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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포퓰리즘 유혹에 시달릴 민주사회주의 - 민주사회주의 이해하기 (28)

김 무인 2021. 12. 5.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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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말

 

한국은 코로나로 어수선한 가운데에서도 다시 대선 정국에 접어들었다. 대통령 선거는 장충체육관에서 나와 관계없이 행해지는 것인 줄 알았던 7, 80년대를 보냈던 사람으로서, 5년마다 찾아오는 직접 선거가 한국에 있다는 것에 여전히 감사하며 소중히 여기고 싶은 마음이 남아있다. 그럼에도 매번 한국 대선을 멀리서나마 지켜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가령, 진보 진영 후보를 보면 애초 급진적였던 정책을 유화시키거나 심지어 가리는 것처럼 보이는 행태를 보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반대 수구 진영에서는 이를 집요하게 물어뜯고.

 

리버럴 민주주의의 선거 공학 더 나아가 현대 유권자의 속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나로서는 더 깊이 파고 들어가 능력이 부족하지만, 유권자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소위 ‘중도층’을 끌어들이기 위한 전술적 조치로 이해된다. 매운맛으로 핵심 지지층도 붙잡아 둬야 하지만 적당히 편안한 맛으로 이들 유권자층도 붙잡아야 하므로, ‘단짠단짠’ 혹은 ‘짬짜면’ 부류의 메뉴를 내놓을 수밖에 없지 않나 추정해 본다. 아무튼 선거 때가 되면 한국을 포함해서 대의 선거제도를 도입한 국가의 모든 정당은 좌파 우파 가릴 것 없이 모두 포퓰리즘 정당 모드로 접어드는 듯하다.

 

아이돌들도 시청자 투표를 통해 인기순으로 뽑는 시대에 유권자에게 인기 있는 정치인이 뽑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문제(?)는 노래를 잘하는 아이가 인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청자가 좋아할 짓을 하는 아이가 인기가 있다는 것이다. 정치인들도 자신의 신념이 무엇이든지 간에 선거 기간 인기가 없으면 신념을 펼칠 기회가 아예 오지 않는 현실에서, 일단 몇 개월의 선거 기간 인기몰이에 집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아래 에세이는 포퓰리즘과 사회주의 계열 혹은 진보 정당과의 관계를 시의적절하게 요약해 주었다. 현 리버럴 대의 선거제도 아래서 좌파 진영의 가장 이상적 시나리오는, ‘인기 있는 좌파’가 되어 선거 승리라는 임도 보고 집권 이후 급진적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뽕도 따는 것일 것이다. 이처럼 선거 승리를 위해서라면 포퓰리스트가 되고 싶은 유혹은 우파뿐만 아니라 좌파에게도 항상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해 저자는 그 유혹의 달콤함은 알겠지만, ‘뭣이 중헌디?’를 정색하며 반문한다. 흉하다고 꼽추에게 혹을 떼어내면 꼽추가 죽듯이,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노동자 자본가 타령여?’라는 유세 기간 중 만난 소위 중도층 대중의 일갈에 민주사회주의의 계급적 정체성을 두리뭉실하게 바꿀 경우 초래될 본말전도를 경고한다.     

 

저자 그레고리 스물레비츠-주커(Gregory R. Smulewicz-Zucker)는 이 책의 첫 번째 에세이 ‘민주사회주의의 세 영역 (The Three Spheres of Democratic Socialism)’의 저자인 마이클 제이 톰슨(Michael J. Thompson)과 함께 이 책을 공동 편집했다. 마이클 제이 톰슨은 초대 편집장으로서 그리고 스물레비트-주커는 현 편집장으로 학술 저널 ‘Logos: A Journal of Modern Society and Culture’를 발간하고 있다.

 


 

포퓰리즘에 반대하는 민주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 contra Populism)

 

그레고리 스물레비츠-주커 (Gregory R. Smulewicz-Zucker)

 

 

 

버니 샌더스 상원 의원의 대통령 후보 지명 운동과 제러미 코빈(Jeremy Corbyn) 영국 노동당 당수의 흥망성쇠는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부활(영국 노동당이 2019년 선거에 참패했음에도 불구하고)의 이 두 신호는 극우 포퓰리즘의 전 세계적 부활의 그늘에 가려졌다. 실제, 2016년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승리했고 브렉시트는 코빈 승리 1년 뒤에 발생했다. 이 두 사건은 샌더스와 코빈이 단지 전 세계 포퓰리즘 경향의 좌파적 표출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촉발했다.

 

제러미 코빈( Jeremy Corbyn)(1949~present)

샌더스나 코빈이 포퓰리스트라는 생각에는 심각한 의구심을 갖고 있음에도, 이 에세이는 이 두 사람에 대한 옹호나 그들의 특정 이데올로기 성향을 소개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샌더스나 코빈이 포퓰리스트라는 주장은 왜 민주사회주의가 포퓰리즘과 동의어가 아니고 또 되어서도 안 되는지 명확히 해야 할 때임을 강조하고 싶다. 나는 두 가지를 주장하고 싶다. 첫째, 원칙적으로, 민주사회주의의 이상은 포퓰리즘과 일치하지 않는 일련의 약속을 수반한다. 둘째, 현실적으로, 민주사회주의를 포퓰리스트 프로그램과 연결하려는 어떤 노력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민주사회주의 전통에 포퓰리즘 옷을 입히려는 시도들은 사회주의 전통이 제공해야 하는 최고의 덕목을 없애는 것이다.

 

 

I.

 

포퓰리즘에 대한 정의는 무궁무진하다. 이 에세이를 위해 나는 충분조건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필수 조건인 포퓰리즘의 네 속성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첫째, 포퓰리즘은 사람들에게 일정 매력을 어필하고 진정한 민심을 안다고 주장한다. 둘째, 포퓰리스트들은 이 민심을 엘리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의지와 대비시킨다. 셋째, 실제로는, 포퓰리즘은 민심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존한다. 마지막으로, 실천 측면에서, 포퓰리즘 정치 영역은 변함없이 민족주의적이다. 이것은 포퓰리즘 정치인들이 외국 우방을 찾아 나서지 않는다거나, 한 나라의 포퓰리즘 성향이 다른 나라로 확산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럼에도, 포퓰리즘 정치의 중심은 민족국가의 지리적 경계이며 포퓰리즘 정치인들의 성공은 다른 나라들의 필요에 굴복함으로 야기된 병폐를 고치겠다는 약속에 달려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속성은 상대적으로 논란이 없으며 좌파와 우파의 포퓰리즘 수사 모두에 등장한다. 좌파 포퓰리즘의 미덕을 옹호하는 이론가들은 분명 후자의 두 속성을 문제 삼을 것이다. 그들은 이 속성들이 우파 포퓰리즘에만 해당하는 특징이고 좌파 포퓰리즘의 특징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주로 남미에서 존재했던 좌파 포퓰리즘 정권들은 사실 민심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후자 속성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들 정치의 범주를 민족주의 영역으로 한정시켰다.

 

이론과 실천 모든 면에서 포퓰리즘에서의  대중(the people)과 민심(the people’s will)의 정의는 모호할 수밖에 없다. 포퓰리스트들은 민심의 정의를 위해 이에 반하는 외부 집단을 끌어들일 수 있지만, 대중을 정의하는 도구는 오로지 대중으로서 그들의 진정성(authenticity) 뿐이다. 포퓰리스트들은 무엇이 대중을 구성하는가에 대한 정의를 탄력적으로 유지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특정 인종 혹은 에스닉 그룹을 비난할 수 있지만, 여전히 그 그룹에 속한 구성원을 자기 캠프 멤버로 환영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엘리트나 외부 그룹을 비난할지라도, 그 그룹 일부 멤버는 여전히 그들 계급에 포함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포퓰리즘은 파시즘처럼 경직된 이념이 아니다. 따라서, 포퓰리스트들은 한 그룹을 적으로 겨냥하면서도 다원주의적 외양을 채택할 수 있다. 포퓰리즘이 폭넓게 인기를 얻는 이유는 바로 이처럼 특정 외부 집단을 비난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자신에 대해 정의를 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야로스와프 카친스키(Jarosław Kaczyński)(1949~present)

포퓰리스트들이 자신들을 정의할 때 비교하는 대상은 통상 엘리트란 집단이다. 대중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민심)이 모호한 개념인 것처럼 엘리트 역시 마찬가지다. 대체로 엘리트는 권력과 영향력에 근접한 존재로 특징지어진다. 엘리트는 부와 영향력에 기반을 둔 지위를 가질 수 있으나, 포퓰리스트의 난해한 전문 용어에서 부 혹은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엘리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폴란드의 야로스와프 카친스키(Jarosław Kaczyński),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Viktor Orbán), 영국의 나이젤 패라지(Nigel Farage) 등은 부와 영향력 측면에서 엘리트로 간주되어야 하나, 이들은 오히려 엘리트들을 반대하면서 지지를 얻었다. 포퓰리스트들에게 엘리트라는 것은 더 감정적이고 형언하기 힘든 의미를 가진다. 그들에게 엘리트는 대중의 진심을 모르거나 대신하여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나이젤 패라지(Nigel Farage)(1964~present)

포퓰리스트의 엘리트에 대한 개념을 더욱더 기이하게 만드는 것은 엘리트가 실제 공통된 이해관계가 없어 보이는 그룹과 협력관계를 구축한다는 포퓰리스트들의 상상력이다. 포퓰리스트들이 규칙적으로 타깃으로 삼는 이민자와 난민을 예로 들어보자. 엘리트는 종종 이민자와 난민의 보호자로 묘사된다. 엘리트가 왜 이런 짓을 할까? 엘리트의 이해관계와 이민자 혹은 난민의 이해관계의 접점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기껏해야 엘리트는 대중을 파멸시키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한다는 음습하고, 복잡하며, 음모적 결론으로 귀결된다. 그것이 어떻게 엘리트에게 이익이 되는지는 절대 설명하지 않는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1935~2014)

물론 고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와 샹탈 무페(Chantal Mouffe)와 같은 좌파 포퓰리즘 이론가들은 좌파 포퓰리즘은 본질적으로 다원적이기 때문에 우파 포퓰리즘과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다. 무페가 지적한 것처럼 “우파 포퓰리스트들은 평등에 대한 요구를 다루지 않는 대신, 민족의 정체성과 번성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많은 카테고리, 보통 이민자, 을 배척한 ‘국민(people)’을 건설한다.” 따라서 무페는 다원적으로 정의된 대중(people) 대 엘리트 구도에 초점을 맞춘 포퓰리즘을 선호한다.

 

샹탈 무페(Chantal Mouffe)(1943~present)

무페를 비롯한 좌파 포퓰리즘 옹호자들의 문제는 그들의 정의 역시 우파 포퓰리스트와 마찬가지로 모호하다는 것이다. 어떤 이해관계가 “대중(people)”을 단합시키는가? 그저 단순히 그들이 “엘리트”가 아니라는 사실뿐인 것 같다. 무엇이 누구를 엘리트로 만드는가?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 시도를 하지 않은 채, 정당한 반대를 위한 공간을 남기지 않는 천박한 이원론이 등장한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러시아 혁명 지도자들에게 보낸 유명한 경고가 있다: “정부 지지자들만을 위한 자유, 즉 아무리 많더라도 한 정당의 멤버들만을 위한 자유는 전혀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항상 그리고 전적으로 달리 생각하는 사람을 위한 자유다.” 어떤 그룹을  진정한 국민으로서 우상화하든, 민의(people’s will)에 대한 지나친 단정은 반대 의견에 우려스러운 전망을 형성한다.

 

대중(the people)에 대한 자기 정의 그리고 엘리트에 대한 정의의 모호함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역할을 더욱 중요하게 만든다. 지도자는 누가 대중의 구성원이고 누가 아닌지, 그리고 누가 엘리트 구성원이고 누가 아닌지를 임의로 규정하는 책임을 갖는다. 지도자가 없으면 포퓰리즘은 일관성을 잃는다. 누가 포함되어야 할지, 그리고 누가 운동을 통합시키는지 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지도자다. 포퓰리즘의 내재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의제를 일관성 있게 보이게 하는 것도 변덕스럽더라도 지도자다. 목표를 설정하고 진로를 바꾸는 것처럼 보일 때에 추종자들을 안심시키는 것도 지도자다. 이런 안심시켜주는 행위 없이는 지지층은 분열되고 이어 그들의 정체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정의하려는 시도를 다시 할 것이다. 포퓰리즘 운동의 편협성과 편견은 가라앉거나 미쳐 날뛰거나 할 것이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포퓰리즘을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만든 통합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

 

포퓰리즘의 정치 영역은 필연적으로 국경 안으로 한정된다. 포퓰리스트들은 누가 포함되며 누가 배제될 것인지에 대해 섬세하게 균형을 잡는다. 국가(nation)는 포퓰리스트들이 그리는 구체적이고 자연스러운 경계에 가장 근접해 있다. 다른 한쪽은 다른 나라 국민이거나 관심사가 본질에서 세계적인 국가의 국민으로 구별될 수 있다. 따라서 항상 외부와 내부에 적들이 있다. 외부의 적은 다른 대중의 이익을 증진하려는 한편, 내부의 적은 진짜 대중을 갖고 있지 않다고 비난받을 수 있다. 실제, 내부의 적은 종종 음습한 엘리트 멤버다.

 

포퓰리즘의 이런 속성들은 포퓰리즘에 대한 완벽한 정의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포퓰리즘이 강력한 정치 세력이 되는데 필요한 구성 요소들을 보여준다. 대중에 대한 정의가 얼마나 다양하든지 간에 - 현대 포퓰리즘은 그 지지층이 더 다원적 사회에서는 더 상호 이질적이고 덜 다원적 사회에서는 더 동일적인 적응력을 보여준다 - 포퓰리즘 정치인들이 대중의 의지(민의)라는 개념은 포퓰리즘에 정치적 토대를 제공한다.

 

엘리트라는 개념은 포퓰리스트들에게 민의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내부의 적을 제공한다. 지도부는 대중 속에서 누가 중요한지 그리고 누가 의제를 선정하는지를 정함으로써 포퓰리즘 운동에 일관성을 부여한다. 마지막으로, 민족주의는 대중과 그들의 적을 구분하는 실용적 도구이다. 민족주의는 대중에 대한 자기 정의가 너무 모호하기 때문에 포퓰리즘 지지자들이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무언가를 제공한다.

 

 

II.

 

민주사회주의는 포퓰리즘에 필수적인 이 네 요소를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민주사회주의와 포퓰리즘은 양립할 수 없다. 포퓰리즘과 달리, 민주사회주의는 다른 대의에 헌신하는 구체적 지지층을 갖고 있다. 이 지지층의 이익은 다른 그룹의 구체적 이익과 대비되며 구체적 용어로 정의된다. 이들 지지층은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정체성 혹은 목표에 일관성을 제공하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이 지지층의 이해관계의 본질은 민족주의적이 아닌 국제주의적 정치 비전을 지향한다.

 

성공적 민주사회주의 정치는 두 가지 제약 조건 안에서 작동한다. 민주사회주의는 그 역사적 유산과 이론적 약속(commitments)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물론, 다른 사회주의들이 이 유산과 약속을 포기함으로써 존재했었고 또 존재할 수 있지만, 이 사회주의들은 민주주의를 포기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로버트 달(Robert Dahl)(1915~2014)

사회주의 운동은 19세기 위대한 민주화 운동과 함께 그리고 협력해서 일어났다. 사실, 사회주의는 무엇보다도 민주주의 이론이었다. 리버럴 민주주의가 군주의 전횡적 명령에 굴복해야 하는 상황에서 해방을 목표로 했다면, 자본가의 전횡적 명령에 굴복해야 하는 상황 역시 민주주의 이상에 대한 위반이다. 실제로, 민주주의 이론가 로버트 달(Robert Dahl)도 이 상식에 부응하며 20세기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민주주의가 국가를 통치하는데 정당화된다면 마찬가지로 경제 기업을 통치하는 데에도 정당화되어야 한다; 경제 기업을 통치하는데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국가를 통치하는데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 이론은 사회주의 기원의 핵심적 민주적 통찰이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의 역사적 이론적 중심 추이다. 민주사회주의자들이 리버럴 민주주의자들과 다른 점은 민주적 가치의 이런 논리적 확장에 대한 인정이었다. 

 

민주사회주의는 민주주의의 개념 확장을 추구하지만, 지지층인 사회 내 특정 그룹에 초점을 맞춘다: 노동자들. 사회주의 정치는 역사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계급 정치와 연계되어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온전한 경험을 직접 박탈당한 사람은 바로 일하는 사람들, 즉 노동자들이다.  ‘자본론’의 가장 인상적 글귀 중 하나를 맑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자본은 죽은 노동이다. 흡혈귀처럼 살아있는 노동을 빨아먹으며 살아가는 죽은 노동이다. 더 오래 살기 위해 더 많은 살아있는 노동을 빨아먹는다. 노동자가 노동하는 시간은 자본가가 노동자로부터 구매한 노동력을 소비하는 시간이다. 노동자가 그의 여유 시간을 그를 위해 소비한다면 자본가를 강탈하는 것이다.” 맑스에 의해 묘사된 이 노동 시간에 대한 절대적 통제는 아마존 미국 창고와 방글라데시의 노동 착취 공장을 통해 진실처럼 보인다. 고용주 뜻에 끊임없이 복종해야 하는 것은 민주적 생활에 의미 있게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자주성에 대한 공격이다. 계급 지향성과 그것이 민주적 경험에 미치는 영향은 사회주의 정치의 기반이 된다. 사회주의 정치에서 계급을 빼려는 노력은 민주사회주의 정치에서 근간을 흔드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사회주의를 포퓰리즘 정치와 차별화하는 첫 번째 중요한 방식이다. 민주사회주의는 그 지지층에 대해 모호하지 않은 구체적 개념을 갖고 있다. 민주사회주의는 자신의 이해관계가 모호한 사람들로 구성되지 않는다. 민주사회주의는 노동자들의 이익을 직접적 관심사로 삼는다. 왜냐하면 민주사회주의자들은 민주주의의 온전한 약속이 여전히 실현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민주사회주의 정치는 계급 기반 정치다. 민주사회주의 정치는 노동자와 생산 수단을 가진 사람들 간 이해관계의 차이를 강조한다. 이런 면에서 비엘리트와 엘리트의 개념을 포함하는 정치다. 대중과 엘리트의 대조는 포퓰리즘 언어의 일부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포퓰리즘 정치는 누가 대중이고 무엇이 엘리트를 구성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개념을 결여할 수밖에 없다. 민주사회주의는 현존하는 사회적 관계에 기초를 제공하는 대중과 엘리트 간 계급 관계의 이해에 기반을 두며 이 둘을 구별한다. 더 나아가, 모든 이익을 엘리트의 이익에 반하는 대중의 이익으로 돌리는 포퓰리스트들과 달리, 민주사회주의는 이런 종류의 사회 환원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민주사회주의는 다른 이해관계도 존재하며 사람들은 그들의 계급적 지위로 단순히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계급적 지위는 누가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누가 그 착취에서 혜택을 얻는지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사실을 민주사회주의는 정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 대목에서 두 우려가 떠오를 수 있다. 첫째는 민주사회주의 정치의 계급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민주사회주의가 가난한 사람들에 의한 부자의 지배를 추구하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해다. 민주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뛰어넘어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고 항상 강조해왔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필요하지도 않은 상품을 생산하면서 모든 사람을 소비자로 만든다. 자본주의는 우리를 비판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문화적 상품보다 가장 쉽게 팔릴 수 있는 상품을 우선시함으로써 우리의 문화와 미적 경험을 죽인다. 자본주의는 모든 인간관계를 경제적 관계로 전락시킨다. 자본주의는 우리의 시간부터 우리의 건강까지 모든 것을 상품화한다. 따라서 민주사회주의의 핵심 지지층이 노동계급이어야 한다고 해도, 노동자의 조건을 시정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우리 사회 전체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다채로운 방식들을 부각하고 맞서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둘째는 민주사회주의 정치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강조가 다른 억압 형태들을 소홀히 할 수 있다는 것과 관련 있다. 그렇다. 급진적 이론가들이 인종, 젠더 그리고 성적 취향에 대한 문제를 민주사회주의의 내재적 문제로 만들려는 노력함에도 나는 이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계급 억압 이론은 모든 형태의 편협성과 편견을 수용할 수 없다. 한 이론이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게 하려는 노력은 실수다. 그러나 민주사회주의를 뒷받침하는 원칙들이 다른 병폐를 시정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인종적, 성적 억압의 대상 역시 노동자들이라는 해묵은 지적이다. 따라서, 이 그룹들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 그룹들과 연대할 좋은 명분이 있다. 두 번째는 민주사회주의의 민주적 약속이다. 민주적 원칙들을 고수하는 민주사회주의는 이 원칙들의 위반에 맞서기 위해 자신을 확장해야 한다. 그래서 레닌주의에 대한 많은 날카로운 비판을 한  칼 카우츠키는 민주사회주의의 목표는 “계급, 정당, 성 혹은 인종과 관계없이 모든 종류의 착취와 억압의 철폐”라고 단정했다. 그럼에도, 많은 급진적 이론가 혹은 정체성 정치 옹호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주사회주의는 다른 형태의 억압을 바로잡기 위한 다른 정치 운동을 대체할 수 없다. 민주사회주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이들을 아우를 수 있지만, 대체물은 아니다. 물론 민주사회주의자들은 이런 부당함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이런 부당함과 싸움에 필요한 자원이 사회주의적 해결에서만 발견되리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찰스 라이트 밀스(C. Wright Mills)(1916~1962)

민주사회주의에서 계급의 역할을 강조함에 있어, 상반되는 이익들에 대한 관점은 민주사회주의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사회주의 이론에서 엘리트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는 점이 몇몇 사람들에게는 놀라움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미국의 위대한 엘리트 사회학 이론가 찰스 라이트 밀스( C. Wright Mills)는 말년에서야 막시즘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유럽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엘리트 이론가들은 사회주의에 반대했다. 자본가는 경제적 엘리트라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 사회 이론과 지식사에서의 논쟁을 정당하게 피해 갈 수 있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만 중요한 뉘앙스를 놓치게 될 것이다. 

 

자본가는 특정 이해 체계를 갖춘 특정 유형의 엘리트이다. 그들은 싼 노동력을 원하기 때문에 그들의 이익은 노동자의 이익과 반대된다. 세상에는 모든 종류의 엘리트가 있다: 정치 엘리트, 군인 엘리트, 연예인 등등. 그들의 엘리트 지위는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 원칙에 부합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들의 엘리트 지위가 특정 이익 관계에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다면 그들 존재가 민주적 원칙들에 얼마나 폭력적 해악을 가하는지 알 수 없다. 민주사회주의는 노동자의 특정 이해와 자본 소유자의 특정 이해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통해 정치적 프로젝트로서 존재를 유지한다. 이 정확함에 대한 포기는 누구나 엘리트가 될 수 있는 좌/우파 포퓰리즘의 길을 열어줄 수 있고 또 열어주었다. 이럴 경우 민주사회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이론적으로 무용지물이 되면서 정치적 사용도 위험에 빠진다.

 

엘리트 문제는 민주사회주의가 포퓰리즘과 차별화되는 제3의 길을 열어준다. 민주사회주의는 대중의 의지(민의)에 특별한 접근을 하는 엘리트 정치적 리더십 개념을 반대한다. 많은 사회주의 사상가들은 계급적 이해관계의 본질과 계급적 이해관계가 모든 개인 혹은 사회적 행위와 행동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고심해왔다.  그럼에도 그들은 지도자를 지명해 민의를 구성하려는 포퓰리즘 해결 방안을 따라가길 거부하고, 사회적 지위와 이해관계의 복잡성을 이해하려는 고된 작업에 매달린다. 포퓰리즘 지도자는 중세 군주 혹은 기업 CEO와 결국 크게 다르지 않은 주장을 한다. 그들은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의 궁극적 이익을 알고 있다. 그들은 오류가 없다. 언론의 자유를 억누르는 포퓰리스트이든 노조 결성을 방해하는 CEO든, 그들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것이 대중을 진정으로 위한 것이라는 명목하에 그렇게 움직인다. 민주사회주의자들은 그처럼 의사결정권을 자칭 전지전능한 권위에 넘기는 것은 민주주의에 위배된다고 주장한다. 

 

아마 이 포퓰리즘 개념에 상응하는 좌파의 가장 악명 높은 것은 전위당에 대한 레닌주의 개념일 것이다. 레닌주의는 노동계급은 결코 자신의 이익을 스스로 실현할 수 없다는 주장에 기초하고 있다. 레닌주의는 노동계급의 진정한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엘리트 당 지도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레닌은 민주사회주의 운동의 주류를 거부했다. 이런 점에서 과거 도널드 트럼프의 고문이자 세계적 우파 포퓰리즘 선동가인 스티브 배넌(Steve Bannon)이 레닌주의자로 자처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지 않다.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평가에서, 19세기 위대한 영국 리버럴 존 스튜어트 밀은 노동자들이 사회 전반의 공익을 반영하는 정치적 결정에 직접적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는 주목했다: “고위층의 언어를 빌리자면 노동자들은 국가에 아무런 지분이 없다고 한다. 실제로는 당연히 그들은 가장 큰 지분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일용 양식은 국가의 번영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힘이 도달하는, 또는 앞으로 도달할 수 있는 한 재산법은 정부를 통제하는 사람들의 개인적 성격이 아닌 공적 본질 그리고 일반 복지를 고려해야 한다.”

 

(1806~1873)

밀의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는 조심스러웠지만, 사회주의자들이 제기한 이슈들의 중요성과 정치적 행동에 있어 노동자들 역할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그리고”, 그는 덧붙인다: “그들이 그렇게 할 때 그것은 법률 및 헌법의 이용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속한 무질서하고 비효율적 방식이 아닐 것이며, 단순한 평준화에 대한 본능적 충동도 아닐 것이다. 그들이 사용할 도구들은 언론, 공개회의, 협회 그리고 노동계급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가능한 많은 사람의 의회 진출이 될 것이다.” 밀이 밝힌 노동자들의 도구들은 민주사회주의자들도 인정할 만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포퓰리스트이든 레닌주의자든 전지전능한 지도부의 권위에 대항하는 민주적 도구이자 실천들이다. 

 

마지막으로, 민주사회주의는 포퓰리즘이 수용한 민족주의를 반대한다. 계급 간 구분을 출발점으로 하는 민주사회주의는 민족주의를 배척해야만 한다. 맑스와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관찰했다: ”자신의 생산품을 위해 끝없이 팽창하는 시장의 필요성은 전 세계 부르주아를 쫓아다닌다. 이 필요성은 모든 곳에 둥지를 틀고, 모든 곳에 정착하며 모든 곳에 연계를 구축한다.”

 

경쟁을 위해 자본은 글로벌 권력이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 비판에 근거한 민주사회주의도 마찬가지로 세계적 시야를 가져야 한다. 개발도상국의 싼 노동력을 찾아가기 위해 선진국이 자국 내 주요 산업 시설을 포기하는 현 제조업 추세에서 이 자본의 세계화는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 금융산업의 세계적 규모 때문에, 전 세계 사람들은 국제적 기업들이 구매한 부채로 고통을 받았다. 기업과 CEO들은 외국 조세회피처 혜택을 누릴 수 있어서 그들의 실제 소재지에서의 세금 납부 책임을 피해 가고 있다.

 

포퓰리스트들에게 이와 같은 기업들의 부정직한 법망 회피에 대한 해결책은 공격적인 민족주의 수사들이지만, 기업들이 그들의 종업원들에게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한다면 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해소하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 포퓰리스트들이 내세우는 이런 유의 경제적 민족주의는 기업들이 더 싼 노동을 찾기 위해 실업자를 방치하고, 동시에 임금이 낮아진 노동자들은 싼 노동으로 가능해진 저물가에 갈수록 의존하게 된다는 사실을 대처할 수 없다. 

 

 

이런 자본주의의 경향에 맞서, 민주사회주의는 수사학에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자본주의가 하는 것처럼 전 세계적 차원으로 이에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대응은 민주사회주의 정치의 가장 까다로운 요소를 필요로 한다: 국제주의 윤리(cosmopolitan ethic). 개별 국가는 자본주의 세계화 본능의 부정적 여파를 처벌하고 제약하기 위해 많은 것을 할 수 있지만, 민주사회주의자들은 국제공조를 통해 해결책을 모색해왔다. 이 실용적 국제주의는 국제 노동운동의 노력과 전 세계 노동자 정당 간 대화와 연대를 촉진했던 조직들에 영향을 미쳤다. 전 세계 노동자 간 이익의 연대를 인식하는 것은 더욱 견고한 윤리적 관점을 수반한다. 개인은 그들의 국경을 뛰어넘는 이익 공동체 일부로 자신을 인식한다.

 

민주사회주의는 리버럴리즘이나 보수주의처럼 진흙탕이라는 현실에서 이리저리 변형되기도 하는 원칙적 정치적 입장이다. 그럼에도 원칙에 입각한 정치라는 것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변형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민주사회주의가 포퓰리즘이 된다면 더는 민주적이지 않게 된다. 계급 기반 그리고 그에 따른 자본가 이해관계에 대한 이해를 잃어버린다. 그것은 추상적이 될 것이고 전지적 리더십의 등장을 용인할 것이다. 그것은 국제주의적 세계관 그리고 이 세계관이 이끄는 정치적 윤리적 약속들을 잃게 된다. 계급에 기반을 둔 정치는 천박하게 계급으로 전락한 정치가 아니다. 계급 착취를 인식하는 것은 다른 형태의 착취에 대한 원칙적 반대에도 영감을 제공할 수 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 생활이 어떻게 개인을 퇴화시키는가에 대한 인식은 자본주의가 우리 사회, 문화, 그리고 자연의 퇴화를 이끄는 방식에 대해 더 폭넓은 이해를 제공해 준다. 자본주의가 우리가 공유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바꾸려고 함에 따라, 민주사회주의는 계급 이익 정치 그 이상의 것이 된다. 민주사회주의는 공익(the public good) 개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정치로 확장된다.

 

역사를 통틀어, 민주사회주의를 지탱하는 원칙들은 수많은 딜레마에 부딪혀 왔다. 노동의 본질이 변했다. 새로운 기술과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사람들이 사회화하고 교류하는 방식을 바꾸었다. 자본주의는 지속해서 혁신하고 있으며 이는 민주사회주의 이론과 실천이 이에 뒤처지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파시즘과 포퓰리즘의 등장과 같은 예상치 못한 정치 현상이 민주사회주의 운동의 정치적 기대를 좌절시켰다. 사람들은 다른 형태의 사회적 억압을 지적해 왔다. 이런 면에서, 과거 이론에 교조적으로 집착하거나 과거 운동에 대한 향수에 젖는 것은 실수다. 효과적인 민주사회주의 정치는 끊임없이 변하는 사회의 본질 그리고 19세기 사회주의 운동에 맑스가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기여했던 부분인 운동에 대한 가차없는 자기비판을 수용해야 한다.

 

근본적 가정에 대한 지속적 재평가는 사회주의 이론의 가장 좋은 전통 중 하나이다. 현실을 이론에 맞추려는 시도는 사회주의에서 최악의 결과로 이어졌다. 실제로는 매우 혼란스러운 세계로부터 분리된 이런 공상적 시도들은 사회주의로 하여금 포퓰리즘을 받아들이게끔 하였다. 실제로 나는 이 에세이에서 사회주의가 포퓰리즘의 위험에서 안전하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주의자들이 물려받은 유산 중 가장 의미 있는 민주적 계급 정치를 확고히 유지할 이유를 더 제공해 준다.

 

산업화된 세계에 급진 정치의 기반을 제공했던 노동운동의 쇠퇴로, 급진 이론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약속만 하는 이론이라는 편안한 영역으로 후퇴했다. 비록 민주사회주의 사상이 새롭게 재조명 받고 있지만, 이론적 혼란은 좌파의 지적 부담으로 남아있다. 정치적으로 강력한 포퓰리즘의 등장을 목격하면서 좌파 일부는 대중에 대한 유사한 로맨틱 개념을 가지고 자체 포퓰리즘을 수용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맑스는 냉철한 분석으로 당시 유토피안들과 맞섰다. 우리 시대 역시 좌파 우파 모두 유토피안들을 갖고 있다. 분명 많은 사람이 완고한 편협성과 환상 덕분에 포퓰리즘에 관심을 두지만, 증가하는 경제적 불평등, 긴 노동시간 그리고 직업 불안정은 다른 많은 사람이 이런 문제들에 관심을 두게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민주사회주의 원칙들은 제공할 것이 많다. 그러나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포퓰리즘의 맹공에 대해 원칙으로 맞서지 않는 민주사회주의는 결코 민주사회주의가 아니다.

 

미국 의회의 신세대 의원들이 증세, 최저임금 인상 혹은 고용 보장과 같은 온건한 법률을 제안했다는 이유로 사회주의자로 매도당하는 오늘날, 그들의 제안들이 민주주의 유산과 부합한다는 것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1785년에 위대한 민주주의 이론가는 경제적 불평등의 위험에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이 우려는 민주사회주의자들에게 반향을 일으키고 그 반대자들에게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는 “재산의 불평등을 조용히 줄이는 방법은 일정 수준 이하 소득자에게 과세를 면제하고,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는 부분만큼 높은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경작되지 않은 땅과 가난한 실업자가 있을 때마다 재산법이 자연권을 침해할 정도로 확장됐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구는 사람들이 일하고 살 수 있도록 주어진 공통 재산이다.” 민주사회주의자들은 구축할 실용적 제안의 견고한 토대를 갖고 있다.

 


 
 

역자 후기

 

에세이의 주 주제가 민주사회주의와 포퓰리즘의 관계였지만 서술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를 가진 주제/소재들도 언급되어 해당 대목을 인용하여 짧은 감상을 적는다.

 

“그들(포퓰리스트)에게 엘리트는 대중의 진심을 모르거나 대신하여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포퓰리스트들은 기존 정치인들이 대중과 격리되어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고 있다고 선동하며 자신을 대중 밀착형 정치인으로 포장하나, 결국 그들도 자신만이 대중이 원하는 것을 안다는 독선적 엘리트가 그 본질이다.

 

이들(민주사회주의) 지지층은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정체성 혹은 목표에 일관성을 제공하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포퓰리즘의 정체성은 그 지지 기반과 지지 정책의 모호성 혹은 모순성으로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정체성 전부일 수 있다.

 

“민주주의가 국가를 통치하는데 정당화된다면 마찬가지로 경제 기업을 통치하는 데에도 정당화되어야 한다; 경제 기업을 통치하는데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국가를 통치하는데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 영역에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하는 근거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자본이라는 큰 지분을 가졌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정치 민주주의에서 1인 1표는 어떤 근거를 가지는가?  많은 지식과 높은 식견을 가진 이가 무지렁이처럼 보이는 이와 같은 1표를 가지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세뇌된 것 중 하나는, 평등은 정치에서만 가능한 것이고 경제에서는 차별적 위계성이 당연하다는 인식이다. 즉, ‘정치는 민주주의 그리고 경제는 자본주의’라는 인식이다. 이 프레임을 깨트리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민주사회주의는 다른 이해관계도 존재하며 사람들은 그들의 계급적 지위로 단순히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계급적 지위는 누가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누가 그 착취에서 혜택을 얻는지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사실을 민주사회주의는 정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 노동자의 조건을 시정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우리 사회 전체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다채로운 방식들을 부각하고 맞서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 민주사회주의는 다른 형태의 억압을 바로잡기 위한 다른 정치 운동을 대체할 수 없다. 민주사회주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이들을 아우를 수 있지만, 대체물은 아니다.”

 

“... 효과적인 민주사회주의 정치는 끊임없이 변하는 사회의 본질 그리고 19세기 사회주의 운동에 맑스가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아주 중요하게 기여했던 부분인 운동에 대한 가차없는 자기비판을 수용해야 한다.”

 

“.... 근본적 가정에 대한 지속적 재평가는 사회주의 이론의 가장 좋은 전통 중 하나이다.”

 

현대 사회의 복잡성을 인정한다 하더라고 생산수단 소유자와 노동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노동자와의 관계는 아직도 본질적 사회관계로 남아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양한 정체성이 등장하고 이에 따른 여러 형태의 억압이 존재하지만, 이들을 이해함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것은 계급 관계에 대한 이해다. 한편, 계급 환원주의처럼 계급 책임론 혹은 계급 만병통치론으로 현 사회에 접근하는 것은 몸을 옷에 맞추는 꼴이다. 민주사회주의는 변하지 않는 형이상학이 아니라, 밑 두 문장처럼 사회 본질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사회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지속해서 비판적 통찰할 것을 권장하는 기능이 있다. 

 

“계급에 기반을 둔 정치는 천박하게 계급으로 전락한 정치가 아니다.”

 

“민주사회주의는 계급 이익 정치 그 이상의 것이 된다. 민주사회주의는 공익(the public good) 개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정치로 확장된다.”

 

빨갱이 콤플렉스의 잔재- 특히 6.25를 겪은 한국민은 - 가 여전히 남아있는 상황에서, 사회주의자(비록 앞에 ‘민주’자가 붙었다 하더라도)가 정권을 장악하면 빨간 완장을 찬 이들이 지주와 자본가를 끌어내어 광장 한복판에 무릎을 꿇리는 모습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지 모르겠다. 하지만 민주사회주의자들의 목적은 ‘너 당해봐라 식’의 자본가 혹은 지배계급에 대한 복수식 탄압이 아니다. 부르주아를 포함한 만인의 해방이다. 프롤레타리아만 소외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역시 소외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나 자본가나 모두 돈의 노예다. 이 노예 상황에서 벗어나야 우리 모두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을 위한 투쟁의 주역은 다만 어쩔 수 없이 이 노예 상태로부터 가장 큰 피해와 소외를 겪는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