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한국 이야기

한국 사회로의 이민자/난민 유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아프간 난민 사태를 보면서

김 무인 2021. 8. 29.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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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잊을만하면 꼭 새벽에 전화하는 전 남자친구처럼 한국 사회를 찾아오는 사회적 이슈가 있다. 뉴질랜드만큼은 아니지만, 한국도 갈수록 이민 관련 이슈들이 한국 사회에 찾아오곤 한다. 이번 한국 관련 단체/조직에 관여했던 아프가니스탄 난민의 한국 입국 추진은 다시 한번 난민/망명을 포함한 저소득 국가 출신 이민자, 특히 무슬림,에 대한 한국 사회의 ‘수용성’ (receptiveness)이라는 껄끄러운 주제에 다시 한번 한국 사회구성원을 직면하게 했다. ‘특별기여자(persons of special merit)”라는 이름과 더불어 난민과 다른 법적 카테고리까지 신설하면서 이들을 한국 사회에 품은 한국 정부인데, 이 신조어의 탄생도 한국 사회에서 이민/난민이 차지하는 사회적 민감성을 느끼게 한다.

 

아프간 난민이 인천 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한국을 사랑하기에 한국 사회에 비판적이라고 주장하는 한국 주재 프리랜서 기자 라파엘 라시드(Raphael Rashid)는 비밀리에 진행된 까닭에 작전 수행 직전까지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자랑스러워하는 한국은 아프간 난민 문제에 침묵한다고 비판했던 인물이다. 그가 2021년 8월 26일 자 The Guardian에 이번 아프간 ‘특별기여자’의 한국 입국을 둘러싼 한국 사회 분위기를 전달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이 기고문에 등장한 사람들의 인터뷰는 현 한국 사회 - 물론 원칙적 측면에서 다른 모든 국가에도 적용된다 -의 구성 주체들이 이민/난민이라는 이슈에 접근하는 각자의 방식을 보여주는데, ‘특별기여자(persons of special merit)’란 신조어에 대한 시각 자체가 그 접근 방식의 상이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입국한 아프간인들은 본질에서 ‘난민’이다. 난민의 사전적 정의는 ‘전화(戰禍) 따위를 피하여 다른 나라나 다른 지방으로 가는 피난민 또는 망명자’를 일컫는데, 이번 입국자들은 이 정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남한 정부는 이들을 난민이라 호칭하지 않고 ‘특별기여자’라는 단어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출입국관리법 시행령까지 개정하였다.

이 배경에 대해 라파엘 라시드를 포함해서 BBC 서울 특파원 로라 비커(Laura Bicker)의 의견을 종합하면 이 신조어는 ‘난민’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일부, 다수가 아니라면, 한국 사회구성원의 반발을 피하기 위한 전술적 조치라는 설명이다. 즉, 난민으로 이들을 규정할 경우 한국 사회구성원의 ‘관용’에 호소하는 수세적 전략을 취해야 하는데, ‘특별기여자’라고 규정할 경우 우리를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보답이라는 ‘도덕적 책무’를 강조하는 선제적이고 공세적 전략을 취할 수 있어 이들 수용 과정에서 파생할 수 있는 사회적 파열음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기대가 그 배경이라는 해석이다.

 

난민인권네트워크 페이스 북에서

이런 시각과는 정반대로 난민인권네트워크를 위해 일하는 변호사 이일을 따르면 난민을 특별기여자로 둔갑시킨 것은 ‘난민’이란 어감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는 한국 사회를 의식한 것이라는 데에 동의하나, 정부의 설명 - 이들이 갈 데가 없어 우리가 도와주어야 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난민으로 취급받을 대상이 아니라, 그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할 대상이기에 새 이름과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 과 달리 국제 난민법에서 보장하는 난민 지위를 피해 가기 위해 만든 교활한 장치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아무튼 (중간) 결과적으로 ‘기적’(miracle)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국군의 이들에 대한 구출 작전의 ‘대성공’ - 최소한 한국 미디어에서만큼은 - 덕분에 다수 한국민에게 국격의 상승이라는 ‘국뽕’을 선사하며 ‘이들만큼은’ 수용해야 한다는 사회적 콘센서스가 형성되면서 큰 고비는 넘긴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이번 아프가니스탄 난민에 대한 한국 사회의 두드러진 사회적 파열음 없는 수용 분위기는 한국 기존 사회구성원의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심리적 보상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이들이 ‘무슬림임에도 불구하고’ 수용하자는 여론이 반대 여론을 압도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들 난민 대부분이 한국 단체/조직이라는 상대적으로 선진국 기관에서 일할 정도로 나름 능력과 기술을 가진 인력이라는 점이 강조되면서, 이들이 영구 정착자가 되더라도 한국 사회에 부담을 주지 않으며 소프트랜딩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도 이 사회적 동의에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2018년 예멘 난민을 둘러싼 찬반 시위

그러나 이 한국 사회 여러 뇌관 중 하나인 저소득 국가 출신 이민자들 - 선진국 출신 이민자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다 -의 수용, 특히 종교적 배타성이 심한 것으로 알려진 무슬림 이민자에 대해서는 한국 네티즌을 중심으로 여전히 경계와 우려심이 강하다. 가까운 예는 2018년, 예멘 난민의 제주도 유입에 따른 한국 사회의 여론 분열이 그것이다. 이번 포스트는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서 한국 사회를 포함해서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민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중간 정리 글이다.

위에서 언급한 기고문에는 이번 아프가니스탄 난민 입국을 둘러싸고 한국 사회란 무대의 다양한 주/조연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가 소개된다. 이들을 한국 사회에 받아들일지를 결정하는 정책결정권자로서 국가(state), 이 난민들의 입장에서 국가의 결정을 비판적으로 감시하는 친 이민/난민 시민단체, 그리고 직접적 인터뷰는 대상은 아니었지만, 국가로 하여금 ‘특별기여자’란 새 용어와 카테고리를 만들게 한 장본인 한국 사회(society)가 그 주인공들이다. 이 에세이는 기본적으로 이 국가, 사회 그리고 기고문에서는 빠졌지만 어쩌면 가장 큰 비중의 또 다른 주인공 ‘자본주의’ 간 삼각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이민 문제를 조명할 것이다.

시원한 정답이 있을 수 없는 이민 이슈

먼저, 즉각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질문들로 시작한다. 이번 한국 정부의 구출 대상이 되지 못했지만, 간접적이라도 한국 단체/조직과의 연관성 때문에 탈레반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주장을 하는 일부 아프간 현지인들과 한국 내 아프간인들의 요구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취직했었던 적이 있었다는 이유로 전 회사 사장에게 생계가 막막하니 도와줘야 한다는 논리 정도로 취급하며 선을 그어야 할까? 아니면 ‘국격’에 맞게 지원의 확대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까?

또, 이번 경우 예외적 상황 -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도 탈레반의 보복 대상이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에 더하여, 난민 상당수가 영아를 포함한 미성년 자녀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가족 동반에 별 저항감이 표출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런 예외적 상황이 아닌 평시 상황에서 한국 입국 시 외국인 주 신청자(비자 종류와 관계없이)의 가족 동반에 대해 어떻게 입장을 정리해야 할까? 그리고 해당 정보는 없지만, 이번 아프간 난민 경우 동반 가족에 그들 부모가 포함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만약 사실이라면, 어떤 과정을 통해 부모는 배제되었으며 또 주 신청자가 나중에라도 부모의 입국을 원하고 요구한다면 이에 한국 사회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인도주의적 차원이 되었든 기여에 대한 보답 차원이 되었든 동반 가족의 한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한국에는 다양한 체류 자격을 가진 외국인 노동자들이 존재한다. 그중 대표적인 두 유형은 ‘비전문 취업(E-9) 비자’와 ‘방문취업(H-2) 비자’이다. 이 비자를 소지한 외국인 노동자는 2021년 6월 기준, 360,272명으로 나타나는 데, 이 중 비전문 취업비자를 소지한 외국인 노동자 수는 162,111명이다. 방문취업비자(H-2)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선족과 같은 외국 국적 동포에게 발급하는 취업비자이고, 비전문 취업비자(E-9)를 가진 외국인 노동자는 한국 티브이에도 많이 등장하는 도시 공장이나 농어촌에서 저 숙련 단순직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이다. 이 둘 중 방문취업비자(H-2)는 주 신청자의 배우자와 자녀를 입국 시 동반할 수 있으나, 비전문 취업비자(E-9)의 신청자는 배우자와 자녀를 동반할 수 없다. 이는 전문 직업비자(E-5) 소지자가 가족을 동반할 수 있는 것과 대조된다.

 

비닐하우스를 개조한 외국인 노동자 숙소

이런 차별화는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근거에서? 비전문취업비자 신청자는 남한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서 내국인 인력으로 채우기 힘든 - 왜 채우기 힘든지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는 생략하자 - 산업 영역을 채워주는 ‘노동력(workforce)’이기 때문에 내키지는 않더라도 받아들일 가치가 있지만, 그 동반 가족에게서는 어떤 ‘경제적 가치’도 발견하지 못해서일까? 취업비자 관련 한국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labour)’이라는 ‘살’은 받아들이고 싶지만, 가족과 함께 행복을 추구하고 싶어 하는 ‘인간(human)’은 한국 사회의 목에 걸릴 수 있는 ‘가시’이기 때문에 미리 발라내고 싶은 것일까?

뉴질랜드는 원칙에서 취업비자 종류에 따라 이처럼 동반 가족 여부를 차별적으로 적용하지 않는다. 워크 비자 신청자의 비자 기간에 따라 배우자 및 동반 자녀의 비자 기간이 연동될 뿐이지, 건설 현장 ‘노가다’를 하든 오클랜드 퀸 스트리트 고층 빌딩에서 회사 중역으로 근무하든 상관없다. 그렇다면 뉴질랜드는 남한보다 국격이 더 높고 혹은/그리고 더 인본주의적이며, 그에 비해 남한은 천민자본주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해 - 어쩌면 갈수록 심화하는 - 여전히 물질을 사람보다 우선시하는 단계의 사회에 머물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러나 ‘동반가족을 허용하는 이민정책 = 좋은 정책 혹은 인본주의적 정책’이라는 부등식은 21세기 각 나라의 이민 현실과 그 함의를 총체적으로 담아 반영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르는 단순 부등식이다. 그 어려움의 중심에는 ‘자본주의 민족국가’(capitalist nation-state)가 있다. 본질에서 한 특정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의 움직임을 의미하는 이민은 한 민족국가에서 다른 민족국가로의 이동이라는 모습으로 현실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글로벌 자본주의는 자본축적이라는 자신의 존재 목적 달성을 위해 전 세계적 차원에서 사람들의 국가 간 이동을 촉발한다. 그 결과, 자신의 기존 생활공간에 이민자라는 새로운 타자(others) 출현에 불편함과 불안감을 느끼는 소위 ‘민족’이라 불리는 이민 수용 국가의 사회구성원들은 국가(정부)에 외친다: ” 우리를 보호하고 잘 살게 해주라고 너를 뽑았는데 뭐 하는 짓이야? 당장 이민자들 못 들어오게 막아! 이러려고 내가 널 위해 세금 내는 줄 알아?”

그러나 모든 국가가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에 깊숙이 편입된 지금, 그 시스템을 활용하여 이익의 극대화를 노리는 글로벌 자본가 그리고 국내 자본가의 요구와 압력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정부는 이 자본가의 압력과 자신이 안녕을 책임져야 할 사회구성원, 다른 말로 유권자,의 아우성 사이에서 줄타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것이 21세기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이민을 이해하기 위한 자본주의, 민족(이민 수용 국가의 사회 그리고 그 구성원) 그리고 국가(이민 수용 국가의 정부) 간 기본적 다이내믹이다.

 

미군 수송기로 탈출하는 아프간 난민

 

국제주의(internationalism)만이 해결할 수 있다

따라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민족국가에 기반을 둔 현 세계의 체제가 무너지기 전에는 이민을 둘러싼 문제에 대한 시원한 해결책은 없다. 인도주의적 이민에 대해서도 “이제 우리도 먹고 살만하니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국격에 맞게 책임 있는 수용적 자세를 가집시다”라는 주장도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 혹은 내가 선호하는 표현인 국제주의 (internationalism)가 실현될 수 있는 지구촌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반박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가령,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번 아프간 입국 난민들이 아프가니스탄에 두고 온 나이 든 부모를 한국으로 데리고 오고 싶다면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야 하나라는 질문에 한국 사회는 만장일치로 Yes 할까? 아니면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면 끝이 없으니 일정 선에서 잘라야 한다고 답할까? 이런 질문은 한 민족국가의 정부가 ‘지구촌 혹은 세계시민의 일원’이라는 정체성과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처럼 ‘내 국민’의 안녕이 최우선인 민족 사회공동체 통치기구라는 정체성 간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 냐는 과제를 우리에게 안겨준다.

이 정부(국가) 차원의 관계 설정 문제는 당연히 민족사회구성원 개인 차원의 문제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를 들어, 정치적 혹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다른 국가의 난민 수용 혹은 그들 국가 국민에 대한 지원을 놓고, “아니, 한국에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이 널렸구먼, 저게 뭐 하는 짓거리래?”라고 일갈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의 일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밴댕이 소갈딱지? 저잣거리 표현을 사용해서 그렇지 이런 마인드셋은 개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도 대단히 견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민족국가 이데올로기’의 기반이다.

예를 들면, 뉴질랜드를 포함해서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캐피털을 갖지 못한 노동자를 포함해 사회적 약자를 대변한다는 진보 정당들 - 뉴질랜드 경우 노동당(Labour Party)으로 하자 - 은 많은 경우 사회적 약자로 구분되는 자국 내 ‘이민자(immigrants)’에게 우호적으로 보이는 정책 - 가령 복지 혜택 - 을 시행할 수 있지만, ‘이민’(immigration)’에 관해서 만큼은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는 보수정당보다 더 보수적 경향을 보인다. 간단히 말해 나라 안에 들어와 있는 노동 계급과 사회적 약자는 ‘내 유권자’이지만 나라 밖에 - 시민권이나 영주권이 없다는 의미에서 - 있는 노동자 혹은 사회적 약자는 내 유권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 그리고 이 정당들을 지지했던 노동 계급이 다른 나라 노동자, 특히 유대인 노동자,를 차별한 것은 그 한 예다.

 

제2인터내셔널 지도자들 중 로자 룩셈부르크(6번)는 끝까지 1차 대전 참전에 반대했다.

노동자를 대표하고 그들을 위한 정당임을 표방하며 세계 역사에 등장했던 각국의 노동당 혹은 사회주의를 표방한 정당들은 결국 본질에서 그들 나라에 국한된 노동자를 대표하고 그들을 위한 정당이지, 세계 노동자를 대표하고 그들을 위한 정당은 아닌 것이다. 19세기 말, 야심 차게 닻을 올렸던 제2인터내셔널이 1916년 와해한 것도 결국 ‘노동 계급의 초국가적 보편성이 민족국가라는 특수성’에 굴복한 사건이다. 유럽 각국에서 주류 정치 진입에 성공한 제2인터내셔널 멤버 사회주의 정당들이 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제2인터내셔널의 공식 명칭이 ‘국제’노동자 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 임을 망각한 채, 자국 집권당의 1차 대전 참전에 동의하면서 국제주의를 포기한 것이다. 이렇게 ‘계급’이 ‘민족’에 무릎을 꿇은 1914년 이후, 진정한 의미에서 국제주의는 세계 무대에서 사라진 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과거 소련 주도 코민테른이나 현 미국 주도 유엔은 19세기 사회주의자들이 꿈꾼 진정한 국제주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 채, ‘자본주의 민족국가’ - 경제 시스템으로 자본주의는 세계적인데 정치체제는 여전히 민족 단위의 국가 - 체제 때문에 발생하는 각종 부작용에 대한 일시적 진통제 역할만 수행해 왔다. 현재, 세계 각지에서 이민을 둘러싼 긴장은 정확히 이 맥락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이민을 바라보는 결론적 입장에 좌파 우파 구분이 의미 없을 정도이고 상호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정책 - 국가 차원에서 - 그리고 입장 - 개인 차원에서 - 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21세기다.

이 모순되어 보이는 정책과 입장은 사회주의적 의미에서 국제주의 (노동 계급의 초 국가성)가 사라지고, 탄생 동기에 대한 분분한 의견에도 자본주의 태동과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민족국가가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Maurice Wallerstein)이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가 세계 체제(world-system)가 된 지 꽤 되었고 갈수록 그 결속력이 강해지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 세계화된 경제 시스템을 제어하기 위한 ‘세계공화국’(Republic of the World) - 일본 학자 카라타니 코진(Kojin Karatani)도 비슷한 개념을 얘기했음을 이 글을 쓰면서 알았다 - 개념의 통치기구가 설립되기 전까지 이 모순은 지속할 것이다. 다른 말로, 이민을 둘러싼 파열음은 세계 곳곳에서 앞으로도 계속 들릴 것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Immanuel Maurice Wallerstein )(1930~2019)

문제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이 ‘세계 공화국’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공화국은 아나키즘과 비교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서 그렇지 기본적으로 사회구성원이 주권을 가진 통치 체제다. 세계라는 사회의 구성원들 - 세계 시민 -로부터 지지를 받는 정부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현 민족국가 내에서도 자본주의의 약탈적 자본축적을 방치할 경우 나라가 사회적 위기로 치달을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충분히 목격했다. 20세기 민족국가 시스템에서 세계화된 자본주의는 이 착취로 말미암은 사회적 갈등과 불만을 저개발 국가로 이전하면서 연명해왔지만, 지금 같은 민족국가란 격실 완충재가 사라지면 계급 간 갈등과 충돌이 더 폭탄 돌리기 할 수 없는 ‘세계 사회’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과 자본가 혹은 그 앞잡이로 구성된 세계 국가는 결코 존속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이 시스템에서 억압받고 소외된 자들의 반란 차원을 떠나,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세계 자본주의의 자본축적을 위한 무차별적 ‘환경파괴’로 지구 생태계가 종말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계공화국은 자본의 축적이라는 브레이크 없는 자연법칙 같은 자본주의 imperative의 지배가 아닌 주권을 가진 사회구성원의 의지가 반영되고 실현될 수 있는 체제가 되어야 한다. 그 체제는 현재 탐구 중인 민주사회주의 형식이 될 수도 아니면 다른 형식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느 경우가 되어도 본질에서 ‘탈 자본주의’ 시스템이 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국가 그리고 사회 간 역학관계

딴 길을 제법 멀리 갔다 온 기분인데 다시 이민 이야기로 돌아가자. 위에서 장황하게 설명한 것처럼 이민에 관한 한 흑백 논리도 천사 대 악마 구도도 적용될 수 없다. 어떤 반대 논리도 어떤 찬성 논리도 모든 측면에서 상대편에게 승리를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상적인 국제주의가 실현되어 전 세계적으로 부가 평준화되지 않는 한, 가난한 사람은 높은 소득이 제공되는 곳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경제적 필요의 충족을 포함한 행복추구권은 본능적 인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돈을 벌겠다고 한국에 온 저개발국 출신 이주노동자들 그리고 더 나아가 저개발국 출신 결혼이주여성을 비난할 수 없는 이유다.

 

파독 광부들

이들을 직접 비난하거나 차별하는 것은 또 다른 면에서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하는 것이다. 1960~70년대 독일에 돈 벌러 간 2만여 명의 광부와 간호사를 잊었는가? (애초 믿었던 것과 달리 파독 광부들은 120명에 화장실 하나의 닭장 같은 숙소에 자면서 막장에서 고된 노동 결과 27명이 작업 중 사고로 사망했으며 파독 간호사 19명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출처 오마이뉴스) 설사 이들이 한국 노동자들의 임금을 포함한 고용 조건을 악화시킨다 하더라도 욕은 최종적으로 이들의 입국 허락 결정을 내린 한국 정부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자본주의에 할 줄 하는 기본적 사회학적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민자를 온화한 눈으로 바라보는 듯한 친 이민자 단체/조직도 마냥 천사화될 수 없다. 인류에 대한 보편적 박애라는 추상적 이데올로기의 구현이라는 명목하에 이주노동자 및 이주 결혼여성에 대한 이들의 온정주의는 그들의 시급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진통적 효과는 있을지언정 결코 균형 잡힌 구조적 접근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이들 중 일부는 고용허가제를 통해 입국한 이주노동자(비전문취업비자(E-9))들의 직장 변경 권리를 주장한다. ‘모든 국민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가진다’는 ‘대한민국’ 헌법 15조다. 이 조항에서 이주노동자는 직업선택의 자유를 가진다는 논리를 유추하는 것은 2011년 헌재의 판결문에 쓰여 있듯이 ‘인간의 자유’는 ‘국민의 자유’라는 삼단논법을 적용했기 때문인데, 모든 인간은 국민의 형식으로 존재한다는 현실을 외면한 삼단논법 적용이다. 이들의 보편적 인권에 기초한 듯한 주장이 적지 않은 한국 사회구성원들로부터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것은 눈만 돌려도 금방 확인할 수 있는 국내 노동자들에 대한 부정적 파급 효과를 외면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온정주의는 역설적으로 국내 노동자의 행복추구권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 외 이민자를 둘러싼 민족국가의 제한된 자원 배분을 놓고 사회구성원의 입장은 엇갈릴 수 있다. 가령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나라 못 사는 사람부터 챙겨라’라는 논리는 나름 여전히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반문하고 싶다. 외국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한국의 경제적 지원 혹은 인도적 이민 허가는 이들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이 아니라면, 한국 내 극빈층보다 못 사는 것이 확인될 때만 가능하다는 의미인가? 그리고 한국 극빈층의 삶의 조건이 어느 정도까지 향상되어야 ‘자, 이제 우리 잔이 넘치니 이웃에 눈을 돌립시다’ 모드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인가?

위는 극단적 단순화 예이고, 현실적 사례는 좀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2019년 한국 노총의 자료에 의하면, 초등학생 2명의 자녀를 둔 4인 가족의 월평균 생활비가 579만 원 그리고 1인 가구는 약 226만 원이다. 직종의 3D 여부를 떠나서 자신이 풀타임으로 현 직장에서 일해도 이 생활비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한국의 노동자들은 당연히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그곳으로의 이직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에게 이런 급여를 주면 기업이 혹은 사업이 운영 자체가 안되므로 해외에서 노동자를 들여와야 한다는 고용주의 논리다. 그런데 사실 많은 경우, 대부분이 아니라면, 기업 혹은 사업 운영 자체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고용주들의 이익이 줄어들 뿐이다. 100억의 이익을 남겨야 하는데 이게 80억으로 줄어드니까 원래 100억을 위해서 외국에서 노동자를 들여와야 한다는 논리다.

위 ‘우리나라 못 사는 사람부터 챙겨라’라는 논리는 이 경우 설득력이 커진다. 자국민 - 대부분 노동자 - 모두가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국가 최우선 책무임을 고려할 때, 이 임무를 방기한 채 일부 자본가의 상대적 이익 저하 불평을 받아들여 한국민 평균 생활비에 못 미치는 급여를 마다치 않는 해외 노동자 - 모국에서 받는 급여에 비하면 여전히 높기 때문에 -의 수입 허가를 내주는 국가는 욕을 먹어도 싸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민을 둘러싼 글로벌 자본주의의 imperative, 기존 사회구성원 그리고 민족국가 역할의 이중성(자본주의와 기존 사회구성원 사이에서 줄타기) 간 역학 관계는 우리로 하여금 이민과 관련된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매번 긴장하게 한다. 이민을 둘러싼 이슈들은 매번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전형적 저임금 노동자의 유입 형태일 수도, 매매혼으로 비치는 결혼이주여성일 수도, 또 이번 ‘특별기여자’ 그룹처럼 난민 형태일 수도, 또 차원을 달리하지만, 배타성과 우월주의 - 우리는 이를 근본주의라고 부른다 -로 무장하여 종교적 믿음을 자신의 가장 큰 정체성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이는 그룹 - 실제로 그런지와 관계없이 -의 등장일 수도 있다.

맺음말

이민을 둘러싼 현재의 긴장 근원은 결국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몸과 ‘민족국가’라는 옷 간 불일치이다. 따라서 에세이 중간에 주장했지만 나의 바람을 담은 결론은, 현존 민족국가가 해체되고 세계공화국 정부가 들어설 때 이 긴장의 대부분이, 전부가 아니라면, 해소되리라는 것이다. 단, 이 세계공화국 정부는 글로벌 자본주의를 대신하는 정부가 아니라 탈 자본주의적 경제사회 시스템(어떤 형태가 되었든 지난 2세기에 걸쳐 사회주의가 인류에게 물려주었던 소중한 유산을 간직한 시스템)을 지휘하고 조율하는 기구가 되어야만 한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계정부의 출현이라면 민족국가의 민족주의 덕분에 사회적 파열음이 나도 글로벌 자본주의의 이익 실현 과정을 일정 부분 억제하는 현 상황보다 더 나쁜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세계정부는 현재 세계 인류가 겪는 재앙적 상황을 극복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 대표적 예로,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버려지는 음식 쓰레기는 기아에 허덕이는 전 세계 인구를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는 양이지만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 사회에서는 이 잉여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지구 다른 편의 사람들에게 결코 전달되지 않는다.

 

미국 환경미화원이 과일/야채를 박스째 버리고 있다

탈 자본주의적 세계공화국 정부 혹은 유사 개념의 정치 기구는 이처럼 생존을 위한 기본적 조건의 세계적 확산뿐만 아니라 경제적 조건의 향상을 위해 사람들이 대규모로 이동(이민) 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30여 년 전에 장벽이 무너지면서 동독과 서독은 하나의 독일이 되었지만, 이 두 지역 간 소득격차는 여전히 있어 구동독 주민은 구서독 주민의 80% 수준의 수입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구동독 주민은 서독으로 이주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한 연구에 따르면, 이주에 따른 경제적 비용과 더불어 정착의 어려움이 크기 때문에 구서독 지역 주민보다 수입이 낮은 것을 알아도 거주하는 구동독 지역에서 경제 및 사회 활동하는 것이 낫다는 결론적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유사한 결과를 탈 자본주의적 세계공화국 정부로부터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 포스트에서 언급했듯이, 소위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는 글로벌 자본주의에 의해 엎질러진 물처럼 호스트 국가 사회구성원 동의 없이 다인종/다에스닉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 파열음에 대한 damage control을 위해 민족국가가 부랴부랴 동원한 이데올로기 같지 않은 이데올로기이다. 이상적인 다문화는 너무 상식적이지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행하다 현지에서 만난 그녀와 사랑에 빠져 그곳에 같이 살면서 같이 한국 드라마를 보고 그래서 한국 문화와 그녀 나라의 문화와 자연스럽게 섞이는 것 정도가 아닐까?

하고 싶은 말은, 강요되지 않는다면 사람은 자신이 편안해하는 환경에 거주하길 선호하며 위 구동서독 주민의 사례에서 보이듯 지역 간 소득 차이 비율이 10:8 정도 - 지금 이주노동자들은 자국에 비해 5~10배의 임금 상승을 기대할 수 있다 - 라면 이주 지역의 텃세까지 감수하면서 이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 세계 노동자의 완벽한 소득 평준화는 불가능하겠지만, 특히 초기에는, 불평등이란 단어를 사용할 만큼 현저한 차이가 아니라면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세계 시민은 자신이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끼는 곳에서 굳이 벗어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이주는 이들을 받는 지역 사회가 전혀 부담 없이 동료로서 이웃으로서 따뜻하게 이 이주민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현 이민을 둘러싼 긴장과 충돌의 궁극적이며 근본적 해결책이다. 이 유토피아는 2021년 안에 올 것 같지는 않기에 장기적 목표로 설정하고, 마지막으로 몇 마디 추가하면서 에세이를 마친다. 뉴질랜드 그리고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민족국가’는 그 정치체제에 관계없이 이민에 관한 한 위에서 누차 강조했듯이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국가 그리고 이민 호스트 사회 간 복합적 역학 관계라는 프레임을 통해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민을 둘러싼 이슈들은 그 양상과 함의가 상황에 따라 항상 달라지므로 특정 시각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민 관련 정책적 결정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 이에 한정되지는 않는 - 다각적 질문을 자신에게 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정책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나를 제외한 다른 사회구성원 - 특히 사회적 약자들에 -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이 정책으로 누가 ‘실질적’ 혜택을 보는가? 이 이민 정책의 실행이 과연 최선의 선택인가? 다른 대안은 없는가? 입으로는 세계시민을 얘기하지만 나도 님비(NIMBY) 과에 속하는 것은 아닌가?

첨언: 이 에세이를 관통하는 논리의 틀은 이전 포스트, ‘한국의 다문화주의에 대한 담론들’(1~7편)에서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