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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민주사회주의 관점에서 본 서구 사회주의 운동 간략사 - 민주사회주의 이야기 (3)

김 무인 2022. 1. 3.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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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사회주의 사상사와 운동사를 제대로 섭렵하지도 못한 주제에, 그 역사를 간략한다는 제목으로 글 쓴다는 것이 겁이 난다. 그럼에도, 민주사회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 역사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어떤 흐름으로 전개되어왔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윤곽 정도는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책에 서술된 내용을 중심으로 이 장을 시도한다. 시도라고 하지만 책의 각 챕터에 소개된 내용을 짜깁기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일관성 있고 촘촘한 역사 서술과는 거리가 먼 단편적이고 불균형적 글임을 미리 자인한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자들에게 항상 골칫거리였지만, 동시에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기원과 운명은 자본주의의 그것과 항상 함께 해왔다. 즉, 서구에서 자본주의가 태동하던 시기에 사회주의, 최소한 맹아라도, 도 함께 태동했다. 이 태동의 상징적인 역사적 사건은 18세기 말 두 대륙을 가로질러 발생한 두 혁명이었다: 프랑스 대혁명(1789년)과 미국 독립혁명(1776년). 이중 프랑스 대혁명이 사회주의 관점에서는 더욱 의미 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18세기, 급속한 산업혁명 과정을 거친 영국만큼은 아니지만, 프랑스 역시 봉건제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전이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상부구조의 정치체제는 여전히 앙시앵 레짐으로 일컬어지는 왕정과 귀족제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부르주아’와 ‘노동자’를 포함한 시민계급은 봉기했고, 체제를 전복시켰다. 혁명 이후, 혁명 세력 간 정권 쟁탈 과정에서   오늘날 사회주의 운동의 맹아 형태들을 발견할 수 있다. 혁명 세력은 왕정복고파, 부르주아 그리고 급진 공화파(맹아 형태의 사회주의자)로 혼재되어 구성되었다. 공포정치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로베스 피에르가 속한 ‘자코뱅(Jacobin)’파, 그리고 혁명 후 그들의 의회 내 좌석 위치에서 기원한 용어  ‘좌익’(left wing) 용어도 이때 만들어졌다. 일시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좌익의 ‘로베스 피에르’는  부르주아 테르미도르파의 반동으로 단두대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이 혼란을 틈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1세)가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황제가 된다. 그의 제1 제국을 거쳐 프랑스의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시민계급은  1848년 2월, 변화에 대한 그들의 공통된 열망을 다시 폭발적으로 분출한다.

 

1794년, 자신 역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로베스피에로

프랑스 대혁명으로부터 60여 년이 지나 발생한 1848년의 2월 혁명은 그 역사적 의미를 좀 더 선명히 드러냈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처음 제기된 자유와 평등을 전면에 내세운 리버럴리즘의 정착, 영국 산업혁명의 진전에 의한 자본주의 경제의 급속한 발전, 그리고 노동자 계급의 대두로 인한 사회주의 운동의 광범위한 전개가 그것이다. 오늘날까지 서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리버럴리즘, 자본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간 역학관계의 틀이 이때 자리 잡게 된다.

 

1848년 프랑스 혁명. 삼색기와 사회주의 적색기가 함께 보인다.

19세기 초 유럽의 초기 사회주의자들 중 일부는 봉건제 이후의 자본주의 사회가 자유(liberty), 평등(equality), 박애(fraternity), 그리고 민주주의(democracy)를 제도화할 것이라는 믿음 속에 이들을 환영했었다. 자본주의 기업의 계층과 착취 형식의 변화를 이전 봉건제와 다른 목적을 가진 형식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혁명 과정에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이룩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치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기선을 뺏겼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가 봉건주의를 대체하는 것은 현실화되었지만, 자유, 평등, 박애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다. 1848년 2월 혁명과 그 이후의 전개는 이 부르주아 약속의 배신에 대한 노동 계급과 사회주의자들의 저항 역사이다.

1848년 6월 봉기 현장.

사회주의 직업 혁명가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는 1848년 2월 혁명 이후 부르주아 임시정부에 사회주의 정책 도입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 맑스의 공산당 선언이 출판될 정도로, 1789년의 대혁명과 달리 크게 성장한 프랑스 프롤레타리아들은 일자리와 최저임금을 주장하며 그해 6월 봉기한다. 봉기는 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진압되고 만다. 프랑스 프롤레타리아의 저항은 1871년 엥겔스가 프롤레타리아의 독재 전형이라고 극찬한 파리코뮌으로 다시 분출되었고, 다시 최대 2만여 명의 사망자를 발생하며 처참하게 진압되고 만다. 그러나 1848년 2월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부르주아 계급은 대혁명 때와 달리, 성장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지지를 받지도 못했고, 안정을 희구하는 농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한 채, 1789년 대혁명 때처럼 다시 한번 권위주의적 체제에 정권을 넘긴다. 1789년 대혁명 직후 집권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1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이 1848년 혁명 직후 혼란을 틈타 즉위한 것이다.

 

1871년 파리 코뮌에서 나폴레옹 동상이 끌어 내려진다.

1848년 혁명 이후 많은 것이 선명해졌다. 리버럴리즘은 부르주아 신사의 이데올로기이고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운동인 것이다. 더 나아가, 민주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라는 용어가 전국 차원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그러나 새롭게 떠오르던 자본주의 그리고 그 이복형제 리버럴리즘이 제대로 된 호적수를 만난 것은 막시즘이 등장했을 때였다. 19세기 후반, 막시즘의 정통 이론은 좌파 내 자본주의 비판 이론의 대부분을 대체했으며, 막시즘은 사회주의 운동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하였다. 막시즘의 매력 중 하나는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미래의 새롭고 더 나은 시스템의 등장이라는 낙관적 역사적 틀 안에서 행했다는 점이다.

 

막시즘의 자본주의 비판 이론은 여전히 강력하다

오늘날과 달리 이 시기에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라는 용어는 사회주의와 엄격한 구별 없이 사용되었다. 구성원과 지도자들 모두가 “막시스트”도 아니었고 다른 파벌도 존재했지만,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는 당시 막시즘을 대표했고, 노동자들도 압도적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였다. 독일에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대표 기관으로 받아들여지던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SPD)은 1890년 90만 명이었던 당원이 1912년 4백만 명으로 증가했다.

 

독일사민당의 창립자이자 의장(1892~1913)였던 아우쿠스트 베벨(August Bebel)

그러나 19세기 말 사회주의 진영 내부에서는 베른슈타인과 다른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개혁주의로 말미암아, 사회주의 운동 에너지 상당 부분이 이 이슈 논쟁에 소비되었다. 레닌, 룩셈부르크 그리고 트로츠키와 같은 혁명적 막시스트들은 이 개혁주의를 비판했다. 더 나아가, 상대적으로 급진적 반자본주의 사조(혁명적 막시즘)와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개혁주의적 사조(사회민주주의) 간 이데올로기적 투쟁에 더해, 추진해야 할 사회주의 형식을 놓고 국가 중심 막시스트(레닌주의)와 반레닌주의(가령, 로자 룩셈부르크) 간 투쟁이 더해졌다.

 

사회민주주의의 이론적 창시자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이 교착 상황은 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노동계급의 국제연대를 유지하고 서로 전쟁을 치르는 정부는 지지하지 않겠다는 애초 맹세를 깨버리고, 제2 인터내셔널의 다수 거대 정당들이 그들 정부의 참전을 지지함으로써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에 굴복한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혁명적 막시스트들은 제2 인터내셔널과 결별하고, 자체적으로 혁명의 기회를 탐색하게 된다. 한편, 레닌의 볼셰비키에 의해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자 많은 아나키스트가 이들 진영으로 넘어갔다. 수정주의 노선을 지지한 개혁주의자들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사적 소유권과 시장이 지배적인 자본주의 사회이지만, 국가 규제와 통제를 통해 자본주의의 해악을 상당 부분 제어하려는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ies)를 지지하면서, 서유럽을 중심으로 오늘날까지 주류 정치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019년, 독일 시민이 로자 룩셈부르크 추모 행렬을 하고 있다.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의 볼셰비키는 1919년 제3 인터내셔널(코민테른) 을 출범시킨다. 하지만 같은 급진적 혁명을 추구했지만, 레닌과 같은 전위대 주도의 혁명을 반대한 로자 룩셈부르크를 포함한 민주사회주의 세력은 불참했다. 1차 대전에 참여하면서 자국의 제국주의를 용인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 역시 불참했다. 반면, 반 제국주의와 반 자본주의를 지향한 식민지를 포함한 세계 각국의 많은 공산당은 볼셰비키의 혁명 성공에 환호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중에는  프랑스 공산당도 있었다. 각 국가 노동조합 혹은 사회주의 정당의 연합체 혹은 협의 조직이었던 이전 제1, 2 인터내셔널과 달리, 제3 인터내설은  위계질서를 갖춘 국제적 공산주의 정치 조직이었다. 사회주의를 현실화한 소련 공산주의와 이에 동조하는 공산당들이 이제는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서 지배적 흐름이 되었다.

 

1919년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 창당 대회

혁명 성공 이후, 코민테른의 맹주 볼셰비키는 자신들의 혁명에 이어 세계 각지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뒤따를 것으로 기대했었다. 이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 각지의 공산당은 볼셰비키 당과 그들의 권력 장악 과정을 혁명에 대한 개념 혹은 사회주의 이행 모델로 삼았으며, 각국 공산당의 정책들은 소련 공산당이 주도하는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라 정해졌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헤이데이는 10년에 그쳤다. 1928년, 코민테른은 기존의 국제연대 노선에서 벗어나 스탈린주의 노선으로 변경하면서 소위 “제3기” (1기는 볼셰비키 혁명기 그리고 2기는 자본주의 안정기)의 대두를 선언한다. 이는 세계 공산주의 운동 역사상 가장 분파적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세계적 위기가 시작되었고 세계적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이 열렸다고 판단했다. 1928년 코민테른은 세계 각지의 공산주의 정당들에게 다른 사회주의 조직들의 신뢰성을 공격하고 약화시킴과 더불어, 가장 억압받는 대중을 전투적 혁명적 노조 조직으로 끌어들여 사태를 대비하라고 지시했다.

 

1928년, 박헌영은 아내 주세죽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를 위해 일했다.

파시즘이 대두하고 있던 유럽에서 제3기 정책은 재앙적이었다. 1932년 선거에서 독일의 사회민주당과 공산당 연합은 나치 권력의 부상을 막을 수 있었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사회 파시스트(social fascist)”라고 비난하면서 적으로 간주하였다. 결과적으로, 나치가 공산당과 사민당을 앞지르고 의회 다수를 차지했고, 1년 뒤인 1933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독일 대통령이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는 길을 열어 주었다.

 

1933년, 히틀러가 지지자들로부터 환영받고 있다.

1935년, 코민테른은 진로를 바꾸었다. 소련에 대한 독일의 공격을 예상한 그들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지가 필요했고, 이들 국가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세계 전반에 걸쳐 혁명을 촉진하는 데 초점을 맞춘 제3기 정책을 적어도 일시적으로 포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에 코민테른은 통일 전선(United Front)(급진 좌파에 속하는 혁명적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아나키즘의 동맹 연합)과 인민 전선(Popular Front)(공통 목표의 달성을 위해 결성하는 폭넓은 정치적 연합으로 중도좌파부터 공산주의까지 포함한다)을 연계시킨 정책으로의 전환을 발표하면서, 세계 각지의 모든 공산당이 이 정책을 도입하고 실행할 것을 주문했다.

 

1935년, 미국 공산주의자들이 거리 행진을 하고 있다.

소련은 인민 전선을 실질적 필요에 의해 도입한 것일 뿐, 국가는 자본가 권력의 도구라는 레닌의 관점 혹은 공산당은 직업적 혁명가들의 전위당이라는 레닌의 개념을 벗어나려는 의도에서 도입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서방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좌파 내 다른 그룹을 협력 세력으로 대하며 인민 전선 운동을 전개하라는 소련의 지침은 최소한 서유럽과 미국에서 공산주의 정치를 의도치 않게 변화시켰다. 그들은 지니를 병 밖으로 꺼낸 것이다: 서구에서 공산주의 정치는 파시즘에 대한 투쟁 그리고 민주주의 보호와 확산으로 그 성격이 변했다.

 

1939년, 시카고에서 열린 미국공산당 전당대회. 미국와 소련 인민의 우호라는 글귀가 보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제 국가는 권력 투쟁의 장으로 변했다. 인민 전선은 민주주의의 수호와 확장이 존재 목적이었다. 인민 전선에서 사회주의는 공산당 내부에서나 논의되는 것이지 대부분 경우 부차적 이슈였다. 공산당은 인민 전선에서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실제로 거대한 방계 조직을 가진 대중 조직이 되었다. 미국의 경우, 1930년대의 공산주의 세대, 약화하긴 했지만, 여전히 공산주의의 활기가 느껴지던 1950년대에 성장한 세대, 그리고 1960년대 사회 운동에 참여했던 미국민들 대부분에게, 공산주의는 스탈린주의가 아니라 인민 전선의 정치였다. 한편, 이 여파로 유럽 공산당은 경제정책과 복지국가 지지 면에서 사회민주주의 당보다 좀 더 급진적 입장을 취했을 뿐 질적 차이가 없게 되었다. 소련은 이후 1936~38년의 대숙청으로 잔학성을 그리고 1939년 독소불가침 조약으로 반 국제주의를 세계에 드러내면서 코민테른의 존립 명분을 스스로 훼손했다. 코민테른은 1943년 세계 무대에서 사라졌다.

 

유럽의 마지막 공산주의 국가 알바니아도 1991년 2월 붕괴했다.

1989년에 시작하여 1990년대 초까지 이어진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로 말미암아,  사회주의는 역사적으로 "끝났다"라는 사망 판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자본주의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붕괴 이후, 소련과 동유럽의 대중은 자신들의 삶이 부유해지고 사회가 민주화되려면 서구처럼 리버럴화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 그 길을 택했다. 또, 이 국가 출신의 많은 사회주의자도 이전 신념을 포기하거나 수정하였다. 일부는 “인간의 얼굴을 한 신자유주의”로 불리기도 하는 변형된 사회복지제도로 무장한 패권적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를 수용했다.

 

 

19세기와 20세기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 투쟁으로 통상 특징지어져 왔다. 그러나 21세기 민주사회주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대결 구조는 잘못된 이해다. 이 시기는 실질적으로 ‘민간 자본주의’ 형태와 ‘국가 자본주의 형태’ 간 투쟁이었다.  소비에트 연방과 동유럽 그리고 중국 대다수 노동자는 여전히 생산 수단에서 분리되어 상품 생산을 위한 임금 노동(그리고 최악의 경우 노예 노동)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아닌 국가 자본주의 국가로 간주하여야 할 것이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 혁명이 약속했던 자유, 평등, 박애, 그리고 민주주의를 민간 자본주의와 국가 자본주의 모두 우리에게 가져다주지 못했다. 

 

이렇게 20세기 사회주의 실험은 인류에게 뼈아픈 상처를 남겨주고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모순과 결함에도, 설사 모두가 동의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에 대한 체계적 비판과 더불어 대안 사회에 대한 비전과 기본적 구조를 상당 부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머릿속 신념 그리고 가슴속 양심을 따라 보다 나은 세상을 건설하고자 했던 선배 인류의 진정성을 결과적 실패를 핑계로 빈정거리듯 획일적으로 재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