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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이 블로그의 주 탐사 주제는 ‘ethnic relations’와 ‘사회주의적 가치의 재발견/부활’이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에서 현재 진행 중인 다문화/인종화 현상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한국의 다문화/인종화 현상에 대한 이런 나의 관심 결과들은 7편에 걸쳐 연재된 이전 포스트 ‘한국의 다문화주의에 대한 담론들’ 시리즈에서 밝힌 바 있다. 사실 이 글은 2013년에 쓴 것으로 블로그를 만들면서 원문의 내용을 조금 업데이트해서 다시 옮긴 것인데, 이 시리즈에 담긴 나의 관점과 이해는 2021년 현재도 대부분 유효하다.
뉴질랜드를 포함해 해외에 사는 교민은 한국의 다문화/인종화(multi-ethnicization) 현상에 대해 어쩌면 한국 내 학자들 그리고 시민단체보다 더 객관적인 진단과 생산적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큰 이유는 ‘역지사지’다. 뉴질랜드의 많은 마오리 학자들 그리고 지도자들이 현 뉴질랜드 사회에서 마오리를 덮고 있는 불편한 진실들 - 예를 들어, 타 에스닉 그룹보다 월등히 높은 범죄율 그리고 재소율 - 에 대해, 그 문제의 해결책은 ‘마오리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파케하 같은 외부 시각에 기반을 둔 문제 이해와 해결책은 파케하식의 합리주의적 결론 혹은 기껏해야 온정주의의 끝자락에 머물 수밖에 없어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파케하라는 백인 그룹이 양적 다수이자 모든 영역 - 경제, 정치, 문화 등- 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뉴질랜드에 사는 소수민족 이민자로서, 한국 교민은 한국의 이민자(불법체류자를 포함해서)와 외국인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에 대해 ‘역지사지 경험’이 없는 관료들로 구성된 한국 정부의 출입국사무소는 물론 ‘온정주의적 친 이민자 시민단체’보다, 문제의 핵심에 더 명료하게 접근할 수 있는 그룹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법무부 산하 출입국 관리사무소는 뉴질랜드 이민부(Immigration NZ)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한 민족(an ethnic group)에 가까운 직원 구성을 보이고 있다. 당연히 이 직원들은 한국에서 '소수'가 되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한국에 아주 가끔 갈 때마다 기분 나쁘게 느끼는 것은 공항 출입국 직원들의 고압적인 자세다. 그들의 고압적 자세는 유감스럽지만, 똥개도 집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시쳇말이 연상되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완장 질로 내게 보인다. 외국인 방문자, 이주자 심지어 해외 교민마저 마치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듯한 그들 태도는 현재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다문화/인종화 현상을 대하는 한국 관료 집단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뉴질랜드 이민부는 신자유주의 시대사조에 맞추어 외국인 방문자들을 '국가 서비스를 소비해 주는 고객(customer)'으로 칭하지만, 한국은 뭐라 호칭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한국 출입국 관리사무소 직원들이 우월적 지위와 시각으로 이주자 혹은 외국인을 내려다보듯 대한다고 한다면, 한국의 친 이주자 시민단체 등은 이들 공무원보다 훨씬 ‘따뜻하고 선한’ 한국인들로 이주자들에게 다가갈 것이다. 하지만 이전 포스트에서 썼지만, 이들의 스탠스에 대한 평가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일단 이들 조직의 재정적 후원 상당 부분이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나오는 탓에, 이들은 한국 정부가 지향하는 다문화 정책에 반하는 입장을 취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이런 구조적 문제뿐만 아니라, 이들 조직 구성원 역시 출입국 사무소 직원처럼 대부분 - 모두가 아니라면 - '소수'가 되어본 경험이 없이, ‘머리'로 배웠던 그리고 ‘나름 가슴으로’ 느낀 ‘보편적 인권에 기초한 온정주의’로 무장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뉴질랜드 한국 이민자들이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접해 볼 수 있는 유형의 그룹 - 대부분 파케하 -이다. 이들은 결코 ‘나쁜’ 사람들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이민자인 나와 모든 것을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도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형식이지만 이들 역시 많은 경우 한국 출입국 관리사무소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당사자들이 의식하든 못하든 이민자를 ‘타자(others)’로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만 남매 스토리
본론으로 돌아가자. 다큐 비디오에 나오는 ‘노만’은 2000년, 돈을 벌러 한국에 온 파키스탄 부모를 따라 4살 때 한국에 와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16년 파키스탄으로 출국할 때까지 한국에서 16년을 보낸 젊은이다. 2012년에 비자 연장이 안 된 부모가 먼저 파키스탄으로 출국한 후 주변의 탄원으로 그나마 고등학교까지 한국에서 마칠 수 있었지만, 이후 체류를 한국 정부가 허락하지 않아 2016년 본인 말마따나 한국에서 자신이 쌓아 놓은 모든 것을 놓아둔 채, 언어도 문화도 종교도 다 생소한 부모의 나라 파키스탄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파키스탄에 돌아간 이후 그곳에서 생활하는 그의 모습을 2019년 다큐에서 생생히 볼 수 있다.
“그냥 미성년자라고 해서 우리에게 선택권이 없었잖아.
한국에서 살고 싶은지 파키스탄에서 살고 싶은지를 물어본 사람이 없었잖아.난 정말 한국은 좋지만 그게 화가 나. 서운하고…..
너도 아까 말했잖아. 나 한국 사람이라고. 한 번이라도 물어봐 줬으면 어땠을까?....”
노만과 여동생들은 출생 혹은 유년기 시절부터 인격 형성의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는 청소년기를 통째로 한국에서 보냈다. '부모의 고향' 파키스탄은 그들에게는 언젠가 돌아가고 싶은 혹은 돌아갈 수 있는 '그들의 고향'이 아니었다. 파키스탄은 그들에게 말도 모르고 문화도 모르는 그저 한 외국일 뿐이었다. 노만의 여동생은 자신을 한국인으로 여긴다고 오빠에게 얘기하는 장면이 다큐에 나온다. 한국에서 성장하면서 분명 인종차별의 경험을 당했을 노만의 여동생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한국 정부는 국익을 이유로 선택의 기회를 주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그들을 쫓아냈다.
다큐 비디오에 올라온 댓글의 대다수 의견은 노만 남매에게 동정적이다. 한국에서 태어났거나 유년기부터 성장했고, 본인들 자신도 한국인이라고 생각할 만큼 한국 사회에 ‘동화’되다시피 잘 적응한 이런 아이들은 한국에 살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의견이다. 반면, 소수이지만 여전히 이런저런 이유로 이들을 봐주다가는 한국이 불법체류자- 특히 무슬림 -의 천국이 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발견된다. 노만 남매의 스토리와 그 댓글들을 통해서, 우리는 21세기 무엇이 '한국인'임을 결정하느냐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이전 포스트 ‘매매혼을 위한 변명’에서 나는 한국의 도시 빈민 그리고 농촌 남성과 상대적 저개발 국가의 여성 간 국제결혼을 속물적 매매혼으로 획일화시켜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커플들의 나이 차가 부녀지간에 해당할 수 있는 정도라도 그들이 그런 걸 감수해야 자신의 행복을 ‘개척’할 수 있다는 결론적 신념들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사례로 든 여성들은 베트남에서 온 황티쿡과 캄보디아에서 온 스롱 피아비였다. 둘 다 한국인 남편과 현격하게 나이 차가 나지만, 현재(2019년) 행복해 보이는 한국 생활을 하고 있다. 만약 한국 남편과의 결혼이 없었다면, 그리고 한국에 오지 않았다면,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이들은 지금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까?
다큐 비디오 19:35에 나오는 노만 여동생의 말은 위 내 우려가 근거 없는 것이 아님을 확인해 준다.
“그냥 (엄마가) 한국에 (나를) 버리고 오면 내가 뭐라도 해서 살았어.
내가 죽지는 않았을 거야. 살기 위해서 뭐라도 했을 거였는데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아예 여기(파키스탄) 살 수 있다는 거…
계속 계속 살아야 되는 것… 그거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난 계속 한국 갈 수 있다고만 생각했어”
아직 10대이고 따라서 그녀 앞에 어떤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나, 그녀에게는 한국이 더 많은 기회의 땅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스테레오타입이지만 히잡을 둘러싸고 촬영에 응한 그녀의 모습에서 한국에 있었으면 ‘뭐라도 해서라도’ 자기 인생을 개척하려고 애썼을 수 있었던 그녀였을 텐데, 파키스탄이란 이슬람 사회가 그녀에게 ‘뭐라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을까 궁금하다. 그녀 역시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이슬람 사회의 전형적 무슬림 여성처럼 뭐라도 한번 자신의 의지대로 해보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하지 않을까 상상하면 가슴이 아프다. 한국에 있었어도 잘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들에게 한국은 ‘미우나 고우나’ 고향같이 익숙한 터전이자 그들이 미래의 꿈을 꿀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이 공간을 송두리째 빼앗긴 것이다.
위 노만 남매가 다시 한국에 돌아가 살 수 있기 위해 절차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잘 모른다. 하지만 인도주의적 결정은 좀 더 적극적이고 '당사자 입장에서 과연 어떤 결정이 최선일까'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 후 그들에게 체류 자격을 주었을 때 국내에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서도 고려하는 것이 순서다. 국가 간 이민은 싼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자본가들의 니드가 가장 큰 동인이다. 그러나 자본가가 필요로 하지 않는 유형의 이민자에게도 적극적인 관심과 케이스 바이 케이스를 적용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자아실현을 할 기회와 공간을 제공해 줘야 하는 것이 어쩌면 '선진국' 한국에 사는 국민 그리고 그들의 정부가 갖추어야 할 마인드 셋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부모의 출국 이후, 노만이 불확실한 그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2014년의 모습도 아래 다큐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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