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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머리말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가 일천한 까닭에 이번 번역은 힘들었다. 의례 그러했듯이 이해 못 하는 대목은 건너뛰고, 그나마 어렴풋이라도 이해 가는 부분 위주로 선별 의역했다.
에세이를 통해 저자는 급진적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현 자본주의 리버럴 선거 정치 제도에서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해 묻는다. 그러면서 이 불가능 테제가 어쩌면 가능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주역은 계급 차별, 인종 차별, 여성차별(혐오)의 삼중고를 몸소 겪는 유색인종 여성들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여성들에 의해 반인종차별 사회주의 페미니즘, 즉 궁극적 해방적 사회주의(liberatory socialism)는 가능할 것이라고 저자는 결론짓는다.
저자 질라 아이젠슈타인(Zillah Eisenstein)은 뉴욕주 이타카 칼리지(Ithaca College) 명예 교수로 정치학과 페미니즘을 주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녀의 책 ‘The Radical Future of Liberal Feminism’(1981)은 ‘자유주의 여성해방론의 급진적 미래’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번역본이 출간되었으며, 저자는 2003년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에 반인종차별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
(Why Democracy and Socialism Need Anti-Racist Socialist Feminism)
Zillah Eisenstein

나는 이 책을 위해 민주사회주의의 의미와 잠재력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이 요청에 대해 우리가 사는 이 순간의 정신과 이 정신으로부터 축적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 가능성에 관해 얘기하고자 한다. 우익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민주주의에 도전하고 있는 가운데 사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수용과 그에 대한 비방이 공존하고 있다. 이런 불협화음 속에 그 의미가 변덕스러운 동시에 풍부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그 의미를 급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양쪽 모두 상대방의 급진적 입장(stance) 없이는 완전히 실현될 수 없다. 그리고 양쪽 모두 견고한 반인종차별 그리고 페미니스트 의제 없이는 달성될 수 없다.
나는 사랑스러운 사회주의적 반인종차별 페미니즘을 상상한다. 나의 바람은 역사적 한계와 가능성을 활용함과 동시에, 미래를 보다 창의적으로 보기 위한 가능성을 열고 확장하는 것이다. 40년 동안 반인종차별 사회주의 페미니즘 운동을 해 온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완전한 민주적 사회주의를 추구하고 있지만, 그것은 경제적 폭력을 키우는 성적 그리고 인종적 폭력의 종식을 필요로 한다. 나의 사회주의는 이익 창출의 이기심에서 파생한 경제적 착취 그리고 부와 권력의 불평등 종식을 요구한다. 나의 사회주의는 또 재산 노예제로부터 감옥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익을 구성하는 백인 우월주의와 여성 혐오의 해체를 요구한다. 미국 전역에 걸친 재산 노예제의 근본적 역할은 최근 찬사를 받은 New York Times의 프로젝트 “1619”(흑인 노예의 공헌을 미국 건국 중심에 놓자는 프로젝트:역자 주)에서 자세히 설명되었다.

나는 자본주의는 항상 가부장제와 상호의존하므로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페미니즘이 되어야 한다는, 즉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일찍이 주장했다. 더 나아가, 가부장제는 항상 백인 우월주의였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인종과 젠더의 계층화와 불평등을 철폐할 필요가 있다고 이 주장을 명확히 구체화했다. 지금까지의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인류의 젠더와 인종의 다양성을 완벽하게 대표하지도 수용하지도 못했다.
전 인류를 포용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는 완전히 자유로우며 민주적 그리고/또는 해방적이어야 한다. 해방은 유색인종과 가난한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민주주의보다 급진적이다. 해방은 민주주의의 불충분함(inadequacies)과 배척(exclusion)을 지적한다. 해방은 가부장적 인종차별과 자본주의 종식을 요구하지만, 기존 민주주의는 종종 각 구조적 시스템의 측면을 보호한다.
민주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는 임금노동과 가사노동 등 모든 노동 분업의 인종차별적 그리고 여성 혐오적 구조를 해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백인 우월주의와 그에 밀착한 성적 폭력 구조에 대한 노골적 비판이 필요하다. 그것들과 자본주의의 상호의존은 가장 자주 숨겨지고 가려지는 권력 시스템을 재생산한다. 여성 혐오적 인종차별에 대한 이런 노골적 비판은 이것이 잘 보이고 문제화되도록 한다.
이처럼 사회주의는 급진적으로 민주적이고 해방적으로 될 잠재력이 있다. 위 노골적 비판은 복합적 초국가적 가부장적 가족 구조를 창조한, 지구 전반에 걸친 권력과 이익의 최신 분배 구조를 들여다보도록 한다. 오늘날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유색인종 여성이다. 이들은 가장 최근의 이민자들과 난민들로서, 부자의 가사노동을 하면서 겪는 성적 폭력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직장과 가사 노동 모두에 내재한 성적 폭력은 전체 권력을 하나로 연결한다. 해방적 민주주의는 성적 폭력, 성희롱 그리고 강간과 함께할 수 없다. 이 폭력들은 인종 분리, 인종 폭력 그리고 인종 착취를 통해 서로 연결된다. 성 착취는 고질적이고 구조적이다. 따라서 반인종차별과 페미니즘이 없다면, 어떤 사회주의도 충분히 민주적이라고 할 수 없다. 이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사회주의는 특히 경제적 착취에 초점을 맞춘 덕분에, 권력의 여러 기반과 촉수를 보이지 않게 하였다.
민주주의는 아주 흔히 리버럴 민주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그리고 서구 민주주의와 동일시되지만, 여러 종류가 있다. 이 특정 유아주의(solipsism)는 부르주아와 리버럴 구조의 인종차별적이고 여성 혐오적 속살을 숨긴다. 사회주의는 리버럴과 우익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는데, 이는 사회주의의 배타성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은 사회주의에는 개성이 실종된 평범함과 획일성이라는 지루한 평등만 있다고 비판한다. 이 경우 부르주아의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개성(individuality)과 동일시된다. 해방적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개인주의의 이기심과 탐욕을 용납하지 않는 한편, 사회적 존재의 개성을 육성한다.
1989년의 동유럽 혁명은 민주주의는 서구화되고 리버럴화될 필요가 있다는 혼란만 가중했다. 1989년 혁명에서 민주주의는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구소련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South Bronx(뉴욕시의 대표적 빈민 지역: 역자 주)가 아닌 부유한 서구 모델처럼 되기를 원했다. 사회주의 혁명들은 인구/노동력의 향상이 필요할 때까지 여성의 평등과 육체적 자율성을 허락하지 않았다. 낙태는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에서 너무 오랫동안 불법이 되었다. 1989년 이후, 여성은 평등해졌다. 이것은 여성이 노동력으로 편입되었음을 의미하며, 대부분 여성은 임금 노동, 가사 노동 그리고 소비자 노동이라는 삼중 노동을 수행해야 했다. 이 무보수 형태의 억압은 새로운 사회주의 착취 시스템을 뒷받침했다.

소련이 붕괴한 후, 나는 “사회주의”라는 용어가 도움이 되기보다는 문제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구) 민주주의의 약속은 자본주의의 불평등과 함께 더욱 훼손되었다. 이 기간 - 1990년대 - 나는 자본 축적에 대한 비판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는 데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여 나를 사회주의라고 칭하는 것을 멈췄다. 민권과 여성 운동에도, 완전한 평등을 실현한 적이 없는 미국에서 민주주의는 작동하지 않았다. 필리핀, 베네수엘라, 인도, 터키, 폴란드, 미국에서는 독재자와 폭군(despots)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국민을 위한 민주주의는 작동하지 않고 있다.
미국과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우파가 득세하는 현재, 민주사회주의 혹은 사회민주주의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은 흥미롭다. 왜 우리는 2019년에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에 대해 궁금해하는가? 지금 사회주의는 새로운 정당성을 가지게 되었다. 몇몇 미국 대통령 후보들이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묘사하거나, 정강에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종 사회주의로 묘사되었던 “Medicare for All”과 같은 프로그램에 이제 폭넓은 지지가 있다. 그리고 물론 트럼프는 미국은 결코 사회주의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틈만 나면 얘기하지만, 이는 오히려 그가 하는 모든 짓을 싫어하는 많은 유권자로 하여금 사회주의에 관심을 두게 만들고 있다.
2020년 대선 상황과 트럼프가 반민주적, 권위주의적, 인종차별적 그리고 여성 혐오적 인간으로 정의되는 것을 고려할 때, 하나의 아이디어로서 사회주의는 새로운 효능을 갖는다. 사회주의는 더 친절하고 공정해 보인다. 트럼프보다 민주주의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사회주의가 민주주의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회주의와 함께 민주주의를 급진화할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한다.
충분히 급진적인 민주주의 혹은 사회주의 개념이 현재 존재한다고 나는 믿고 있지 않지만, 현존하는 부분적으로 정치화된 파편들이 급진화된 민주사회주의로 향한 길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르주아 리버럴 민주주의는 충분할 만큼 사회주의적인 적이 없었지만, 유색인종, 젠더 그리고 성적 정체성에 대한 포용성(inclusivity)을 향한 새로운 투쟁을 촉진한다.
한때 나는 리버럴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계급, 인종, 젠더의 구조적 제약을 초월해서 그 자체 약속으로 스스로 급진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리버럴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가져올 수 있다고 더는 생각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는 민권과 여성 운동의 가장 민주적이고 평등한 요구에 대한 대응이었다. 신보수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가 너무 민주적이어서 통치가 불가능할 정도라고 주장했다. 미국에서 국민을 위한 민주주의는 1970년대 중반부터 혹독한 공격을 받아왔다.

그러나 부자들은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들과 중산층은 더 고통을 받게 되면서, 이런 추세는 바뀔지 모른다. 새롭게 드러난 백인우월주의자들의 과도한 경제적 탐욕은 해방적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위한 토대가 될 수 있다. 이익 추구, 인종차별 그리고 젠더 위계질서의 폐지를 요구하는 사회주의의 해방적 모델은 어쩌면 이미 진행 중이며 육성을 필요로 할지 모른다. 해방적 사회주의는 특히 유색인종 여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유권자들로부터 등장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치적 정체성과 구조는 정적이고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산양식은 이전까지의 국경 혹은 공적 사적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새로운 글로벌 배치 그리고 사이버 기술과 함께 계속 변하고 있다. 따라서 생산/착취 양식에 대한 통제는 경제적 계급을 중심으로 권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요구한다. 권력이 여전히 잘 작동하도록 하는 새로운 신비화와 보호층이 대두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이윤 동기보다는 인간의 필요에 기초한 경제 시스템이다. 이윤은 생산의 인도적 성격(humanity)을 부인하고 끝없이 노동력 착취 방법을 개발한다. 사회주의는 어떤 형태 - 경제, 젠더, 인종 등 - 이든지 간에 노동력을 훔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노동 분업의 위계성은 해체되어 보상적 모델로 정비되어야 한다. 페미니스트 슬로건, “동등한 급여(equal pay)”는 이제 충분하지 않다.
민주주의는 리버럴에서 네오리버럴(신자유주의)로 그리고 파시스트로 바뀌었다. 이 변종 중 어느 것도 사회주의를 지원해 주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위한 그간 싸움의 잔해를 해방적 사회주의의 출발점으로 이용한다면, 다음과 같은 것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부유층 세금 부과; 기후 보호;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주택 제공; 무상 헬스케어와 돌봄 서비스 제공; 건강한 환경 조성; 보장된 소득 제공; 착취적 이윤 추구 노동과 소비주의 종식 등. 이런 프로그램들은 노동 그리고 노동과 지식, 로봇 그리고 인공지능과의 관계 그리고 더 나아가 일상적 노동의 조직과 인간 일자리를 뺏지 않으면서 필요 물품의 생산을 위한 계획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것이 더 민주적일까? 그렇다. 이것이 사회주의적일까? 이것은 사회주의로 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나는 우리의 실천을 안내해 줄 이론이 필요하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의 실천은 또 우리의 이론을 안내해 주어야 한다.
“사회주의는 존재한다"라는 선언을 확인해 줄 확립된 체크리스트는 없다. 생산 시스템이 때때로 인식 가능한 “양식(modes)”을 갖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생산양식을 통제할 수 있을까? 권력, 착취 그리고 억압의 새로운 구조는 사회주의, 반인종차별 그리고 페미니즘에게 새로운 상상력을 요구한다. 복지국가의 의미, 개혁과 혁명 간 논쟁, 사회주의의 민주화를 강조한 그린 뉴딜과 같은 명확한 요구의 차단에 대한 오래 투쟁의 역사를 생각할 때, 나는 민주적 투쟁을 급진화하기 위한 길고 어려운 과정을 예상한다.

나는 정치적 정체성의 탄력성을 수용하고 싶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개념이 구체화될수록 그것들의 의미는 더 포괄적이고 더 보편적으로 된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반인종차별주의, 페미니스트 그리고 반자본주의가 되어야 한다.
나는 지금이 평등주의와 급진적 민주주의를 향해 사회주의를 급진화할 수 있는 드물고 특별한 순간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계속한다. 왜냐하면, 세계의 대부분이 끔찍한 수준의 배고픔, 절박함 그리고 기후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인종적으로 다양하다. 엄청난 수의 유색 인종 여성들은 노동력에서 초 착취 당하는 한편, 그들의 일상적 가사노동과 소비자 노동은 무보수로 완전히 도둑맞고 있다. 이 억압적 착취는 인종차별적이고 여성 혐오적 구조를 손보기 전에는 고칠 수 없다.

놀랍지 않게, 흑인 여성을 중심으로 유색인종 여성은 오늘날 가장 잘 봉기할 수 있는 급진적 유권자들이다. 2018년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할 뻔했던 스테이시 에이브람즈(Stacey Abrams)(아프리칸 미국인: 역자 주)는 현재 유권자 억압 문제를 다루기 위해 그녀의 모든 정치력과 관심을 쏟고 있다. 다른 유색인종 여성들, 특히 최근에 선출된 민주당 아이아나 프레슬리(Ayanna Pressley)(아프리칸 미국인: 역자 주), 러시다 털리브(Rashida Tlaib)(팔레스타인 난민 출신 가족 배경: 역자 주), 일한 오마르(Ilhan Omar)(소말리아 출생 무슬림: 역자 주),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Alexandria Ocasio-Cortez)(푸에르토리코 이민자 가족 배경 히스패닉: 역자 주)는 오늘날 각자마다 다른 의미를 가질지 모를 사회주의를 수용하면서, 급진적 선거 혁명을 주도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 유색인종 여성들을 “스쿼드”(the Squad)라고 부르며, 미국에서 태어난 이 선출직 공무원에게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라며 조롱했다.

이 네 명의 유색인종 여성은 신자유주의 민주당에 심각한 문제를 안겼다. 이들은 그린 뉴딜, 친 팔레스타인 정치 그리고 소득 보장 등 평등주의에 입각한 진보적 사회주의를 지지한다. 이 여성들은 민주사회주의와 사회주의적 민주당원의 진보적 운동을 대표하며 이들의 지지를 받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회주의가 선거 정치를 통해 통상적 리버럴 혹은 복지국가 개념을 뛰어넘어 급진화하는 것이 이제 가능할지 모른다. “Squad”가 신자유주의에 맞서 트럼프를 물리칠 수 있는 급진적 선거 정치를 구축하여, 혁명적 반인종차별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향해 초법적/개혁 운동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Medicare for All” 개념이 2020년 선거 주기에 자리를 잡은 것은 드문 일이며,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활동가들은 사회주의 그리고 사적 이윤과 그 과잉을 억제하는 것이 왜 필요한지를 명확히 하기 위해, 사회화된 의료에 대한 공격을 역으로 반드시 이용해야 한다. 우익 공화당원들은 대부분 그렇다고 할 수 없는 민주당원을 사회주의자라고 몰아붙인다. 그러나 사회화된 의료를 food and shelter for all(모두를 위한 음식과 거처)까지 포함하는 급진적 정치의 시작점으로 삼는 것은 어떤가? 동시에, 이 불가능의 정치를 이용하여 불가능할 정도로 급진화된 개념인 폐지론자 사회주의 페미니즘(abolitionist socialist feminism)을 요구하자.
“Health care for all”은 우리 몸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으로 급진적 요구다; 그리고 몸은 항상 진실을 말해주는 곳이다. 여기에서 시작해서 백인 우월주의도 없고 여성 혐오주의도 없는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하자. 질병은 모두에게 예외가 없다는 면에서 이보다 더 민주적일 수 없다.
지구를 오염시키는 악랄한 우파가 지배하는 시대인 지금, 나는 급진적인 해방적 사회주의를 단호히 지지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혁명이 어떤 모습일지는 아직 모른다는 것을 인정한다. 따라서 나는 민주적 반인종차별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복합체가 과연 어떤 모습일지 보기 위해 가능한 많은 사랑과 진실성 그리고 상상력을 받아들인다. 어쩌면 다음번에 우리는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투쟁은 항상 기존 조건에 의해 정의되고 제한되지만, 이 제약들에 갇힐 필요는 없다. 지금 이 순간 급진적 리버럴들과 선거 급진주의자들을 급진적 사회주의자들로 만들어보자. 이 변화와 격변 속에서 급진적 민주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젊은 유색인종 여성이라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급진적 민주적 사회주의와 급진적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약속은 유색인종 여성의 해방적 실천과 요구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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