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세상 이야기

흑표당(Black Panthers Party)의 공동체 사회주의 - 민주사회주의 이해하기 (15)

김 무인 2021. 8. 20.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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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말

이전 포스트 ‘Big Brown 선입견 부수기’에서 뉴질랜드 퍼시피카 에스닉 그룹의 혁명적 사회운동 단체인 Polynesian Panthers Party가 등장했었다. 이들이 뉴질랜드 사회에 표면으로 드러난 대표적 사건은 1970년대 퍼시피카 이민자들을 불법체류자로 규정하면서 이들을 본국으로 송환하기 위해 실행된 ‘새벽 급습(Dawn Raids)’에 대한 저항 시위였다. 이번 에세이는 이 Polynesian Panthers Party(흑표당)의 모델이 된 미국 Black Panthers Party에 대한 글이다. 이전에 이 단체 존재에 대해서는 대략 알고 있었지만, 이들이 민주사회주의 담론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궁금했다.

 

오클랜드 K-Road에서 시위하는 Polynesian Panthers

 

 

이 에세이 전반에 자주 등장하는 전 흑표당 멤버가 있다. 캐슬린 클리버 (Kathleen Cleaver)가 그녀인데 그녀의 과거가 매우 흥미로웠다. 그녀는 1967년, 흑표당의 리더였던 엘드리지 클리버(Eldridge Cleaver)와 결혼했는데 그가 살인 사건 혐의로 경찰의 추적을 받자 1969년 알제리로 같이 피신했다. 거기서 만난 북한 대사의 초빙으로 다음 해 1970년, 북한에서 열린 반제국주의 기자 총회에 참석했다가 평양에서 아이를 출생하게 된다. 그녀가 출산한 여아의 이름은 ‘조주 영희’인데 그 이름은 김일성 주석의 부인 김성애가 직접 지어 준거라고 한다. 의미는 ‘주체 조선에서 태어난 젊은 여자 영웅’이라고 하는데 이후 줄여서 ‘조주’라고 불렀고 당사자인 딸도 그 이름을 좋아했다고 한다.

 

1970년 평양에서 출산 직후, 김 성애와 만난 캐슬린 클리버. 뒤편에 강보에 싸인 신생아가 보인다.

 

에세이 공동 저자 K. Kim Holder(학교 홈페이지에서도 사진을 찾을 수 없었다)는 미국 뉴저지에 있는 Rowan University의 부교수로 재직하며 사회적 소외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다. 다른 저자 Joy James는 매사추세츠에 있는 Williams College 교수로 정치철학, 미 흑인, 페미니즘 그리고 비판적 인종 이론에 대한 연구로 알려졌다.

 

 


 

 

(흑인) 공동체 사회주의의 진화

(The Evolution of (Black) Communal Socialism)

K. Kim Holder and Joy James

(Joy James) ​

 

“집에 돌아가서 너에게 말을 걸지 않는 이웃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그리고 네 친구에게도 연락해… 그들로 하여금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미국에서 아니, 세계 어느 곳에서도 너와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닫게 해야 해”….- Ella Baker, 말해 Ella Baker! (1974)

“우리는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다. 흑인 대통령은 사회정의를 위해 인종 중립 프레임을 사용하고 Black Lives Matter 운동은 참여민주주의를 위해 구조적 인종차별 프레임을 사용하고 있다. Killer Mike, 그래미상 수상 경력의 슈퍼 듀오 Outkast와 협업으로 잘 알려진 남부 출신 래퍼,는 미국 현직 상원의원이자 자칭 사회주의자인 버니 샌더스를 지지했다. 일부 흑인 목사는 도널드 트럼프와 친해지기 위해 아니면 힐러리 클린턴의 역사적 출마에 즈음해서 자신의 자리를 바꾸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으로 이상한 시대다.” - 2016년 1월 14일, 목사 Andrew J. Wilkes

I. (소개(INTRODUCTION)

민주사회주의를 이해하는 데에는 다양한 접근법이 있다. 민주사회주의는 진보주의자, 노동자, 학자, 반인종차별주의자, 페미니스트, 퀴어 운동가와 선출직 관료 등에 의해 사용되는 정치 개념이다. 민주사회주의 대통령 후보 상원 의원 버니 샌더스는 루스벨트의 뉴딜이라는 언어를 사용해 민주사회주의는 “어떤 막시스트 신념 혹은 자본주의 철폐” 혹은 “정부가 생산수단을 소유해야 한다"라는 믿음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이어 그는 민주사회주의는 “중산층과 미국의 부를 생산하는 노동자 가정은 공정한 거래를 할 자격이 있다"라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서 막시즘은 부인되고 자본주의의 혜택은 노동 계급과 중산층을 겨냥한다. 샌더스의 운동은 자본주의의 폐지가 아니라 노동자의 존엄성과 복지에 관한 것이다.

루스벨트의 뉴딜을 기반으로 한 그린 뉴딜을 주창한 상원 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는 민주사회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자본의 집중”은 “우리로 하여금 이익과 자본의 축적을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하여 어떤 인적 환경적 비용이 있더라고 추구하도록 한다…. 민주사회주의는….. 민주주의와 사회를 최우선으로 한다…..” 그녀에게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사회의 종속으로 존재한다.

샌더스 운동 진영의 핵심 멤버 활동가이자 학자인 코넬 웨스트 (Cornel West)를 따르면 민주사회주의는 변혁적 목표(transformative goal)를 추구한다:

“근본적 목표는 평범한 사람들의 존엄성 그리고 그들이 품위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민주사회주의는 직장에서 권력을 덜 가진 사람들, 가사 일을 하는 여성, 동성애자, 성 전환자, 흑인, 원주민, 이민자 등에 대해 권력을 가진 자들의 책임에 관한 것이다. 이 약자들이 품위 있게 대접받고 권력을 가진 자들이 어떤 경우든 이들을 조종하지 않고 종속하지 않으며 착취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

샌더스, 오카시오 코르테즈 그리고 민주사회주의에 여러 형식이 있다고 언급한 웨스트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우리는 민주사회주의와 그 진보적 잠재력에 대한 논의를 급진적 반 인종차별주의 국제적 정당인 흑표당(Black Panther Party:BPP) (그렇지 않아도 공격적 이미지를 가진 당 이름이라 흑표당으로 번역하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지만, 한국에서 이미 공식화된 용어처럼 보여 그대로 쓴다: 역자 주)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어갈 생각인데 흑표당이 사회주의에 기여한 바가 여전히 민주사회주의와 관련성이 있기 때문이다. 흑표당은 흑인 공동체의 공동체 사회주의(communal socialism)에 대한 갈등적 대응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 갈등 혹은 적대감은 계급 혹은 사회경제적 지위에 의해 형성된다. 사회주의적 성격을 가진 흑표당의 정강을 논하기에 앞서 당의 핵심 이론가였던 캐슬린 클리버 (Kathleen Cleaver)를 참여시키는 것이 도움 된다.

 

2019년의  캐슬린 클리버  ( Kathleen Cleaver ). 현재 조지아의 Emory University 교수다

 

II. 실용적 분석 (PRAGMATIC ANALYSES)

혁명의 시대(1967~1972)에 오직 한 정당만이 사회주의적이고 반 인종차별적 정책과 국제적 호소 덕분에 불법적이며 치명적인 경찰 폭력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흑표당을 파괴하기 위해 투입된 국가폭력의 양을 고려했을 때, 흑표당이 인종적 자본(racial capital)에 가한 이데올로기적 위협을 면밀히 조사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이 매우 작고, 젊고, 용감한 조직은 국내 외 공동체에 제국주의, 인종차별주의 그리고 계급주의에 반기를 들도록 영감을 주었다. 1966년, 정당방위를 위한 흑표당(the Black Panther Party for Self-Defense)으로 시작된 흑표당은 도시 경찰의 공격성을 감시하고 저지하면서 공동체의 물질적 필요(음식, 의류, 쉼터, 의료 그리고 교육)를 충족시키려 했다. 급진적 정치와 전투적 흑인을 범죄시 하면서, 지역, 주, 연방 경찰은 수백 명 멤버 대부분이 25세 미만인 이 조직을 몰살시켰다. (조직 멤버들은 국가 군국주의와 COINTELPRO (Counter Intelligence Program의 약자로 미국 내 정치조직에 대한 암암리 불법 사찰을 통해 붕괴시키는 프로젝트로 1956년부터 1971년까지 실행되었다: 역자 주)에 도전하며 정당방위/무장투쟁을 믿었다; 정당방위와 폭력에 관한 당 내부 실패는 잘 기록되어 있다.)

 

COINTELPRO의 사찰 대상들

 

흑표당은 실용적 정치와 지향적(visionary) 정치를 병행했다. 흑표당 중앙위원회의 첫 여성 위원인 캐슬린 클리버는 알제리 국제주의 계파의 공동 설립자이자 국제 사회주의와 지하 무장주의(militarism)의 연구자가 되었다. 클리버의 미국 흑인들 사이 반혁명적 정서에 대한 비판은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다. 1997년, Harvard 대학 Henry Louis Gates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혁명운동이 발생하고 위기를 겪으며 쇠락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묘사한 적이 있었다.

 

클리버에 따르면 미국 흑인들의 계급적 이데올로기적 분열은 급진적 혹은 혁명적 투쟁을 유복한 흑인이 가난한 흑인 노동 계급에 가지는 “복잡한” 가부장적 관계의 산물로 여기는 흑인 중산층 혹은 흑인 부르주아 그리고 이들이 흑인 급진주의자와 혁명가들에 가지는 이데올로기적 적대감의 산물로 보았다. 클리버가 보기에 “흑인 단합(black unity)”에 대한 낭만적 탐구는 계급 분열을 무시하도록 요구했고 따라서 대외적으로는 단합된 흑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피상적 합의에는 도달했으나, 실제로는 국가와 자본에 대한 대치로 인한 혜택은 개인적 이득을 차지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는 일부 흑인에게 불균형적으로 돌아갔다:

“민권운동(Civil Rights Movement)의 많은 목표는 본질에서 중산층이 받아들이기 쉬운 목표들이었습니다….. 노동 계급과 가난한 자들은 이 운동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흑표당은 “붉은 미끼에 굴복한” 다른 민권 단체와 달랐다: 그들은 혁명가 말콤 엑스(Malcolm X), 콰메 은크루마 (Kwame Nkrumah) 그리고 프란츠 파농 (Frantz Fanon)을 연구하면서 막시스트 정당을 구축했다.

 

프란츠 파농 (Frantz Fanon)(1925~1961)

 

혁명가들은 만약 “제3세계” 국제적 운동이 세계 자본과 제국에 도전한다면, “미국 경제구조와 교육시스템을 바꾸고 미국을 세계 경찰의 역할에서 벗어나게 하는 국제 혁명의 선봉으로서 미국을 점령하여 인민들의 혁명적 합중국으로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고 클리버는 본다. 아프리카와 남미에서 전형적 “독립(independence)” 국가의 자국 자원 통제권이 여전히 IMF, World Bank 그리고 세계적 식민 기업 자본에 남겨져 있음을 고려했을 때 세계의 “해방” 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권력 장악” 그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고 클리버는 단언한다.

1960년대에, 실용적 혁명가들은 부와 빈곤의 극단적 집중화를 예상하고 이를 준비했다. 1990년대에, 클리버는 공영 티브이 시청자들에게 “향후 15 ~ 20년 계획에 따라 자원을 통제하는 기업에 의해 정부는 지배될 것”을 상기시켰다. “우리를 제거하기 위해 수십억 달러를 쏟아부은” 기업-국가 파트너십의 출현에 반기를 든 클리버의 흑표당은 자신의 세대에 물질적 승리를 기대할 수 없었던 투쟁에 있어서는 불완전한 선지자였지만, 모델을 남기기를 원했다: “우리는 이상을 가졌고 우리는 헌신했으며 또 우리는 인간의 정신은 인간의 기술보다 위대하다는 고귀한 신념을 가졌었습니다.”

오늘날, 정치인들과 개혁가들은 백인 민족주의자 그리고 반 인종차별 투쟁이 계급 분석에 눈을 뜨도록 노력하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없이는 국제적 약탈 자본 속에 존재하는 국내 경제의 작동 방식을 제도로 이해할 수 없다며 클리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식민 권력은 통상 자기를 위해 식민지를 통제해 줄 중산층을 조성합니다… 미국 흑인 공동체 내 의사, 경영자, 법률가 그리고 판사 계층의 조성은 그들이 받은 교육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을 만들어 준 공동체로부터 떠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흑인 학교에서 교육받고 흑백 분리 정책에 따라 그들의 재능이 흑인 공동체에 머물렀던 우리 부모 세대와는 다릅니다. 그들은 백인 주류 사회에서 교육받고 그들의 재능을 보다 큰 사회의 기업과 비즈니스 구조에서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가난한 흑인 공동체에 머물지 않습니다.”

 

1968년 흑표당 지도부. 가운데 캐슬린 클리버가 눈에 띈다.

 

III. 흑표당 생존 프로그램 (BPP SURVIVAL PROGRAMS)

혁명의 시대(1967~1972), 흑표당은 지역공동체 안에서 사회주의 제도 건설을 위한 생존 프로그램(survival programs)을 창조했다. 흑표당은 1960년대 중반의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이 대안적 경제 시스템과 더불어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남미의 제3세계 해방투쟁을 연구했다. 흑인들은 종종 가장 낮은 임금을 받으며 가장 나중에 고용되고 제일 먼저 해고되는 자본주의 경제적 실체와 약속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푸에르토리코인, 아메리카 원주민, 히스패닉 그리고 아시안과의 연대는 인종차별, 빈곤 그리고 경제적 착취라는 공통된 기반을 하고 있었다). 1960년대의 정치 풍토는 종종 자유주의와 밀접히 연계된 것으로 보이는 사회주의를 수용하기에 좋았다. 미국 공산당의 Du Bois Club(1964~1970)과 1940~50년대의 다른 사회주의 조직들과 달리 흑표당은 흑인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흑표당의 생존 프로그램

 

흑표당의 사회주의에 대한 접근은 지식인보다 더 실용적이었다. 이론화보다는 부의 분배라는 실질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흑표당의 모토인 “인민에게 모든 권력을(All Power to the People)”은 사회주의적 경제에서 구체화되었다. 사회주의적 정치를 통해서 당은 치안, 주택, 의료 그리고 식량 분배에 대한 공동체 통제라는 그들의 목표를 옹호했다. 흑표당은 공동체에 사회주의를 실용적 측면에서 도입했다. 뉴욕의 보건부 소속 Dianne Jenkins는 민권 지도자 Ella Baker의 다음 말을 인용한다:

“자매들이여, 사회주의를 실천하라. 만약 당신이 설탕 한 컵이 필요하다면 그저 옆집으로 가라…. 사회주의 혹은 사회주의 사상은 엄청난 것이 아니다…. 흑표당은 사람들을 섬기는 프로그램에 대한 개발과 대중 정치의식을 고양하는 것을 계속할 것이다.”

시애틀 조식 주최자인 Elmer Dixon은 당의 사회주의적 목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민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흑표당의 주요 과제다. 공동체 내에서 사회주의를 실행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한 방법이다.” 생존 프로그램(survival programs)은 흑인 사회를 상대로 봉사하고 교육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인민에게 봉사하는 것은 Ten-Point Program and Platform (Nation of Islam’s Muslim program에 기반을 둔)의 중심 주제였다. 인민들의 필요에 대응하기 위해서 엘리트가 아닌 일반 당원으로 구성된 직원에 의해 생존 프로그램은 자본주의로부터 버림받은 소외된 사람들의 물질적 정서적 필요를 충족하는 제도들을 개발했다: “사람을 달에 보낼 수 있는 나라에서 삶의 조건들…… 그리고 어린이들이 영양실조로 1년 내내 고생하는 동안 과잉 생산된 밀을 태워버리고….. 무슨 긍정적 조처를 하지 않기에는 너무나 우울한 상황…..”

새로운 대안의 토대를 마련할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에 대해 Richard Dhoruba bin Wahad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존 프로그램을 통해 시행하는 것이 두말할 것 없이 노동 대중에게 최선의 이익이다…. 대안을 통해서 지역공동체 인민은 집단적으로 협동 매장을 소유, 지원, 운영하며… 이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 공동체를 포함하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들의 생존 문제이기 때문이다.”

 

Richard Dhoruba bin Wahad

 

흑표당은 생존 프로그램이 혁명적이지도 않고 흑인들의 물질적 빈곤 상태를 해결해 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프로그램의 목적은 사회주의와 일상생활의 관련성에 대해 교육하는 것이었다. 흑표당은 추상적 이론이 항상 공동체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생존 프로그램은 실천 속 이론(theory-in-practice) 형식이 되었다. 물질적 필요의 한 형식은 또 경찰의 공격과 대량 투옥으로부터 보호를 포함한다.

공동체 통제 (COMMUNITY CONTROL)

2014년 이후, Black Lives Matter와 다른 형식의 행동주의는 공동체, 인종 프로파일링, 민주주의 안에서의 무장 치안유지에 대한 의식을 형성해왔다. 이 의식들은 민주사회주의와의 연관성에 대한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흑표당의 1967년 첫 번째 경찰 감시프로그램(당의 1966년의 원래 이름은 “Black Panther Party for Self-Defense”였다)은 경찰의 위법 행위를 감시하고 줄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오늘날 휴대폰 영상추적과 비슷하지만, 차별화된). 흑표당이 경찰의 괴롭힘과 충돌의 표적이 되면서 경찰 위법행위에 대한 효과적 감시는 줄어들었다. 1968년까지 흑표당의 프로그램들은 더 광범위하고 정치적이 되었다. 예를 들어, 집주인과 세입자 간 분쟁에 개입하여 세입자를 도와주었다. 흑표당은 갱들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요청도 지역 주민으로부터 받았는데 이는 경찰이 저소득 유색인종 거주 공동체를 타깃으로 하는 것에 대한 불신과 소외감 탓이었다. 1969년, 뉴욕의 Lower East Side의 아파트 건물에 살던 흑인 세입자들은 쫓겨나려는 위협을 받고 흑표당에 도움을 요청했다; 흑표당은 보안관을 대동한 채 세입자 그리고 갱들과 대화를 하면서 사태가 종식될 때까지 아파트를 지켰다.

당원들은 매일 공동체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돌아가며 요리, 청소와 가사 일을 하는 집단생활을 했다, 가구 운영을 위한 기본적 필요는 음식과 건강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수많은 어린이가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하고 등교했기 때문에 가장 인기 있는 흑표당의 프로그램은 무상 조식프로그램(FBP:Free Breakfast Programs)이 되었다. 흑표당 지부마다 공동체 내 영양 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FBP가 최소한 한 개씩 운영되었다. 등교 전 학생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은 인종-자본 내 경제적 불평등도 드러냈다. 정부와 기업은 자원을 가지고 있으나 영양가 있는 음식 제공, 특히 어린이들에게, 을 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폭로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대안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바빌론에서 굶주림에 관한 사실과 통계가 담긴 2천 페이지 리포트를 발간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굶주린 아이들에게 리포트를 먹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신 흑표당은 인민을 섬기라는 이론을 실천에 옮겨 전국에 걸쳐 어린이들을 위한 무상급식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대안적 모델을 조직하고 구축함으로써 어린이들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공동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더욱 정의로운 사회질서 창조를 위한 가능성을 높였다.

뉴욕 FBP의 Malika Adams는 이 프로그램에서 일하는 기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뭔가를 하고 있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이들을 먹이는 나 자신을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아이들을 먹일 때마다 난 그 아이들이 굶주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FBP의 교육 파트는 SNCC Freedom School 모델에서 따왔다. 모든 아이는 환영받았다. 필라델피아 FBP의 코디네이터 Sam Coley를 따르면: “우리를 찾아온 모든 어린이에게 우리는 음식을 제공했다.” 프로그램은 백인, 라티노와 흑인 어린이들을 포함했다. 뉴욕, 버클리, 워싱턴 그리고 시카고에서 각 건물은 다문화 어린이들과 직원으로 가득 찼다.

 

흑표당의 무료 조식프로그램

 

많은 급식센터가 직원과 음식 부족으로 어린이들과 공식적으로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다른 센터들에서는 직원이 비공식적으로 흑인과 라티노 역사에 대한 토론과 수업 그리고 FBP의 필요성에 대한 정치교육이 이루어졌다. Des Moines Clive DePatten은 FBP가 사회주의 사상을 보살핌과 음식으로 현실화했다고 보았다; ”우리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다섯 명의 어린이가 있는데, 그중 한 명이 5개의 사탕을 가지고 있다. 만약 네가 그 사탕을 각자에게 하나씩 준다면 그게 사회주의다. 사회주의는 간단히 누가 무엇을 가졌든지 관계없이 동등하게 나누는 것이다.”

FBP는 지원을 받는 공동체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받으며 현금과 음식 도네이션을 받을 수 있었다. Puerto Rican Young Lords, Chicano Brown Berets, and Asian I Wor Kuen 그리고 Young Patriots와 같은 단체들은 자체적으로 또 협업으로 무상 조식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 음식은 개인의 현금 기부 및/또는 기업과 단체의 기부로 충당되었다. 이 공동체 사회주의(communal socialism) 모델은 자율적이었다: 1971년까지, 흑표당은 정부 자금 지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부 기관들은 기업-자본가 정부에 의해 방치된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이 조직을 악마화하고 비방하려고 했다. 흑표당의 입장은 자본주의에 반하는 것이었지만, 당규는 FBP를 위해 협박이나 절도를 금지했다. 흑표당은 대신 FBP를 지원하지 않는 상점들에 대한 보이콧을 시작했다.

1970년이 되자 이 모델은 무료 건강클리닉, 음식 배분 그리고 의류 프로그램과 같은 다른 생존 프로그램의 모델이 되었다. 이 프로그램들을 관통하는 철학은 사회주의였다. 뉴욕의 Carlton Yearwood는 의류 나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중들 간 연대는 이 대중으로 하여금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보게 하고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인민을 섬겨라(Serving People)’와 비교할 수 있게 하는 객관적 실체로 변모했다. 자본주의를 타도하려는 사회주의 모습은 이 행동이 인민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FBP와 모든 프로그램은 결국 공동체에 의해 운영되는 모델이다: “우리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는 지역 사람들은 이 프로그램이 자신들을 위한 것임을 알고 그들의 시간과 돈을 기부하고 요리에 직접 나섰다. 또 그들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관료적 프로그램의 부담 없이 그들의 자원과 에너지가 제대로 사용되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의 어린이들을 소중히 여기는 그들을 존경한다.”

FBP의 현장에는 흑표당 당원보다 비당원들이 더 많았다. 이 현상은 인민을 섬긴다는 당의 관점과 일치했다. 흑표당은 프로그램을 관리하는 것보다는 프로그램을 개시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따라서 이 프로그램에 비당원 개인들이 참여하는 것을 제약하지 않았다.

1970년, 연방정부는 51,380건의 “무료 혹은 할인된” 조식을 매일 학교 어린이들에게 제공했다. 조식 평균 비용은 25센트며 농무부 보고서에 따르면 빵 한 조각과 우유 반 잔을 커버하는 금액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흑표당은 매일 3,200명이 넘는 어린이들(32개 센터에서 각 100명)에게 급식을 제공했다. 흑표당의 이 무료 조식프로그램은 당시 공동체 사회주의 운동 중 가장 포괄적인 급식 프로그램이었을 것이다. 이 공동체 사회주의 프로그램에 대한 지속적 반대가 있었다. 샌디에이고 지역 FBI 요원은 가톨릭 교회에 압력을 넣어 FBP를 주최한 신부를 뉴멕시코로 보냈다.

SNCC Freedom Schools를 모델로 한 흑표당의 해방 학교는 FBP 부속인데 이데올로기 현장으로 의심받았다. 그러나 지역사회와 공동체 돌봄은 계속되었다. 어린이와 가정은 단지 음식 혹은 물질적 지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형성하는 정치, 윤리, 경제에 대해 평가를 할 수 있는 비판적 교육 역시 필요하다. 어린 자녀와 노인을 가진 모든 노동자 가정은 자녀와 노인 돌봄이 절실히 필요했다. 1970년, 흑표당은 애초 당원들의 유아들을 돌보기 위해 탁아소 운영을 시작했다. 탁아소는 지역 주민을 포함할 수 있게끔 확장되었다. 학교에서 만족스러운 성적을 받은 다섯 자녀를 둔 한 엄마는 흑표당과 연계된 해방 학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녀는 자녀가 기사에 대한 보고서를 고르고 작성하며 글로벌 뉴스에 대해 구두 보고하는 것을 보면서 : “아이들이 하는 일은 그들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세계의 다른 가난한 사람들과 연관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학생들은 공동체에서 일하도록 격려 받으면서 읽고 쓰려고 노력했다.

의료 프로그램(MEDICAL PROGRAMS)

오늘날 단일 납세자 건강보험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다. 흑표당이 모든 공동체를 위한 보편적 건강보험을 추구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또 다른 성공적 풀뿌리 프로그램은 무료 보건소(medical clinic)였다. 1969년 초, 흑표당은 의료 및 건강관리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당의 여러 지부는 지역 사회를 위한 건강 검진을 위해 의료 인력 및 의대생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고혈압, 겸상 적혈구 빈혈, 납중독, 약물 남용과 같은 증상들이 초기 의료 프로그램의 주 관심사 중 일부였다. 혈액 및 혈압 검사, 영양 상담, 일반 검진, 약물 상담 등은 초기 흑표당 의료팀이 제공한 서비스 중 일부였다. 의료팀에서 일했던 흑표당 당원들 대부분은 전문 의료 인력과 의대생으로부터 훈련받았다. 처음에 흑표당원들은 응급처치 기술을 습득하는 데 집중했다. 거리 모퉁이 테이블은 무료 결핵 검사와 겸상 적혈구 빈혈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흑인 의대생과 의사는 할렘(Harlem)의 보건소를 도왔다. Bronx, Brooklyn, Harlem, Jamaica와 Corona 지부의 의료 인력 간 주례 회의가 개최되었다: 흑표당은 진보적 백인 그리고 푸에르토리코 의료진과도 함께 일했다. 건강검진, 각종 검사 그리고 기초 진료 외에도 보건 의학과 예방의학에 각 센터는 집중했다.

 

흑표당의 의료 프로그램

 

지난 3월, 일리노이주 록포드 지부에서 새로운 클리닉을 개원했다. 시카고의 People's Medical Care Center는 개원 2개월 만에 2천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이 센터는 산부인과 의사, 치과의사, 소아과 의사, 검안사, 주치의, 간호사, 실험실 기술자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센터들은 자격을 갖춘 의료진들과 적절한 장비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시 보건 당국은 이 클리닉을 폐쇄하려고 반복적으로 시도했다. 진보적 학생들 그리고 의료 전문 인력과 함께 일하면서 흑표당은 풀뿌리 공동체 차원에서 그들의 발전된 기술을 활용할 수 있었다. 흑표당은 흑인 공동체와 다른 가난한 공동체로 의료 기술과 서비스가 유입되는 과정을 촉진했으며 이 프로그램 유지와 보수에 지역 주민을 참여시켰다.

지역사회의 의료진 참여를 독려함으로써, 지역사회에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공공보건 인력양성에도 힘썼다. 보스턴 클리닉 센터는 공중 보건수업을 개최하는 것 외에도 실험실 기술자, 간호조무사 및 의료 행정직을 양성했다. Boston People Health Center는 지역사회를 의사 결정 과정에 지속적으로 포함시키는 한편, 지역사회에 성공적으로 경험이 누적된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1971년, 흑표당은 겸상 적혈구 빈혈 문제에 대한 대중 의식을 높이기 위한 전국 캠페인을 시작했으며, 겸상 적혈구 빈혈 해결을 위한 연구재단 설립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IV. 결론 (CONCLUSION)

“국가가 우리를 표적으로 삼은 것은 우리가 무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이다.” - 마샬 에디 콘웨이 (Marshall Eddie Conway) (경찰관 살해 혐의로 43년간 복역했다가 2014년 가석방된 전 흑표당 지부 지도자:역자 주)

언론인이자 전 흑표당 정치범인 마샬 에디 콘웨이는 흑표당이 경찰 탄압의 표적이 된 것은 자본주의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여러 요소 - 당의 실수와 폭력을 포함해서 - 이 흑표당에 대한 악마화와 거부감으로 이끌었다: 정당방위권, 반인종차별 분석들, 국제주의 프레임웍 그리고 공동체와 경찰에 대한 통제권 요구 등.

 

43년 만에 풀려난 마샬 에디 콘웨이를 캐슬린 클리버가 환영하고 있다

 

흑표당은 흑인을 포함한 모든 공동체 해방은 자본주의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한다는 신념에 기반을 둔 반자본주의 조직이다. 인종차별과 가부장제가 억압의 주요 형태이지만, 이것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해체되기 전까지는 근절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이 믿음은 미국 흑인들의 암울한 경제적 지위를 고려했을 때, 흑인 사회의 대부분 섹터에서 사회주의는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쁘띠 부르주아와 정부 기관, 군대 그리고 기업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찾은 흑인들은 실업자와 노동빈곤층의 계급 지위와 박탈 상황을 공유하지 않았다.

흑표당은 또 조식, 주택 그리고 의료 프로그램 등과 같은 물질적 지원을 통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제시함으로써 집단적 수단을 통한 개인의 금융 압박을 해소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모든 것이 50년 전 일이다. 개인주의, 소비주의, 디지털화된 중독성 오락은 사회적 소외와 증가하는 정신적 정서적 고충의 핵심 요소들이다. 이 모든 병폐가 약탈적 자본주의 혹은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 때문에 형성되지 못한, 새로운 사회를 향한 변혁적 전망을 가져오는데 심각한 장애물이 되고 있다.

현실에서는 제대로 실행되지 않는 약속들이 계속 이어지는 현재와 같은 대의정치 제도에서 사회는 사회주의에 대한 견고한 분석에 도달할 것 같지 않다. 이는 단지 2010 Citizens United 결정 혹은 유권자 탄압, 게리맨더링 혹은 중범죄자 선거권 박탈 덕분에 큰돈이 선거 과정에 몰리기 때문이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은 풀뿌리 활동가에 등을 돌리고 억만장자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민주당과 공화당 내 선거인단 그리고 “내부 거래(insider trading)”와 함께 다루어져야 할 중요한 이슈들이다.

공동체 조직에 기반을 둔 풀뿌리 활동가들은 노동자 계층이 그들 자신의 삶을 이론 속에서 볼 수 있는 풀뿌리 사회주의를 논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이들은 정치 운동뿐만 아니라 그런 운동에 참여하는 정치이론의 설계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약 선거정치의 압박이 사회주의에 대한 활발한 토론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백인 우월주의, 남성 가부장제, 성전환/동성애 그리고 지구상 다른 생물의 파괴에 대한 날카로운 논의 역시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선거에서 승리할 필요 때문에 중도주의 정치로 기운다면, 우리는 자본주의는 신이 만든 것이고 사회주의는 본질에서 이교도적이고 “비 미국적 (un-American)”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신화에 대항할 수 있는 논리를 개발할 여지가 더 적어진다

수십 년 전의 변혁 투쟁 시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배울 것이 많다. 풀뿌리 국제적 환경운동가이자 Black Socialists of America (BSA)의 멤버인 반 인종차별 지식인 Kali Akuno는 억압과 계급 분열을 극복하는데 흑인 사회주의 역할에 대한 평가를 아래와 같이 내린다. 그의 비판적 견해는 지역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급진적 노동자들의 유산을 바탕으로 미래의 가능성을 지적한다:

 

Kali Akuno

 

“이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는데 걸림돌은 노동계급 내 충분한 조직과 계급 의식의 부족이다. 지난 5백 년 동안 전 세계 모든 지역에서 프롤레타리아 여러 섹터의 용감한 노력에도, 노동 계급은 언어, 민족, 문화, 종교, 인종, 성 그리고 젠더로 쪼개져 여전히 분열된 주체로 남아있다. 프롤레타리아는 또 부르주아가 그들 의지를 실행하기 위해 조종하는 반동적 국가 기관과 사회적 세력에 의해 지속적 공격을 받고 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는 현재의 분열과 끝없는 부르주아 계급의 공세에서도 객관적으로 규모와 힘이 객관적으로 커지고 있다.”

삶과 치유를 추구하고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고 현실화하기 위해 편안함과 안전함을 뒤로하는 공동체들에 모든 권력을.

 


 

역자 후기

현대 사회학의 거대한 두 개념인 ‘인종(race or ethnicity)’과 ‘계급(class)’의 상관관계는 많은 학자가 연구하는 대상이며 소수 민족 이민자로서 나 역시 이 관계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다. 이 블로그의 궁극적 탐구 주제 역시 ‘인종과 계급이 만났을 때’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에세이 역시 외부에서 보기에 미국 백인 주류사회의 차별에 대한 흑인(race)의 폭력적 저항 형식으로만 비칠 수 있는 흑표당 운동에 대해 계급(class) 프레임을 적용할 것을 독자에게 요구한다. 계급은 당연히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전제로 하므로 흑표당의 운동을 본질에서 백인에 대한 저항이 아닌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정의한다. 에세이에서 인용한 마샬 에디 콘웨이의 “국가가 우리를 표적으로 삼은 것은 우리가 무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선언은 흑표당의 활동 기간 실제 행적이 이 선언을 뒷받침하는지에 관계없이 최소한 지도부가 무엇을 지향했는지를 엿보게 해준다.

그러면서 미국이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한적이라도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자체 실험을 흑인 공동체 혹은/그리고 소외계층 공동체에서 실행하면서 이 형식을 공동체 사회주의(communal socialism)라고 칭한다. 당연히 이 실험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환경 탓에 제한적 결과로 나타나겠지만, 개인적 생각으로 이 풀뿌리 민주주의 경험은 당장 결과물에 상관없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경험적 자산으로 남을 것으로 생각한다.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경험 그리고 조직이란 것은 나의 필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경험은 새로운 사회를 향한 투쟁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흑표당의 공동체 사회주의 실험은 미래 민주사회주의 사회의 풀뿌리 단계의 모습에 대한 영감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