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세상 이야기

미국 사회주의 역사, 존재 부정과의 투쟁사 - 민주사회주의 이해하기 (16)

김 무인 2021. 8. 24.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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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머리말

이전 포스트를 통해서 현 사회에 대한 나의 기본적 인식을 국가, 사회, 경제, 시장, 이 네 가지 개념의 역학 관계를 도식화해서 서술한 적이 있었다. 이 기본 틀 위에서 나는 현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는 경제가 사회 보다 우선시되는 것은 물론 시장의 마수가 국가에까지 뻗쳐 국가를 상품화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고 표현했다. 상품이 될 수 없고 되어서는 안 되는 것마저 상품화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대표적 특징이라는 나의 인식은 다름 아니라 칼 폴라니 (Karl Polanyi)의 통찰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다. 이 칼 폴라니를 민주사회주의 담론 탐구 과정에서 처음으로 이 에세이에서 발견해서 다른 것을 다 떠나 반가웠다.

이 에세이 저자도 지적했지만 나를 포함해 많은 대중이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존재하지 못했을까?’라는 피상적 궁금증을 가질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존재를 부정당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에세이에 등장하는 핵심 용어, ‘불가능 테제(impossibility thesis)’는 미국 내에서 사회주의를 바라보는 시각 - ‘지구상 유일한 예외적 국가 미국에서 사회주의는 있을 수 없어!’ - 을 단적으로 표현한 단어다. 미국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혹은 기껏해야 찻잔 속 태풍 정도로 치부하는 그간 세간의 인식과 달리 역사적 상황에 따라 때로는 지하로 때론 지상에서 그 흐름을 계속 이어온 대항운동(counter-movement)의 한 유형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 스테파니 머지 (Stephanie L. Mudge)는 University of California, Davis (UCD)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녀의 저서 ‘좌파의 변신: 사회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Leftism Reinvented:Western Parties from Socialism to Neoliberalism)’에 대해 저자와 인터뷰한 내용이 JACOBIN에 있다. ‘Neoliberalism from the Left’ 이 그것인데 ‘서구 좌파 정당은 어떻게 신자유주의를 수용했는가?’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로도 번역된 것도 있다.

 


민주사회주의 불가능의 역사: 미국 이야기

(The Impossible History of Democratic Socialism: An American Tale)

Stephanie L. Mudge

“주의(-ism;主義)”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려는 시도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主義(isms)들은 분명 역사적 기원이 있지만, 역사 위에 떠다닌다. 主義를 정의하려는 시도는 종종 정치적 동기 아래 이 시도를 하는 이들로 하여금 선별적이고 몰 역사적으로 이 작업을 수행하게 하여 主義를 필연성으로 몰고 가거나 아니면 반대로 그것을 더 쉽게 허물어트리기 위해 시도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결과, 우리로 하여금 主義에 대한 모든 정의 시도를 의심하게 한다.

오늘날, 미국에서 민주사회주의 - 죽었다고 생각되거나 혹자에 의하면 실제론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정치 무대에 극적인 방식으로 등장한 -를 정의하려는 시도들은 이런 모든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민주사회주의를 정의하려는 시도들을 탐색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나는 “주의(isms)”의 성격에 대한 특정 개념으로 시작하겠다. “주의(ism)”는 정치 이데올로기 - 즉, ‘시간적 사회적으로 제약된 환경에 놓인 사람들의 정부의 수단과 목적에 대한 세계관” -이다. 이론상, 정치 이데올로기가 세계관 이상의 것이 될 잠재력은 그것의 설득력 혹은 내용의 기능은 아니지만, 분명 중요하다; 최소한, 특정 정치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들이 권력과 정책 결정 수단에 접근할 경우, 이 정치 이데올로기는 정부, 입법 그리고 공식적 강령 - 사물을 바라보는 특정 방식을 장기적으로 일상 경험에 끼워 넣어 현실화하는 효과가 있다 -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의(ism)가 시간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역사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럼에도 정치 이데올로기는 항상 시공간에 제약받는 사람들의 네트워크 활동에서 비롯한다; 주의(ism)는 특정 역사적 맥락에서, 특정 종류 인간들의, 특정 관점을 표현한다. 따라서 비판적이든 아니든 한 주의(ism)에 대한 참여는 피할 수 없는 전략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한 주의(ism) - 이 에세이 경우 민주사회주의 -에 대한 정의를 진전시키려는 모든 노력은 싸우려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칼 폴라니(Karl Polanyi)(1885~1964)

 

모호하지 않고 명확한 입장을 발전시키길 희망하지만, 이 에세이도 위 서술한 것에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 에세이에서 나는 특정 역사적 순간에 등장하여 인간 진보를 뒷받침하기보다는 위협하는 자본주의 경제 제도의 고착화와 발전에서 기인하는 혼란, 불안 그리고 불안정 경험에 대한 정치적 대응으로서 민주사회주의의 역사적 그리고 사회적 정의를 시도할 것이다. 민주사회주의는 다른 말로 역사 정치 경제학자인 칼 폴라니(Karl Polanyi)(1885~1964)의 통찰을 빗대어 내가 “폴라니의 순간(Polanyian moment)”으로 명명한 정치적 징후이다.

 

그러나 모든 정치 운동은 특별하며 모든 정치 상황은 자체만의 특이점이 있다. 실제, 미국식 민주사회주의는 특정 상관관계가 있다; 미국식 민주사회주의는 비록 명백히 역사적 허구임에도 미국 정치에 착근이 불가능할 정도로 이질적이고 상반된다는 의례화된 불가능 내러티브를 불러일으킨다. 다른 말로, 미국 사회주의 정치에서 가장 의례화되고 일상화되고 예측되는 특이점 중 하나는 우리가 불가능 테제(impossibility thesis)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불러일으키는 경향이다.

I. 불가능 테제 (THE IMPOSSIBILITY THESIS)

동시대 정치인과 평론가들은 민주사회주의의 부활을 한 세대 혹은 일시적 요행이고 나쁜 경제 정책, 큰 정부, 비미국적(un-American) 일탈 혹은 이들의 조합으로 구성된 위험할 정도로 그릇된 철학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미국식 민주사회주의의 현대판 불가능 테제이다. 이 불가능 테제는 규칙 같은 혹은 사회학자들이 ‘관습(institution)’이라고 칭하는 패턴화된 행동을 암시하는 규칙성을 보여주는 아주 낡은 대본 - 과거 발흥기(1840년대~1860년대)와 부활기(1910년대~1920년대, 1960년대~1970년대) 미국 사회주의 정치에서 관찰 가능한 - 을 따르고 있다. 다른 말로, 불가능 테제는 미국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 주장이라기보다는 미국 사회주의’의’ 의례적 보완이다.

일단, 오늘날 불가능 테제의 지지자들이 그들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진심으로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많은 역사적 증거들이 그 반대를 보여주지만, 미국 민주사회주의 불가능이 사실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갖추어져야 할까? 이 질문을 던짐으로써, 불가능 테제는 사회주의 자체와 마찬가지로 정치사를 (거짓)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정치사 일부가 된다. 이 질문은 또 미국 사회주의의 오랜 지배적 수수께끼 - 왜 “여기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거야” -를 실제 미국 경험에 기반을 둔 훨씬 나은 질문으로 전환시킨다: 왜 미국에서는, 아마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회주의 정치가 강해질수록 사회주의 존재에 대한 부정도 활성화되는 가이다.

참으로, 미국에서 민주사회주의의 심지어 가능성조차 부정하는 당대 비평가들의 의견은 최근 현상과도 배치된다: 2016년 대선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 거의 당선할 뻔했던 민주사회주의자, 그 이후 민주사회주의자들(DSA)의 급속한 성장, 그리고 갈수록 미국민들은 사회주의를 정부 형식이 아닌 평등과 연계시켜 생각하며 특히 젊은이들과 민주당원들은 자본주의가 유일한 최고 시스템이라는 것에 심각한 의구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경향에도, 여전히 사회주의는 “비미국적(un-American)”이란 소리를 듣는다. 미국 민주사회주의 정치의 불가능한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이 다시 고개를 든다.

그렇다면 우리가 질문할 수 있는 것은 이 불가능 테제가 어디에서 왔고, 무엇이 이것을 지탱해왔으며 그 결과는 무엇인지 일 것이다. 여기에서 이 질문들 모두를 충분히 다룰 수 없지만 몇 가지 예비 단계 주장을 하겠다. 아마 가장 중요한 마지막 질문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불가능 테제의 핵심 결과는 민주사회주의의 ‘내용’ - 경험, 정치적 주장 그리고 정책적 입장 - 이 아닌 미국 민주사회주의 ‘존재’의 논쟁에 대한 반영구적 초점이란 사실이다. 그 영향으로 미국 민주사회주의 대항운동(counter-movement)( 칼 폴라니의 개념: 역자 주)은 미국의 민주적 삶에 대한 본격적 개입을 가로막는 일종의 모호한 선제공격을 촉발한다. 이 모호한 촉발은 폴라니의 순간(Polanyian moments)이 너무 늦을 수 있는 정점에 도달할 때 주기적으로 그러나 부분적으로 극복된다. 내가 보기에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미국 민주사회주의의 역사를 말하고 또 말해서 그 존재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민주사회주의의 부활이 주목받을 수 있고 받아야 한다는 보다 진지하고 핵심적 관심이 주 초점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II. 민주사회주의란 무엇인가?(WHAT IS DEMOCRATIC SOCIALISM?)

사회주의는 역사적으로 산업자본주의가 초래한 혼란, 불평등 그리고 사회적 문제에 대한 문화적 정치적 대응의 형태로 등장했다. 사회주의는 다양한 형태를 취했다(협동조합, 협회, 기독교, 유토피안, 자유주의, 과학적 사회주의 등). 오늘날 사회주의는 많은 경우, 이 많은 형태 중 생산양식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역사적 분석에 기반을 둔 맑스와 엥겔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버전을 유일하게 가리킨다; 자본주의가 야기한 정치적 역학, 계급 간 적대시 그리고 상품화 방식; 그리고 장기적으로 자본주의의 인간 공동체의 필요와 안녕보다는 자본의 축적과 소유권에 대한 독점적 패턴을 갈수록 우선시하는 경향. 막시스트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의 사회주의 운동 모두 경제적 목표에 뚜렷한 특징이 있다: 재산 소유권 분배에 대한 변화; 파괴적 시장으로부터 공동체, 가족 그리고 더 나아가 인류 전반의 보호; 자본주의 생산양식 전체를 시장이 아닌 인간을 위해 작동하는 경제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많은 사회주의 사상가뿐만 아니라 다른 사상가들도, 경제적 번영과 시장의 성장이 극심한 불평등, 불신 그리고 정치적 불만을 키운다는 것이 지배층과 피지배층 모두에게 명확해지면서 이에 대한 자연스러운 대응으로서 사회주의를 바라보았다. 예를 들어, 루스벨트는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1908년에 그는 사회주의 정치와 “말 그대로 전례 없는 번영”은 몸통과 깃털의 관계라고 주장했다. 모든 규제(regulation) 형태를 사회주의로 몰아붙이려는 노력은 문제들을 해결하기보다는 무시함으로써 오직 사회주의 정치의 호소력을 강화시킬 뿐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반동분자들과 극보수주의자들”이 비즈니스를 규제하려는 모든 노력을 “사회주의를 향한 움직임”이라고 치부했다면, 연방정부는 적절한 입법과 행정 조처를 통해 부의 비즈니스를 위한 남용을 막는 데 실패했을 것이다.’ 루스벨트에게 미국의 번영에는 미국 사회주의를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번영은 사회주의를 필요로 한다고 믿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자본주의 질서가 사회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운동을 포함한 대항운동을 불러일으켰다는 이해는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칼 폴라니 (Karl Polanyi) (1886~1964)는 그의 유명한 역작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1944)을 통해, 사회주의는 자기 규제를 할 줄 아는 시장이란 이미지 기반 위에 구축되어 모든 계층의 사람들 - 임금 노동자뿐만 아니라 정치인, 공동체, 기업가 그리고 일반 국민 -에게 인간과 생태계 존속을 위한 수단이 아닌 위협으로 다가선 경제 세계에 대한 반발의 한 유형이라고 주장했다. 즉, 사회주의는 인간의 경제제도가 본질에서 무관심하고, 자의적이고, 불평등하며 잔인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우리를 찾아온 불확실성과 불안에 대한 기초적 반응의 일부인 것이다. 폴라니 관점에서 사회주의는 상황을 균형 있게 되돌리려는 보호적 대항운동의 한 종류인 셈이다. 사회주의 등장의 문제는 만약(if)이 아니라 언제(when)이다.

III. 미국 민주사회주의의 “불가능”의 역사

 

동시대 미국인들, 특히 젊은 세대,에게 폴라니의 이 “언제”에 대한 질문의 답은 “지금”이다. 폴라니를 포함한 역사가들과 역사정치경제학자들은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민주사회주의의 미국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도 이 불가능 테제가 다시 돌아온 것에 대해 놀라지 않을 것이다.

사실, 미국에서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는 전통은 미국 사회주의만큼 오래되었다. 그 표현이 얼마나 다양하고 오래되었는지 간에, 그 표현 양식이 유명한지, 아니면 그 용어를 받아들이는 사람과 조직의 숫자가 얼마이든 간에 미국 사회주의는 그 자체, 불가능을 알리는 기인한 속성이 있다.

 

1864년 11월 16일, 뉴욕 트리뷴(New York Tribune)의 1면

 

우리는 뉴욕 트리뷴(New York Tribune)(1841~1924)을 예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북전쟁 전 그리고 재건 기간 사이에 트리뷴은 - 호러스 그릴리 (Horace Greeley)(1811~1872)가 편집자였던 명백히 사회주의 신문 - 은 Whig-cum–Republican Party(휘그당 겸 공화당)의 대변자이자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었다. 트리뷴은 “1841년부터 1871년까지 30년에 걸쳐 지속해서 사회민주주의 프로그램”을 광범위한 독자들에게 전파했다: 1850년의 6만 발행 부수가 1860년, 24만 7천 부로 증가하면서 새 공화당(Republican Party)의 급진적 대변자로 변모함과 더불어 약 18명의 해외 특파원을 두었는데, 칼 맑스도 이중 한 명이었다.

맑스의 가장 중요한 사상 전파 수단 중 하나가 미국 공화당 출판물이었다는 사실은 미국 정치의 과거는 현재에서 읽어낼 수 없으며, 미국은 일종의 지정학적 공백 속에서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어야 한다. 트리뷴의 인기가 상승한 시기는 보다 급진적 계급 정치에 민주적 권리를 요구한 1848년 혁명들(잘 알려진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빈 체제에 대한 반항 운동: 역자 주)과 연관되어 있으며, 일부의 주장을 따르면 이 혁명들을 통해 민주사회주의라는 새 용어가 국가적 차원에서 사용되었다. 대부분 지역에서 이 혁명들은 성공하지 못했는데, 칼 맑스가 보기에 프랑스 경우 루이 나폴레옹이란 독재적 민족주의자 등장으로 실패했지만, 새로운 종류의 민주사회주의 공화국 단초가 보였다.

위 역사적 사실은 우리에게 신문과 기자들은 단순히 사회민주주의 운동(저자는 민주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t)와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tic)를 구별 없이 번갈아 사용하는 듯하다: 역자 주)의 관찰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그들은 사회민주주의 정치를 기록하고, 알리고, 분석하고 구체화하는 일을 동시에 수행한 참여자들이었다. 민주사회주의가 사회학적 표현으로 “현장화(fielded)”된 것은 사회주의적 급진 저널리즘을 통해서였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말로, 1848년 이후 민주사회주의의 “진정한(true)” 의미에 대한 논쟁은 내부의 두 반대 축 혹은 정치학자 Tom Harsanyi의 표현으로 “상대적으로 급진적 반자본주의 사조와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개혁주의적 사조 간 심오한 이데올로기적 전술적 투쟁”과 “분권적이며 급진적 민주적 협동조합 사회주의 (‘자율 경영(self-management)’, ‘경제민주화(economic democracy)’)”를 놓고 국가 중심 막시스트와 반 레닌주의 간 투쟁으로 정착되었다.

사회주의적 사상에 따라 통제되지 않는 시장에 대해 비판적 단호한 철폐주의자로서, 사회주의자와 급진적 작가들에게는 중요한 의사 전달 매개체로서, 민주화된 재산 소유와 협동적 ‘자유노동(free labor)’의 대변자로서, 트리뷴은 사회주의자들의 경쟁과 교류라는 새로운 장을 미국에서 열었다. 트리뷴의 존재,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은 기자들과 편집자들의 삶과 활동 그리고 미국 정치에서 차지한 중심적 위치는 모두 불가능 테제를 거부하는 좋은 이유들이다. Greeley는 상원에 재직했고 공화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1872년 결별을 주도하면서 Liberal Republican Party를 만들어 민주당으로부터 재건의 종식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 내며 대통령 후보로도 출마했다.

 

호러스 그릴리 (Horace Greeley)(1811~1872)

 

그릴리는 대선에 실패하고 논란의 인물인 채로 사망했는데, 그의 삶의 궤적은 미국 노예제와 끊임없는 우여곡절로 얽혔다. 그러나 어느 것도 그릴리가 “그의 공인으로서의 살았던 삶 대부분’ 사회주의자였으며, “사회민주주의 정신(social democratic ethos)”을 보여준 신문의 영향력 있는 편집자였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한편, 제임스 파튼(James Parton)은 1872년 전기에서 그릴리의 30년 이상 사회주의 관여를 부수적인 것으로 일축했으며, 몇 주목할 만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다른 역사학자들도 이에 동조했다.

1870년대와 1890년대 사이 금본위제 시대가 긴 위기 국면에 접어들면서 사회민주주의 정치는 서유럽에서는 심화하였지만 미국에서 매우 다른 방향의 길로 갔다: 급진적이고 대중영합적 농업과 산업 세력의 새로운 물결은 1892년 인민당(People’s (or Populist) Party)의 전국적 결성과 함께 절정에 달했다. 금융과 비즈니스 이익 권력을 억제하려는 이들의 시도는 분명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지만, 19세기 후반의 포퓰리즘은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s Jennings Bryan)(1860~1925)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s Jennings Bryan)의 대권 후보 도전이 실패한 후, 1896년부터 1900년대 초에 걸쳐 개신교 중서부 숙련노동자와 대평원의 소작농부터 맨해튼 남부 유대인 이민자, 시카고와 뉴욕 등 “현대 좌파(modern left)”의 젊은 지식인과 예술인에 이르기까지 미국 사회주의의 새 시대가 열렸다. 시카고에서는 1905년 설립된 세계산업노동자연맹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IWW — the “Wobblies”)이 대부분 원주민인 수만 명의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면서 파업과 선동 의제를 추구했다. 1901년, 유진 데브스 지도하에 설립되어 공식적으로 맑스 사회주의를 지지한 미국 사회당 (Socialist Party of America) (1901~1972)에 대한 관심도 증가했다.

따라서, 1840년대부터 1900년대 초까지 미국 역사의 대부분은 산업적 농업적 기반과 광범위한 지리적 문화적 범주를 가진 사회주의, 급진주의 그리고 포퓰리즘 - 폴라니가 말하는 대항운동 - 이 서로 얽혀 존재했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민주당과 공화당에 도전할 수 있는 유럽식 국민 정당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의 사회주의 존재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상태로 남았다. 이에 IWW 설립 1년 후인 1906년, 독일 학자 베르너 좀바르트 (Werner Sombart)(1863~1941)(우리에게 익숙한 ‘후기 자본주의’ 그리고 “창조적 파괴’ 용어를 만들었다: 역자 주)는 그의 1905년 에세이,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는가? (Why Is There No Socialism in the United States?)’ 영어판을 출간하면서 미국의 번영이 사회주의 정치를 선점했다고 주장한다.

 

베르너 좀바르트 (Werner Sombart)(1863~1941)

 

좀바르트의 선언에도 조직화된 미국 사회주의는 전례 없는 전성기에 도달한다. 1911년 11월, 1,141명이 넘는 사회주의자들이 36개 주 324개 지방 자치 정부에 근무했다. 1912년, 유진 데브스는 4번째 대선에 도전하면서 총 투표의 6%인 90만 표를 획득했다. 같은 해, 좌파 성향의 제3 정당들에 대한 투표는 치솟아 거의 20%에 육박했다. 그럼에도, 학자들과 정치 평론가들이 여전히 불가능 테제를 들먹이자 분개한 사회주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John R. McMahon은 1912년 뉴욕 트리뷴에 다음과 같이 기고한다:

“사회주의가 무엇인가? 악마가 하루 쉬는 동안 무종교, 키메라(chimera), 아나키, 자유로운 사랑 등을 섞은 혼합체를 발명한 후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옛날 답변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사회주의의 진정한 정의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한다….. 사회주의는 모든 것이다: 따라서 아무것도 아니다. 사회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존속한다.”

IV. 정부의 보이는 손: 미국 사회주의를 불가능하게 만들다 (GOVERNMENT’S VISIBLE HAND: MAKING AMERICAN SOCIALISM IMPOSSIBLE)

만약 사회주의를 한편에서는 사회주의 이론을 그리고 다른 한 편에서는 조직된 노동에 기반을 둔 특정 유형의 정당으로 정의한다면, 1900년경부터 1920년까지 불가능 테제는 틀렸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이후부터는 옳게 ‘되었다’. 이처럼 애초 허위 주장이 스스로 참된 주장이 되는 부트스트래핑(bootstrapping) 형태는 설명할 가치가 있는데, 이는 다음 섹션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이번 섹션에서는 최초 제기된 질문으로 돌아가자: 역사적 증거가 반대임을 보여주지만, 미국 민주사회주의의 불가능성이 그 자체 사실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갖추어져야 할까?

완벽한 해답은 아마 학계 내부적 역학 관계로 넘겨져야 할지 모른다 - 역사적 학문(scholarship)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 어떤 조건 생산되는지; 비슷한 질문이 저널리즘과 대중 매체에도 던져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미국적(American)이고 무엇이 아닌지에 대한 정의를 제도화할 수 있는 정부 기관과 정치 관료들의 특별한 권력을 다루지 않고는 답을 완성할 수 없다.

미국 사회당(The Socialist Party of America:SPA)(1901~1972)의 역사가 미국 민주 사회주의의 모든 역사는 아니지만, 불가능 테제의 사회적 기원에 대해 우리에게 뭔가 말해 줄 수 있다. 사회당이 쇠락한 이유들 - 종파주의, 내부 급진주의, 인종적 에스닉 분열, 정부 탄압, 전쟁 반대 그리고 cooptation - 은 서로 분리하기 힘들다. 일부는 미국 다수결 제도가 처음부터 사회당을 망쳤다고 주장하고; 다른 이들은 노동당의 노동쟁의 의존성 그리고 급격한 산업 변화로 사회주의의 사회 현상 인식 방식이 제한되면서 유권자 기반이 미국 북부와 중서부 고립된 지역으로 이동했음을 지적한다. 다음 섹션에서 다룰 다른 의견은 분열, cooptation 그리고 특히 민주당에 의한 흡수라는 내부 축에 초점을 맞춘다. 사회당의 쇠락은 높은 비율의 이민, 급진적 노동운동 그리고, 아마 가장 중요하게도, 정부의 강력한 탄압이라는 삼중고 속에 진행되었다.

 

1919년, 오버맨위원회 (Congressional Overman Committee). 가운데가 오버맨이다.

 

40년 이상의 유례없는 이민, 특히 아일랜드, 독일 그리고 영국으로부터의, 이후 제정된 아나키스트(다른 그룹과 더불어)의 이민을 금지한 1903년 이민법은 정치적 신념에 근거해서 이민을 제한한 첫 국가법이 되었다. 1917년 이후, 러시아와 동구 유럽으로부터의 새로운 이민자 유입과 노조의 성장 시기에 미국 정부는 미국 사회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을 적극 추적했다: 사회당의 반전 캠페인은 의회 간첩법에 저촉되다는 명목으로 사회주의와 좌파 출판물에 대해 검열을 하고 금지했으며, 당수 유진 데브스를 포함해서 미국 사회주의자와 좌파들을 기소하여 감금했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1919년, 오버맨위원회 (Congressional Overman Committee) (오버맨은 이 위원회 민주당 소속 의장의 이름이다: 역자 주)를 설립해서 미국 산업계와 정치계에 독일 그리고 볼셰비키 동조자가 있는지 조사했다.

오버맨위원회가 연방 권력을 국내 사회주의자와 노동 운동으로 확대 사용한 것은 지정학적 보완 차원이었다: 코민테른(1919년 설립)을 통한 소비에트 공산당의 권력 확장은 국제 무대에서 사회민주주의 정치를 분열시켰다. 1919년의 대규모 파업, 새로운 미국 공산당의 창당 그리고 1919~20년의 적색공포(Red Scare)를 통해 사회주의 운동은 분열되었다. 연방 정부의 이민법은 국적(nationality)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고, 엄격한 이민 쿼터를 적용하면서 아시안 국가 출신의 이민을 금지했으며, 남부와 동부 유럽 이민자 대신 북부와 서부 유럽 이민자를 선호한 결과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 경향은 유지되어 이민은 감소했다. 한편, 오버맨위원회의 영구적 후계자로서 공식적으로는 비미 활동 위원회 (HUAC: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로 명명된 다이스위원회(Dies Committee)는 사회주의의 비미국성 (un-Americaness)을 국가의 공식 용어로 사용하였다. 그때까지의 오랜 역사에도, 미국의 사회주의는 강제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적색공포(Red Scare)

 

V. 과거 사회주의: 내부 분열, COOPTATION, 흡수 (SOCIALISMS PAST: INTERNAL DIVISION, COOPTATION, ABSORPTION)

따라서 미국 사회주의가 전시 말엽부터 붕괴한 것에 대해 아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뉴딜의 농업, 산업 그리고 노동 정책은 조직된 노동을 지원했지만, 또 내부 분열도 조장했다. 미 남부의 인종적 카스트 시스템(그리고 미 북부는 공모자로 가담)을 보존하려는 남부 민주당원들의 노력이 가미된 배타적이며 낙인을 찍는(stigmatizing) “복지(welfare)” 정책과 어울려 이 분열 정책은 깊숙이 인종화된 색채를 띠었다. 한편, 1930년대와 2차 대전 후 초반 사이에 미국 좌파와 사회주의 정치는 부분적으로 억압받았고, 보다 인종적으로 포용적이고 평화적인 뉴딜 “진보주의(progressivism)” - 특히 헨리 월리스(Henry Wallace)(당시 민주당의 대표적 진보 정치인으로 부통령, 농무부 장관 그리고 대통령 후보까지 되었던 인물: 역자 주)와 같은 인물과 연계된 - 가 쇠퇴했을 때에도 부분적으로 ‘자유주의적(liberal)’ 민주당에 흡수되었다.

 

1938년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헨리 월리스(Henry Wallace)(1888~1965)

 

한편 의회 내에서, 이민 제한(이른바 1952 이민과 국적법)은 정치 활동과 이데올로기를 배척의 중요한 기반으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두 번째 적색공포(Red Scare)(1950~1954) 기간 매카시 재판의 오싹한 효과와 함께, 국가 권력에 의한 미국 사회주의의 불가능(impossibility-by-fiat)은 그때까지 사회주의가 얼마나 가능하게 보였는지와 관계없이 굳어졌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신좌파(New Left) - 청년 주도의 민권, 페미니스트, 반전 그리고 환경 운동들 -는 1910년대 좌파가 달성한 수준의 조직력과 선거 파워에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 1968년, 미국 사회당은 민주당 내에서 활동한다는 공식 정책을 채택했으며 공개적 사회주의 노력은 오랜 취약점 (인종적/에스닉 그리고 젠더 분열; 연합 구축의 무수한 문제)과 냉전의 그늘서 미국 사회주의 정치에 대한 상상 불가 탓에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졌다.

그럼에도, 1940년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기간, 좌파 정치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그 전임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불가능 테제에 저항했다. 그들은 또 마이클 해링턴(Michael Harrington)에 의해 조직된 민주사회주의 조직위원회(Democratic Socialist Organizing Committee:DSOC)와 New American Movement(NAM)를 병합하여 1982년 미국 민주사회주의자들(Democratic Socialists of America:DSA)을 설립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민, 경제 및 사회 법률 제정을 주도했다.

VI. 가능성 테제 - 혹은, 불가능 무시 (THE POSSIBILITY THESIS — OR, UNTHINKING IMPOSSIBILITY)

세계 역사상 가장 큰 금융 위기(2007~08년)에 이어, 우리는 민주사회주의 정치의 부활이라는 또 다른 폴라니의 순간(Polanyian moment)을 맞이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불만의 첫 번째 희미한 빛은 틀림없이 오랫동안 지평선에 있었다. 1990년대, 두 거대 정당에 대한 대중의 애정이 식으면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반대에 선거 운동을 거의 전적으로 의지했던 로스 페로(Ross Perot)와 같은 제3자에 대한 투표가 증가했다: 급진적 학계 역사가와 인문학 학자들이 대중적 추종자를 얻었다; 세계 정의를 위한 새로운 캠페인이 등장했다. 9/11 이후 몇 년 동안 “Netroots” (Internet과 grassroots의 합성어로 온라인 미디어를 통한 정치 활동을 의미: 역자 주) 진보주의자와 활동가들이 부상했고; 금융위기 몇 년 동안 Occupy 운동, 인종 정의를 위한 새로운 운동 그리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좌파 진보 정치인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을 목격하였다.

 

2018년, 오카시오 코르테즈가 Netroots Nation annual conference에서 연설하고 있다.

 

예상했던 것처럼 불가능 테제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학계, 정치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서 다시 돌아왔지만, 가장 최근 사례는 대통령 자신(도널드 트럼프: 역자 주)이다. 트럼프 집권으로 DSA는 최근 몇 년 놀라운 성장을 보였다. 창립 이후 6천 명에서 1만 명 사이의 회원 수를 맴돌았는데, 2016년 11월부터 2017년 7월까지 13,000명 이상의 신규 회원이 가입했으며 이들 대부분은 18세에서 35세 사이다 (2021년 8월 현재, 92,000명 회원:역자 주)

불가능 테제는 그 테제가 부정하는 바로 그것의 징후다: 사회주의 정치는 이 나라 역사적 그리고 당대 정치 구성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구성 요소다. 그렇다면 질문은 왜 “미국에 사회주의가 없는가”라 아니다; 질문은 왜 미국 사회주의 정치가 사회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완고한 고집을 낳느냐 하는 것이어야 한다.

위 논의는 불가능 테제가 최소한 네 가지 사회적 기원이 있음을 시사한다. 첫 번째는 변화무쌍하고 투과성이 있는 정당들로, 1870년대 이후 공화당은 민주사회주의를 고아로 만들었고 민주당은 민주사회주의의 비미국성 우화를 부분적으로 역사적 삭제라는 수단을 통해 그리고 부분적으로 cooptation을 통해 강화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두 번째 출발점은 듀보이스(W. E. B. Du Bois)(미국의 사회학자, 사회주의자, 역사가, 민권운동가로 흑인으로서 최초로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역자 주)를 포함한 역사학자들과 인종학자들에 의해 치열히 검토된 바로 “인종 간 장벽(color line)”(노예제 철폐 이후에도 미국에 존속하는 차별적 인종 분리 현상: 역자 주)의 끈질김, 비타협성 그리고 복잡성이다. 이 인종 간 장벽은 미국 정치를 계속해서 왜곡하고 분열시켜 완전한 민주적 참여와 연정 구성을 저해함과 더불어, 대중을 두려움과 희생양 정치 방식에 민감하게 만든다. 세 번째 기원은 1910년대 이후부터 그 중요성이 특히 명확해진 것으로, 사회주의 정치에 급진적 비미국성(un-Americaness)이라는 주홍 글씨를 새기기 위해 정부가 권력을 사용한 것이다. 네 번째 기원은 세 번째 기원과 상관이 있다: 사회주의에 대한 비미국성 주홍 글씨로 민주사회주의 정신을 가진 정치와 정책들이 어쩔 수 없이 다른 이름을 사용하거나 혹은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반대편이 명명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1959년, 듀보이스가 중국에서 마오쩌둥과 만나고 있다.

 

아마 인간 활동의 다른 영역과 달리 정치에서는 가능성의 언어(language of possibility)가 모든 것이다. 이제 미국 민주사회주의의 역사를 말하고 또 말함으로써 불가능 테제를 불식시키고 시장(market) 탓에 희생된 인간의 안녕과 민주적 제도에 대한 민주사회주의의 비판적 관심에 대한 본격적 논의의 길을 열어 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