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한국 이야기

무궁화도 사쿠라도 아닌 부용(芙蓉)의 비극, 그리고 사회학적 상상력의 부재

김 무인 2021. 5. 14. 19:24

 

* 블로그를 찾아주신 분께 알려드립니다. 다음(daum) 블로그의 편집 에러와 한계로 교정/편집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같은 제목/내용의 '네이버 포스트'를 권장합니다.

 

 

머리말

 

쉬는 날이면 영화 혹은 다큐멘터리 등 한,두편의 영상물을 보곤 하는데 오늘은 일본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시청한 다큐멘터리는 총 3편이지만 소재는 두 개인데 보고 난 후 답답함과 먹먹함을 동시에 느꼈다. 첫번 째 소재는 ‘재한일본인 처’에 관한 것이고 두번 째 소재는 재일학도의용군출신 할아버지의 일본에 두고 온 딸을 찾는 과정에 관한 것이다. 시간 되는 분은 보시길 권장한다. 이 다큐는 개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굴러가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떻게 그 개인들의 삶에 파괴적으로 관여하는지 그리고 그 바퀴에 치인 인간이 역사로부터의 소외는 물론 같은 바퀴에 치인 주변 인간들로부터도 소외당하는 이중비극을 잘 보여준다.



재한일본인 처 

 

어렴풋이 부용회(芙蓉會)란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이번 다큐를 보면서 제대로 알았다. 부용회는 ‘재한일본인 처’들의 모임 이름이며 첫번 째 다큐는 이 부용회를 통해 알려진 재한일본인 처에 관한 것이다. 재한일본인 처는 엄격한 정의는 아니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서 일본 여성이 조선 남성을 만나 결혼관계를 유지하다가 해방이 되면서 조선인 남편이 한국으로 돌아갈 때 슬하 자녀와 함께 따라갔다가 많은 경우 남편 혹은 시댁으로부터 버림받고 혼자서 혹은 자녀와 함께 한국에서 살아가야 했던 일본 여성을 칭한다. 이들 숫자는 미디어마다 다르지만 한 때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 일본 여성 중 다수는 1940년대 일제가 전쟁 중임에 따라 일본 남성이 전쟁터로 향해서 부족한 공장과 탄광의  인력을 조선 남성으로부터 충당해야 했던 당시 상황에서 자연스러이 그 공장과 탄광을 중심으로 조선 남성과 결혼하는 경우였다.

 

 

 

이들이 조선 해방 직후 일본 가족들의 반대에도 한국행을 택한 것은 많은 경우 한국인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 때문였는데 한국말을 한마디도 못하는 상황에서 한국에 도착한 이들 일본 여성에게는 상상키 어려운 가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령, 한국에 이미 남편의 본처와 자녀가 있는 경우도 많았으며 말과 문화가 다른 며느리에 대한 시어머니와 시댁 식구의 구박이 그런 것이다. 의지할 수 있고 일본말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남편은 많은 경우 이들 ‘왜년’ 아내를 짐처럼 여기면서 팽개치며 딴살림을 차리거나 술,도박에 빠지면서 일본인 아내를 아예 투명인간 취급하게 된다. 

 

가정적으로 이런 남편과 시댁의 학대와 더불어 주변 사람들의 ‘쪽발이’ 시선은 이들을 정신적 사지로  그리고  6.25 전쟁 등으로 인한 한국사회의 빈곤은 이들로 하여금 생존을 위해 식모 혹은 몸을 팔아야만 하는 상황으로 이들을 몰고 갔다. 다큐에 출연한 할머니 중에도 자살 시도를 했다는 증언이 나오는데 실제 많은 일본인 처는 이렇게 막다른 길에서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이들의 유일한 희망은 늦더라도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1965년 한일수교가 되기까지 일본으로 가는 운송편이 없었고 그 이후에는 일본에서 자신을 받아주어야 할 가족들마저 귀국에 필요한 신원보증을 거부함에 따라 이마저도 여의치 않게 된다.



부용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

 

부용(芙蓉)은 꽃 이름이며 뉴질랜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hibiscus가 이 부용과에 속하며 중국이 원산지다. 이 재한일본인 처의 모임 이름이 왜 부용회가 되었는가를 설명해주는 장면이 31:31에 나오는데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인간들의 생존전략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모임이름을) 한국 이름으로 하려면 무궁화,

일본 이름으로  하려면 사쿠라로 해야 되니까

일본식으로도 하지 말고 한국식으로도 하지 말고

부용으로 하자. 부용은 중국 꽃입니다.’

 

한국에 수십 년을 살았지만 여전히 같은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 그들 시선 속에서는 - 한국사회 그리고 어찌 되었든 일본에서 태어나고 성년이 될 때까지 살았기에 일본인의 정체성 포기를 의미할 수 있는 무궁화를 선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여전히 ‘쪽발이’ 소리를 듣는 한국사회 그리고 자신들을 받아들일 의지가 없는 일본의 가족과 사회를 보면서 사쿠라를 대놓고 선택하기도 꺼려지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어쩌면 ‘아무’ 의미가 없을, 따라서 역설적으로 안전한 선택이 되는  ‘제3의’ 꽃을 선택한 것이다. 

 

이런 제3의 선택은 비단 재한일본인 처 그룹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두 이질적 사회/문화에 양다리를 걸치는 경계인 적 위치에 있는 모든 그룹에 해당한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 명준이 남한과 북한 어디도 자신이 안주할 곳이 아님을 발견하고 제3의 안식처로 죽음을 선택하듯 말이다. 강도가 다르지만, 많은 뉴질랜드 한인 교민도 유사 경험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 있으면 한국이 가고 싶고 한국 가면 뉴질랜드에 되돌아가고 싶은 경험이 그것이다. 

 

이전 포스트에서 다뤘던 혼혈 그리고 1.5세대/2세대 모두 유사 환경에서 유사 경험을 할 수 있다. 다만 혼혈과 1.5세대 혹은 2세대는 재한일본인 처 그룹보다 훨씬 강한 사회적/휴먼캐피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두 이질적 사회/문화 사이에서 차별의 경험을 피동적으로 그리고 패배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강함’을 가지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재한일본인 처 그룹이 일본사회라는 능선을 한편에 두고 다른 한 편으로는 한국사회라는 능선 사이에 껴서 이쪽 능선에도 저쪽 능선에도 올라서 다가가지 못한 채 두 능선 사이의 깊은 응달 분지에서 외롭게 춥게 지내는 상황이라면 혼혈과 1.5세대 혹은 2세대는 자신이 능선 위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듯’ 양쪽 분지에 위치한 두 사회를 대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자신의 조국이 '가해국'임을 속죄하기 위해 한국 고아 4명을 키운 요네모토 도키에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출처: 김종욱 사진작가)

 

사회학적 상상력(sociological imagination)의 부재

 

그러나 유감스럽게 재한일본인 처 그룹에게는 이런 강함이 없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가해국’ 출신이기 때문이며 비슷한 시기 비슷한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간 ‘피해국’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 그룹이 대척점처럼 한국 사회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주홍글씨처럼 가해국 출신이 따라붙는데 이 대목이 바로  우리에게 ‘사회학적 상상력’이 필요한 대목이다. 이 가해국 대 피해국이라는 단순 이분법적 프레임을 벗어나는 상상력 말이다. 왜냐하면, 이 프레임에서는 ‘가해국 출신’은 자동으로 ‘가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오직 남편만 믿고 한국 왔는데 바람 피고 폭력을 행사하며 생계도 책임지지 않는 남편 그리고  가해를 한 적이 없음에도 가해국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잔인한 차별을 하는 한국 사회구성원과 재한일본인 처 사이에는 ‘피해국 출신 가해자’와 ‘가해국 출신 피해자’라는 다층적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많은 한국의 대중은 ‘가해국 출신 피해자’라는 개념을 쉽게 수용하지 못하는 듯하다. 위 다큐가 2014년에 촬영된 것인데 일본인 처 할머니 한 분이 자신이 고생했던 부산 자갈치시장으로 촬영팀을 안내하는 장면이 13:20부터 나온다. 그 시장에서 해방 직후 상황을 기억할 정도 오랫동안 장사를 한 상인에게  당시 일본인 상황에 대해 촬영팀이 질문하는 상황에서 그 상인은 앞에 서 있는 할머니가 일본인인지 모르고 ‘쪽발이들은 다 쫓아내야 해’ 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 대답을 듣자마자 일본인 처 할머니는 황급히 자리를 뜨는데 2014년에도 저 정도인데 이전에 이들이 받았을 차별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이런 ‘가해국 출신 피해자’에 대한 시선을 자칫 ‘피해국 출신 피해자’가 받았을 고통에 대한 초점을 분산시키는 소위 물타기로 바라보는 시각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다. 가령, 일본 내 재일교포들에 대한 차별을 반박 카드로 꺼낼 수 있을 것이며 원폭투하로 고통받았던 일본 대중의 모습을 다룬 영화나 책들은 자신들 탓에 더 큰 고통을 받았던 ‘피해국 출신 피해자’의 아픔을 교묘히 외면하는 악어의 눈물로 바라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 피해자 입장에서는 가해국 혹은 피해국 출신이란 것은 의미가 없다. 이들 재한일본인 처에게 마지막 안식을 제공해 주는 보호시설 나자레원에 다니면서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카메라에 담아대는 사진작가 김종욱님은 아래 비디오 7:09에서 정확히 이 점을 얘기한다. 

 

 

 

‘전쟁으로 인한 인간의 피폐함이 

자국민이든 타국 국민이든 다 피해를 보고 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다 약자들이다’

 

참고로 김종욱님의 부친은 일제강점기 때 동원되어 탄광에서 강제노역하면서 전기고문까지 당한 경험때문에 당연히 일본을 증오하는 분이었지만 아들의 재한일본인 처 사진 활동에 대해서 적극 권장하였다. 그분의 말씀(5:10)은

 

‘내 뭐 일본 (징용)갔다 온거나 위안부 할머니나 

그 (재한일본인 처) 할머니나 다를게 뭐 있노?

다 동시대에 있었던 사건들이다.

전쟁으로 힘의 원리에 의해 우리가 식민지화 된 것

그런 부정적 요소들이 아니냐?’

 

전쟁의 논리라는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속수무책으로 깔린 개인들은 전부 피해자임을 정확히 간파한 말이다. 여기에서도 가해국 피해국 논리를 따지는 것은 그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들 - 자본가가 되었든 군국주의가 되었든 - 의 전쟁 도발 논리에  여전히 놀아나는 것밖에 안 된다. 피아식별을 정확히 해야 한다. 지금 내 고통이 어디에서부터 기인했는지를 알고 그 근원을 적으로 간주하여 정확히 타격해야 하며 따라서 필요하다면 가해국 피해국 가릴 것없이 ‘피해자 개인’들이 연대해서 투쟁해야 할 일이다.  전쟁을 일으킨 자들이 보여주는 대로 또 남들이 그러하니까 부화뇌동식으로 저항할 힘이 없는 그들을  린치를 가하듯 마녀 사냥하는 것은 ‘사회학적 상상력’ 부재의 비극적 결과다.



내가 그때 가족을 선택했더라면... 

 

다른 비디오는 역시 해방 직후와 6.25 전쟁 사이에 한 가정에 일어난 가슴 아픈 사연이다. 김태순님은 16살 나이에 일본은 건너갔다가 해방되면서 일본에 눌러앉으며 일본여성을 만나 결혼을 한 후 딸까지 얻게 된다. 그런 가운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자원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한 후 휴전이 되면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와중에 일본의 법령 개정으로 재입국이 불허되면서 한국에 발이 묶인 경우다. 한일 수교가 될 때까지 물리적으로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우편연락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다시 한국여성과 결혼한 후 생업에 종사하다 보니 수교 이후 왕래가 자유로워져도 한국 가족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겹쳐 일본의 아내와 딸을 찾지 못하다가 2013년(당시 88세)에 일본을 방문해서 가족을 찾는 노력을 한다. 방문 당시에는 찾지 못했다가 이 사연을 일본 신문기자에게 다큐 피디가 부탁하고 이 기자가 일본신문에 사연을 기사화하면서 한 달 만에 찾던 딸이 신문사에 연락을 취하면서 두 사람은 전화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60 년이 넘는 세월을 거쳐 처음 전화로 통화한 딸로부터 일본인 아내는 재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홀로 딸을 어렵게 키우다가 병으로 15년 전에 사망했고 참전 당시 아내 뱃속에 있던 아들은 태어나고 돌이 되기 전에 죽었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은 이 다큐의 마지막 부분(46:13)이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의용군 뽑는다는 소식에 일말의 주저 없이 지원했던 그가 아내와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들의 죽음 그리고 고생하며 자랐을 딸의 목소리에 자신의 선택에 후회를 담아 오열하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첫째로 드는 생각은 나라에 북한이 들이닥쳐서

내 인생이 이렇게 됐다는 것도 생각도 안하고

그냥 죄가 내 죄라…. 내가 잘 못한거라

일본에서 안 나왔으면 이런 지경을 안봤지

일본에서 안 나왔으면... 

아이를 놔두고 마누라를 놔두고 안 나왔으면….

이런 꼴을 안봤을 거라 말이지

그래 지 엄마 죽은 것도 그렇고... 

지 동생 죽은 것도 그렇고…’

 

위 재한일본인 처 할머니들은 조국을 뒤로하고 남편을 따르는 선택을 했지만 결국 이  선택으로 자신의 이후 삶이 무너졌으며 위 김태순 할아버지는 가족을 뒤로하고 조국을 선택했지만 결국 그 선택은 자신의 일본 가족들 모두의 삶을 무너뜨린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나와 가족을 위한 삶과 나를 벗어난 더 큰 공동체- 가령, 나의 국가 -를 위한 삶 속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어떤 선택을 했을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나와 내 가족에게 행복이란 결과로 돌아와야 하는데 역사는 과거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 못하다. 재한일본인 처 할머니들이 당장은 이산의 아픔이 있더라도 남편을 따르지 않고 조국에 남았더라면, 그리고 김태순 할아버지가 하지 않아도 되었던 의용군 지원을 하지 않고 일본의 가족에 남았더라면 어땠을까라는 결과론적 안타까움만 남는다.  

 

 



참고 자료

 


“사랑 좇아 온 나라에서 단지 일본인이라 죄인이었지”

 

한·일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 나는 아오키, 이복순, 청목항

 

“드러낼 수 없었던 일본 할머니들 존재… 하나님 사랑에는 국경이 없어”

 

광복절: 강제징용 피해자 아들이 기록한 ‘재한일본인 처’

 

가족 대신 민족을 택했던 선택의 댓가는 가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