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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머리말
에세이 중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다. “자유는 부를 생산하고 그 부는 자유를 파괴한다 (Liberty produces wealth and that wealth destroys liberty).” 좌파는 이 문장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통제되지 않은 부의 축적과 분배 과정 탓에 인간, 특히 노동 계급이 경제적 자유를 포함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으므로 이 부의 축적과 분배 시스템에 대한 전면적 변화를 요구한다. 이에 반해 경제적 자본가는 물론 정치적 리버럴은 이 ‘통제되지’ 않는 독립적 개인의 자유 덕분에 궁극적 자유의 기초가 되는 물질적 부가 가능하다는 입장에서, 이 개인주의에 기초한 자유를 손대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지금까지 내가 접한 좌파의 주장에서, 지극히 제한되었지만, 자본가와 리버럴의 ‘자유는 부를 생산한다’는 주장에 대한 결정적 카운터 한 방을 발견할 수 없었다. 대신 그들은 구관의 폭정 을 지적 - 지적 자체는 맞다 - 하는데 집중하며 새로운 사또의 부임을 강력히 선동하지만, 부의 창출 관련해서는 나중에 ‘구관이 명관이여’라는 한탄을 백성이 나중에 해도 별로 할 말이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분명 내가 뭔가를 빠뜨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가 궁금해하는 이 대목을 해결책을 포함한 패키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면으로 다룬 글을 이른 시일 내 접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데 다행히 이 책 다음 섹션이 사회주의 대안이므로 기대해 본다.
에세이 저자 Steve Fraser는 미국 노동사와 자본주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연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개인적으로 그의 이번 에세이는 솔직히 그다지 즐기며 읽지도 번역하지도 못했다. 한마디로, 난삽했다. 이 책 초기 몇 에세이 저자가 그랬는데 이 저자 역시 독자가 자신의 논리 전개를 잘 따라오게 하는 배려심 없이, 논리의 흐름이 아닌 자신의 의식 흐름에 따라 자신의 지식 창고에서 즉흥적으로 개념과 주장을 꺼내어 나열하는 식이다. 글 자체도 사회과학적 표현이 아니라 은유적 표현이 많아 이 번역을 읽을 분들에게 미안한 맘이 들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음을 미리 양해 구한다.
사회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Socialism, Capitalism, and Democracy)
Steve Fraser
헌법을 한 번도 읽어본 적도 그리고 따를 생각도 없을 것 같은 흉악범 억만장자(도널드 트럼프 지칭: 역자 주)를 지도자로 모시며, 시민 연합 (Citizens United) (보수적 시민단체로 기업이 특정 후보 당선을 위해 지출하는 비용은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는 2010년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 내어 미국 선거판에 기업 로비 자금이 밀려 들어오는 계기를 마련했다: 역자 주)이 ‘1인 1표’를 조롱하는 정실 자본주의 (crony capitalism) 늪에 빠진 시대에 살면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같은 정치 세계에 공존할 수 있다는 생각은 기분 더러운 농담처럼 보인다. 현재 형태의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의 무덤이 되었다.
최근 민주사회주의의 재등장은 죽은 자의 부활을 의미한다. 오랜 시간 묻혀 있다가 다시 번창하고 있는데, 그 원인의 상당 지분은 그것이 사회주의의 길잡이여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특히 경제민주주의의 회복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많은 관찰자는 버니 샌더스와 그의 운동들이 지향하는 민주사회주의가 전통적인 사회주의로 이해되기보다는 뉴딜의 확장된 버전처럼 보인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것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배신인가 현명한 전략적 조치인가? 사회주의에 대한 고질적인 미국 알레르기를 고려한 불가피성인가 아니면 이전에 존재했었던 사회주의들의 심각한 범죄를 피해 가려는 선택인가? 잠시 거쳐 가는 역(station)인가 아니면 미루어졌던 꿈의 마지막 안식처인가? 이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대신, 지금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재검토할 가치가 있다: ‘자본주의는 본질에서 민주주의의 치명적 적이다.’ 아마 일부 사람은 이런 시도를 삐딱하게 바라볼 것이다. 기존 자본주의가 민주적 사회의 모든 징후를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있는 것이 매일 증명되고 있는 현 시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도 오늘날에도 이 명제는 지속해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훼손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미국의 사회주의는 차고 넘치는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는데 이 중 가장 집요하고 저항하기 힘든 적이 ‘민주적 자본주의(democratic capitalism)’신화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민주적 자본주의를 탐구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방식으로서 민주적 사회주의 (democratic socialism은 줄곧 ‘민주사회주의’로 번역해왔는데, 이 에세이에서 democratic capitalism을 민주자본주의라고 번역하지 않고 민주적 자본주의라고 번역했기 때문에 문맥에 맞추어 민주적 사회주의로 번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자 주)를 구별하거나 혹은 구별해야 하거나 혹은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국가적 신화(CAPITALISM AND THE NATIONAL MYTHOS)
“자유(liberty)는 부(wealth)를 생산하고 그 부는 자유를 파괴한다.” 미국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금권정치에 대해 널리 알려진 비판가이자 미국 최초의 대호황 시대(Gilded Age: 남북 전쟁 후 호황기:역자 주) 반독점 운동의 지도자였던 헨리 데마레스트 로이드 (Henry Demarest Lloyd)(1847~1903)(진보적 정치활동가이자 탐사보도 저널리즘의 선구자: 역자 주)는 이렇게 말했다. 문장의 후반 명제는 로이드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자명한 진실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의 신조와 자본 축적에 따른 극심한 경제적 정치적 비용에 대한 무감각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이 사회 수학 공식의 첫 번째 명제 - 자유는 부를 생산한다 -이다. 결국, 우리는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유례없는 풍요로움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자유의 땅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중 일부는, 현재 “조국(homeland)”이라고 부르는 곳의 기원과 발전에 대한 이야기에서 습관적으로 자본주의를 다루지 않는다. 통상, 이 나라 역사의 다른 부분들이 우선시된다. 가장 좋아하는 서사는 아마 무엇보다도 서구 세계 자유와 민주주의의 인큐베이터로서 신세계(New World)일 것이다. 다른 서사는 미국이 국가의 국가로서 세계 각지로부터 온 사람들을 포용하는 것을 강조한다. 또 다른 서사는 영웅적인 것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용맹함과 대담함이 요구되는 전설적 여정으로서 개척지 정복을 추적하기도 한다. 이런 서사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은 기업가적 천재성, 위험을 감수하는 대담성 그리고 토착적 창의성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비즈니스 문명사회의 땅이라는 미국의 신격화(apotheosis)이다. 마지막 서사는 정말로 자본주의의 축제로 번졌다.
이 모든 서사는 그들 나름의 진실을 담고 있다. 미국이 특정 민주주의 형태와 관습의 선봉에 있었으며, 시민 자유의 개념을 육성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많은 대중이 실제로 미국에 모여들었고, 그들이 몰려든 이유와 관계없이 그들의 존재는 미국이란 나라의 자의식에 독특한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를 부여했다. 만년 이상 오래된 원주민 사회가 있었음에도 모든 자연적 인공적 장애물을 개척한 미국인이라는 오글거리는 자기도취 측면이 분명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국민(we the people)”은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고 기업가적 정신에 관해서는 불가사의할 정도로 재능이 있다는 국가적 나르시시즘의 자명한 한 형태다.
두말할 것 없이, 이 모든 서사는 더 추악한 이면을 생략하는 경향이 있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선별적 분배 그리고 이것들에 대한 빈번한 훼손 사례; 만성적 낙인찍기, 스테레오타입화 그리고 “huddled masses”(직역으로는 ‘옹기종기 모여있는 군중’이란 뜻으로, 역사적 상황에서는 1880년대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들을 지칭: 역자 주)의 배척; 착취자, 토지 몰수자 그리고 말살자로서의 선구자;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빈번한 기업가적 환상의 붕괴 그리고 그에 따른 삶과 생계의 추락; 그리고 인간 노동에 대한 십일조 징수와 미국 자본주의를 특출난 세계적 파워로 만들기 위한 포도밭에서 일했던 많은 사람의 존엄성에 대한 모독.
이런 오점과 불평에 불구하고 이 기원 신화는 일정 수준의 흡인력을 유지한다. 게다가, 이런 모든 서사는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라는 관례 법전(rubric) 아래에 놓인다. 미국 예외주의는 초월적 서사(meta-tale)로 작용한다: 우리의 자유로운 사상가와 약탈자들, 우리의 본능적 민주주의 옹호자와 이민 난민들, 우리의 개척자들과 모험가들이 떠났던 구세계(Old World) 유럽의 문명을 수 세기 동안 괴롭혔던 ‘사회적 적대 관계’로부터 신세계를 예외로 만들었다. 이 미국 예외주의는 유토피아적 환상으로서 미국 심장부 중심에 자리 잡아 왔다. 이 미국 예외주의에서 사회적 계층과 이 계층 간 부득이 조장되는 치명적 대립은 미 대륙의 충분한 땅과 천연자원 덕분에 가능해진 무한한 자기발전에 의해 해소된다.
만약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기회, 기업가적 활력, 물질적 풍요 그리고 경제민주주의를 선도할 것이다. 갈등은 그 추한 얼굴을 드러낼 때도 있겠지만, 세계를 누비는 미국의 예외적 커리어란 메인 도로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난 우회도로일 뿐이다. 주위를 끌 만한 심각한 사회적 불협화음은 진로를 변경함으로써, 다시 유토피아 프로젝트라는 메인 로드를 주행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랜드 캐니언 크기의 괄호 안에 이 나라의 “예외주의”의 추악한 예외들을 모두 집어넣는다면 위 로이드의 등식 좌측 편(자유는 부를 생산한다)을 부정할 수 없다. 자유는 부를 생산했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아메리칸드림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그만큼 설득력을 얻고 지속하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더욱이, 그 부는 무생물 더미 혹은 그에 상응하는 금전적 등가물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유기적 혹은 무생물 자연을 판매 가능한 상품으로 전환할 수 있는 모험을 할 수 있는 자유도 영적 묘약 역할을 해 왔다.
자립 행위와 시장, 자연, 성적 충동(libido)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지배에 닻을 내린 자유(freedom)는 최음제처럼 취할 수 있다. 설사 자유의 사회적 영향력이 줄어들더라도 자본 축적이 점점 더 강력한 정복자만의 독점적 영역이 되어 가면서 꿈은 지속한다.
물론, 그 시대 반독점 운동에 투자된 엄청난 에너지와 대호황 시대(Gilded Age) 화려한 외관을 무색게 하는 광범위한 반자본주의 정서를 고려했을 때, 로이드의 “부가 자유를 파괴한다"라는 선언도 맞다. 그럼에도, 자본주의의 유동성, 기존 경제 기업의 형식들과 구식 기술을 쓸어버리려는 구조적 충동 덕분에 꿈을 새롭게 할 기회들이 주기적으로 등장했다. 남북전쟁 이전부터 시작해서 대공황 때까지 규칙적으로 지속된 경제의 주기적 호황과 불황을 통해 이는 사실로 드러났다. 이런 식으로 바닥을 평평하게 하는 것은 많은 노력형 기업가(수백만의 노동계급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를 짓밟으며 이들 파산한 기업의 자산을 더 강하고 무자비한 약탈자들이 싼값에 가져갈 수 있는 전리품으로 만들었다. 한편 이 혼란은 새로운 기업가적 영웅을 꿈꾸는 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해 주는 듯했지만, 이들의 사회적 지위 상승의 야망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종류의 야망은 원래 대호황 시대에도 왕성했고 두 번째 대호황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우리 시대에도 살아있다. 자유시장 이데올로기 덕분에 정부, - 특히 규제에 대한 적대감이 대중들 사이 널리 퍼져 있는 현재 - 신자유주의, 분권화 그리고 “유연한 자본주의”로 특징지어지는 우리 시대에 중소기업의 확산은 두드러져 미국 기업 80% 이상이 소규모, 가족 소유로 전체 노동력의 3분의 2 이상을 고용하고 있다. 이 지점이 꿈이 여전히 살아 있는 대목이다. 외부 권위라는 올가미를 벗어던지는 것이 개인주의 형이상학의 핵심이며 꿈의 일부다.
공공 생활로의 관문이 수백만 명의 시민에게 갈수록 닫혀가는 것처럼 보이는 와중에도 기업가와 기업가 지망생들은 국가의 천부권이라고 생각하는 이 경제적 민주주의를 축복한다. 이것을 해로운 형태의 “가짜 뉴스” 혹은 신화적 교란으로 일축하기 전에 이것이 에이브러햄 링컨이 말한 미국의 전망이란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민주적 자본주의의 두 삶의 형식 (THE TWO LIFE FORMS OF DEMOCRATIC CAPITALISM)
독립적이고 평등한 가계(household) 경제 - 가정 자본주의 (family capitalism)라고도 불린다 -에 대한 비전은 건국 이전 존 스미스 선장이 신대륙을 조사한 후,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동과 땅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될 수 있다"라고 말했던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59년 Wisconsin Agricultural Society의 유명한 연설과 내전 발발 후 상원에 보낸 첫 연례 메시지에서 링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주 근원이 노동이라는 것에 세계는 동의한다.” 링컨의 이 말은 땅이 되었든 가계 기업이 되었든 “역량 (competency)”을 향한 중산층의 열망을 찬양하는 “노동가치론(labor theory of value)”이었다. 고용된 노동자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링컨은 “그 누구도 노예 상황만큼 나쁜 혹은 더 나쁜 조건에서 평생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노동과 자본의 관계가 종속적 그리고 우월적 지위 관계인 것은 사실일 수 있지만, 그 상태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예외적인 것이었다. 존 스미스처럼 링컨은 미국을 “모든 생산물을 자기가 가지면서 한편으로는 자본의 호의도 다른 한편으로는 고용자나 노예의 호의도 구하지 않는” 자신을 위해 일하는 가족들의 땅을 상상했다. 링컨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세상의 신중한 무일푼 초보자는 임금을 받기 위해 일을 잠시 하면서 자신을 위한 도구나 땅을 사는 데 필요한 잉여금을 저축하고… 얼마 동안 혼자서 일을 한 후… 마침내 그를 돕기 위해 다른 초보자를 고용하게 된다.” 이럴 경우 모든 사람은 결국 자신의 독립을 보장하는 ‘역량’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링컨 버전 가족 자본주의는 따라서 분명 “노동가치론”을 담고 있었을 뿐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해방론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민이 농장이나 공장 소유자에게 의존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의미하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번창하는 평등 사회를 예고하는 약속 어음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19세기 노동기사단( Knights of Labor)과 인민당(Populist Party) 만큼 강력한 산업계 강도 거물들은 민간 기업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위한 남부 주 연합(cooperative commonwealth)을 구상했었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capitalist democracy)의 첫 번째 삶의 형식이다. 링컨 버전은 자애롭고 심지어 유토피아적이다. 그러나 특정 조건 하에서, 그것은 민주적 본능을 잃어버린 채 오늘날 도널드 트럼프가 병적인 화신이 되어 보여주는 가부장적 권위주의로 빠질 수 있다. 심지어 링컨 당시에도 많은 이들이 가족 자본주의는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강력한 정치적 신화로서 그리고 경제적 재생산의 물질적 형식으로서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보수를 잘 받든 못 받든 종속적 프롤레타리아 신분에서 벗어날 기회가 거의 제로에 가까움에 따라, 모든 사람을 부르주아 맹아 형태로 보는 이 전망은 철 지난 희망이 되었다. 임금을 받는 노예가 존속할 것이라는 충격적 뉴스는 나라를 계급 갈등의 지옥으로 만들었다. 백 년에 걸친 금권 정치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그리고 “계급에 대항하는 대중”의 전쟁은 링컨이 사망(1865년) 할 때부터 대공황(1929~1939)을 거쳐 그 이후에도 지속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는 새로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삶의 형식이었다. 뉴딜(1933~1936)로 가장 잘 알려진 이것은 헌법과 복지국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새로운 삶의 형식이 성취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그것은 직장을 민주화했고, 단체교섭권을 합법화했으며, 한때 절대왕정처럼 난공불락의 절대주의가 팽배했던 민간기업 안에도 법치주의를 확대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산업 민주주의는 명령과 복종이란 위계를 평준화하지 못했다. 소유권을 민주화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회적 자원을 배정하는 민간 자본의 본질적 특권을 그대로 남겨 두었다.
뉴딜 질서는 선거 시스템에 영향을 미쳐, 특히 이전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노동계층 사람들이 민주당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편 이 새 정치 질서는 노동 계급의 요구와 욕망을 대변하는 독자적 정치 수단을 만들기 위한 초기 노력을 중단시켰다. 대신, 계급적 이해관계는 이익 집단의 정점에 있는 비즈니스 시스템에 충성하는 정치 계급을 통해 전달되었다.
뉴딜은 자유시장을 규율하면서 그것이 초래할 혼란을 줄였다. 그러나 이 규제 국가는 자유 시장이 여전히 나라 경제 운명의 결정권자라고 간주했으며, 다만 경쟁력 있는 자본주의의 필수적 요소들이 존속할 수 있도록 더 단단한 프로토콜을 수립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보다 더 많이, 규제에 대한 충동은 자기 이익과 체계적 이익을 위해 안정적 시장을 필요로 했던 최고 기업과 금융 기관에서 시작되었다.
현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초기의 야만적 다윈주의를 문명화했다: 최저 임금, 최대 노동 시간제한, 실업 수당과 연금 그리고 극빈층을 위한 기초 복지 혜택은 구식 자본주의의 내재적 불안정성에 대한 보호막을 설치했다. 그러나 복지국가는 의존적 프롤레타리아와 실업 예비군을 떠맡았다. 복지국가의 관료는 사회공학 자격증을 소지한 채 문화적 우월성으로 무장한 징계 감독관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그들 “고객들(clientele)”과 보호자 관계를 확고히 했다.
케인스주의 경제 기법 - 통화 및 재정 정책의 활용 - 은 자본주의의 고질적 불안정을 야기하는 비즈니스 사이클을 완화하기 위해 고안되었지만, 결코 이 비즈니스 사이클을 제거하려는 척하지 않았다. 이 기법은 세수의 양과 세원을 조종하고 소득을 적당히 재분배하며 공적 사적 신용 활용을 섬세하게 조정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지, 자본의 흐름을 제어하기 위해 설계된 것은 아니었다. 이 케인스 도구 상자는 대량소비 자본주의라는 기본 구조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그 유효 기간이 종료되었다. 탈산업화, 탈 노조화 그리고 부채 종속 상태는 우파 보수주의가 아닌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신자유주의 버전의 작품이다.
뉴딜 질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그 한계를 강력하고 적절하게 비판했다: 여성과 소수 민족을 보호에서 배제한 것, 짐크로 법에 대한 묵인, 남성 고용 그리고 사회 보험과 구제의 연계 방식, 저비용 주택 제공에 대한 지지부진한 노력, 의료보험 제공 실패 등. 이런 심각한 프로젝트 미완성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들은 이 새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미완성 비즈니스로 생각해야 한다. 이 결함 중 일부는 그 후 특히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1964~1865년, 당시 대통령 린든 존슨에 의해 시행된 가난과 인종 차별을 없애기 위한 프로그램: 역자 주) 기간 부분적으로 개선되었다. Medicare(노인 의료 보험 제도)와 Medicaid(저소득층 의료 보장 제도)는 사회 복지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치 영역에서는 그간 소외된 자에게 헌법적 보호와 공식적 평등을 확대하는 민권법이다. 이런 것들이 뉴딜 시대 혹은 오늘날 달성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민주사회주의가 아닌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CAPITALIST DEMOCRACY VS. SOCIALIST DEMOCRACY)
이 두 가지를 융합하려는 현대의 경향은 뉴딜 질서가 태어났을 때 일어났던 사건들을 반영한다. 뉴딜이라는 획기적 개혁을 주도한 급진적 에너지의 대부분은 대호황 시대 이후부터 장기간 공적 삶을 관통했던 반자본주의 정서에 기인한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임금노동을 비민주적이고 비참하며 본질에서 금권적이라고 비난한 정치적 사상 계열의 일부였다. 뉴딜의 탄생에서 산파 역할을 한 것은 자본주의가 말기 위기에 접어들었다고 많은 사람이 믿었던 당시의 반자본주의 흐름이었다. 그러나 뉴딜 질서는 사회주의 더 나아가 반자본주의의 무덤이기도 했다.
급진적 반자본주의 흐름은 수면 위로 드러났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조직 형성기 산별노조협의회(CIO)를 통해 산업노동자의 봉기를 주도한 전투적 노조원들은 공장을 장악하려 시도했고 때로는 성공하기도 했다. CIO는 제도의 한 축으로 모든 기업 업무에 대해 공무원, 회사 측 그리고 노동자 평의회가 함께 결정을 내릴 것을 촉구했다. 테네시 강 유역 개발 공사(Tennessee Valley Authority:TVA)(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테네시 강 유역 종합 개발을 목적으로 설립한 연방정부 기관:역자 주)와 다른 공공사업들은 비록 뿌리는 얕았지만, 경제에 국가계획 개념을 이식했다. 실업자들을 동원하여 문을 닫은 공장을 열고 정부의 지원으로 이를 운영하게 하여 그 생산물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실업과 빈곤 문제를 해결하자는 제안이 제기되었다. 비록 뉴딜 정책의 좌파 진영에 곧 흡수되기는 했지만, 독자적 노동자 정당들이 결성되었다. 노먼 토머스(Norman Thomas)와 사회당( Socialist Party of America:SPA)은 그들이 추구하는 것과 뉴딜 정책을 계속 구별했다.
이 모든 것이 사라졌다. 무수한 원인이 있지만, 그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아마 민주적 자본주의에 대한 링컨식의 구식 꿈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한 것일 것이다. 사유재산의 독립 대신, 새로운 꿈은 대량 소비 자본주의라는 지형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링컨이 추구한 가정의 역량과 적절한 독립성은 “임금 노예(wage slavery)” - 고통스러움 때문에 더는 사용되지 않는 용어 - 가 대부분 사람의 의존적 상황을 여전히 반영하는 현재지만 여전히 달성될 수 있다. 대량 소비 - 소비자 민주주의 - 와 소비자 문화를 매개로 대중 속에 녹아들어 간 이 환상은 자기 창조(self-invention)라는 내부적 승리를 위한 공간을 만들었고, 실제로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재창조하는 여러 행위를 위한 공간을 만들었다. 이 소비문화는 지난 세대에 걸쳐 심화한 불평등의 깊은 간극에 의해 상처받은 자존감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실생활 모독이란 상처를 달래준다. 역사적 연금술 덕분에, 계급과 계급 위계는 사라지거나 위대한 미국 중산층이란 계급 아닌 계급으로 분해되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두 번째 형태는 헌법에 복지국가 그리고 대량 소비를 더한 형태로 재편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어떤 표현이 우세하든 상관없이(오늘날 둘 다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우리가 자유시장보다 뉴딜을 아무리 선호해도 그 둘은 특정 본질을 공유한다. 둘 다 자본, 제약은 있지만,에 대한 재산권에 뿌리를 두고 있다; 둘 다 재산권의 극복도 그 우선적 지위에 대한 도전도 고려하지 않는다. 민간 종교로서, 둘 다 개인의 권리에 기초하고 있으며 집단의 권리에 대해서는 거의 또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형식적 평등은 이 두 민주주의의 특징이며 근본적 개인주의에 매우 잘 부합하기 때문에 기회의 평등으로 만족한다. 반면, 조건의 실질적 평등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매우 불편하게 만든다.
이 두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버전 모두 민주적 참여는 대부분 선거 영역에 국한된다. 이 둘은 모두 전성기에 사회주의가 보여주었던 보다 강력하고 실질
적인 민주주의 특징에 대해서는 불편하게 느낀다: 미국에서 유사 형태가 등장했던 소비에트 혹은 노동자 평의회; 민족, 인종, 성별, 기술 그리고 경제 영역을 초월하여 세력을 확장하면서 자신을 대기 중인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로 묘사했던 Wobblies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IWW (세계 산업노동자 연맹)의 별명)를 통해 대표되는 생디칼리슴 ; 세인트루이스, 시애틀, 미니애폴리스, 오클랜드와 같은 곳에서 자생하며 의료와 위생부터 치안 및 교통에 이르기까지 준 정부 조직으로 기능을 수행한 총파업 위원회들; 산업 시설, 소매점 그리고 그 외 기업을 점령한 상태에서 이들 직장 내 생활을 감독하기 위한 민주적 기구를 만들었던 연좌 파업; 전국에 걸쳐 형성, 소멸 그리고 재탄생을 거듭한 아나키스트 협동조합 공동체 들.
이런 것들은 전술 이상의 것들로 사회의 생명 기능을 이어갈 준비를 하는 경제민주화의 태아로 여겨졌다. 오늘날, 선거판에 대한 집착은 마치 선거가 민주주의가 태어나고 민주주의가 속한 곳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투표는 대중 참여의 가장 소극적 형식이고 가장 분열적이며 개인적이다. 민주주의의 기본적 기구(apparatus)를 유지하는 한, 투표는 자본주의와 어울린다. 왜냐하면, 투표는 사적 기업과 사적 자본 축적을 전제로 하는 사회에 자명한 개인주의를 반영하고 강화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민주사회주의는 다른 주제를 상상한다: 사회의 중요 기능을 적극 지휘하는 것에 관여하는 사회 기구. 사회적 재생산의 지렛대에 참여하는 것은 선거판에서 제공해 주는 것보다 견고한 권력의 발현이자 민주사회주의 미래의 리허설이다.
글로벌라이제이션에 대한 왈가왈부에도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민족국가라는 틀 안에서 작동한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서 국제주의(internationalism)는 공허한 경건함이며 미국 경우 세계 지배를 의미할 뿐이다. 민족국가는 한때 종족, 마을, 민족 그리고 믿음 간 분열을 극복한 많은 경우 피를 통해 달성한 위대한 업적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민족국가는 많은 동지를 얻었으며 자본주의가 번창할 수 있도록 시장 확대를 위한 제도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게다가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비즈니스는 통상 평화와 안정을 추구한다; 자본주의 국가 간 무역은 국제적 긴장 완화 역할을 기대하게 한다. 그러나 이미 오랜 기간 민족주의는 유통기한을 지나 대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민낯의 민족주의가 불평등한 국가 간 국제 연대라는 허울마저 벗겨 낼 때 민주주의와 날 것의 국가 이해 간 가상적 연결은 단절될 것이다.
민주사회주의는 민족주의가 의존하는 국내 사회적 통합에 대한 허구적 주장을 철폐하고 대신 노동하는 인류의 유기적 우애에 기초한 “외교 정책”을 채택하여 다른 국가와 관계를 맺을 것이다. 민주사회주의는 국내 그리고 국외라는 인위적 구분을 무너뜨린다: 궁극적으로, 국내 자본이 해외에서 하는 일들 - 무역, 투자, 착취, 약탈 전쟁 등 - 은 “모국(homeland)”에 파장을 불러일으키며 산업 파괴, 착취 노동, “상처 입은 전사”, 군산 복합체 그리고 종국에는 민주주의를 훼손하면서 군국주의 사회를 창조한다. 민주사회주의는 이런 자본주의 국가 간 충돌 - 무력 혹은 무역 형식 상관없이 - 과 저개발 국가의 종속에 대한 해결책이다.
자본주의는 야만적이든 문명적이든, 민주적이든 그렇지 않든, 개인의 부와 공공의 부(commonwealth) 간 적대 관계에 묶여 있다. 민주사회주의는 명백히 공공의 부를 선택한다. 어떤 형태가 되었든지 간에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세상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류를 상품화한다. 이런 사회에서 인류는 노동력을 담은 그릇으로, 재화와 용역 그리고 소비자 문화라는 망상을 담을 빈 그릇으로 살아간다. 민주사회주의는 계약의 결과물로서가 아닌 출생권으로 모두에게 적절한 삶의 기준을 약속한다. 그러나 민주사회주의는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 구성원들을 거래할 수 있고 무한히 대체 가능한 교환가치처럼 취급하는 사회를 벗어난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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