출물이 표시된다. 섹터의 출력(output) 대비 입력(input) 비율은 입력에 대한 기술적 요구 사항 - 보통 통화 가치(monetary value)로 표현되지만, 톤(tons), 부셸(bushels)(곡물이나 과일의 중량 단위로 8갤런에 해당하는 양:역자 주), 배럴(barrels), 킬로와트(kilowatts) 혹은 인간 시간(human hours) 등으로 표현된다 - 을 반영한다.”
결론(CONCLUSION)
나는 지금까지 세상에 사회주의가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사회주의는커녕 사회주의를 자처하는 정권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사실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t)로 그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은 당국가(party-state)의 지도로 상품 생산과 임금 노동을 일반화했다.
여기서 우리는 레닌과 마르토프(Julius Martov) -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지나치게 무시된 영웅 중 한 명 -의 논쟁을 언급하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 부분은 러시아 혁명 연구의 위대한 권위자 에드워드 카(E. H. Carr)의 말을 인용한다: 마르토프는 소비에트 헌법의 위법성을 공격했고, 차르와 농노주 하에서 수 세기에 걸친 노예제로 인해 육성되고 강화된 대중의 무관심, 시민의식의 마비 그리고 이들 대중은 자신의 운명에 관한 모든 책임을 정부에 떠넘길 준비가 되어 있다고 진단했다. 마르토프는 또 헌법의 복귀, 언론의 자유, 결사 및 집회의 자유, 인간의 신성함, 재판 없는 사형집행, 행정상 체포 그리고 공식적 테러의 철폐를 요구하는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에 대해 레닌은 마르토프의 선언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로의 회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응답하면서 : “우리가 우리에게 동조한다고 입장을 밝힌 사람들로부터 이런 선언을 들었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말한다: 아니야, 테러와 체카(Cheka)(10월 혁명 직후 레닌의 지시에 따라 설립된 볼셰비키 체제를 지키기 위한 소련 최초 정치경찰로 GPU의 전신: 역자 주) 모두 절대 불가결한 존재야.”
확실히, 사회주의는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연합체이며 그만큼 유기적으로 민주적이다. 정확히 이 연합체에서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은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될 것이다.
역자 후기
머리말에도 썼지만, 책 번역이 중반을 향해 가면서 사회주의 사회의 구체적 모습에 대한 조급증이 생긴다. 가령, 생산수단의 국유화 대신 사회화라는 표현을 쓰는데 국유화가 20세기 악몽 같았던 - 최소한 민주사회주의자들에게는 - 국가사회주의의 상징적 조치였기 때문에 이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국가가 아닌 노동자 혹은 인민에게 생산수단이 직접 소속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인데 이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현실에서 어떤 식으로 구현되는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또, 우리가 쉽게 연상할 수 있는 생산수단은 제조업 분야인데 뉴질랜드 경우 제조업보다는 농축업과 서비스업이 우리에게 피부적으로 더 다가온다. 이 분야는 어떻게 사회화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많은 교민이 종사하는 식당과 같은 소규모 자영업은 어떤 형식을 취하게 될까? 빌더 자영업자들은 어떤 식으로 비즈니스를 하게 될까? 등.
위 질문들에 대한 답과 더불어 이 책의 번역을 다 마칠 즈음에 사회주의 담론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에 대한 답도 얻길 기대한다: 인간은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으면 동기의 부재로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참일까 거짓일까? 사회 소유는 다른 말로 내 소유가 아니므로 주인 의식을 가지고 ‘내 일처럼’ 일하지 않는다는 논리는 개인주의에 기초한 리버럴 자본주의의 패권적 논리에 수 세기에 걸쳐 우리가 세뇌당한 결과일까?
분명 위 질문들에 대한 답 혹은 족집게 답은 아닐지라도 생산적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 문헌들이 도처에 있을 것이다. 내가 다만 이를 적극 찾지 않았을 뿐이지. 예를 들어, 이 에세이에 나온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의 현물 분배 방식과 레온티예프(Wassily Leontief)의 투입산출분석(input-output analysis)도 당장 내가 궁금해하는 사회주의 사회의 실체를 일면을 보여주는 귀중한 이론인데 지금 당장은 시간을 핑계로 더 깊이 파고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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