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세상 이야기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과 돌아볼 시간이 있는 삶 - 민주사회주의 이해하기 (23)

김 무인 2021. 11. 16.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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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머리말

요즘 한국이 대세다. BTS, 기생충 그리고 오징어 게임으로 이어지는 한국 문화상품의 세계적 히트와 더불어 경제를 포함한 국력 지표에서 세계 최상위권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한국인의 삶은 그렇게 행복할 것 같지 않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어느 정치인 표현대로 저녁을 집에서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장시간 노동이다. 2020년 기준, 연 1,908시간을 일하는 한국 노동자는 OECD 국가 중 4위로 OECD 평균(1,687시간) 노동자보다 28일(8시간/일 기준)을 더 일하는 셈이다. 독일(1,332시간)과 비교하면 무려 72일을 더 일한다. 그리고 드디어 1인당 GDP를 제쳤다고 ‘국뽕’에 차게 만든 비교 대상, 일본(1,598시간)보다 39일을 더 일한다. 누군가(로 쓰고 자본가로 읽는다)에게는 진부하고 심지어는 결코 환영받지 못하겠지만,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이번 에세이는 민주사회주의 담론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를 위한 경종 같은 에세이다.

저자가 정확히 지적한다. 세계는 지금 소중한 일자리를 창출해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해 주시는 ‘자본가님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는 분위기이다. 노동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직업의 불안정성과 저임금을 개선하기 위해 자본가에게 대들고 정부에 압력을 넣기보다는, 줄어든 노동시간으로 말미암은 저소득을 어떻게든 보충하기 위해 투잡, 쓰리잡을 뛰는 쪽으로 마음을 가다듬는다. 이에 따라 ‘알바’같은 일자리도 고용주에게 구걸하고, 시간당 최저임금 절반에도 못 미치는 소득을 위해 한밤에 우버택시를 몬다. 노조의 시위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어떻게든 부가가치와 일자리를 창출하려는 기업가들의 고뇌를 이해 못 하는 배부른 노동자의 철없는 행동으로 치부된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나 한 걸까? 오징어 게임 속 죽어나가는 수백 명의 참가자가 바로 우리인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징어 게임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을 ‘우리의’ 행복으로 전환하는 정신승리뿐일까?

다른 에세이와 마찬가지로 이번 에세이 주제 역시 우리의 갈 길이 멀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저자 Wilson Sherwin는 현재 뉴욕에서 사회학 박사 과정의 밟으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Less Work for All! Reclaiming a Forgotten Socialist Aspiration

(모두 적게 일하자! 잊힌 사회주의자의 소망을 되찾아서)

Wilson Sherwin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던 작년 어느 날, 한 젊은 남자의 팔이 내 머리 위를 맴도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셔츠 자락에서 훔쳐본 것은 팔뚝 대부분을 차지한 커다란 문신이었다. “WORK HARDER”. 큰 굵은 활자가 명령하였다. 누군가 이 단어들을 몸에 문신으로 새긴다는 것은 최근의 “허슬 문화”(hustle culture)를 반영하는 실례다. “Do what you love”와 “lean in”(도전하라)과 같은 모토로 대표되는 허슬 문화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닌 그 자체를 가치로서, 긴 시간 노동을 장려한다. 허슬 문화가 모든 곳에 퍼져 있음을 고려할 때, 다른 삶의 방식을 생각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역사에서 노동자들의 목표는 “work harder”가 아니라, 일하는 시간을 줄이면서 그들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허슬 문화 (hustle culture)

노동사학자 허버트 구트만(Herbert Gutman)은 미국의 산업노동 계급 문화에 대한 그의 고전적 에세이를 통해, 미국에 도착한 이민노동자들과 이후 세대들은 그들에게 가해진 “당근”과 “채찍”을 통해 노동 규율에 세뇌되었다고 주장한다. 임금노동을 받고 끝없이 일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화와 세대에 걸친 공통된 성향 혹은 열망이 아니었다고 구트만은 주장한다. 오히려, 서로 다른 노동자 그룹을 단결시킨 것은 “긴 시간 웃고 떠들기”(prolonged merriment), “느긋하게 바다 바라보기”(shore gazing) 그리고 “saint Monday” 혹은 “blue Monday”(우울한 월요일)에 대한 열망이었다. 월요일의 일상적 결근은 사실상 삼 일간의 주말 휴식을 하는 관습이었다. 다른 말로, 시대를 초월해서 그들 삶을 규정하는 자본가의 규율에 저항하며, 다양한 문화적 국가적 배경을 가진 노동자들은 즐거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그들의 공통된 열망을 심오한(그리고 세속적) 방식으로 표출했다.

 

직장에 인간 삶을 가두려는 것에 대한 싸움은 미국 역사의 상당 부분, 이질적 좌파 프로젝트를 통합한 목표였다. 한 세기 이상 이 목표는 노동자들이 그들의 필요 충족을 위한 노동시간의 점진적 단축을 이끌었다. 여가의 역사를 연구한 벤저민 허니컷(Benjamin Hunnicutt)은 “노동 역사에서 가장 극적이고 중요한 사건들(가령, 1886년 철도파업헤이마켓 사건1919년 철강 파업) 일부와 노동운동의 가장 주목할 업적 중 일부는 더 적은 시간 노동을 위한 노동자들의 세기에 걸친 투쟁”이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직장 내부의 권력투쟁은 동시에 직장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다.

지난 수십 년의 생산성 향상에도 임금은 정체된 까닭에, 노동자들은 그들의 기본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했다. 이 기간, 더 짧은 노동시간을 위한 투쟁은 거의 완전히 잊혔다. 대신 자본가와 좌파 모두, 보다 많은, 때로는 더 나은, 일자리에 대한 요구를 추구하는 것이 유일한 합리적 목표라는 것에 동의한 듯하다. 그 한 사례는 일자리 창출의 대가로 기업에 지급하는 중앙과 지방정부의 대대적 보조금이며, 이 움직임은 지금까지 저항에 거의 부딪히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몇 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었지만, 소위 노동 좌파는 대처리즘(Thatcherism)의 신자유주의 주문 “대안은 없다”에 대부분 굴복해왔다.

그러나 최근 두 엄청난 변화는 잊힌 열망이 된 짧은 노동시간을, 가능할 뿐만 아니라 부활시킬 필요가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첫 번째는 버니 샌더스와 알렉산드라 오카시오 코르테즈와 같은 정치인들의 선거 운동에서 보여준 민주사회주의의 고무적 부활, 그리고 이 후보들에 영감을 받은 의미 있는 풀뿌리 활동들이다. 두 번째는 기후변화의 심각성에 대한 대중의 뒤늦은 인식이다. 기후변화는 말 그대로 지구를 구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중심으로, 특히 새로운 세대의 활동가들을 끌어들였다. 이 희망적 새로운 전개들, 그것들이 제기하는 전략적 문제들 그리고 좌파 정치를 위해 그것들이 연 정치적 지형을 고려하여, 나는 현 역사적 국면에서 노동시간 단축 요구에 우리가 다시 집중할 것을 주장한다.

짧은 노동시간의 유산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요구는 거의 미국 자체만큼이나 오래되었다. 1827년, 하루 10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파업이 일어났다. 보스턴과 필라델피아의 목수들은 더 많은 여가를 위한 그들의 바람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모든 사람은 자기 계발을 위해 매일 충분한 시간을 가질 창조자로부터 부여받은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비슷하게 로웰 밀 “소녀들”(Lowell Mill “girls”)(대부분 여성이었다)도 노동일 단축을 중심으로 10시간 운동을 집단적으로 요구했다. 이 젊은 여성 중 다수는 일주일에 72시간 이상 일해야 했다. 이 공장에 고용된 여성 중 한 명인 Lucy Larcom이 마침내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 상사가 그녀에게 “돈을 더 벌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거냐?”라고 묻자 “아뇨, 시간이 더 있는 곳으로 갈 겁니다”라고 답했다.

 

로웰 밀 소녀들(Lowell Mill girls)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이런 초기 노력은 많은 경우 지적 능력 향상을 위한 더 많은 시간에 대한 바람에서 비롯되었다고 노동자들 스스로 설명했다. 많은 고용주는 노동자들의 직장 밖에서의 시간이 그들의 정치적 참여를 부추길 것이라면서 노골적으로 노동시간 단축에 반대했다.

이 우려는 에드워드 벨라미의 ‘뒤돌아보며’(Looking Backward)에서 표현되었다. “가장 인기 있고 호소력 있는 미국 유토피아”로 알려진 벨라미의 이 1888년 사회주의-미래주의 소설은 19세기 후반 대중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소설은 남북전쟁 후 대호황 시대(the Gilded Age)에 잠들었다가 불평등, 전쟁 그리고 광고와 같이 불쾌한 것들이 사라진 놀라운 신세계, 2000년에 깨어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신용카드, 비행기, 텔레비전 등을 포함한 수많은 현대적 발전을 예측한 벨라미가 구상한 신세계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생산성 향상으로 사람들이 그들 삶의 훨씬 적은 시간을 노동을 위해 쓴다는 것이다. 벨라미는 시민이 직장에서 45세에 은퇴해, 이후 대략 20년 동안 다른 관심사를 추구하는 것을 상상했다.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는 벨러미를 “미국의 예언자”라고 불렀는데, 정치적 프로젝트로서 “부담스러운 형태의 노동으로부터 해방”을 강조한 덕분이었다. 노동계급에게 노동시간 단축의 잠재적 매력은 다양하다: 단축된 노동시간은 생산성 향상의 혜택이 단지 기업주에게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장한다. 이에 더해, 단축된 노동시간은 실업 감소의 효과적 수단으로 모든 사람에게 일을 보장하면서, 일이 너무 적어 생존하지 못한다거나, 너무 많아 삶을 즐기지 못하는 것을 방지한다. 이런 관점에서 노동시간 단축은 사회주의 프로젝트의 핵심 목표 중 하나다.

미국 노동운동은 미래의 단축된 노동시간을 꿈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실로 만들기 위해 여러 방면에서 노력했다. 1926년에 AFL(미국노동총연맹)은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통과시킨다: 생산의 현대적 과정에서 장시간 일하도록 강요되면, 활력, 건강 그리고 노동자들 삶 자체가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된다; 노동시간과 주당 노동 일수의 점진적 단축을 위해 교육 및 조직 캠페인을 시작하도록 집행위원회에 요청한다. AFL 결의안은 이상적인 노동시간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노동시간의 “점진적 단축”에 광범위한 합의를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노동시간의 점진적 단축의 중요성과 불가피성은 너무나 명백해 보였기에, 이어 케인스와 같은 경제학자들이 벨러미가 소망했던 것의 일부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1930년의 에세이 “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우리 손자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에서, 케인스는 생산성을 향상한 기술적 진보의 출현을 축하하면서, 그로 인해 사람들은 “그동안 익숙했었던 노력의 4분의 1로 농업, 광업, 제조업의 모든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지적했다. 이런 생산성 향상으로 2010년까지 사람들은 주 15시간만 일할 것으로 예측하면서, “하루에 3시간이면 우리 대부분은 늙은 아담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라고 선언했다.

이 생산성 향상의 짜릿한 혜택은 기본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무의미한 역사적 과제로부터 마침내 인류를 해방한 것이라고 케인스는 주장했다. 물질적 필요가 보장되면 사람들은 “삶의 수단”이 아닌 “삶의 예술 그 자체”라는 더 높고 더 철학적 관심에 집중할 수 있다고 그는 부연해 설명했다.

대공황 기간, 미국 노동운동은 만연한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 30시간 노동제를 입법화하려 했다. 그것을 산업 전반 변화의 신호탄이라고 믿었던 시리얼 제조업체 켈로그(Kellogg)는 자발적으로 임금 삭감 없이 실질적 노동시간 단축을 단행했다. 현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소수 노동계급이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내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켈로그는 선구자가 아닌 돌연변이였다. 루스벨트의 뒤를 쫓아 노동운동은 기존 일자리 나누기보다는 더 많은 일자리 창출로 우선순위를 옮겼다. 불가피성에 대한 케인스의 확신에도, “노동시간과 주당 노동 일수의 점진적 단축”을 향한 적극적 투쟁은 대공황 이후 중단되었다. 결과적으로 세기에 걸친 노동시간 단축 흐름도 멈췄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이 긴 시간의 염원을 포기했다거나, 주 40시간에 만족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신, 노동시간 단축 요구는 노동운동의 중심축에서 종종 개별적 또는 원자화된 노력 형태의 주변부로 옮겨갔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정치인들과 사회학자들은 새로운 현상의 등장을 우려했다: “블루칼라 블루스”(blue collar blues). 노동계급 전체에 전염병처럼 퍼진 일에 대한 불만족으로 정의되는 이 질병의 증상은 만연한 결근, 불복종, 사보타주(sabotage) 그리고 일에 대한 소외와 혐오의 다른 표현들을 포함했다. 이 현상은 종종 비정치화되고 개인의 정서적 질병으로 취급되었지만, 그것은 더 넓은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로드스타운(Lordstown) 자동차 파업

1972년의 로드스타운(Lordstown) 자동차 파업은 노동자의 일에 대한 이 변화하는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파업 기간, 관측통들은 이 노동자들과 그들의 직업윤리에서 질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주장했다. “난 이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 한 현지인은 비웃듯 말했다. “파업에 들어갔을 때, 대부분은 다시 직장에 복귀하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UAW(미국 자동차 노조)는 이 반항적 노동자들과 이전 세대와의 차이를 알아내려고 했다: “그들은 최소한 티브이를 통해서 지난 10년간 청년 운동에 노출되었었고, 실업자가 되는 것을 불명예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 아버지가 받았던 것과 같은 대접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30년이 보장되는 직업, 그 이상의 것을 원합니다.”

로드스타운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직장에서 노동자들의 좌절감이 표출된 주요 형식 중 하나는 만연한 결근이었다. 결근은 월요일과 금요일에 집중되었는데, 노조가 포기한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계속 투쟁을 하고 그 과정에서 주말에 3일 혹은 4일을 쉬기 위해서였다. 왜 주 4일만 출근하느냐고 묻자 “주 3일 근무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라고 한 노동자는 당당하게 답했다. 노동자들은 여러 핑계를 대며 자신들의 결근을 정당화했다: “차가 시동이 안 걸렸다, 아내가 아프다, 시계 알람이 안 울렸다” 등. 케인스는 더 적은 일과 더 많은 여가를 추구하는 이들 반항적 노동자로부터 삶의 수단보다는 삶의 예술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을지 모른다.

 

전국복지권기구(National Welfare Rights Organization:NWRO)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정치 프로젝트의 마지막 주요 움직임은 1960년대 초에 개별적으로 시작된 복지권운동(Welfare Rights Movement)이었을 것이다. 가난한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한 이 풀뿌리 운동은 1969년 정점에 달했을 때, 약 10만 명의 회원을 대표하는 전국복지권기구(National Welfare Rights Organization:NWRO)로 공식 통합되었다. 대부분의 빈곤 퇴치 운동이나 단체와는 달리, NWRO는 더 많은 일자리, 더 나은 일자리, 또는 직업훈련이 빈곤을 해결할 것이라는 주장을 거부했다. 오히려, 기술 변화와 미국 노동의 인종화된 역사에 대한 분석에 근거하여, 회원들은 개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인종으로서(조직 회원은 90%가 흑인) 이미 많은 일을 했지만, 그로부터 거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들 입장에서 이제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은 임금노동과 별개로 보장된 소득과 “살아갈 권리”였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복지권운동을 노동시간 단축의 가장 진보된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임금 노동을 완전히 피하려고 했다.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단축 요구에 대한 반대는 노동자들이 반항적 목적을 위해 여가를 활용할 것이라는 자본가들의 두려움에 근거하고 있음을 상기하라. 이 두려움은 복지권운동의 경우 정당화된다. 노동 부담을 덜게 된 노동계급의 어머니들은 단순히 가정일에 얽매인 삶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관대한 복지수당 덕분에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와 시간을 효과적이고 전투적인 공동체에 참여하는 데 사용하면서, 사회운동의 증가를 가져왔다. 복지활동가들은 주택, 학교, 공립대학 등과 관련된 프로젝트에서 지역사회의 통제, 민주적 통제 그리고 노동자계급 재생산의 중심에 있는 기관에 대한 자금 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앞장섰다. 우리가 긴 시간을 직장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그들은 보여주었다.

1973년에 시작된 깊은 경기 침체와 더불어, 복지수급자에 대한 지속적 이념적 공격은 복지권운동과 “블루칼라 블루스”를 뒷받침했던 반항정신을 무너뜨렸다. 1973년, 자동차공장 노동자 Jack Weinberg는 “한 달 전만 해도 인플레이션 영향으로 40시간 급여로는 버티기가 힘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해고는 40시간 급여를 정말 달콤하게 보이게 합니다…. 생존을 염두에 둔 상태에서 속도 향상, 건강과 안전, 근무 조건 등에 대한 문제에 답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경기 침체가 시작되고 임금 하락으로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노동시간을 찾으면서, 노동을 아예 안 하거나 적은 노동으로 남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전투적 가능성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전투적 복지수혜자나 반항적 계급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현대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은 노동정신의 확고한 개종자 중 일부였다. 중산층 주부로서 사는 삶을 거부한 이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이 성취감, 경제적 안정, 존엄성 그리고 존경을 얻는 것은 고용을 통해서라고 주장했다. 노동을 해방과 성취의 장소로 축하하면서,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은 권력의 위치에 더 많은 여성이 있으면 여성이 삶이 향상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불균형적으로 대부분 여성을 불만족스럽고, 낮은 보수, 그리고 금전적 불안정 때문에 특히 상사의 학대와 괴롭힘에 취약한 막다른 직업으로 이들을 내모는 많은 구조적 장벽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노동의 해방 잠재력을 믿는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은 백인과 상류계급이 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활동을 하기 위해 거부한 가사노동을 이민자와 유색 인종 여성이 대행하는 것을 간과했다. Hester Eisenstein을 포함한 많은 페미니스트 학자는 이런 특정 유형의 페미니즘이 자본주의를 위해 엄청나게 생산적 이데올로기를 제공했지만, 어려움을 겪는 대부분 여성에게는 그렇지 않았다고 바르게 지적했다.

 

머리사 마이어(Marissa Mayer)

기업 페미니즘에 대한 망상은 노동시간문제에 관해 특히 두드려졌는데, 유리 천장을 뚫는 데 성공한 많은 여성이 항상 더 많은 직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대표적 예는 상상할 수 없는 긴 시간을 일하는 것이 성공의 열쇠라는 Yahoo의 CEO 머리사 마이어(Marissa Mayer)의 주장일 것이다. 과장이 아니다. 메이어는 “일주일에 130시간을 일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만약 당신이 언제 자고, 언제 샤워를 하고, 얼마나 자주 화장실에 가는지에 대해 전략적 태도를 취한다면” 그것이 가능하다고 메이어는 주장했다. 로웰 공장 “소녀들”(Lowell Mill “girls”)은 현명하게도 100년 전에 그 시간의 반을 일하도록 강요받는 것에 저항했다.

단결된 집단적 좌파 운동이 없는 상황에서, 이런 이데올로기는 팀 페리스(Tim Ferriss) 같은 터무니없는 자본가에 의해 강화되었다. 그는 사람들이 적절한 초고수익 사업 아이디어를 개발한다면, 누구든지 “새로운 부자”가 되어 일주일에 4시간만 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제는 폭넓은 좌파 프로젝트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서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집단 프로젝트를 다시 준비할 때다.

 

우리 시대 가장 혁신적인 아이콘이라는 소리를 듣는 팀 페리스

단축된 노동시간을 향한 움직임은 여러 이유로 현대 좌파 운동의 전면과 중앙에 있어야 한다. 첫째, 직장으로부터 더 많은 시간을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요구를 앙드레 고르츠(Andre Gorz)는 “비개혁적 개혁”(a non-reformist reform)으로 불렀을 것이다: 지금 당장 삶을 향상하는 변화는 노동계급에게 급진적 변혁을 향한 힘을 증가시키고, 더 큰 혜택을 성취하기 위한 능력을 제공한다. 자본주의에 도전하고 기업의 이익보다 사람들의 복지를 우선시하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상상은 고사하고 일과 후 소파에 앉아 배달음식 주문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정도로 녹초가 된다면 이를 달성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복지권운동이 보여주듯, 직장에서 벗어나 있는 시간은 사람들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을 제공한다. 고용주들은 오래전부터 이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도 시급히 이를 알아야 한다.

 

아픈 아내와 함께 생을 마감한 앙드레 고르츠

둘째, 노동시간 단축은 기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중요한 걸음이다. 끝없는 성장에 대한 거부와 무분별한 이익 추구보다 사람들의 필요 충족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는 기후 재앙을 피하는데 자본주의에 비해 결정적 이점을 가지고 있다. 자본가의 이익을 위한 무차별적 생산은 기후 위기의 핵심 원인으로 인정된다. 자본은 노동자들의 유의미한 노동 조직을 가능케 하는 생활임금을 지급하지 않기 위해 지구를 가로지르는 복잡한 물류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연료를 소비하고 있다. 노동계급의 건강과 복지는 지구의 건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현재의 노동운동은 너무나 자주 잊어버린다. 경제적 안전을 이유로 노동운동 일부에서는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면 환경 악화를 포함해 결과가 극도로 의심스러운 프로젝트도 지지했다. Dakota Access Pipeline은 그중 유난히 끔찍한 사례다. 프로젝트의 환경적 문화적 재앙을 보여주는 수많은 연구에도, 일부 노조는 실업 건설노동자에게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파이프라인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상 생명선이다”라고 주장했다.

 

Dakota Access Pipeline의 환경 파괴에 저항하는 시위

생태 위기의 심각성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위기는 동시에 우리의 우선순위를 재고할 기회를 제공한다. 기후 변화에 대한 인식의 증가는 단축된 노동시간이 다시 한번 필요한 목표가 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주지시킨다. 주 4일 근무제 제안은 독일과 뉴질랜드의 실험이 큰 성공을 거둔 후 최근 인기를 얻고 있다.(뉴질랜드의 실례가 궁금하다:역자 주) 이 제안에 대한 관심은, 부분적으로, 통근 관련 탄소 배출량의 현저한 감소 덕분이다. 단지 출퇴근만 예방 가능한 낭비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앙드레 스파이서(Andre Spicer)는 최근 Guardian 기고를 통해 노동시간 단축은 여러모로 환경적 혜택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업무량이 적다는 것은 탄소 집약적인 통근량의 감소, 사무실 공간 에너지 감축, 전력 소모가 많은 컴퓨터 사용시간의 감축을 의미한다. 게다가, 노동시간 단축은 전통적 노동-지출 사이클을 허물어트린다.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이 적으므로 우리는 여행, 요리, 가정용품 수리 같은 것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다. 우리는 또 환경적 비용이 따르는 시간 단축 수단에 대한 의존을 줄일 것이다; 예를 들어, 고속 여행 혹은 오토바이를 통해 플라스틱으로 배달되는 음식 등.

 

앙드레 스파이서가 영국 지하철에서 신체에 대한 이미지를 주제로 실험을 하고 있다 ​

사회주의자들은 녹색 미래에 대한 금욕적 개념도 거부해야 하지만, 직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우리를 위로하거나 보상한다는 명목으로 우리에게 낭비적 소비를 유도하는 자본주의 문화를 인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지난해 세상을 떠난 우리 시대의 위대한 사회주의 사상가 에릭 올린 라이트(Erik Olin Wright)를 따르면, 인간의 번영을 추구하는 것은 사회주의 주요 목표 중 하나이다. IWW(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세계산업노동자연맹)의 요구가 증명하듯, 시간은 인간 번영의 필수 요소 중 하나다. 다른 필수 자원의 부족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부족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복지를 약화시킨다. 더 많은 시간은 의미 있는 관계를 발전시킴과 더불어 우리의 열정을 발견하고 그것을 추구하기 위한 조건이다. 해변을 바라보든 정치적 시위에 참여하든, 우리가 자유와 자율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직장에서 벗어날 때이다.

열심히 일한다는 개념을 일방적으로 거부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자본주의가 우리의 노력에 대한 개념을 임금노동으로 붕괴시켰다는 것이다: 근면함, 인내, 헌신, 탁월함 등은 우리가 직업과 분리해서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특성들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소중한 제한된 시간을 직장으로부터 해방함으로써, 우리는 자격 없는 자본가를 위해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아닌 다른 목적을 향해 창의적으로 이 덕목들과 우리의 능력을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우리에게서 훔쳐 간 모든 것을 되찾는 것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그 시작은 우리의 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