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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머리말
지난 6월, 현재의 재앙적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탐구의 일환으로, 민주사회주의의 포괄적 이해를 위해 책 ‘An Inheritance for Our Times: Principles and Politics of Democratic Socialism’ (우리 시대의 유산: 민주사회주의의 원리들과 정치학) 번역을 시작했다. 휴가 기간 속도를 내기도 했다가 중간 다른 프로젝트에 매달리며 공백을 가지기도 했지만, 어느덧 막판에 이르렀다. 서론 제외 총 30개 에세이 중 이번 에세이를 제외하면 4개의 에세이만 남았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번역 작업의 장점은 비록 번역 결과물이 타인이 보기에는 조악할지라도 일반 독서 과정보다 더 정확한 이해와 더 많은 독후감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 책과 같은 옴니버스 형식의 에세이 모음집은 다양한 저자가 다양한 언어를 통해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측면을 다루기 때문에 입체적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된다. 같은 주제를 이처럼 다양한 형식으로 반복해서 접하다 보면 어느 순간, “아, 이게 그 의미였구나!” 무릎을 치게 된다. 처음 접했을 때도 머리로는 이해를 했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피부로 느껴진다고나 할까?
이번 에세이는 그런 느낌이 강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지금까지 25개의 에세이를 번역하다 보니 후반부로 갈수록 실루엣 같았던 민주사회주의에 대한 모습이 점점 눈에 들어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에세이는 번역하면서도 유난히 밑줄을 긋게 하는 대목들이 많았다. 후기를 통해 이 대목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본다.
저자 낸시 홈스트롬은 미국 뉴저지의 럿거스(Rutgers) 대학의 명예교수로 정치철학과 페미니스트 이론이 주 연구 분야다. 그녀의 책 ‘The Socialist Feminist Project: A Contemporary Reader in Theory and Politics’는 ‘사회주의 페미니즘 - 여성의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완전한 자유’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번역되기도 했다.
유한한 세계를 위한 민주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 for a Finite World)
낸시 홈스트롬(Nancy Holmstrom)

“민주사회주의”가 미국에서 최근 역사상 처음으로 거론되고 있다. 그 꼬리표를 달고 있는 우리로서는 놀랍고도 행복한 사실이다. 그러나 민주사회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지 않다. 사실 민주사회주의는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한다. 이 에세이에서 나는 맑스가 이해했던 민주사회주의 개념을 옹호하고, 그것이 왜 본질에서 페미니스트적이고 환경친화적인지 설명하겠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 그리고 오직 자본주의 사회만 - 가 민주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의 목적이자 수단이라는 이야기도 듣는다. 이 모순된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민주주의(democracy)”와 “사회주의(socialism)”는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민주주의”(“DEMOCRACY”)
“민주주의”의 근본 의미는 사람들에 의한 통치(rule)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어떤 사람들? 그리고 무엇을 통치? 민주주의의 정의는 두 가지 척도에 따라 달라진다: 첫째, “국민(the people)”의 범주가 얼마나 포괄적인가; 둘째, 국민들이 무엇을 결정할 수 있는가? 첫 번째 척도로 볼 때, 미국의 민주주의는 분명 확장되었다. 정치적으로 민주적 자본주의 사회(모든 자본주의가 정치적으로 민주적인 것은 아니다)에서 모든 시민은 투표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지지자들이 믿는 것처럼 “선천적”으로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경우는 거의 없다; 실제, 민주주의는 노동계급, 여성 그리고 소수 인종의 오랜 시간에 걸친 영웅적 투쟁의 결과이다. 초기에 투표권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19세기 중반까지 재산 있는 미국 남성만 미국에서 투표할 수 있었다. 반면, 여성이 투표권을 획득한 것은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미국 여성의 참정권은 1920년에 법제화되었다:역자 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민권운동으로 1965년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이 제정될 때까지 남부에서 투표권이 실질적으로 거부되었다. 그들은 중죄인 투표권 박탈과 유권자 신분증을 놓고 여전히 투쟁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혹은 모든 계급사회)에서 민주주의의 형식적 평등은 가장 포괄적 형태라 할지라도 경제적 불평등에 의해 훼손된다; 간단히 말해, 더 많은 경제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더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극심한 불평등, 선거에서 돈의 영향 그리고 독특한 선거인단 제도는 미국 정치적 민주주의를 더욱 제한한다.

더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의 두 번째 척도,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권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가 극도로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자본주의 이전과 이후, 모두 정치권력은 경제 권력과 결합되었다. 봉건 제도와 소련식 체제에서 정치권력과 경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였고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등장과 함께, “경제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은 처음으로 분리되었고, 사회적 권력은 경제에 둥지를 틀었다. 엘렌 마이크신스 우드(Ellen Meiksins Wood)가 주장했듯이, 이 분리가 정치적 민주주의를 더 가능케 한 동시에 덜 중요하게 만들었다.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결정들, 즉 무엇을 생산할 것인지(연료를 많이 소비하고 운전자 없는 자가용 대 버스와 기차), 어떻게 생산할 것인지(화석연료 혹은 재생 에너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인 얼마나 많이 생산할 것인지는 투표의 대상이 아니다. 이 모든 결정은 선거로 뽑히지 않은 자본가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모든 결정이 민주적으로 이루어지는 전면적 경제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글로벌 자본주의 권력에 더욱 종속되는 작은 나라들은 스스로 통치할 능력이 더 떨어진다. 긴축과 반 생태적 결정의 압력에 내몰리면서 국민은 “민주주의”에 실망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귄위주위적 지도자를 찾으면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들은 취약해진다. 이런 과정은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제약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민주주의를 반대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명확하게 정의했다: 민주주의는 “자유롭게 태어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동시에 다수가 되어 정부를 통제하는 체제”인 반면, 과두제(Oligarchy)는 “부자와 잘난 사람이 동시에 소수로서 정부를 통제하는 체제”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보통선거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민주주의가 아닌 과두제하에서 살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극단적 불평등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노암 촘스키는 우리의 과두제 내 정치적 민주주의 시스템을 묘사하는 근사한 약어를 만들었다. : RECD(Really Existing Capitalist Democracies(실제로 존재하는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SOCIALISM”)
“사회주의”는 “사회(the social)”에 대한 막연한 약속 혹은 경제에 대한 국가의 부분적 개입을 제외하곤 공통점이 거의 없어, 실제로는 서로 호환될 수도 없는 다양한 사회 모델들에 적용되어 왔다. 심지어 반자본주의조차 공통분모가 아니다. 역사를 통틀어 많은 집단이 집단주의적 모델을 전면에 내세웠는데, 대부분은 실현되지 않았고 일부는 매력적이었고 일부는 분명 반 이상향적(dystopian) 이었다.
더 중요하게, 실제 존재하는 소위 사회주의 모델들을 생각해 보자: 하수도 시스템과 같은 공공복지정책을 추구하는 지방 정부들(따라서 “하수도 사회주의”라고도 불린다), 스웨덴처럼 관대한 복지정책을 포함해서 큰 국가 섹터를 가졌다는 이유로 사회주의로 불리는 자본주의 국가들. 이런 자본주의의 사회민주주의 모델이 아마 버니 샌더스와 같은 미국의 민주사회주의 지지자들 대부분이 지향하는 것일 것이다. 한편, 우리는 위 사회민주주의 모델과는 매우 다른, 자본주의이지도 정치적으로 민주적이지도 않았던 구소련과 그 위성 국가 모델도 알고 있다. 생산수단을 개인이 아닌 집단이 소유했지만, 그 집단은 국민이 아니라 정부였다. 따라서 이 모델은 “관료적 집단주의”라고 묘사할 수 있다.
사회주의라고 불리는 이 두 큰 유형은 전통적으로 개혁주의(reformist) 대 혁명주의(revolutionary) 혹은 민주주의(democracy) 대 독재주의(dictatorial)로 구분된다. 비록 이 구분이 유효하지만, Hal Draper는 그의 영향력 있는 에세이 “사회주의의 두 영혼”(The Two Souls of Socialism)을 통해서 많은 “사회주의” 사회의 유형을 구분하는 보다 명확한 방법을 제시했다. 그는 이들 사회주의 비전 간 근본적 구분은 “위로부터의 사회주의”와 “밑으로부터의 사회주의” 차이라고 주장한다. 놀라운 것은 추정 상 “반대(opposite)”일 것 같은 사회민주주의와 관료적 집단주의 그리고 유토피안 모델이 모두 같은 카테고리에 속한다는 것이다: “위로부터의 사회주의.” 그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모두 사회주의는 공산당이 되었든 의회가 되었든 아니면 유토피아 사상가가 되었든 지배 엘리트들에 의해 국민들에게 전해진다고 믿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그룹은 사회주의는 오직 “밑으로부터”, 대중의 자기활동(self-activity)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는 맑스가 쓴 제1 인터내셔널 노동자협회(the First 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 제1원칙에도 나와 있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체의 행동이어야 한다.” 맑스와 엥겔스를 제외하고 가장 유명한 밑으로부터의 사회주의자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유진 빅터 뎁스다. 불행하게도,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더 영향력 있는 것은 위로부터의 사회주의라는 것을 Draper도 인정한다. 그러나 대안의 씨앗은 그들의 운명을 개척하려는 대중의 투쟁에서 발견된다: 파리 코뮌에서 러시아 혁명에 이르기까지, 1956년 헝가리 봉기부터 아랍의 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오늘날 중국 노동자와 학생 봉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사고방식을 갖게 되면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간 불가분 관계가 명확해진다: 슬로건이 말하듯,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의 수단이자 목적이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사회주의의 비전인 목적에서 시작해서 수단으로 넘어갈 필요가 있다. 목적이 수단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목적이 다르면 수단도 다르다. 수단이 목적을 결정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만약 우리가 평등한 민주적 목적(사회)을 창조하고 싶다면 우리는 잔인하고 비민주적 수단을 쓸 수 없다.

사회주의 목적으로서 민주주의(DEMOCRACY AS THE END OF SOCIALISM)
맑스와 엥겔스는 사회주의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 많은 글을 쓰지 않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이 바라고 기대했던 것에 대해 더욱 명확한 생각을 밝혔다면, 소련이나 중국과 같이 실제 존재했던 국가들을 사회주의와 동일시하는 끔찍한 일로부터 우리를 사전 준비하게 했을 것이다. 이들 국가는 사회주의 대의에 너무 심한 손상을 입혔다. 맑스와 엥겔스의 침묵은 어쩌면 과도기적 모델들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과 실험을 도왔을지 모른다. 그들의 침묵은 기존 사회에 대한 그리고 어떻게, 누구에 의해 사회주의가 구현될 것인지에 대한 분석 없이, 그저 머릿속에서 “위로부터”의 사회주의 모델을 상상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되었다. 대신 맑스와 엥겔스는 생산양식, 특히 자본주의, 에 대한 과학적 이론을 발전시킴으로써, 자본주의는 종말을 고하고 사회주의로 대체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것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고 특히 계급 투쟁을 통한 인간의 행동을 통해 일어날 것이다. 그러고 나면 변혁의 주체이자 새로운 생산양식의 지배 세력인 노동계급 스스로, 새로운 시스템의 형식을 집단으로 결정할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의 침묵에도, 자본주의와의 핵심적 차별점 그리고 파리 코뮌에 대한 그들의 반응으로부터 그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전 일부를 엿볼 수 있다. 파리 코뮌은 프랑스-프러시아 전쟁 말기인 1870년, 프랑스 군대가 항복한 이후 프러시아 군대에 투항하길 거부했던 파리의 노동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맑스는 그의 짧은 글, ‘프랑스 내란(The Civil War)’에서 생생하게 파리 코뮌의 영웅적 이야기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맑스와 엥겔스가 보기에 국가는 항상 가장 강력한 계급의 지배를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엥겔스는 “파리 코뮌을 보라.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라고 썼다.
프랑스 은행(the Bank of France)을 접수하지 못한 실수를 제외하곤, 그들의 조치는 노동계급이 기존 자본주의 국가를 단순하게 장악할 수 없다는 결정적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매우 다른 이익을 보호하기에 적당한 새로운 것들을 고안해야 했다. 이에 따라 그들은 낡은 억압적 정부 기구를 폐지했고, 군대를 무장할 수 있는 모든 시민으로 구성된 국가방위군(National Guard)으로 대체했으며, 교회를 국가와 분리했다. 새로운 억압 세력의 발흥을 막기 위해 코뮌 지도부는 자신들의 급여를 노동자 평균 임금으로 제한했으며 언제든지 소환이 되는 대상으로 만들었다.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다양한 조치들이 시행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폐쇄된 공장을 하나의 커다란 노조로 통합 시켜 협동조합으로 전환한 것이다. 맑스는 이 조치가 전면적 사회주의 사회로 이끌 것이라고 믿었다. 1871년 5월 잔인하게 분쇄되기 전까지 짧게 존재했던 코뮌이었지만, 1917년 러시아나 1956년 헝가리처럼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했던 곳에서 우리는 유사한 정치적 형태를 볼 수 있다. (맑스는 코뮌을 보통선거권으로 선출된 것처럼 묘사했지만, 실제로는 남성 유권자에 한정되었다; 여성이 혁명 과정에 깊숙이 참여함으로써 나중에 바뀌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특정 노동자 정부가 어떤 특정 정책을 결정하든, 그 정부를 구성하는 매우 다른 계급 관계만으로도 사회주의의 결정적 공통점을 추론할 수 있다. 자본주의 및 모든 계급사회에서, 생산수단을 소유/통제하는 자들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자들이 지배계급이 전용할 수 있는 잉여를 생산하도록 강요한다. 봉건제, 노예사회 그리고 관료적 집단주의 생산양식에서 이는 잘 드러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잉여 생산이 자유계약 관계의 결과처럼 보이지만, “본질에서 그것은 항상 강요된 노동으로 남아있다"라고 맑스는 강조한다.
이런 형식은 착취이며 생산자가 소유자인 사회주의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산수단은 더 이상 다른 사람 손에 있지 않고 노동계급에 의해 집단으로 소유되고 통제된다. 생산은 이익 혹은 관료계급의 권력 증가를 위해서가 아닌, 필요를 위해 이루어진다.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생산할 것인지는 필요 측정 결과에 따라 민주적으로 결정된다. 노동은 인간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여전히 필요하지만, 계급사회의 강제된 노동이 아니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는 자연의 맹목적 힘으로 지배되는 대신, 자연과의 교류를 합리적으로 규제하고 공동의 통제하에 두며, 가장 적은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인간 본성에 가장 호의적이고 가치 있는 조건으로 이를 달성하려는 관련 생산자에게만 가능하다….. 그 너머로 그 자체가 목적인 인간 에너지의 발전이 시작된다. 그러나 자유의 진정한 영역은 그 기반이 되는 필연의 영역에서만 꽃 필 수 있다. 그 기본 전제로서 노동일의 단축이 필수적이다.”
간단히 말해, 사회주의에 대한 맑스의 비전은 창조적 표현(진정한 자유)을 위해 최대의 시간을 허락하는 민주적 계획(필연성 속 자유) 그리고 집단적 소유이다. (집단적 재산은 그 재산을 향유할 수 있고 그 재산의 통제권을 공유하는 개인의 권리를 포함한다는 점에 유의한다.)
이런 사회는 어떻게 조직이 될까?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사회주의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가 생기기 전에는 누구도 자본주의가 어떻게 움직일지, 어떻게 진화할지 정확히 말할 수 없었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 특정 원칙들과 조치들이 아이디어를 주었지만, 자본주의는 실제 역사 속에서 새로운 도전에 맞서고 투쟁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회주의 비전 역시, 이런 역사적 과정을 참조하며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파리 코뮌에서 보았듯, 한 사회가 어떤 모습을 가질까의 핵심은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의 계급적 본질이다.
민주사회주의에 시장이 설자리가 있느냐는 중심 논쟁 중 하나이다. “시장사회주의(market socialism)” 옹호자들은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적 계획(democratic planning) 옹호자들은 ‘그럴 수도’(maybe)라고 말하겠지만, 여기서 핵심 질문은 사회 내 시장의 위치다. 설사 우리가 자본주의 이후 사회주의 사회의 노동자 소유 기업들을 얘기한다 해도, 사회주의가 기본적으로 시장시스템으로 구성된다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생태적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 노동자 소유 기업들은 시장의 정치적 경제적 힘에 의해 같은 물건을 같은 방식으로 생산할 것을 요구받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시장이 되었든지 간에 합리적이고 민주적 계획 제도의 통제하에 있어야 할 것이다.
계획은 어느 정도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할까? 상황마다 다를 것이다. 많은 전문가는 계획의 비중을 작게 가져가는 것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현장의 지식이 멀리 떨어져 있는 계획가들보다 더 신뢰할만하며, 사람들은 신뢰를 발전시키고 그들 스스로 만든 규칙을 자발적으로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과 협력이 부족하다 보니 중앙정부의 규제는 천연자원의 보존이 아닌 파괴로 종종 우리를 이끌었다.

사회주의 수단으로서의 민주주의(DEMOCRACY AS THE MEANS TO SOCIALISM)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행위여야만 한다.”
- 칼 맑스, 제1차 국제노동자협회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적 의지와 의식적 행동이 없다면 사회주의는 있을 수 없다.”
- 로자 룩셈부르크, 로테 파네(Die Rote Fahne: 붉은 깃발)
“너무나 오랜 기간 세계의 노동자들은 모세 같은 사람이 속박에서 그들을 벗어나게 해주길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오직 않았습니다; 그는 절대 오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면 나는 여러분을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누군가에 의해 이끌려 벗어난다면 여러분은 다시 속박으로 이끌려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여러분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게 할 것입니다.”
- 유진 데브스, 1905년 뉴욕 연설
사회주의의 목적으로서 민주주의와 수단으로서의 민주주의는 그 둘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분리하기 어렵다. 개혁(reform)을 위한 투쟁은 사회주의 건설의 핵심이지만 일부 비막시스트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주의가 간단히 개혁의 누적물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다른 생산 양식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험, 비전, 조직 그리고 노동자들의 역량을 발전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변혁을 위한 투쟁 과정이다. 이것이 ‘개혁과 혁명’(Reform and Revolution)에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Edward Bernstein)에게 보낸 로자 룩셈부르크의 답변이었다.
토론과 실험은 필수 부분이다 - 따라서 개인의 권리와 정치적 자유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좌파 내 일부는 자본주의 민주주의의 총체적 한계와 위선을 핑계로 제한적이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자유를 위한 기구들을 전적으로 거부하거나 심지어 민주주의 개념을 폄하하기도 한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고 맑스의 입장이 결코 아니었다; 그의 첫 번째 기사를 통해 정부의 모든 검열에 반대하는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면서, 그는 이 원칙들에서 한 번도 후퇴한 적이 없었다. 실제 존재하는 자본주의 민주주의에서 우리는 단지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화석연료 기업과 같은 기득권에 도전하는 구체적 이슈를 둘러싸고 조직할 수도 있다. 심지어 우리는 때로 이기기도 한다. 특정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런 결정을 대중의 민주적 통제하에 둠으로써 민주주의를 심화시켜야 하다는 것이다. 공개적 대중 토론은 필수적이다. 이와 더불어 사람들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미케니즘 그리고 단순한 조언 수준이 아닌 대중이 뽑은 대표가 그들의 결정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들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해야 한다.
상향식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창조적 대안으로서 흥미로운 한 실험은 사회운동 과정에서 떠오른 바르셀로나의 새로운 정당이다. (2014년 창당한 포데모스(Podemos:우리는 할 수 있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역자 주) 이 정당은 당 윤리 강령을 “크라우드 소싱”방식으로 정하고 “지역 및 지방 단위에서 민주적 실험을 발전시키는 새로운 디지털 기술 수단”을 활용한다. 물론 그들은 여전히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제한하는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운영되고 있지만, 그들은 무엇이 가능한지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회 운동의 대상이 제국주의와 전쟁의 반대가 되었든, 여성 이슈가 되었든, 반 인종차별이 되었든, 환경 이유가 되었든, 노동 투쟁이 되었든, 민주사회주의자들은 평당원 전략(풀뿌리 민주주의:역자 주)을 구사하고 반자본주의 시각으로 이 문제들을 통합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실수도 할 것이다. 그러나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했듯, “ 혁명적 노동운동을 진심으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는 가장 훌륭한 중앙위원회(Central Committee)의 무결함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더 생산적이고 가치가 있다.”

왜 민주사회주의가 생태사회주의인가? (WHY DEMOCRATIC SOCIALISM IS ECOSOCIALIST)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1차 세계대전 전날 발표한, ‘선택은 사회주의와 야만 중 하나’라는 성명은 더 진실일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투쟁은 우리 존재 자체에 관한 것이다. 기후변화에 관한 가장 최근의 IPCC 보고서는 우리가 우리 행성의 한계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광범위한 재앙을 막기 위해서는 인류는 평소보다 더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대안을 실천해야 한다. 이는 성장에 기초한 경제의 역할에 대한 재평가를 포함한다.”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An Inconvenient Truth)’ 이후 문제들은 급속도로 악화하여 가고 있다.
지구 온난화보다 더 불편한 진실은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제안된 대책으로는 지구 생태시스템에 대한 위협을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좋든 나쁘든 경제 성장 머신이다. 현재 세계 경제는 2주도 안 되는 기간에 1900년 한 해의 전체 물리적 생산량과 맞먹는 양을 배출하고 있으며, 세계 경제 생산물은 매 25년~30년마다 배로 증가하고 있다. 중국의 세계 자본주의 경제 대국으로의 변화와 내부 민주적 통제의 부재는 생태적 종말을 재촉하고 있다.
비록 일부 자본주의 정치인들 그리고 심지어 기업들도 문제의 심각성과 급진적 대책의 시급함을 인식하고 있지만, 자본주의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근본적 문제는 경쟁적 시장시스템에 의해 강제된 개인주의적 합리성과 사회적 관점에서의 합리성 간 갈등에 있다. 각 사업체는 그 결과가 재앙적일지라도 그들 각자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계속 생산할 수밖에 없고 이 움직임을 멈출 수 없다. 이 자멸이 합리적 경제형태 개인주의 모델의 종착점이지만, 주류 경제학자들이 이를 포기하기에는 너무 깊숙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빠져있다.
반면, 민주사회주의 사회는 합리성에 대한 보다 폭넓은 사회적 이해에 의해 통치될 것이다. 개인주의적 관점의 합리성과 집단적 관점의 합리성이 충돌할 경우 후자가 우선시되어야 한다. 맑스의 비전, “자유는 자연의 맹목적 힘으로 지배되는 대신, 자연과의 교류를 합리적으로 규제하고 공동의 통제하에 두며, 가장 적은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인간 본성에 가장 호의적이고 가치 있는 조건으로 이를 달성하려는 관련 생산자에게만 가능하다”를 고려할 때, 우리 유한한 행성의 제약에 대한 인식은 근본적이어야 한다.
가치가 없고, 낭비적이며, 사람들과 지구의 웰빙에 해를 끼치지만, 수익성은 높다는 이유로 생산되는 제품의 목록은 길다. 대부분의, 전부가 아니라면, 무기, 끝없이 생산되는 유독성 전자 제품, 그리고 자동차 등은 구식이 되게끔 고안된 제품이기 때문에 짧은 수명을 거친 후 교체되어야 한다. 생산량의 문제도 있다. 우리가 지구라는 행성 안에서 사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해방이어야 한다. 연구들이 말해주듯, 일정 치를 지나면 사람들은 돈이 많고 물질을 더 가졌다고 더 행복해하지 않는다. 행복에는 자유 시간과 인간관계가 더 중요하다.

우리의 여러 생태적 위기는 필요하다면 지역 차원에서 계획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많은 위기는 마을, 시 혹은 지역 단위 계획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우리는 국가적 차원에서 청정공기를 위한 규제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각 지방은 환경 기준을 낮추어서 사업을 위해 경쟁할 것이며, 이는 국제적 차원에도 적용된다. 기후과학자들이 지구 전체 배출량 제한을 요구하고, 해양과학자들이 “남획으로 약탈당한” 바다를 구하기 위한 5개년 계획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다. 기후 문제로 야기된 인간적 정치적 문제는 국경 안에 머물지 않는다. 자원 고갈로 인한 실업, 부족한 자원을 얻기 위한 전쟁 그리고 그 결과 발생한 수백만 명의 난민을 생각해 보라.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는 지역, 지방 그리고 국가 차원의 기관과 더불어 유엔과 같이 국제적 차원에서 계획과 규제를 실행하는 통치 기관이 필요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계획이 지역, 지방, 국가 심지어 국제적 차원인지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기관들이 아래로부터의 합리적이고 민주적 콘트롤을 가능하게 하고 환경 위기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이다. 이 시대 우리의 시급한 과제는 이런 풀뿌리 기관들의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다.
민주사회주의가 페미니스트인 이유(WHY DEMOCRATIC SOCIALISM IS FEMINIST)
페미니스트들이 종종 비판해왔듯이, 임금 노동, 특히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 은 자본주의에 존재하는 유일한 형식의 노동은 아니지만, 맑스가 집중한 유일한 형식의 노동이다. 실제, 페미니스트들에게 대부분 여성에 의해 행해지는 무급 돌봄 노동이 “비생산적” 노동이라는 맑스의 분석은 특히 모욕적이다. 무급 돌봄 노동은 생물학적으로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서도 필요할 뿐만 아니라, 매일 노동자를 공장에 출근하게 하는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돌봄 노동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맑스는 “생산적 노동(productive labor)”의 정의를 제한한다. 그는 “자본주의 생산 양식 전체와 자본 자체가 기반을 둔 노동의 특정 형식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산적 노동 개념은 자본주의의 “본질(essence)”을 이해하고 자본주의가 개혁될 수 있는 한계를 이해하는 데에 핵심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본의 관점에서) 다리를 이용해서 그녀 고용주의 이익을 위해 춤을 추는 댄서는 생산적 노동 여성이지만,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여성과 프롤레타리아 엄마들의 모든 힘든 노동은 비생산적 노동으로 간주된다. (이것이) 엉터리 같고 미친 것처럼 들리지만 오늘날 경제질서가 얼마나 엉터리이고 미쳤는지를 정화하게 표현하고 있다…”
맑스를 겨냥한 타당한 비판은 아니지만, 상당 부분 여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무급 노동의 중요성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강조는 부정할 수 없다; 사실 다른 모든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노동이다. 막시스트/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 특히 소위 사회적 재생산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에서 임금노동과 무급노동을 다 포함하는 노동에 대한 완전한 이야기를 발전시키려고 시도했다. 생산과 재생산의 관계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젠더와 계급 투쟁의 결과물이다. 미국 페미니스트들은 사회민주주의 전통이 강한 많은 나라에서 그런 것처럼, 돌봄(caregiving)을 공공재로 인식할 것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계속되는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재생산 영역의 지출을 삭감했다. 따라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투쟁을 계속해야 하겠지만, 자본주의하에서는 확실하게 승리를 쟁취할 수 없다는 면에서 과도기적 투쟁임을 인지해야 한다. 무급 돌봄 노동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는 궁극적 사회는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일 것이다.
이익이 아닌 필요의 충족을 위한 사회주의 생산 양식에서 이 “노골적이고 미친”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의 제약은 사라질 것이다. 이 두 시스템을 움직이는 근원이 다르기 때문에, 생산적인 것과 비생산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도 달라진다. “생산적(productive)”이란 개념은 이익 관점이 아닌 웰빙 관점에서 정의될 것이다. 따라서 사랑으로부터 나와 “공짜(for free)”로 제공되고, 모든 사회가 필요로 하는 무급 돌봄 노동은 그 자체 필수적인 생산적 노동으로 인정될 것이다. 그리고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행해지지 않는 과학적이고 창조적 일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삶을 향상해 주는 노동으로 인정될 것이다. 자본주의 관점에서는 비생산적이지만 사회주의 관점에서는 생산적이다. 반면, “자본주의에서 생산적”인 많은 노동은 생태사회주의 섹션에서 논의된 것처럼 비생산적 노동으로 올바르게 인식될 것이다.
전반적으로 민주사회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더 많은 여가 따라서 더 많은 시간을 우리의 친구와 가족과 함께 보낼 것이다. 이것이 항상 페미니스트 사고의 기저에 깔린 가치였다.

민주적인 페미니스트 생태사회주의는 진정한 안전(security)의 기초 위에 자리 잡을 것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에서 안전은, 우리의 안전(safety)과 웰빙에 대한 의도적 위협으로부터 보호라는 측면으로 배타적으로 상상되고 있다. 이런 상상은 위협이 개인 혹은 국가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대응한다. 사실 미국의 침략이 9/11의 결정적 원인이었다. 데즈먼드 투투(Desmond Tutu) 주교는 말했다: “ 여러분은 총구에서 진정한 안전을 얻을 수 없습니다.”
보통 여성과 관련된 넓은 의미의 안전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모든 종류의 위협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한다. 위협이 환경적 재앙에서 오든 전쟁에서 오든, 그 누구도 현 상태와 같은 세계에서는 진정으로 안전할 수 없다. 갈수록 지구의 모든 사람은 상호 연결되며 궁극적으로 하나이다. 따라서 우리 행성의 자원은 합리적으로 민주적으로 관리되어야 할 공통 보고로 간주되어야 한다.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일국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오늘날 얼마나 더 명확해야 할까?
역자 후기
“....그러나 자본주의 등장과 함께 “경제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은 처음으로 분리되었고, 사회적 권력은 경제에 둥지를 틀었다. 엘렌 마이크신스 우드(Ellen Meiksins Wood)가 주장했듯이, 이 분리가 정치적 민주주의를 더 가능케 한 동시에 덜 중요하게 만들었다.”
한국과 뉴질랜드를 포함한 자본주의 국가 민주주의의 역사적 본질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다. ‘경제적 민주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 그리고 ‘실질적 평등’과 ‘형식적 평등’과 같은 개념들이 이 경제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의 분리로부터 설명이 된다. 자본가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의 번영을 위해 의붓형제 리버럴로 하여금 형식적 평등을 전면에 내세운 정치적 민주주의를 동시에 실행하게 한다. 자본주의 초기, 프롤레타리아 포함 대중의 환호를 받으며 등장했던 이 형식적 평등과 정치적 민주주의는 결국 자본주의의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실체가 갈수록 명확해지고 있다. 실질적 불평등 그리고 경제적 독재가 그 결과다.
1인 1표와 같은 형식적 평등은 껍데기라는 의미에서 형식적 평등이 되어가고 있다. 애초 기대와 달리 정치적 민주주의가 자본가의 경제적 독재에 속수무책 일방적으로 밀리는 것을 특히 지난 40여 년간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국가 대중은 지켜보고 경험했다. 이런 자본주의 정치적 민주주의에 실망한 대중은 대의 선거제도를 더 중요시하지 않게 된다. 결과적으로 유권자의 선거 참여율은 갈수록 떨어지며,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저항에 부딪힘 없이 경제적 이익 추구를 위한 행보를 보다 노골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Hal Draper는…. 사회주의 비전 간 근본적 구분은 “위로부터의 사회주의”와 “밑으로부터의 사회주의” 차이라고 주장한다. 놀라운 것은 추정 상 “반대(opposite)”일 것 같은 사회민주주의와 관료적 집단주의 그리고 유토피안 모델이 모두 같은 카테고리에 속한다는 것이다: “위로부터의 사회주의.” 그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모두 사회주의는 공산당이 되었든 의회가 되었든 아니면 유토피아 사상가가 되었든 지배 엘리트들에 의해 국민들에게 전해진다고 믿는다.”
창피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Hal Draper라는 인물 그리고 그의 "socialism from below"(밑으로부터의 사회주의) 개념도 처음 알았다. 소련과 같은 관료적 집단주의 형식 그리고 공상적 사회주의가 위로부터의 사회주의라는 것은 기존 이해 사항 중 하나였으나, 사회민주주의 역시 의회 다수당이라는 지배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된다는 점에서 다른 두 모델과 다를 바 없다는 지적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더 나아가 공감이 가기도 한다. 세계 역사를 통틀어 엘리트가 지배하지 않은 사회가 없기 때문이다. 엘리트를 시대정신의 대리인으로 간주하더라도, 어쨌든 대중의 직접적 통제를 벗어난 집단이라는 의미에서 엘리트로부터의 통치로부터 자유로 왔던 사회를 세계 역사상 찾기 힘들다. 이 엘리트주의(elitism)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바로 민주사회주의의 주요, 어쩌면 가장 큰, 과제일 것이다. 저자의 이런 문제의식은 아래 이어지는 글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사고방식을 갖게 되면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간 불가분 관계가 명확해진다: 슬로건이 말하듯,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의 수단이자 목적이다.”
“개혁(reform)을 위한 투쟁은 사회주의 건설의 핵심이지만 일부 비막시스트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주의가 간단히 개혁의 누적물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다른 생산 양식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험, 비전, 조직 그리고 노동자들의 역량을 발전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변혁을 위한 투쟁 과정이다…..특정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런 결정을 대중의 민주적 통제하에 둠으로써 민주주의를 심화시켜야 하다는 것이다….. 공개적 대중 토론은 필수적이다.”
사회민주주의와 민주사회주의와의 연결고리를 명확하게 짚어준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정치적 힘과 실체를 드러내 보여주지 못하는 민주사회주의에 비해, 사회민주주의는 이미 존재하며 그 세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들 간 차이와 논쟁을 적대적으로 유추해 내면 수정주의냐 교조주의냐와 같은 해묵은 이분법을 여전히 적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각자 서로를 찌를 창과 그것들을 막을 방패들도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고의 전환을 한다면 위와 같은 보완관계가 양자 간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사회주의가 이전 소련과 같은 국가사회주의 혹은 위로부터 사회주의와 구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대중이 직접 자신을 통치한다는 밑으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밑으로부터의 사회주의는 위 맑스, 로자 룩셈부르크 그리고 유진 데브스가 말했듯, 풀뿌리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구성원의 의식과 경험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이 의식과 경험은 어느 순간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조직을 통해 작은 목표부터 달성하기 위한 순차적 투쟁을 통해 이 경험과 의식은 축적되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가 중요한 것은 이들이 현실에서 노동자들이 또 대중이 이후 민주사회주의 사회가 엘리트주의로 빠지지 않게끔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실습하는 장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사회주의 구성원들의 예비 양성소이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가 선거에서 승리를 위해 노력하는 것, 그리고 혁명에 비교하면 미미할지라도 개혁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선거 승리와 개혁 쟁취가 최종 목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사회민주주의를 통해 노동자와 대중은 민주사회주의라는 궁극적 목적지에서 구현될 민주주의와 그 목적지에 가기 위한 민주적 투쟁 수단을 학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앞의 작은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승리를 향해 가는 ‘과정의 민주성’인 것이다. 공개적 대중 토론은 그 대표적 예다.
레닌은 이 과정의 민주성보다는 결과의 도출을 중요시하며 전위대론(Vanguardism)을 주창했고, 결과적으로 볼셰비키를 통해 혁명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역사가 말해주듯 서둘러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된 위로부터의 사회주의는 수십 년 후 해체라는 유감스러운 결말을 맞이했다. 그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정작 사회주의를 필요로 하는 100년 뒤 후손에게 잘못된 역사 표본을 남겨 줌으로써, 진정한 사회주의 가치를 지향하는 이들을 힘들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진리를 레닌과 동시대의 그녀는 알고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혁명적 노동운동을 진심으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는 가장 훌륭한 중앙위원회(Central Committee)의 무결함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더 생산적이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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