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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머리말
아랫글은 버니 샌더스가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경선에 참여하며 유세 과정에서 행한 연설문이다. 2019년 6월 12일, 조지 워싱턴대학교에서 행한 이 연설의 원문은 중도좌파로 알려진 미디어 Vox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전에도 민주사회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버니 샌더스였는데, 2019년의 이 연설이 각별히 주목을 받은 이유는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젊은이를 중심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입으로 민주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를 처음으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그의 연설문은 1930년대 루스벨트 대통령부터 버락 오바마에 이르기까지, 지금 시점에서 보면 결코 급진적이지 않아 보이는 민주당 정책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사회주의(라고 쓰고 빨갱이라고 읽혀야 할 것이다)라는 공격을 받아 왔는지 생생하게 전한다. 특히 루스벨트 대통령이 집권 중이었고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직전이었던 1939년, 뉴욕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나치 찬양 집회는 이 역사적 사실을 처음 접한 나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나처럼 몰랐던 분은 아래 비디오를 꼭 보길 권한다. 집회 도중 반대 시위자가 폭력적으로 끌려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연설문을 통해 알게 된 사실들은 이전 포스트, ‘미국 사회주의 역사, 존재 부정과의 투쟁사’,에서의 묘사를 피부로 와닿게 한다. 극우세력은 위 집회처럼 공공연히 존재를 드러내도 괜찮았지만, 사회주의자는 물론 진보 세력도 사회주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런 면에서 버니 샌더스의 민주사회주의 개념이 과연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급진적인지 여부와 관계없이 사회 정의를 위한 지난 수십 년에 걸친 그의 노력은 인정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민주사회주의의 오늘날 의미 (What Democratic Socialism Means Today)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

우리는 미국과 우리 지구를 위한 결정적이며 중추적 순간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동시에 달려든 많은 위기 탓에 압도되거나 우울해지거나 심지어 체념에 손들 들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미국 역사에 절망이 선택이 아니었던 순간이 있었다면 지금이 그 순간이라고 믿습니다. 이 역사적 시대를 규정하는 경쟁적, 정치적, 사회적 힘을 효과적으로 분석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면 바로 지금입니다. 과두 세력과 권위주의에 맞서 싸울 필요가 있는 순간이 있었다면 바로 지금입니다. 정의, 품위 그리고 인간 존엄성을 위한 싸움에 우리 국민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새로운 비전이 필요한 순간이 있었다면 바로 지금입니다.
2019년, 미국과 세계의 다른 나라들은 매우 다른 두 갈래의 정치적 길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믿을 수 없는 정도로 부유하고 강력한 소수의 억만장자가 경제의 상당 부분을 쥐고 흔들면서 미국 정치적 삶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과두제와 권위주의를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과두제에 반대하며 점점 더 많은 노동자와 청년이 정의를 위해 싸우자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학교에 충분한 자금이 지원되고 그들의 학생이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 교사들입니다. 그들은 최소 시간당 $15의 생활임금(living wage)과 노조를 결성할 권리를 위해 맞서 싸우는 디즈니, 아마존, 월마트, 패스트푸드 업계의 노동자들입니다. 그들은 화석 연료 산업에 맞서 우리의 에너지 시스템을 변화하고 기후변화의 파괴로부터 우리 지구를 지키는 정책을 요구하는 젊은이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지역, 주 그리고 연방 정치인에게 맡기는 것을 거부하는 여성들입니다. 그들은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한 구조적 인종차별과 대규모 인종 불평등의 종식을 요구하는 유색인종과 그들의 연대 세력입니다. 그들은 불법체류자들의 악마화를 종식하고 이민 개혁을 위해 싸우는 이민자와 그들의 동맹 세력입니다.

우리가 과두제를 얘기할 때 그 의미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세 가족이 1억 6천만 명에 달하는 하위 절반 가족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상위 1%는 하위 92%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으며, 오늘날 새로 창출되는 소득의 49%는 상위 1%에게 돌아갑니다. 사실, 미국의 오늘날 소득과 부의 불평등은 1920년대 이후 그 어느 때보다 큽니다. 우리가 과두제에 관해 얘기할 때 그것이 단지 매우 부유한 사람들이 더 부유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만은 않습니다. 지구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수천만 노동자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생존에 급급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4천만 가까운 미국인들이 가난에 시달리고 있으며, 오늘 밤 오십만 명은 거리에서 잠을 청할 것입니다. 사고, 이혼, 질병 혹은 해고 등으로 절반의 미국인은 저축 없이 근근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국의 많은 공립학교는 학생을 제대로 교육할 자원이 부족한 반면,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투옥률이 높은 나라입니다. 억제되지 않은 기업의 탐욕을 조장하고 지원해 온 지난 수십 년의 정책 결과, 우리는 근본적으로 망가지고 기이할 정도로 불공평한 경제를 갖게 되었습니다.
GDP, 주식시장 그리고 실업률 같은 거시경제 지표는 호조를 보이는 데도, 수백만 명의 중산계급과 노동자들은 살아남기 급급합니다. 반면 억만장자 계층은 우리가 국가로서 집단으로 창출한 부의 가장 큰 부분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소위 경제 호황기에도 평균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거의 오르지 않았습니다. 기술과 노동생산성의 폭발에도 불구하고, 미국 노동자의 실질적 평균임금은 46년 전보다 높지 않으며,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단지 생존하기 위해 두세 개의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규제 없는 자본주의 결과에 대해 여러분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오래, 행복하게, 그리고 생산적인 삶을 살고 싶어 하지만, 오늘날 미국에서 매우 부유한 사람들은 가장 가난한 미국인보다 평균 15년을 더 삽니다. 2014년, 가장 가난한 카운티 중 하나인 웨스트버지니아주 맥도웰 카운티의 남성 기대수명은 64세였습니다. 불과 350마일 떨어진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 남성의 기대수명은 거의 82세로 18년 차이가 났습니다. 이 두 카운티 여성 기대수명 차이는 12년이었습니다.

규제 없는 자본주의 문제는 단순히 학문적 논쟁이 아닙니다; 가난, 경제적 고통 그리고 절망은 이 나라 수백만 노동자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더 부유해지고 더 오래 삽니다. 이에 반해, 가난한 노동자 가족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제대로 된 건강 관리를 받지 못한 결과, 그들의 기대 수명은 미국 현대 역사상 처음으로 감소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신분 상향이동이라는 아메리칸드림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상황을 반전시키지 않는다면, 우리 젊은 세대는 살아있는 기억으로는 처음으로 그들 부모보다 낮은 삶의 수준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상황은 더 충격적입니다: 세계 부의 대부분은 극소수에 집중되어 수십억 명의 사람들은 거의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26명의 억만장자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38억 명 - 세계 인구의 절반 - 이 가진 것과 같은 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단지 경제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전 세계적으로 과두정치를 향한 움직임은 러시아의 푸틴, 중국의 시진핑,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과 같은 권위주의 정권의 성장과 평행선을 달리고 있습니다. 이 지도자들은 기업주의 경제(corporatist economics), 외국인 혐오증 그리고 권위주의와 결합하여 있습니다. 이들은 불평등과 쇠퇴하는 경제 상황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이민자, 인종 소수자, 종교 소수자 혹은 성적 소수자에 대한 폭력적 분노로 돌립니다. 그리고 반대 의견을 억압하기 위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탄압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에서도 이런 과두정치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나라를 분열시키고 소수자 그룹을 공격하는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 내 지지자들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을 친구와 동맹으로 간주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이런 권위주의적 움직임이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국가로서 세계로서 우리가 지금 직면한 도전은 많은 면에서 1930년대 대공황 당시 그리고 이후 우리가 직면했던 도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당시도 지금처럼 뿌리 깊고 다루기 어려워 보이는 경제적, 사회적 불균형이 전 세계적으로 우파 민족주의 세력의 발흥을 이끌었습니다. 유럽에서 분노와 절망은 기업주의, 민족주의, 인종차별주의 그리고 외국인 혐오증 등, 이 모든 것을 전체주의 권력을 축적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며 결국 내 가족을 포함해 수백만 명을 학살한 정치적 운동과 융합한 권위주의적 선동가들에게 궁극적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둠의 세력이 일어나려고 한 곳이 그곳만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버지니아 샬러츠빌에서 공개적으로 행진하는 신나치와 KKK의 모습에 당연히 혐오감을 느끼고, 우익 테러리스트들이 예배당에 총을 쏜 것을 보고 끔찍해 합니다. 그러나 1939년 2월 20일, 2만 명이 넘는 나치들이 베를린도 로마도 아닌,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만 자로 둘러진 30피트 높이의 조지 워싱턴 현수막 앞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 극단주의자들은 대서양 넘어 권위주의적 동료들의 성공을 재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위기에 대응하여 감사하게도 미국은 유럽과는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이념을 배척했습니다. 대신 당시 민주당 진보파의 지도자였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담하고 선견지명 있는 리더십을 채택했습니다. 조직된 노동자, 흑인 사회 지도자 그리고 당 안팎의 진보주의들과 함께 미국 정부와 미국 경제의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루스벨트의 혁신적 변화의 추구는 월스트리트, 공화당 심지어 민주당 내 보수파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같은 공포 전술에도 직면했습니다: 빨갱이, 외국인 혐오증, 인종차별 그리고 반유대주의.
1936년 루스벨트는 선거 유세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우리는 평화의 오랜 적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 사업과 금융 독점, 투기, 무모한 은행업, 계급 간 적대, 분파주의, 전쟁 사업 폭리. 이들은 정부를 자신의 부속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돈으로 조직된 정부는 조직된 폭도로 조직된 정부만큼 위험하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압니다. 우리 역사상 이들 세력이 한 후보에게 대항하기 위해 오늘날처럼 단결된 적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한마음으로 나를 증오합니다 - 그리고 나는 이 증오를 환영합니다.”
이런 반대에도, 미국 국민들을 규합하여 루스벨트와 진보 연합은 뉴딜을 만들었고, 4번 집권했으며, 소수가 아닌 모두를 위한 경제를 창조했습니다. 오늘날, 사회보장, 실업 보상, 노조 결성권, 최저임금, 농민 보호, 월스트리트 규제, 대규모 인프라 개선과 같은 뉴딜정책은 미국 사회의 한 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루스벨트가 이런 노동자 가족을 위한 정책을 펼칠 당시, 과두제 집권층은 이 극도로 인기 있던 정책들을 “사회주의”로 낙인찍으며 비난했습니다. 유사하게, 1960년대에, 린든 존슨이 Medicare, Medicaid 그리고 다른 매우 인기 있는 정책을 도입했을 때도 그는 이 나라의 지배계급으로부터 잔인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은 수백만 미국민들의 삶을 개선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극우 극단주의를 물리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날 미국과 세계는 다시 권위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과두제, 재계의 국가 장악(corporatism), 민족주의, 인종차별주의 그리고 외국인 혐오와 같은 우파 세력이 다시 발흥하면서, 지난 세기 유럽의 잘못된 종말론적 선택으로 우리를 몰아가고 있습니다.
전례 없는 부와 권력을 가진 소수의 억만장자를 현재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거의 모든 면을 통제하는 권력을 가졌음에도, 민주적 통제권 밖에서 운영되며 납세자들의 보조금을 받는 민간 독점 세력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의료, 기술, 금융 시스템, 식량 공급 그리고 삶의 거의 모든 기본 필수품의 길목에서 이윤을 챙깁니다. 그들은 월스트리트, 제약회사, 화석연료 산업, 군산복합, 교도 산업 복합체, 거대 농업입니다. 그들은 무한한 부를 가진 자들로서, 수천 명의 고액 로비스트를 동원해 우리 의사당을 포위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며 지켜야 할 법을 만드는데 깊숙이 관여합니다.
오늘날 백악관에는 값싼 정치적 이익을 위해 우리가 직면한 진정한 위기로부터 미국 국민의 관심을 돌려 국민을 분열시키고 증오를 법제화하는 선동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잔인한 가족 분리, 국경 장벽, 무슬림 금지, 반 LGBT 정책, 추방 그리고 유권자 탄압을 지지하는 대통령입니다.
미국은 이 증오와 분열의 길을 거부하고, 다른 길, 더 높은 길, 연민, 정의 그리고 사랑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도덕적 확신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저의 강한 신념입니다. 그 길이 제가 민주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길입니다. 민주사회주의는 민주당의 미완 사업이고 우리가 이뤄내야 할 비전입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권리 보호, 시민권 보호 그리고 이 나라 모든 국민의 경제적 권리 보호에 우리가 전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루스벨트는 1944년 연두교서에서 말했듯이 : “진정한 개인의 자유는 경제적 안전과 독립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권리 장전(Bill of Rights)은 많은 중요한 정치적 권리들을 헌법 차원에서 미국 국민들에게 보장합니다. 이 권리들이 언제나 존중된 것은 아니었고, 우리가 여전히 노력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우리의 헌법이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언론의 자유 그리고 다른 권리들을 보장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우리가 권위주의적 폭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진정한 자유를 우리는 결코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 모든 남성, 여성 그리고 어린이에게 기본 경제권을 보장해야 합니다: 양질의 건강 관리를 받을 권리,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원하는 만큼의 교육을 받을 권리, 생활임금을 지급하는 좋은 직장을 가질 권리, 저렴한 주택을 가질 권리, 안전한 노후를 보장받을 권리 그리고 깨끗한 환경에서 살 권리.
21세기,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경제적 권리는 인권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민주사회주의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말했습니다: “민주주의라고 부르든, 민주사회주의라고 부르든, 이 나라 안에 있는 부의 더 나은 분배가 모든 하나님의 자녀를 위해 있어야 합니다.”

이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미국이 단절된 개인의 집합으로서 보지 않고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말했듯이 우리를 “운명이란 한 벌의 옷으로 묶인 피할 수 없는 상호 관계 네트워크”의 한 부분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우리는 이 일을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종, 성별, 종교, 성적 취향 혹은 출생 국가와 관계없이 우리 자신을 하나의 나라, 하나의 공동체 그리고 하나의 사회로 봐야 합니다. 이 본질에서 미국적 사고는 문자 그대로 우리 동전에 새겨져 있습니다: E Pluribus Unum, “많은 사람으로부터 한 사람으로.” 이 말은 우리 대통령 선거운동의 모토인 ‘나가 아닌 우리’를 의미합니다.
명확히 하겠습니다. 나를 비롯한 진보 진영이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동원하여 비방하려는 사람들로부터 대규모 공격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런 공격을 받아왔고 또 극복해왔다는 것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이는 단지 저만 아닙니다. 1932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허버트 후버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전체주의 국가를 위장한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936년, 전 민주당 뉴욕 주지사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알 스미스(Al Smith)는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민주당 공약과 사회주의 정당의 공약을 취합해서 여러분의 식탁에 나란히 놓은 것.”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헬스케어 프로그램을 제안했을 때, 미국 의학협회는 로널드 레이건을 그들의 대변인으로 고용했습니다. 협회는 백악관 참모들을 “모스크바 당 노선 추종자”라고 주장하며, 트루먼의 제안에서 비롯된 법안을 “사회화된 의료(socialized medicine)”라고 불렀습니다. 1960년, 로널드 레이건은 리처드 닉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존 에프 케네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헝클어진 소년 같은 머리 아래에는 여전히 나이 든 칼 맑스가 있습니다.” 1990년대, 당시 하원 의원 뉴트 깅리치(Newt Gingrich)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헬스케어 플랜이 “중앙집권적 관료적 사회주의”라고 주장했습니다. 보수적 헤리티지 재단은 어린이 건강보험 프로그램(CHIP)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한 걸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존 베이너(John Boehner) 전 하원의장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제출한 경기부양책 그리고 옴니버스 지출 법안과 예산에 대해 “새로운 미국 사회주의 실험을 위한 거액의 계약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해리 트루먼이 한 말은 맞았습니다:
“사회주의는 사람들이 지난 20세기 이룩한 진보를 향해 그들이 내뱉은 욕설입니다. …..사회주의는 그들이 사회보장(Social Security)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회주의는 그들이 농산물가격 지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회주의는 그들이 은행 예금보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회주의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노동자 조직의 성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회주의는 모든 사람을 돕는 거의 모든 것을 가리키는 그들의 이름입니다.”
우리는 명확히 해야 합니다: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과두제 동료들은 우리 보고 민주사회주의를 지지한다고 공격하지만, 그들은 사회주의의 모든 형식을 정말로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민주사회주의가 노동자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싫어하지만, 트럼프를 비롯한 억만장자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기업 사회주의는 절대적으로 사랑합니다. 규제 없는 자본주의의 고위 성직자인 월스트리트의 믿을 수 없는 위선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2008년, 그들의 탐욕, 무모함, 불법적 행위가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 재앙을 불러일으켜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이 직업, 집 그리고 평생 모은 저축을 잃은 후, 월스트리트의 자본주의에 대한 종교적 집착은 갑자기 끝이 났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월스트리트는 커다란 정부 사회주의자가 되어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연방 구제금융을 요청했습니다. 미 재무부로부터 약 7천억 달러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로부터 수조 달러를 지원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필요할 때 사회주의를 사랑하는 것은 월스트리트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업 세계 전체의 표준입니다. 기업 미국은 수천억 달러의 연방 지원을 매년 받지만, 트럼프의 과두정은 일반 미국민들에게 혜택을 주는 프로그램들을 항상 삭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탄소 배출로 지구를 파괴하는 화석연료 기업이라면 당신은 정부로부터 특별 세금 감면, 로열티 경감, 연구개발 자금 지원 그리고 수많은 세금 공제와 같은 수십억 달러의 보조금을 받을 것입니다. 당신이 제약회사라면 납세자의 세금 지원으로 개발한 의약품의 특허권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릴 것입니다. 당신이 미국 최고 갑부가 소유한 아마존처럼 독점기업이라면 창고를 짓는데 경제적 인센티브라는 명목으로 수억 달러를 세금으로부터 지원받고는 이후 연방 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족인 월튼(Walton)가라면 당신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생존을 위해 식권, 메디케이드와 공공 주택에 의존하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엄청난 보조금을 받을 것입니다. 이 모든 돈은 납세자에게서 나옵니다. 당신이 트럼프 가족이라면 인종차별을 기반으로 지어진 당신 가족의 주택 제국을 위해 8억 8천5백만 달러 상당의 세금 감면과 보조를 받을 것입니다.
트럼프가 사회주의를 향해 악을 쓸 때, 그의 모든 위선은 미국민들에게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민들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그가 공격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회보장, 메디케어, 참전용사 헬스케어, 도로와 다리, 공립학교, 국립공원, 깨끗한 물과 공기.
트럼프가 사회주의를 공격할 때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을 떠올립니다: “이 나라는 부자를 위한 사회주의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단호한 개인주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도널드 트럼프와 저의 차이점입니다. 그는 부자와 권력자를 위한 기업 사회주의(corporate socialism)을 믿습니다. 저는 이 나라 노동자 가족을 위한 민주사회주의를 믿습니다.

제가 믿는 것은 미국 국민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는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지만 이제 이 단어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세히 살펴볼 때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자유롭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 당신이 아플 때 병원에 갈 수 없거나, 퇴원하면서 재정적 파산에 직면한다면 당신은 진정으로 자유로울까요?
- 당신이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약을 살 수 없다면 진정 자유로울까요?
- 당신이 제한된 수입의 절반을 주택에 소비하고 200% 금리로 초단기대출(payday lender)을 받을 수밖에 없을 때 진정 자유로울까요?
- 당신이 70살이 되어도 연금이 부족하거나 은퇴자금이 부족해서 일해야 한다면 진정 자유로울까요?
- 당신이 가족이 가난해서 대학이나 직업학교에 다니지 못한다면 당신은 진정 자유로울까요?
- 당신이 생활임금(living wage)을 주는 일자리를 찾지 못해 일주일에 60시간 심지어 80시간을 일해야 한다면 정말 자유로울까요?
- 당신 아기가 방금 태어났지만 유급 가족 휴가가 없어 곧바로 직장으로 복귀해야 한다면 당신은 진정 자유로울까요?
- 당신이 대기업의 독점적 관행에 의해 축출된 소규모 사업자 혹은 가족 농부라면 진정 자유로울까요?
- 당신이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이제 길거리에서 잠을 자는 참전용사라면 정말 자유로울까요?
제가 보기에 이 질문들에 대한 지구의 가장 부유한 나라의 답은 ‘노’입니다. 여러분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권리장전이 억압적 정부의 폭정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지만, 기득권층의 많은 사람은 미국민들이 과두정치, 다국적 기업, 월스트리트 은행 그리고 억만장자에게 굴복하기를 원합니다.
이제 미국 국민들은 자유를 누릴 권리,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안전을 위해 일어나 싸울 때입니다. 이것이 제가 지향하는 정치의 모든 것입니다. 1944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경제적 권리장전을 제안했지만, 1년 뒤 사망하면서 그 비전을 결코 이룰 수 없었습니다. 75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과제는 그가 시작한 것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21세기 경제 권리장전(21st Century Economic Bill of Rights)을 제안합니다.
모든 미국인은 소득과 관계없이 다음과 같은 권리를 가질 것입니다:
생활임금을 지급하는 괜찮은 직업을 가질 권리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받을 권리
온전한 교육을 받을 권리
적절한 주택을 소유할 권리
깨끗한 환경을 누릴 권리
안전한 노후를 보장받을 권리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저에게 민주사회주의는 모든 공동체가 정치적 경제적 자유를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은 정치적 혁명입니다. 수백만 명의 사람이 정치과정에 참여하고 탐욕으로 우리나라의 사회적 경제적 구조를 파괴하는 강력한 기업 이익에 맞서는 용기를 통해 우리의 민주주의를 되찾는 것입니다.
1%가 엄청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결국 그들은 1%입니다. 99%가 뭉친다면 우리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들이 저의 가치이고 제가 저 자신을 민주사회주의자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그 중심에는 미국 국민에 대한 깊고 지속적 믿음이 있습니다. 번영의 공유, 사회적 평등 그리고 모두를 위한 자유를 만드는 변혁을 민주적이고 평화적으로 가져올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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