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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나는 한국 시민권자가 아니므로 지금 주오클랜드 분관에서 진행 중인 (2월 23~28일) 재외선거에 참여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20대 한국의 대통령 선거를 나는 한국 국민으로서가 아닌 한국을 모국으로 둔 세계 시민의 눈으로 지켜보고 접근한다. 더 나아가, 민주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 관점을 통해 대선 후보들을 관찰한다. 후보의 공약집을 읽어볼 정도로 섬세한 관찰이 아니다. 따라서, 아랫글은 불규칙하게 관련 영상과 뉴스를 접하면서 드는 생각을 두서없이 적어 본 글이다.
이번 한국 대선 여정을 보면서 나는 두 가지에 놀랐다. 하나는 이재명이 내 생각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제법인데 수준을 벗어난 윤석열 돌풍이다. 이 두 가지가 이번 한국 대선에서 나의 관전 포인트다. 먼저 이재명이다.
누가 말이고, 누가 마차인가?
이재명의 유세를 유튜브로 잠깐씩이라도 자주 본다. 그의 연설을 보면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변화의 주체’가 시민 - 혹은 국민, 혹은 대중, 혹은 민중 - 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물론, 말미에는 항상 “잘 할 수 있는 사람 누구입니까?”라는 추임새를 넣으면서 선출직 대중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리더십을 부각하기도 하지만, 그는 변화의 주체가 지도자가 아니라 시민임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것 - 혹은, 그렇게 비치길 바라는 것 - 처럼 보인다. 그의 말을 따르면 시민은 단지 ‘유권자’가 아니다. 즉, 선거가 끝나면 길바닥에 나뒹구는 홍보물처럼 5년에 한 번 반짝 표를 구걸하기 위해 찾는 대상이 아니다. 시켜만 주시면 잘 할 수 있으니 자신을 머슴으로 고용해달라고 시민 주인에게 울먹이며 사정한다. 자신이 이끌고 나갈 테니 여러분은 따라오세요가 아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 그리고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앞장서서 하겠다는 이타적 행동대장의 마인드다. 지도자로서 이런 섬김의 리더십과 변화의 주체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이 블로그에서도 많이 등장했다.
19세기, 칼 맑스는 강조했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행위여야만 한다.” 20세기 초, 로자 룩셈 부르크는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적 의지와 의식적 행동이 없다면 사회주의는 있을 수 없다"라고 누차 강조했다.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 유진 데브스는 “너무나 오랜 기간 세계의 노동자들은 모세 같은 사람이 속박에서 그들을 벗어나게 해주길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절대 오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누군가에 의해 이끌려 벗어난다면, 여러분은 다시 속박으로 이끌려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여러분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열변을 토했다.

이들로부터 1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 140만 명 노조원을 거느린 영국의 Unite 노조위원장 Sharon Graham은 2021년 Tribune 기고문을 통해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를 구하러 오는 웨스트민스터(영국 중앙정치를 의미) 영웅은 없습니다…우리는 스스로 우리를 구해야 합니다…우리는 대중적 노동계급 권력을 구축해야 합니다.” 노동자를 구해줄 모세 같은 엘리트 정치인/지도자는 절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유진 데브스가 역설한 지 115년이 지난 지금, 똑같은 이야기를 영국의 노조 지도자가 반복하고 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국 민주당이라는 기존 리버럴 정당의 기득권을 어떻게든 이용해 보려는 자칭 민주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의 대통령 경선 도전은 실패했다. 계급 본질과 국제주의에 충실히 하려고 했던 영국 제러미 코빈 노동당수의 모험 역시 실패로 끝났다. 결과적으로, 서구 기존 정치 시스템과 직업 정치인들은 노동자와 서민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정책을 시행하는 데 실패했다. 이런 결과를 150여 년 전부터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했던 사상가와 혁명가들은 꿰뚫어 보고 있었다. 2022년, 세계는 다시 이들 선지자의 깨달음을 다시 깨닫고 있다.
엘리트주의와 관료주의를 넘어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자를 전면에 내세우는 정당은 노동자라는 마차를 끌고 가는 말이 결코 아니다. 그 반대다. 말은 직장에서, 길거리에서 그리고 지역공동체에서 존재하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 정당과 그 대표 - 설사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 는 말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며 뒤치다꺼리를 하는 마차다. 정당은 이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의 대변인이고 머슴일 뿐이다. 간단하지만 근본적인 이 인식의 전환을 이재명 연설에서 보는 듯했다.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신선한 충격이었다.
자본주의 국가의 정당과 지도자들은 많은 경우 리버럴 대의시스템의 고질적 병폐인 엘리트주의에 함몰되어 있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한다. 그들의 각자 고객인 유권자 앞에서는 싸우는 척하지만, 유권자가 안 보이면 그들은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자기들끼리 잘 논다. 프로스포츠 선수들과 유사하다. 프로 선수들은 자기에게 수익을 가져다주는 연고지 팬들을 위해 경기 성적으로 팬 서비스를 한다. 그러나 그 연고지가 특정 지역일 필요가 없다. 그들은 지역 화폐로 연봉을 받지 않는다. 이 구단이든 저 구단이든 자기 밥그릇만 잘 챙겨주면 그만이다. 프랜차이즈 스타? 돈 앞에는 장사 없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국가의 많은 직업 정치인은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유리한 정당, 지역구 심지어 이념도 선택한다.
이재명은 자신의 성장 과정과 맞물려서인지 기본적으로 이런 엘리트주의를 거부하는 스탠스를 취한다. 민주적 노동조합에서 노조위원장은 자신의 권한이 조합원들로부터 임시로 부여받은 것을 철저히 인식한다. 결코 귀족화, 엘리트화하지 않는다. 소위, 자신의 태생과 근본을 망각하지 않고 초심을 지킨다. 그리고 이 초심은 시스템을 통해 엄격하게 감시되고 지켜진다.
대의 민주주의 제도하에서 선출직 정치인이 유권자로부터 멀어지는 엘리트주의와 더불어 자본주의 혹은 사회주의 국가와 관계없이 목격되는 다른 병폐는 관료주의다. 검찰 조직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윤석열이 대통령을 보고 ‘감히 5년짜리 선출직 정권이’란 말을 내뱉는 배경이다. 한편, 선출직 정치인은 엘리트라는 동지의식 속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 관료주의를 방치 혹은 이용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기득권으로 무장한 세계의 모든 관료는 변화를 추구하는 선출직 보스를 싫어한다. 틈만 나면 대들고, 태업하고, 직무를 유기하려 한다. 이재명은 성남 시장과 경기 도지사로서 정책 실행 경험을 통해 이 관료주의 병폐를 상당 부분 꿰뚫어 보고 있으며, 그에 대한 해결책도 축적한 듯하다.

사회민주주의자 이재명?
엘리트주의를 지양하고 관료주의를 극복하면서 자기 생각을 현실화하려는 이재명은 그런 면에서 많은 이에게 기대감을 갖게 한다. 개인적으로 그의 정책 중 기본소득과 기본금융은 인상적이다. 이재명은 유세 연설에서 자신 정책의 정당성과 실현 가능성을 위해 유럽의 사례를 자주 인용한다. 분명, 그는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를 염두에 두고 있다. 기본소득과 기본금융은 전통적 리버럴리즘의 정치적 형식적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실질적 기회의 평등이라는 사회주의적 요소가 가미된 것이다. 담보가 없어도, 신용이 없어도, 청춘이라는 이유만으로 저금리 대출을 하는 것은 자본주의 금융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면에서 이재명은 한국 사회에 사회민주주의를 뿌리내린 최초 정치인으로서 남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민주사회주의 관점에서는 이재명보다는 심상정이 훨씬 진보적이다. 후보 간 토론 시간에 등장한 그녀의 지적에 나는 대부분 공감한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의 정책이라는 표현 대신 지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녀와 그녀 정당의 위상을 반영한 것이다. 심상정과 이재명을 서구 사회주의 정치사를 통해 비교하자면, 사회민주주의와 민주사회주의 간 관계로 비유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분명, 민주사회주의의 지향점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지향점을 향해 조금이라도 나아가는 것은 사회민주주의다. 민주사회주의가 사회민주주의 타협주의와 기회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쉽다. 그렇지만 이런 그들이 대중의 지지를 얻는 것 역시 쉽지 않다. 같은 현상이 한국 대선의 이재명과 심상정에게서도 발견된다는 느낌이다.
포퓰리스트 이재명?
그러나, 심상정의 이재명 정책에 대한 비판을 떠나, 이재명에게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재명에게서도 자본주의 국가 리버럴 대의 민주주의 제도하 정치인의 전형적 특성이 보인다: 포퓰리즘(populism).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그의 말은 포퓰리즘이다. 그의 저소득 서민/청년에 대한 복지정책은 이전 진보적 리버럴 정권과는 결을 달리하는 프레임의 전환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자본가 그리고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정책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자본가의 이기적 난폭함을 다스리려는 사회민주주의자에 대한 평가 기준으로 나는 그들이 ‘자본가’(capitalist)와 ‘기업가’(entrepreneur)를 얼마나 엄격하게 구분하느냐를 그중 하나로 꼽는다. 흔히, 경제 활성화를 위해 규제 완화를 이야기한다. 누구를 위한 규제 완화인가? 이 경우 규제 완화는 ‘기업가’의 기업 활동을 위한 규제 완화다. 자본가의 불로 금융 소득과 축적을 위한 규제 완화가 아니다. 자본가는 엄격하게 규제하고 기업가는 적극적으로 격려해야 한다. 자본가와 기업가는 종종 동일 인물이므로 이에 대한 섬세한 분리가 필요하다. 과연 이재명은 이런 분리 그리고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시행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모두를 행복하게 하겠다는 구호는 모두에게 불만족스러운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대부분 포퓰리스트가 그러했던 것처럼. 포퓰리스트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등장했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은 그들에게 사회적으로 견고한 지지 기반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를 위한다는 말에 솔깃해서 지지를 보낸 대중은 결코 지지 기반이 될 수 없다. 그 지지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이 아니라 ‘덜 깨어있는 대중의 충동’에 불과하다. 사회민주주의자로서 이재명을 선거에서 밀어주고, 당선 이후 그의 정책을 지지하면서 그를 지켜 줄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은 과연 있는가? 토론 중 심상정의 지적에 “저는 좌파 정책, 우파 정책 가리지 않고 국민에게 현실적으로 유용한 정책만 한다”라고 주장한 이재명이다. 그가 말한 국민은 실체가 있는 국민일까? 아니면, 포퓰리스트 지도자가 선거 승리를 위해 단골 메뉴로 써먹는 공허한 지칭 대명사에 불과할까?
이재명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는 이유다.
윤석열 돌풍
돌풍이란 표현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만 갑작바람이란 단어 정의에 충실하자면 내게는 돌풍이다. 이재명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윤석열의 한국 정치 무대 등장이다. 이 자의 등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나중에 이 자의 등장에 대한 학자들의 깊이 있는 정치학적, 사회학적, 선거 공학적 의미 분석이 있기를 바라며 나의 중간 소감을 적는다.
나는 사회주의적 가치의 부활을 바라는 사람이지만, 맑스가 남긴 교훈처럼 자본주의 국가 리버럴 민주주의 정치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한다. 특히, 한국처럼 수천 년 이어진 권위주의적 위계 사회에서 최소한 형식적이라도 평등을 강조하는 리버럴리즘의 가치는 대단히 중요하다. 개인주의가 최고의 가치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인권에서 개인주의적 가치와 경험은 필수적이다. 유감스럽게 아시안 문화는 많은 경우 이 긍정적 개인주의를 결여하고 있다. 집단을 본질로 하는 사회주의적 가치도 이 개인의 가치와 맞물리지 못할 경우 권위주의적 사회주의(를 자칭하는) 국가로 전락한다. 지금까지 정통 사회주의를 표방한 국가치고 독재 소리를 듣지 않는 국가를 찾아보기 힘든 것도 사회구성원 개인의 자존감(self-esteem)에 기반을 둔 개인주의가 그 사회에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중국을 보라. 집단적 애국주의는 있어도 다원적 개인주의는 실종된 권위주의 사회다.
이런 인식 위에서 한국 사회의 권위주의적 위계 문화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간 순서일 필요는 없지만, 지금까지의 권위주의적 위계에 기초한 공동체 의식은 사라지고 리버럴 정치적 평등에 기반한 문화가 정착한 이후에야 한국 사회는 사회주의적 가치가 반영된 새로운 공동체 질서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지난 수십 년 한국 정치는 권위주의에 기초한 기득권 구질서 세력과 정치적 평등의 이념으로 무장한 리버럴 민주주의자들 간의 충돌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민주’ 대 ‘반민주’라는 프레임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현상은 이 충돌 프레임에 사용되는 개념의 퇴보성이다. 잦은 충돌과 전투로 상호 공격과 방어 전술에 익숙해지면서 한 단계 진일보한 다음 전투를 기대할 수 있을 텐데 한국 정치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민주 대 반민주 프레임은 ‘상식’ 대 ‘비상식’이라는 보다 원초적 개념 간 대결로 퇴보했다. 이번 윤석열의 등장은 이 퇴보에 정점을 찍는 듯하다. 어느 댓글 표현을 따르자면, ‘인간’ 대 ‘동물’의 대결이다. 동의한다. 정치적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윤석열은 인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론조작 혹은 여론조사 조작이 있다 치더라도, 저런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이 어떻게 저 정도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지 믿을 수가 없다.

한국 민주주의의 패배
이 지점에서 나는 1987년 대선 이후 35년이 지난 지금, 한국 민주주의의 실체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재명 유세 연설에 자녀를 데리고 나온 한 가장의 인터뷰가 인상적이다. 박근혜 탄핵 촛불 혁명 때 애들을 데리고 나간 적이 있었는데 이번 대선 유세 현장에 다시 나올 줄 몰랐다고. 그렇다. 눈발 흩날리는 저녁 한파와 코로나 감염을 무릅쓰고 이들 가족은 왜 다시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을까? 티브이 혹은 인터넷을 통해 정책을 접하고 투표 날 선거에만 참여할 수는 없었는가? 무엇이 이 가족들로 하여금 이재명 지지 세력 세 과시에 힘을 보태야겠다는 절박감을 가지게 했을까?
한국의 민주주의는 지난 35년간 발전하지 않았고, 심지어 여전히 위태롭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대선에서 누가 승리하는지에 상관없이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번 윤석열 등장만으로도 ‘이미’ 패배한 것처럼 내게 다가온다. 한국 민주주의의 본질적 취약성과 후진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비친다.
자유선거를 치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 한국을 민주주의 국가로 부를 수 없다. 민주주의는 정치제도에 국한된 그런 협소 개념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경제를 포함해 사회 전반의 제도와 의식을 아우르는 총체적 개념이다. 이런 면에서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가 아님을 보여주는 참혹한 지표들이 많다. 몇 수치를 예로 들어 본다. 압도적으로 세계 꼴찌를 기록하는 출생률 (2020년 기준, 0.84), OECD 평균보다 한 달(28일)을 더 일하는 한국의 노동자들, OECD 1위를 기록하는 자살률, 역시 압도적으로 OECD 1위인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 비슷한 인당 GDP라도 뉴질랜드 최저임금 $21.20 (4월 1일부터)의 절반 정도에 불과한 한국의 최저임금 9,160원. 이외에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극심한 임금 격차, 금수저로 상징되는 기회의 불평등, 한국 사회 전반에 만연한 살인적 경쟁, 학연 등으로 상징되는 기득권 재생산 구조의 고착화 등이 그것이다.
사회 전반, 특히 경제 분야의 밑으로부터의 민주화 없이 정치 분야에서만의 위로부터 민주화가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이번 윤석열 돌풍이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민주당 쪽도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으로 상징되는 지지기반이 없다고 본다. 이재명과 민주당 지지층은 깨어있는지 모르지만 조직되지 못한 파편화된 개인이다. 경제 민주화로 대표되는 사회 전반의 풀뿌리 민주주주 혜택과 경험을 하지 못한 이 파편화된 의식 있는(혹은 있으려 하는) 개인들은 결정의 순간에 깨어있기를 포기한 채 ‘덜 깨어있는 이기적 대중의 하나’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들을 잡기 위해 이재명과 민주당은 윤석열과 똑같은 이전투구식 포퓰리즘 전략을 채택하는 배경으로 이해된다.
덜 깨어있는 이기적 대중의 하나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이들에게는 윤석열의 무식함은 섹시하게 다가갈지 모른다. 수구 기득권 세력은 자신의 이익 수호를 위한 대리인을 선정할 때 후안무치한 무식함을 때로 선호한다. “MS 오피스를 왜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샀나?”라는 창조적 무식함을 보여준 과거 겐세이 이은재라는 작자부터 지금의 윤석열에 이르기까지, 필요하다 싶으면 무식해서 용감한 돌격대장을 대리인으로 선정한다. 이들의 후안무치함이 덜 깨어있는 대중의 이기적 충동을 불러일으키는데 효과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맺음말
이재명과 윤석열에서 공통으로 느껴지는 것은 포퓰리즘의 향기다. 포퓰리즘의 특징 중 하나는 ‘모두’를 위한 정치라는 구호다. 문제는 모두가 누구냐는 것이다. 모두는 다른 말로 누구도 아닐 수 있다. 따라서 이 모두를 유권자로 전환하기 위해 특정 지지 기반이 없는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은 바람을 일으키고자 시도한다. 이 바람의 생성에 지도자의 카리스마는 절대적이다. 지금 한국 대선 정치에서 목도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카리스마를 갖추려는 후보들의 구호 전쟁이다. 한 후보의 카리스마에 흠집이 나는 것은 치명적 패배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양쪽 모두 상대방 후보 흠집 내기와 상대방 후보의 자신에 대한 흠집 내기 시도에 대한 차단에 혈안이다. 선거라는 정치 제도가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사회구성원 집단 - 계급 혹은 계층 - 의 실체가 수면 위로 드러나는 순간이 되어야 함에도 이들 집단의 실체가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끝판왕은 경제민주주의다. 민주화된 경제 위에서 정치민주주의는 자연스레 딸려온다. 경제민주주의는 곧 풀뿌리 민주주의이며 대중조직의 활성화를 의미한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직장과 지역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이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가 없다. 지난 35년, 위로부터의 정치적 민주주의에 급급했을 뿐이다. 이재명의 사회민주주의적 생각도 이 밑으로부터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으면 그 실현과 유지 가능성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한국이 유럽 사회민주주의를 따라가려면 사회민주주의를 외치는 지도자도 필요하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우선이다. 유럽 사회민주주의가 견고할 수 있는 것은 이들 국가가 이런 시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수상이 되는가는 비본질적이다. 한국 사회도 이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있다면 지금처럼 절박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선거를 맞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의 리버럴 대의 민주주의에서 깨어있는 시민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행동은 투표다. 투표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말은 ‘선택하지 않음(not-choosing)은 위험한 형식의 선택(choosing)’의 다른 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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