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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민주주의, 민주주의, 또 민주주의 - 민주사회주의 이해하기 (22)

김 무인 2021. 11. 13.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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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머리말

이전 에세이 ‘막시즘의 시장사회주의’에서 저자가 궁극적으로 강조한 부분은 ‘민주주의’였다. 이 민주주의에 대한 강조는 미래 사회주의 형식의 국가에서 경제적 평등이 ‘사회’ 혹은 사회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20세기 식 막연한 인식을 거부한다. 특히 ‘직장의 민주화’로 구현되는 노동의 민주화는 미래 사회의 성패를 좌우할 핵심 중의 핵심으로 간주된다.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의 ‘개인’이 그 중심에 서야 한다는 명제가 성립된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이 미래 사회는 개인의 권리, 개인의 참여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어떻게 보장할 것이란 문제에 전력을 쏟을 것을 요구한다.

아래 에세이도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일정 성공을 개인의 권리,자유 그리고 참여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이들 국가의 민주주의 문화에서 찾는다.

저자 이언 윌리엄스(Ian Williams)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간 영국 노동당 당원으로 여러 책을 집필한 작가이자 방송인이다. 영국에서는 버스회사에서 일하기도 했고 70년대 중국을 방문해서 저우언라이와 술 시합까지 한 다양한 경력의 소지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 에세이는 학자적 엄격한 논리의 전개가 아닌, 자신 의식의 흐름을 따른 비유적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전문 번역이 아니라 요약과 의역의 형식을 택했다.


 

50가지 빨간 색조(Fifty Shades of Red)

​                                                                                                                   

                                                                                                                                              Ian Williams

포르노를 정의하려고 애쓰면서, 어느 미국 대법원 판사는 “나는 그것을 볼 때, 나는 안다”라는 유명한 판결을 했다. “사회주의”는 민주적이든 아니든 객관적 정의에 저항한다. 특히, 이론에서든 현실에서든 그 다양한 형태가 사이언톨로지나 골상학보다 과학적이거나 반증 가능(falsifiable)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회과학처럼 사회주의는 과도한 주관성에 시달리고 있다. 국가 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 아랍 사회주의, 기독교 사회주의, 아프리카 사회주의, 혁명적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사회주의는 평범한 대중 혹은 최소한 그들 일부를 돌보는 시늉(pretension)을 한다는 것 빼고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날카로운 정치철학자 험프티 덤프티(Humpty Dumpty)(거울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캐릭터로 역설적 비유:역자 주)가 말했듯이, “내가 단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단지 내가 선택한 의미를 의미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앨리스(Alice)가 “문제는 단어가 그렇게 많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할 수 있느냐는 거야”라고 반박하자, 덤프티 동지(Comrade Dumpty)가 대답했다. “문제는 누가 주인이 되느냐, 그게 다야!” 그리고 덤프티는 정확히 맞았다: 진짜 문제는 자신만의 독특한 정의를 사용해 논쟁의 적들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포퓰리스트들은 여러 시대에 걸쳐 권력을 장악하고, 이후 무자비한 권력 유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주의라는 수사학을 이용했다.

많은 자칭 사회주의자들,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특히 레닌주의 진영은 사회주의에 대해 혐오적 접근 방식을 채택한다. 그들은 같은 편은 끌어안고 경쟁자들은 배척하는데 “비사회주의적”(unsocialist) 혹은 실제는 사회주의라고 할 수 없는 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자칭 “민주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 옹호자들은 보통 이 용어가 동어반복인 것을 알면서도 사용한다. 그 이유는 많은 권위주의 정권과 정당들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악용하고, 오웰주의 방식으로 남용했기 때문이다. 모든 합리적 사회주의자는 철조망과 사회주의는 상반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시민은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낙원(철조망 수용소를 빗댐:역자 주)에 갇혀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국경수비대와 경찰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사회주의가 아닐 것이다.

 

확실히, 구소련 블록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사회주의”는 우리의 사회주의에 대한 개념과 공감에 치명적 해악을 지금도 미치고 있다. 그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시늉을 증명하기 위해 국가 소유, 무료 혹은 매우 저렴한 의료 및 교육 그리고 엄격한 중앙 계획을 시행했다. 이런 시늉 정책들은 많은 사람을 경제적 유사성으로 매료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시민의 자유와 민주적 권리의 부재를 간과하게 하였다. 예를 들어, 바베이도스(Barbados)는 효과적인 무료 교육과 의료, 자유 노조 그리고 높은 문자해독률을 가지고 있으며, 국민은 그들이 좋아하는 책을 읽을 수도 있고 나라를 떠나기 위해 무장경비원을 피해 도망칠 필요가 없다. 객관적 관점에서 볼 때, 바베이도스는 쿠바보다 훨씬 매력적이고 평등한 나라다. 그러나 왠지 본능적으로 선뜻 다가오지 않는다.

최근 수십 년간, 많은 나라에서 중앙집권적 계획은 종종 불법 행위를 묵인하거나 방조하여 수익을 올리고, 밀수와 부패를 은폐해 왔다. 많은 정권이 산업과 기업을 국유화했지만, 국민 전체 혹은 노동자들에게 큰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다. 멕시코의 Pemex(국영 정유회사로 남미에서 두 번째로 큰 기업:역자 주)나 베네수엘라의 PDVSA(국영 석유가스 개발회사: 역자 주)는 경제에 대한 국가 통제의 우월성은 고사하고 평등주의의 빛나는 사례도 아니다. 그럼에도 50대 기업이 국유화되면 최소한 강제수용소나 총살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사회주의는 실제 어느 정도의 국가 계획 혹은 공공 소유를 의미하지만, 그런 권력의 집중화는 인권과 시민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이 인권과 시민의 자유가 발전하고 보호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역사에서 배운 핵심적 교훈은 권력은 부패한다는 것이다. 노동자 정당이 이끄는 노동자 국가의 순수성에 대한 이상적 언어들은 1917년 이래 끔찍한 실시간 실험을 통해 반복적으로 망상임이 판명되었다.

총체적 혹은 심지어 우쭐댈만한 권력을 가진 국가는 권위주의적으로 될 위험성이 지극히 높다. 최근 역사가 보여주듯, 이런 국가의 통치자와 엘리트는 많은 개인적 급여가 필요하지 않다. 그들이 장악한 권력이 불안해지거나 해외에 부를 축적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지 않는 한, 그들은 국내 경제의 모든 자원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유화가 최소한 특권의 개인적 상속을 막는다고 스스로 위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중국과 소련 과두제 집권층들의 부 축적 과정을 추적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 특권 계층은 노골적 원시적 축적을 통해 매우 빠르고 효과적으로 정치적 권력을 경제적 권력으로 전환했다.

추상적 계급을 위한 권리를 가지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사회주의는 결과이자 계급 투쟁의 목적이다. 그러나 논리와 역사는 우리에게 말한다. 사회 차원이든 국가 차원이든 집단에 우선순위를 두면서 그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패러다임은 모두 엘리트 지배를 초래한다. 오믈렛을 만들기 위해서는 계란을 깰 필요가 있다는 코민테른의 진부한 오랜 비유를 암송하는 사람들은 민주사회주의에 대한 요청을 무시할 것이다. 이들은 오믈렛의 목적에 대한 불안감은커녕, 계란의 운명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다.

레닌주의에 영감을 받은 많은 정권은 억압적 보수 그리고 파시스트 정권과 마찬가지로 개인들이 주축인 모든 형태의 자율적 조직에 반감을 보인다. 그러나 노조, 정당 그리고 다른 협회에서 단결하는 사람들의 능력은 선진국 노동자가 산업화 과정에서 습득한 기술/수단의 한 부분이다. 볼셰비키 이전 시대에 이 사회적 기술은 정확히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하였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당 통제 아래 있지 않은 이 가드닝 클럽을 용납하지 않았다. 조지 오웰이 경고했듯이, “계획되고 중앙집권화된 사회는 과두정치나 독재체제로 변질하기 쉽다는 것은 언제나 의심할 여지가 없다”. 현실주의자인 그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에 화답하여 “집단주의(collectivism)는 본질에서 민주적이지 않지만, 폭압적 소수에게는 스페인 종교재판과 같은 꿈도 꾸지 못한 권력을 준다”.

흥미롭게도, 프랭클린 루스벨트(FDR)를 여전히 볼셰비키 비밀 당원으로 여기는 보수주의자들의 요새인 월스트리트 저널은 요즘 젊은이들이 “사회주의”를 들었을 때 당장 강제수용소를 연상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고민해왔다. 물론, 월스트리트 저널은 1917년 이후 더욱 불공평한 합성 방식으로 선전을 펼치고 있다. 가령 민주사회주의를 생존 멘셰비키 증언을 통해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와 연계시킨다. 슬프게도, 이런 보수주의자들의 레닌주의 일탈과 사회주의 융합은 많은 경우 다양한 열정을 가지며 대량 숙청과 감금을 집요하게 옹호하는 많은 좌파에 의해 공감을 받고 있다. 많은 사람이 마두로, 밀로셰비치, 폴포트, 시진핑 등을 옹호하는 한, 월스트리트 사설은 비난의 대상에서 제외될 것이다.

구 소련 블록 사회주의 주장의 의심성을 인정한다면 “진정한” 사회주의 모델은 무엇이란 말인가? 유감스럽지만, 현재의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ocialist International:SI) 회원 자격은 민주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2차 세계대전 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재개업무를 맡았던 영국 구 노동당 당수 Denis Healey의 경험은 그 실례다. 중동 지역의 자매정당 지지 호소를 위한 순방을 할 때, 그는 레바논 드루즈파(Druze)(레바논 이슬람교 광신도:역자 주) 군벌 왈리드 줌블라트(Walid Jumblatt)에게 “레바논 사회주의 운동”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Jumblatt 동지는 “마론파 교도(Maronite)(레바논 가톨릭교도: 역자 주) 두개골의 피를 마시는 것”이라고 답했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느슨한 가입 기준에도 Jumblatt는 특이한 경우였겠지만, Healey는 그의 가입신청을 받아들였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은 그 지역의 회원 확보를 간절히 원했다고 웃으면서 그는 나에게 설명했다.

 

왈리드 줌블라트(Walid Jumblatt)(1949~현재)

Jumblatt가 가입한 이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은 싱가포르 이광요의 People’s Action Party(PAP), 이집트 무바라크의 National Democratic Party 그리고 멕시코의 독재 Institutional Revolutionary Party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동지들을 받아들였다. 이들 정당은 종종 왜 사회주의가 간단한 이진법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50가지 붉은 색조로 구분되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의 PAP는 국유화 - 사회주의 원칙 중 하나 - 를 피했지만 복지주의와 신자유주의 결합 측면에서 초기 블레어파였다. 미국의 많은 공화당원은 무료 교육, 공공 주택 그리고 의료 서비스를 순수 볼셰비키주의로 간주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미국 민주, 공화 양 진영 모두 이런 복지주의를 사회주의와 연관 짓는다. 그러나 기독교 민주당, 심지어 파시스트 정부도 대상과 관계없이 모두를 위한 복지를 포함한 협동조합주의 요소를 종종 가지고 있다. 오히려 사회주의 진영이라고 알려진 소련과 중국은 “반동분자”는 물론, 농부에게조차 이 복지 혜택을 확대 적용하지 않았다. 맑스와 엥겔스는 역사의 물결이 프롤레타리아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착취적일 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확신과 별개로 그들은 사회주의 낙원이 어떻게 기능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항상 조심스럽게 말을 아꼈다. 사회주의 계획은 계획되지 않은 경쟁의 무정부 상태보다 노동자와 대중을 위해 더 효율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별도의 느낌이었다.

1848년의 공산당 선언 십계명은 지금은 다소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당시 도시의 사망률을 반영한 제9항은 마치 도시 생활의 도전과 편리함을 위해 뒤로한 전원생활에 대한 요구처럼 보인다. 이 조치들은 물론 나라마다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 선진국에서 아래 조항들은 상당 부분 해당할 것이다.

1. 토지 소유권 폐지 및 모든 토지임대료의 공공목적 적용

2. 높은 누진 소득세

3. 모든 상속권의 폐지

4. 모든 망명자와 반역자의 재산 몰수

5. 국가 자본과 독점권을 가진 국립 은행에 의한 신용의 국가 중앙집중화

6. 통신 및 운송 수단의 국가 중앙집중화

7. 국가 소유 공장 및 생산수단의 확장; 공통계획에 따른 황무지 경작 및 토양 개선

8. 모든 이의 노동에 대한 의무. 특히 농업을 위한 산업군의 육성

9. 농업과 제조업의 결합; 인구의 균등 분포로 도시와 국가 간 차별의 점진적 폐지

10. 공립학교 어린이를 위한 무료 교육. 아동 공장 노동 폐지. 교육과 산업 생산의 결합 등등

놀랍게도 이 중 상당수는 유럽 사회민주주의에 의해 달성되었다. 심지어 상속권 폐지조차 신자유주의의 훼방을 받을 때까지 상속세 형식으로 점진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자들은 무엇을 위해 애쓰고 있는가? 한편에서는, 제임스 코놀리(James Connolly)(아일랜드 출신 노동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 역자 주)처럼, “우리는 지구만을 원한다”라고 외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우리는 “더 많이(more)”라고 답할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영국 감리교, 루터교, 미국 유니테리언(Unitarian)교 그리고 흑인 교회가 러시아 볼셰비키보다 더 실용적이고 덜 종말론적 접근을 했다.

 

서구 사회주의자들에게, 비록 로버트 오웬과 같은 선구자들에게도 벤담의 공리주의 영향이 있었지만, 에드워드 벨라미(Edward Bellamy) 혹은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문학의 사회적 실험이 이데올로기적 규범적 작품보다 더 타당성과 견고성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현실에서 민주사회주의의 점진적, 양적 진보는 낭만적 막시스트가 추구하며 우리를 흥분시키는 질적 도약이라는 짜릿함을 놓치고 있다. 바리케드와 왕궁의 포위 그리고 내전의 부재의 따분함은 민주사회주의에서 조용한 실시간 실험을 압도한다.

사회주의의 가장 가까운 실제 모델은 조지 오웰의 70년 전 언급에서 찾을 수 있다. “가까운 미래에 민주사회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은 서유럽이다.” 객관적으로 서유럽 사회민주주의는 수억 명의 사람들에게 최고 수준의 인권, 민권 그리고 경제적 권리와 안전을 제공했다. 이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권력자들의 그들 자유에 대한 침해에 저항할 만큼 충분히 자신감 있고 회복력 있는 자체 조직, 자체 협회와 네트워크를 가진 공동체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는 맑스가 언급한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이었다.

따라서 버니 샌더스가 유럽 사회민주주의를 그의 사회주의 모델로 인용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신자유주의 훼방에도 유럽 사회민주주의는 자기 길을 가고 있다. 오웰은 경험은 그로 하여금 사회주의에서 인권과 민주주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게 만들었다. “기회의 평등과 소득의 적절한 평등 없이 민주적 권리는 가치가 거의 없다.” 샌더스의 민주사회주의 정의는 생활 임금을 제공하는 직업, 적당한 가격의 주택, 안전한 노후, 깨끗한 환경에서 살 기회, 교육 그리고 양질의 의료에 접근할 권리를 포함한다. 유토피아는 아닐지 몰라도 강제수용소보다는 매력적이다.

버니 샌더스의 미국을 위한 유화된 현실적 비전과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의 실질적 성과 사이의 어딘가에서 우리는 민주사회주의의 방향을 찾을 수 있고 그 길의 건설을 시작할 수 있다. 맑스-레닌주의의 형이상학적 열정에 직면하여, 구호를 현실로 맞서는 것은 어렵다. 우리가 점진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점진적 진보를 위한 목소리를 더 크게 낼 필요가 있다. 빨간색은 50가지 색조가 가능하다. 헬스케어 개선, 사회보장 강화, 사법 개혁, 소득재분배, 노조 권한 강화 그리고 노동자 보호는 모두 옅은 분홍색부터 짙은 진홍색에 이르는 빨간색의 단계별 색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