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세상 이야기

자본주의의 허구적 신화, '혁신'(innovation) - 민주사회주의 이해하기 (24)

김 무인 2021. 11. 1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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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머리말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와 자본가와의 관계에서 가장 많은 쓰는 용어 중 하나는 “착취(exploitation)”일 것이다. 맑스 경제학에 따르면, 생산품의 판매 가격에서 실비용을  제외한 나머지가 부가가치이다. 이 부가가치는 전적으로 노동에 의해 창출된다. 그럼에도  노동자는 자신이 창출한 가치에 대한 보상을 온전히 받지 못한 채 그 일부만 받는다. 나머지는 생산에 필요한 자본은 투자한 자본가에 돌아간다. 이 자본가는 노동하지 않으므로 부가가치 창출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셈이다. 기훈이가 성실한 노동자였다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를 외칠만한 대목이다. 이 인식을 기반으로 우리는 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자본가는 노동자가 창출한 부가가치로 얻어진 수익을 가져갈(착취) 자격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명분으로?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개인적으로 이 질문에 자본가는 그럴 자격이 전혀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 주저되었다. 그 주저함의 이유 중 하나는  ‘자본가는 투자리스크를 안고 투자를 단행하므로 이 리스크 감당에 따른 사후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에 대한 완벽한 반격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에세이 저자는 이에 대해 어려워하지 말라고 옆에서 속삭이는 듯하다. 물론 자본가로 불리는 자본 투자자가 투자에 대한 리스크를 100% 자신이 지지 않는다는 것을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처음부터 투자 자금의 상당 부분을 은행으로부터 빌리고, 이후 투자에 실패해도 그 빌린 돈 상환 책임을 온전히 자신이 떠맡지 않기 때문이다. 소위 ‘구제금융’으로 표현되는 자본 투자자를 위한 ‘비용의 사회화’는 신자유주의가 지배한 현 자본주의 모든 국가에서 일상화가 되었다. 

 

저자는 이 에세이에서 자본 투자자의 비용과 리스크 부담의 사회화를 자본주의의 가장 큰 미덕 중 하나로 손꼽히는 ‘혁신(innovation)’과 연관 지어 논파한다. “자본주의가 문제가 좀 있지만, 사회주의 너네는 창조적으로 혁신할 의욕도 동기도 없잖아? 그러니까 생산성 향상 문제만 나오면 항상 꼬리를 내리는 거잖아”. 이 자본주의 반박에 대해 저자는 ‘혁신을 이룩하는 것은 너네 자본주의가 아니라 그 혁신을 뒷받침하는 사회적 관계야. 그리고 그 사회적 관계는 바로 사회주의의 정수야, 이 바보야!’라고 외친다.  사회주의적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 자본주의 사회 내 혁신이 자본주의 이윤 추구 욕망으로 왜곡되면서 현재와 같은 비생산적 지식재산권 시스템 그리고 기형적 금융화를 가져왔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에세이 후반 사회주의 대안 부분은 이전 에세이, ‘시장사회주의란 무엇인가?’ 그리고 ‘사회주의 은행 시스템은 어떤 모습일까?’를 참조하면 도움이 된다.

 

저자 Tony Smith는 미국 Iowa 주립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사회주의 오늘(... 그리고 내일) (Socialism Today (. . . and Tomorrow))

 

 

Tony Smith

자본주의 시장사회는 사회 생활 구석구석까지 스며든 이윤추구 법칙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 싸울 가치가 있는 사회주의는 “이익보다 사람”을 우선시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구호일 뿐이다. 이 구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우리는 그런 사회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사회가 정말 나을까? 이 질문들에 대답을 시작하는 한 가지 방법은 현대 자본주의의 숨겨진 비밀에 대한 탐구이다: 자본주의의 사회주의 맹아 형태에 대한 전적인 의존.

 

 

자본주의의 사회주의에 대한 기생적 의존! (CAPITALISM’S PARASITIC DEPENDENCE ON . . . SOCIALISM!)

 

자본주의 사회는 여러 방식으로 본질에서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사회적 행동 유형에 의존하고 있다. 무급 간병노동은 특히 주목할 사례다. 이 에세이에서 나는 종종 자본주의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로 여겨지는 혁신적 역동성에 필수적인 네 가지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자본주의 기업 내에서 혁신 과정은 공식적 그리고 비공식적 협업의 집단적 사회적 과정이다. 이 혁신 과정은 기업 생산품의 최종 사용자로부터의 피드백뿐만 아니라, 회사 내부 그리고 다양한 회사에 걸쳐 협력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과학-기술 노동자를 포함한다.  대부분 경우, 이런 협업은 자본 투자자 - 혹은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매니저 - 가 필요 자금을 배정할 때만 발생한다. 그러나 행동이 일어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힘은 행동 자체와 다르다. 혁신에 투자된 돈 그 자체는 혁신을 구성하는 어떤 활동도 하지 않는다. 투자자 계급이 그들이 혁신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사기다. 그들은 자본주의 재산 관계가 투자 자본을 통제하는 자들에게 허락한 사회적 권력을 행사했을 뿐이다.

 

우리는 두 측면을 가진 단일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다: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 측면과 동시에  인간의 욕구 혹은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혁신을 향한 창조적 사회적 협력 측면. 사회적 협력이 인간의 욕구 혹은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한, 사회적 관계는 사회주의의 초기 형태이다. 물론, 그것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왜곡된 형태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욕구와 필요는 오직 그것들 뒤에 충분한 구매력이 있을 때만 중요하다. 우선시 되어야 할 욕구와 필요는 무시된다. 인간 삶의 물질적 전제 조건이 자본주의 기업이 소유한 상품의 형식을 취할 때, 창조적 사회적 협력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은 그 상품 구매를 위한 돈을 벌기 위해 그 능력을 팔아야 한다. 그러고 나서 그들의 노동 과정은 이윤 추구 동기에 의해 뒤틀릴 것이다. 이윤 추구를 위한 경영 통제가 강화될 때마다 창의성은 희생되고 일은 파편화될 것이다. 노동 일과의 페이스와 시간은 건강을 해치는 스트레스를 유발할 것이다. 노동력은 자신이 창출하는 사회적 부가 증가하더라도 급격한 경제적 불안정성에 시달릴 것이다. 이 중 어느 것도 협력적 사회적 노동의 창조적 활동으로부터 자본주의의 혁신이 나온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2. 현재 자본주의의 지식경제로서의 기능은 갈수록 공공 자금의 지원을 받는 기초연구와 장기적 연구개발에 의존한다. 민간 투자자들은 다양한 이유로 이런 과학 기술적 역동성의 필수적 전제 조건들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R&D에 투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비용이 많이 든다. 상업화될 수 있는 혁신은 이런 투자에서는 절대 나오지 않을 수 있다.  설사 투자자가 나선다고 하더라도 투자를 뒷받침할 충분한 시장 수요가 없을 수 있거나 이 시장 수요가 경쟁 업체의 대체품으로 채워질 수 있다.   

 

이런 상당한 리스크 탓에 민간투자 펀드를 통제하는 사람들은 혁신의 꾸준한 흐름을 위해 필요한 기초연구와 장기적 R&D에 대해 투자를 축소하는 경향이 필연적이다. 미국에서 민간 섹터가 전체 R&D 지출의 약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기업 R&D는 중단기에 상업화될 수 있는 프로젝트에 집중하고 있다. 장기적 영향력이 있는 거의 모든 프로젝트는 공적자금으로 지원된다.

 

 

공공투자는 다른 의미에서 우리 사회 기술 변화 과정의 핵심이다. 하이테크 스타트업의 중요한 초기 단계에서 수반되는 리스크는 일반적으로 가장 용감한 벤처자본가들도 겁낸다. 공적자금이 구제에 나서야 한다. 또, 많은 혁신(예를 들어, 컴퓨터 칩)의 결정적 초기 단계에는 그것들에 대한 민간 섹터의 수요가 없다. 만약 국가의 구매가 없다면 그 혁신 개발은 중단될 것이다. 과학기술자의 다음 세대 교육을 위한 공적자금도 여기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에서 기술 변화의 가장 큰 비밀은 기술 변화가 실제로 자본주의와 얼마나 관련이 없는가이다. 자본주의의 근원에는 자본 간 경쟁이 있다; 자본 간 경쟁의 근원에는 경쟁적 우위 추구가 있다; 경쟁적 우위의 근원에는 혁신이 있다; 혁신의 근원에는 자기 자본의 리스크를 피하고자 하는 민간 투자자 대신 공공투자가 있다.

 

자본주의에서 성공적 투자에 대한 보상은 그들 투자의 리스크에 대한 대가로 투자자에게 돌아간다. 현대 경제에서, 대중은 가장 중요한 투자자로서 가장 장기적 중요성을 가진 가장 리스크가 큰 프로젝트에 투자한다. 그러나 금전적 보상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공투자를 “이용(leverage)”할 수 있는 민간 투자자에게 압도적으로 돌아간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새로운 약을 개발하기 위한 생물 의학 연구 비용은 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 of Health)을 통해 사회화된다. 그럼에도 대형 제약회사는 그 결과에 대해 특허를 획득할 수 있으며 독점적 가격 결정권을 가진다. 비용은 사회화되고 이익은 사유화되는 변태적 사회주의다.

 

못지않게 중요한 왜곡은 민간 자본이 과학기술 지식의 발전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산업과 과거 및 미래의 관계를 맺은 개인은 국가기관에서 직위를 획득하여 연구자금의 흐름을 조종할 수 있다. 또한 민간 섹터 보조금이 연구 프로젝트에 대한 공적 지원을 얻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적은 기여로도 혁신의 전반적 방향을 결정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아니면 공적자금을 배정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민간 자본이 선호하는 과학기술 지식의 발전 방향이 인간의 번영을 실현 가능한 최고 수준까지 높일 수 있다고 가정하는지 모른다. 이 가정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왜냐면, 수면, 운동, 영양 혹은 스트레스가 적은 직업의 건강상 이점에 대한 생물 의학 연구는 상대적으로 도외시되기 때문이다.

 

3.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는 “공산주의” 위협을 본능적으로 반대하는 대기업 경영진에 의해, 이들 기업이 이득을 보는 저렴하고 신뢰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소스로 이동했다. 일부 하이테크 기업들은 오늘날 그들 직원 근무시간의 일부를 오픈소스 프로젝트에 할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중요한 방식으로, 오픈소스 혁신은 자본 서클의 “외부”(outside)에 남아있다. 대부분의 사회적 노동은 자본에 의해 채용되는 임금노동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 협력하는 노동자들은 자체 조직된다; 무슨 프로젝트를 추진할 것인지, 누가 누구와 협업할 것인지, 업무가 어떻게 분담될 것인지, 언제 수행될 것인지를 지시하는 관리자가 없다. 그리고 이 흥분되는 새로운 형식의 창조적 집단 노동의 결과물은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에 의해 판매되는 상품이 아니다. 사용하기를 원하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무료 공공 물품이다. 사회적 협력의 이런 네트워크 내에서의 관계는 초기 사회주의 관계이다.

 

 

이익 중심 R&D의 한계를 뛰어넘는 오픈소스 혁신의 세계사적 잠재력은 엄청나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이 잠재력의 현실화는 현대 사회에서 제한되고 왜곡된다. 자본주의 기업이 오픈소스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사은품”(free gifts)으로 전용할 때, 또 다른 비용의 사회화(이 경우 오픈소스 프로젝트에 참여한 자원봉사 참가자의 시간과 노력이 공짜로 사용된다)와 이익의 사유화가 이루어진다. 이 같은 “사은품”은 직장 내 지배력 강화, 환경 해악, 사생활 침해, 구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필요에 대한 무시 등에 사용될 것이다. 이 같은 사용으로 추가 이익이 예상될 때마다 활용할 것이다. 오픈소스 커뮤니티에서 기업의 감독을 받는 지식노동자의 비중이 커질수록 오픈소스 커뮤니티가 가는 방향이 기업의 이익에 의해 결정될 위험은 커진다.

 

오픈소스 프로젝트는 또 자본주의 시장사회에서 금전적 여유가 없는 사람은 금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능력을 팔아야 한다는 사실에 제약받는다. 이런 사회적 맥락에서, 오픈소스 커뮤니티에 참여하는 것은 기업들이 자신의 종업원들이 갖길 원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잠재적 종업원이 되는 방편의 성향이 있다. 이 과정을 통해 교육 훈련 비용과 이 기술들이 곧 쓸모없는 것이 될 위험을 기업들은 지지 않게 된다. 또한, 대부분 직원은 여가에만 오픈소스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오픈소스 혁신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들 중 소수만 상대적으로 제한된 기간, 참여한다. 이런 한계와 왜곡을 고려할 때, 자본주의가 인간의 번영을 최대한 촉진하기 위해 오픈소스 혁신의 잠재력을 현실화한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4. 인류의 과거 유산(언어, 수학, 다양한 필수 기술 등)을 현세대에게 전수하는 것은 오늘날 사회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 과거 세대는 그들의 유산을 사용함으로써 오늘날 이득을 보지 못한다. 인류의 문화유산은 본질적으로 후세 인류에게 주는 무료 선물이다. 이런 선물 증여는 자본주의가 동시에 의존하고, 제약하고, 왜곡하는 또 다른 사회주의적 관계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이윤 창출은 우리의 문화유산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자본주의 투자자들은 이 유산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질 권리가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생산관계는 이들이 이 사회적 부의 가장 큰 부분을 전용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이 현대 사회를 괴롭히는 구조적이고 극단적 경제적 불평등의 지극히 중요한 요소이다.

 

요약하자면, 현대 자본주의 중심에는 협력하는 노동의 창조적 사회적 에너지, 국가와 대학 연구소에서 공적자금으로 수행되는 과학기술 연구, 오픈소스 프로젝트에서의 협업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공통 유산이 있다. 명백히 이 모든 현상은 오늘날 자본주의의 일부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이것들은 사회주의의 잠재적 형태이다. 자본주의는 흡혈귀가 산 자의 피를 먹고사는 것처럼, 사회주의적 실천의 성과를 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사회주의의 맹아 형태가 이미 우리 주변에 있다는 사실은 사회주의 사회가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이 사회주의적 맹아 형태가 제약되고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은 왜 사회주의 사회가 필요한지를 시사한다.

 

물론 더 많은 것들이 언급될 필요가 있다. 모든 명백한 결점에도, 자본주의는 의심할 여지 없이 세계 역사에 많은 중요한 진보를 가져왔다. 오늘날, 대부분 진보주의자는 여전히 세상을 보다 인간적이고 유지 가능하게 만드는 개혁(reforms)을 추구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이런 믿음이 그 설득력을 잃은 세계 역사의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의 “성장하거나 죽거나!”(Grow or die!) 운명에서 초래된 다가오는 환경재앙은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

 

 

 

자본주의의 미래 전망(CAPITALISM’S FUTURE PROSPECTS)

 

자본주의 발전 이전 시대에, 기술혁명의 최전선에 있던 지역이 높은 수준의 투자, 경제 성장, 실질 임금의 상승 그리고 향상된 생활 수준을 만끽하던 “황금시대”(golden age)가 있었다. 올바른 공공정책이 시행된다면 광범위한 혜택을 가져오는 새로운 “황금시대”가 왜 가능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보았듯이, 자본주의에서 혁신은 광범위한 기업 내부 그리고 기업 간 사회적 협력 네트워크와 더불어, 기초연구와 장기 R&D, 스타트업 지원, 교육, 첨단 제품의 조달 등에 대한  광범위한 공적 투자가 필요하다. 이 모든 것들이 소위 국가혁신시스템의 구성 요소들이다. 효과적인 국가혁신시스템을 수립하고 유지하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든다. 절대적 측면에서 지극히 소수 국가만 그것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적 측면에서는 전례 없는 수의 효과적 국가혁신시스템들이 지금 작동하고 있다. 2016년, 총 글로벌 R&D 자금 중 미국의 비중은 26.4%였다. 유럽은 또 다른 20%를 차지하고 있다. 아시아는 중국이 20.4%를 기록한 가운데 41.8%를 차지했다. 

 

국가혁신시스템의 확산은 혁신 및 확산의 속도에 관한 한 긍정적 발전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용가치 관점이며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화폐가치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요한 것은 혁신 자체가 아니라 혁신을 통한 경쟁 우위로부터 높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간(시간)이다. 이 기간, 이 지역의 자본은 세계시장에서 경쟁 우위를 누린다. 이런 관점에서, 효과적 국가혁신시스템의 확산은 자본주의에 큰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세계 한 지역에서 예외적으로 높은 수익성이 예상되는 혁신이 개발되는 순간, 한몫 챙기기를 바라며 전 세계의 국가혁신시스템은 즉각 반응한다. 그 결과, ‘자본주의 초기 단계보다 경쟁우위를 통해 고수익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은 필연적으로 짧아지는 경향이 있다.’ 

 

지식재산권(Intellectual property rights)은 국가혁신시스템에게 혁신으로 인한 이익을 장기간 향유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여전히 기술 강국인 미국은 범위와 집행 측면에서 지식재산권의 전 세계적 확장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과학기술 지식의 인위적 독점을 창출하기 위해 국가의 강압적 힘의 집중적 사용은 지식 생산비용의 사회화와 그 사용에 따른 보상의 사유화라는 왜곡을 심화시킨다. 지식재산권 시스템은 또  상대적으로 소수 기업이 방대한 지적재산 청구권을 축적함에 따라 경제력 집중은 전이된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확장된 지식재산권 시스템은 자본주의 성장의 “황금시대”를 열지 못했다. 법원에서 지적재산 주장에 대한 공격과 방어, 기존 특허를 중심으로 한 설계 그리고 라이선스 계약 구매 비용은 많이 증가했지만, 총 투자 비율은 증가하지 않았다.

 

혁신을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 현저히 단축되고 오직 상대적 소수 기업만이 지식재산권 시스템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면, 이익 추구 시스템에서 이익을 증가하는 다른 방법들을 적극 추구해야 한다. 이것이 최근 수십 년 동안 노동에 대한 자본의 전쟁 격화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전 세계적으로, 국민 소득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감소했다. 노골적 용어로, 이익은 착취율의 현저한 증가로 뒷받침되어 왔다.

 

“금융화”(Financialization)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또 다른 중요한 현대 추세이다. 저렴한 신용은 부채가 있는 가구들이 평소 할 수 없는 구매를 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기업들이 다른 방법으로는 누릴 수 없는 이윤을 제공한다. 값싼 신용은 낮은 수익으로 이미 파산했어야 할 “좀비 자본”(zombie capitals)들이 대출을 이월할 수 있도록 해준다. 값싼 신용은 금융자산에 대한 투자를 급증시키고, 이에 따른 금융자산의 가격 상승은 금융 투자자에게 다른 방식으로는 누리지 못할 이익을 제공한다. 금융화는 투기성 거품을 동반하고, 거품이 꺼지면 금융위기가 찾아온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구제금융 명목으로 공적자금이 동원된다; 보상의 사유화와 비용의 사회화라는 자본주의의 더러운 비밀이 그 모습을 여기서도 드러낸다. 

 

더 높은 착취율과 경제의 지속적 “금융화”는 상위 1%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지식재산권 시스템의 확장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발전의 새로운 “황금시대”를 자극하지 못했다. 세계 경제의 한 지역이 기술 혁명을 이끌며 다른 지역보다 수십 년 동안 경쟁 우위를 가질 수 있었던 역사적 시대는 끝났다. 대부분의 국가혁신시스템을 파괴하는 세계적 재앙이 없다면, 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의 의식은 이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 뒤처져 있다. 우리는 여전히 올바른 공공정책을 마련할 수 있다면 몇 획기적 기술이 새로운 “황금시대”를 열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이상 자본주의 발전의 “황금시대”는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역동적 시스템으로서 그 역사적 한계에 봉착했다. 이는 혁신이 너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혁신이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경제력의 집중화 가속, 노동을 상대로 한 무자비한 전쟁, 부채 노예의 증가, 지구를 배회하는 좀비 자본, 다른 곳의 자원을 필사적으로 빨아들이는 금융거품과 위기.

 

자본주의는 심지어 이전 옹호자들조차 인간의 번영을 촉진할 수 있는 사회적 질서에 자리를 이제 내줘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드는 형태로 변모했다.

 

 

 

싸울 가치가 있는 사회주의(A SOCIALISM WORTH FIGHTING FOR)

 

우리의 당면 과제는 불확실한 미래의 어느 시점보다는 내일 실현 가능성이 가장 큰 사회주의 모델을 개념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현 사회에서도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측면들은 수용하면서 자본주의와 그 증가하는 병적 경향과는 결별한 사회질서를 원한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현재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시장에 제약받는 사회주의적 사회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사회주의적 관계에 의해 (비자본주의) 시장이 제약받는 사회 질서는 실현 가능하다는 그럴듯한 주장이 있다. 자본주의의 중심에서 시장과 사회주의적 관계 모두 실현 가능성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주의적 관계가 이윤추구 메커니즘에 종속되는 것을 극복함으로써, 자본주의 시장사회로부터 완전한 단절을 가져올 수 있다는 그럴듯한 주장을 할 것이다.

 

사회주의 대안의 가능한 요소를 David Schweickert(이전 포스트, '시장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에세이의 저자이다: 역자 주)에 저술에 기초하여 스케치해 본다:

 

- 생산과 유통은 지역공동체가 소유하고 노동자 자신이 조직한 직장에서 직접 혹은 노동자에 의해 선출된 매니저를 통해 이루어진다.

 

- 노동자가 운영하는 기업의 생산물은 소비자와 생산자 시장에서 판매될 것이다.

 

- 노동자 기업을 위한 투자 자금은 지역 공동체 은행에 의해 조달될 것이다.

 

- 지역공동체 은행은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인구수에 비례하여 분배할 투자 기금을 받는다.

 

- 공동체 은행의 자금 배분은 지역, 지방, 국가 그리고 어쩌면 궁극적으로는 세계 차원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기구에 의해 결정된 사회적 우선순위에 기초할 것이다.

 

- 노동자는 그들이 민주적으로 수용한 원칙에 따라 기업 수입의 일부를 받는다. 공동체 은행 노동자들이 받는 소득은 민주적으로 결정된 사회적 우선순위를 성공적으로 처리한 기업에 투자 자금을 성공적으로 할당한 것에 대한 보상이다.

 

- 노동자 집단과 공동체 은행의 이사회는 이들 기관의 행동에 영향을 받는 사회단체를 대표할 것이다(공동체 협회, 환경 감시단체, 소수 그룹 옹호 단체 등)

 

- 민주적으로 선출된 기구도 원칙에 따라 공공재 제공을 위한 투자 자금의 수준을 결정할 것이다. 우리의 웰빙을 증진하는 모든 것은 무료 공공재로 분배되어야 한다는 원칙 위에서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합리적 공공투자가 이루어질 것이다.

 

-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양질의 삶을 살 수 있을 만큼 높은 수준의 기본 소득을 보장받을 것이다.

 

이 모델에서는 사회의 나머지 영역에 하향식 계획을 강요하는 책임 없는 엘리트들은 없다.  시장의 중요 이점들은 유지된다. 가계와 기업은 무슨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것이다; 기업은 구성원이 결과에 대한 혜택을 직접 누리므로 과정과 생산의 혁신을 추구할 강한 동기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통치는 깨질 것이다. 투자의 전반적 수준, 이 투자의 사회적 우선순위, 그리고 특정 지역에 대한 투자금액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생활을 지배하는 이윤 추구에 의해 결정되지 않을 것이다. 이 중요 결정들은 대신 민주적 숙고 후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익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의미다.

 

많은 의문점이 남아 있다. 여기에서는 하나만 고려한다. 사회주의 제도와 실천에 통합되는 것은 위에서 논의된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인식할 수 있는 사회주의의 네 형식(기업 내부 노동자 간 그리고 기업 간 네트워크에서의 사회적 협력, 공적자금으로 지원되는 R&D, 오픈소스 혁신 그리고 우리의 집단적 문화적 유산의 전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

 

1. 위에서 스케치한 사회주의 모델은 시장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 모델은 자본주의 시장사회가 아니다. 민간 개인이 사회의 생산 자원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구매할 수 있는 자본 시장이 없다. 민간 투자자들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관리자는 사라진다. 관리자는 대신 권한을 행사하는 대상인 사회구성원에게 민주적 책임을 진다. 이런 환경에서 직장의 살아있는 노동의 창조적 사회적 힘은 자본주의 하에서와 같은 강압, 지배, 착취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기업 내 혁신과 협력적 기업 간 네트워크가 생산성 향상을 이끌면서, 사회의 생산적 자원의 유실과 경제적 불안정 없이 근무 일수를 줄이는 데 이 향상된 생산성이 사용될 수 있다. 일을 보다 창의적으로 만들기 위한 혁신도 적극적으로 모색될 것이다.

 

2. 사회주의에서, 비용의 사회화는 이에 적절히 대응하는 혜택의 사회화와 연계될 것이다. 자본시장과 생산과 유통 수단에 대한 소유권이 없으므로 사적 이익을 위해 공공투자를 “이용”(leverage) 할 수 있는 소수의 자본가와 통제자들도 없을 것이며, 혁신은 대중을 위한 방향으로 추진될 것이다. 기초연구와 장기적 R&D에 대한 투자와 함께 동반되는 미래 계획은 명시적으로 인지되면서 공공 논의와 민주적 결정의 대상이 될 것이다.

 

3. 시장에 의해 체계적으로 무시된 사회적 필요는 오픈소스 프로젝트를 통해 해결될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 오직 사회주의만이 그 잠재력을 완전히 현실화할 수 있다. 이를 위한 중요한 한 걸음은 오늘날 자본주의가 원하는 광범위한 지식재산권 시스템을 해체하는 것이다. 지식재산권 시스템은 오픈소스에 필요한 아이디어의 자유로운 흐름을 철저하게 제한한다. 다른 걸음은 오픈소스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는 수준의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정과 공동체의 돌봄 서비스에 대한 지원이 제공될 것이다.) 오픈소스 프로젝트의 성과는 이미 사람들은 금전적 동기부여 없이도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프로젝트에 다른 사람들과 기꺼이 협력하며 참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아존중, 동료에 대한 존중, 창의성을 발휘하고 호기심을 충족하는 것에서 오는 행복감은 엄청나게 효과적인 동기부여 요인이다. 추가적 동기 부여가 고려되어야 한다면, 긴급한 사회적 목표를 위한 오픈소스 프로젝트에서 획기적 발전을 이룬 팀에게 일회성 금전적 보상이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4. 자본주의의 재산권은 “신탁펀드 베이비들”(trust fund babies)이 극도로 높은 보장된 평생 소득을 누릴 수 있게 한다. 이것은 우리 공동유산의 불법적 사유 전용이다. 자본주의의 사회적 관계가 자본가에게 허용한 것과 같은 규모로 집단적 유산의 혜택을 사적으로 전용하는 소수 그룹은 없었다. 모든 사람은 우리 공동의 문화유산에 의해 생산된 사회적 부의 공평한 몫을 보장받아야 한다. 우리 모두 “신탁펀드 베이비”가 되어야 한다! 평생 기본소득 보장은 이 원칙을 제도화할 것이다. (또, 대중은 혁신에 있어 가장 중요한 투자자인 만큼 투자로부터 가장 큰 “배당”(dividend)을 받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 이 보장은 구체화하여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무료 공공재의 증가와 더불어 모든 수혜자는 괜찮은 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 기본소득은 높아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기본소득은 충분한 사람들이 추가 수입을 위해 노동자 기업과 공동체 은행에 일할 것을 결정할 정도로 적절히 낮아야 한다. 자동화 진전과 함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격려 자극의 필요성은 줄어들 것이다. 그럼에도 이 기본소득 수준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지배와 착취의 강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에서 있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결론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제약하고 왜곡하면서도 기생적으로 유사 사회주의적 상호작용에 의존한다. 자본주의의 세계 역사적 한계는 이제 명확하다. 자본축적의 유일한 경로는 사회적 퇴행의 경로이다: 더 많은 경제력의 집중, 노동을 대상으로 한 더 잔인한 전쟁, 빚에 허덕이는 더 많은 사람, 반복되는 금융 위기. 행복의 공유, 실질적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환경적 온전성은 영원히 손에 잡히지 않을 것이다. 사회주의 대안을 위한 투쟁이 훨씬 나은 경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