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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포스트’ 껍데기 민주주의, 위로부터 사회주의는 가라’에서 영감을 받아, 그동안 미뤄왔던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의 세계적 히트에 대한 내 생각을 간단히 정리해 본다. 에세이에서 저자는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경제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이 분리되고, 경제적 권력이 사회적 권력의 주축으로 자리 잡았음을 이야기한다. 이 분리를 통해 정치적 권력은 정치적 민주주의의 외연 확대 - 가령 보통 선거권 -라는 일정 성과를 얻었지만, 경제적 권력은 경제적 민주주의를 가져오지 못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경제적 권력이 자본가에 있기 때문이다.
기생충에 이어 오징어 게임의 연이은 세계적 히트를 보는 내 감정과 생각은 좀 복잡하다. 블로그를 보신 분들은 알다시피, 나는 전 세계적 차원의 불평등과 빈부격차의 근본적 원인을 자본주의라는 경제 시스템 그리고 악화의 책임을 신자유주의에서 찾는 사람이다. 이런 사회학적 관점으로 세계의 현상을 이해하는 사람으로서, 한국 사회 불평등과 빈부격차를 소재로 한 이 두 영화/드라마의 세계적 인기에 대한 해석 시도에 이 관점을 적용해 보려 한다.

한국은 경제 시스템으로는 자본주의를, 정치 시스템으로는 리버럴 민주주의를 갖춘 나라이다. 서구 근대화는 개인주의(Individualism)라는 같은 아버지를 둔 자본주의(Capitalism)와 리버럴리즘(Liberalism)이라는 쌍둥이에 의해 완성되었다. 현 서구 사회의 두 기둥인 자본주의와 리버럴리즘을 한국 사회도 그대로 차용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3, 40여 년간 한국 사회는 리버럴리즘의 두 주요 가치인 자유와 평등을 최소한 형식적, 즉 정치적으로는 옹호해 오면서 일정 부분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실질적 자유와 평등, 즉 경제적 자유와 평등은 특히 1998년 외환위기 이후, 발전은커녕 퇴보하고 있다.
나는 이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의 불균형이 오징어 게임과 기생충의 세계적 히트를 가능하게 한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성공은 한국 사회의 치부 - 극심한 빈부격차, 장기매매, 반지하 방, 외국인 노동자 차별, 복지 사각지대 등 -를 드러내는 것을 금기시하지 않는 자율성을 문화에 부여했다. 경제적 민주주의의 실패는 정치적 민주주의 성공으로 가능해진 이 표현의 자유가 묘사할 대상, 즉 두 영화/드라마의 소재인 한국 사회의 치부를 제공했다. 이처럼 성공한 정치적 민주주의(형식)와 실패한 경제적 민주주의(내용)가 만나 이들의 성공을 이끌었다고 이해한다. 이 두 문화상품의 세계적 성공은 한국민의 민족주의를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이 민족주의와 한국 사회의 치부를 소재로 한 문화상품의 만남은 의외의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분야가 되었든지 간에 아시아에서 1등을 해도 자랑스러워했던 그 한국이, 언제부터인가 세계를 무대로 찔끔찔끔 1등을 하기 시작하더니, 최근 몇 년 대놓고 그것도 매우 가시적 문화상품을 통해 1등을 밥 먹듯이 하고 있다. 이건 언젠가 깨어나 허탈해 할 일시적 ‘뽕’ 기운이 아니라, ‘우리’ 한민족에 대한 인식의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하는 단계에 이른 듯하다. 이 새로운 ‘우리’에 대한 인식은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의 성공이 보여주듯, 한국 사회의 치부를 부끄러워하기보다는 그 치부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 보이고 자아 성찰할 줄 아는 한국 사회의 성숙함을 자랑스러워하게 만들었다. 한국 사회의 치부 자체는 부끄러울지 몰라도, 그 치부에 대한 당당한 인정은 자랑스러운 것이 되었다. 이 치부에 대한 당당한 인정을 성숙함으로 이해하며 이를 자랑스러워하는 대목이 나에게는 신경 쓰이는 부분이다.

불평등과 빈부격차마저 대상화(objectification) 하고 상품화(commercialization) 하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놀라운 신공을 보는 듯하기 때문이다.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이 세계적 히트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불평등과 빈부격차에 대한 세계적 공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한국 사람들은 매일을 전쟁처럼 살아가는 나와 내 이웃의 이야기가 나온 영화/드라마였고 따라서 공감도 했지만, 그게 다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카데미상도 타고 몇 주 연속 넷플릭스 1위도 하면서, ‘우리나라’가 세계 1등이 된 것에 자랑스러워하는 해피엔딩으로 문화상품 소비를 마치고 만다. 외국 사람들 역시 절박한 궁지에 몰린 오징어 게임 출연자들의 사연이 자신의 이야기임에도, 결국은 달고나 게임과 같은 이국적 문화상품을 가볍게 즐기는 것으로 소비행위를 마친다. 빈부격차와 불평등은 이제 시장 천지에 널리 문화상품 중 하나가 되고, 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다른 상품처럼 개인 선택의 문제가 된다. 오징어 게임과 기생충 속 빈부격차와 불평등은 나의 현실 경험임에도, 대상화되고 상품화되는 과정을 거쳐 나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이처럼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는 당사자들로부터 빈부격차와 불평등을 분리하여 대상화시키고 상품화 시킨 후, 다시 그 당사자들에게 빈부격차와 불평등이라는 상품을 소비하도록 유도한다. 경제적 민주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를 분리한 자본가와 리버럴의 ‘콜라보’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두 영화/드라마가 한국 사회의 빈부격차와 불평등을 다루었지만, 경제적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원인을 자본주의 그리고 리버럴 민주주의의 본질적 한계에서 찾으려는 움직임에는 어떤 동기 부여도 하지 못하고 있다. 영화/드라마 제작자들은 지금 어쩌면 다음 작품을 위해 세계 시장에 먹힐만한 한국 사회의 치부를 찾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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