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한국 이야기

'K- 선진국, 대한민국' - 한국 방문 감상문 (1)

김 무인 2022. 6. 11. 17:49

 

머리말

 

코로나 발발 직전인 2019년 한국을 방문한 후 3년 만에 한국에 다시 왔다. 연로하신 어머니를 매년 뵐 의도였는데 코로나로 인해 늦어진 방문이 되었다. 이번 방문은 어머니를 뵐 목적도 여전히 있지만, 개인 신병 치료 목적도 있다. 따라서 몇 개월 정도 체류하면서 몸을 추스를 계획이다. 지금 블로그에서 진행하고 있는 번역 프로젝트는 몸이 허락하는 한 계속하겠지만, 제법 긴 시간 한국에 체류하는 만큼 한국 생활에 대한 주관적 관찰과 경험을 틈나는 대로 감상문 식으로 그려볼까 한다. 이후 글은 표현에 있어 일반화가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내가 머무는 지방 광역시의 한 동네에 대한 경험을 마치 한국 전체에 대한 경험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 사회학이 아니라 감상문이므로 너그러이 읽어주길 바란다. 

 

내가 한국에 왔음을 느끼게 해주는 정겨운 풍경

 

K- 선진국, 대한민국

 

K-pop을 위시로 ‘한류’ 혹은 ‘한국식’을 의미하는 알파벳 K가 영어 접두사처럼 한국을 묘사할 때마다 앞에 따라다닌다: K-drama, K-beauty, K-food, K-culture 등. 

 

3주가량 한국에 체류하면서 이전 방문 때와 달리 한국 사회 내부에 일정 부분 들어가 들여다볼 기회가 생겼다. 이전에는 여행객처럼 한국 사회의 외면을 느끼는 정도였다면, 이번에는 동네 치과와 내과와 같은 의료 서비스/인력을 체험하기도 하고, 이동 과정에서 시내버스를 타기도 하고, 자전거를 이용해서 도심을 이동하면서 한국의 교통/운전 문화를 좀 더 가까이에서 경험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나의 이 3주 치 개인적 경험과 이제 거의 자타가 공인하는 듯한 선진국 한국의 지위가 맞물려 한국의 선진국 호칭 역시 앞에 K가 붙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다소 생뚱맞은 생각이 들었다: ‘K - 선진국 대한민국’. 유감스럽지만, 이 나만의 호칭 ‘K - 선진국 대한민국’은 요새 조회 수가 잘 나온다는 이유로 우후죽순처럼 등장하는 ‘국뽕’ 유튜브 채널의 ‘대한민국 어천가’는 아니다. 세계시민(cosmopolitan) 혹은 국제시민(international citizen)을 지향하는 또 다른 선진국 뉴질랜드 시민으로서 바라본 까칠한 용어다. 어쩌면 ‘틀린 것(선진국이 아니다)을 다른 것(다른 유형의 선진국)으로 에둘러 완곡하게’ 표현하기 위해 선진국 대한민국 앞에 K를 붙인 것인지 모른다. 



10년 전에도, 3년 전에도 그리고 올해도 죽을 뻔하다.  

 

이번을 포함해 지난 10여 년 한국을 세 번 방문했다: 2012년 경, 2019년 그리고 올해 2022년. 이 세 번 모두 호들갑스럽게 표현하자면 나는 길에서 죽을 뻔한 경험을 했다. 그것도 모두 같은 상황 같은 장소에서: 횡단보도. 

 

보행자가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대기하는 상태에서 차가 횡단보도를 지나가는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한다. 뉴질랜드에서 나 역시 운전할 때 횡단보도 초입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무심코 지나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도 잘못된 것이지만. 하지만 한국에서의 경험은 이런 유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내가 가까운 곳에서 접근하는 차량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간에도 횡단보도 쪽으로 접근하는 차량은 멈추지 않고 바로 내 코앞을 지나간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자전거에서 내려 자전거를 끌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도중에도 반대편 차량이 멈추지 않고 돌진하는 바람에 생명의 위협을 느껴 횡단보도 한복판에서 멈추기도 했다.  

 

한국의 흔한 횡단보도 풍경

 

더 가관은 그 차량이 클랙슨을 울리고 지나갔다는 것이다. 차량이 안전하게 지나간 다음에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고 막무가내로 횡단보도에 진입해 자신의 바쁜 갈 길을 방해한 보행인에게 던지는 경고이자 짜증이다. 횡단보도에 도달해서도 쉽게 발길을 내딛지 않고 주변 ‘차량님’들의 눈치를 살피는 한국 원주민들의 태도가 점점 이해 가는 대목이다. 한국의 횡단보도는 나에게는 ‘황당보도’이다.  

 

이것이 2022년 ‘선진국’ 대한민국의 교통 문화이다. 내가 보기에는 후진적 혹은 미개한 문화를 거론할 때마다 많은 한국인이 인용하는 옆의 큰 나라까지 갈 것 없다. 대한민국은 교통/운전 문화에 관한 한 후진국이다. 이런 교통/운전 문화는 다른 문화가 아니라 ‘틀린’ 즉 ‘잘못된’ 미개한 문화다. 

 

우리는 쉽게 문화의 다양성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모든 문화가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똑같이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고급문화가 있고 저열한 문화가 있다. 다양한 문화는 횡적 배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 배열도 있다. 예를 들어, 더러운 손을 닦지 않고 음식을 손으로 먹는 것은 저열한 위생문화다. 존중받아야 할 ‘다른’ 위생문화가 아니라 ‘틀린’ 위생문화다. 교통 문화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교통/운전 문화는 저열하고 미개하고, 틀린 문화다. 

 

더 나아가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인본주의에 관한 것이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기풍 말이다. 한국은 여전히 인명 경시 풍조가 만연하다. 보행자보다 차량을 우선시하는 것은 한국이 사람보다 물질을 중시하는 천민자본주의 단계에서 여전히 허우적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나는 생각한다. 빨리 가야 경쟁에서 이기고, 그 경쟁에서 이겨서 좀 더 많은 물질적 보상을 확보하는 것이 최고의 사회적 목표로 추앙받는 천민자본주의 사회.

 

이 빨리 가기 과정에서 차량은 보행자보다 물리력에서 우위를 점한다. 횡단보도를 놓고 경쟁에서 질 것 같은 한국의 보행자가 차량에게 포기하듯 양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따라서 만약 마동석이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건너고 있다면 멈출지도 모른다. 천민자본주의 단계의 국가는 선진국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물론 지난 수십 년에 걸친 신자유주의의 득세는 그동안 천민자본주의 단계를 많이 벗어난 많은 서구 선진국들을 다시 천민자본주의 방향으로 퇴보시키고 있지만 그럼에도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인본주의 전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교통/운전 문화만을 놓고 판단한다면 위에서 단정한 것처럼 한국은 후진국이다. 

 

지난 몇십 년 동안 한국의 미개한 교통 문화가 어쩌면 이렇게 변하지 않나 궁금해서 관련 기사를 검색해 보았다. 경찰청은 올해 7월 12일부터 시행되는 새로운 도로교통법을 지난 1월 발표했다. 이 새로운 도로교통법에 의하면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 주변에 서 있기만 해도 차량은 반드시 멈춰야 한다. 순간적으로 7월부터 시행되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횡단보도에서 여전히 차량이 우선으로 지나가도 된다는 운전자들의 이기적 태도 때문인 걸까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만 기사를 다시 읽어보니 기존 도로교통법에서도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으면 차량은 반드시 멈춰야 한다’는 어쩌면 당연한 조항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목도하고 경험한 많은 한국 운전자들은 도로 위에서 불법적으로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범법 과정에서 타인의 안전과 생명을 위협하는 데에도 무감각하다. 도덕적 시민의식까지 기대하지 않더라고 타인의 안전과 생명을 위협하면서까지 법을 준수하지 않는 운전자들이 모여 사는 대한민국은 과연 선진국일까? 그럼에도 한국의 물질적 풍요, 사회 인프라 그리고 국력을 함께 감안해 선진국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경우, 난 어쩔 수 없이 선진국 대한민국 앞에 딴지형 접두사 K를 붙여 K - 선진국이라는 별도의 카테고리를 만들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횡단보도에 사람이 지나가는 도중에도 보행자 앞을 차가 스쳐 지나가도 인당 GDP, 국방력, 삼성, BTS, 기생충, 오징어 게임, 손흥민에게 취해 여전히 한국을 선진국이라고 생각하는 한국민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자유다. 단 그들은 사람보다 차가 우선시되는 K형 선진국에 살고 있다.   



간호사 박진주와 소울리스좌

 

배우 박진주를 좋아한다. 물론 그녀를 직접 만난 적 없이 미디어를 통해 비친 그녀의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몇 년 전 드라마에서 그녀의 간호사 연기가 나름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반복되는 업무에서 기인한 매너리즘에 빠진 그녀의 일하는 방식에 많은 사람이 공감했었기 때문으로 기억된다. 그녀가 연기한 간호사 모습을 이번 한국 방문에서 떠올린 것은 동네 치과/내과를 방문하면서 만난 의사와 간호(보조)사 그리고 다른 직원을 통해 그 모습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영혼 없는 간호사 박진주

최근 한국에서는 이처럼 매너리즘에 빠져 입에서 나오는 용어 자체는 친절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어투에서는 그 느낌이 전혀 와닿지 않는 영혼 없는, 하지만 숙달된 고객용 멘트로 화제를 모은 유튜브 비디오가 있다. 소위 소울리스좌(solulless座)라고 불리며 선풍적 인기를 끌어모은 전직 에버랜드 놀이공원의 아마존 익스프레스라는 어트랙션의 담당 직원이었던 김한나가 그 주인공이다. 

 

 

소울리스좌

이 비디오가 세간의 관심을 끌자 에버랜드는 퇴직한 그녀를 놀이공원 홍보 모델로 채용하여 광고를 만들었고, 주류 미디어에서도 그녀를 인터뷰하기까지 했다. 

 

배우 박진주가 연기한 영혼 없는 간호사의 환자 대응 말투와 놀이공원 서비스 직원의 영혼 없는 고객 상대용 랩은 본질에서 마찬가지로 보인다. 하지만 간호사 박진주와 소울리스좌를 대하는 한국 대중의 태도에서는 온도 차이가 느껴진다. 

 

간호사 박진주의 영혼 없음에서는 자화상을 보는 듯한 씁쓸함과 동시에 얄미울 정도로 연기를 잘한 그녀에 대한 감탄이 대중의 주 반응이라고 한다면, 소울리스좌에서는 그녀의 청산유수와 같은 랩 숙련도에 열광하는 듯하다. 즉, 영혼은 없지만 숙달된 그녀의 업무수행 방식은 영혼 없는 서비스가 필연적으로 프로페셔널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데 그녀는 성공한 듯하다. 그녀 역시 자신의 숙달된 영혼 없음에 대해 이와 유사한 평가를 한다. 추정컨대 그녀의 자평은 유튜브 댓글을 통해 그녀의 업무 수행 방식을 촌평한 시청자들의 의견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영혼이 없다는 것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닌 것 같아요.”    

 

“영혼이 없다는 것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나 소울리스좌의 영혼 없는, 하지만 능숙한 업무 수행 방식에 열광하는 대중과 영혼 없어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그녀의 논리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일단 대중이 열광하는 것은 그녀의 서비스에서 느껴지는 친절함이 아니라, 그녀의 경력과 개인적 노력을 통해 이루어진 그녀 랩/춤 기술의 숙달도이다. 이처럼 자기 분야에서 일반인이 보기에 감탄스러울 정도로 놀라운 숙달도를 보여주는 사람들은 티비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을 보면 된다. 그들도 묘기에 가까운 숙달된 기술을 아무런 감흥 없이, 즉 영혼 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간호사 박진주도 환자 10여 명을 줄 세워 놓고 연속 주사 놓기를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유사한 달인의 경지를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영혼 없는 숙달된 서비스에서 우리가 놓친 것은 없는 것일까? 숙달은 영혼 없음을 상쇄하고도 남을까? 유감스럽지만 소울리스좌의 직종은 특별한 경우다. 그녀의 업무 특성 - 즐거움을 위해 놀이동산을 찾은 고객을 상대로 분위기를 업 시켜주는 보직 - 상 랩의 숙달은 서비스의 기본 조건이고, 더 나아가 영혼 없음마저도 이 숙달과 맞물려 고객을 신선하게 즐겁게 해주는 엔터테인먼트의 한 요소로 상품화된 것이다. 그녀의 영혼 없음은 쇼의 한 부분이다.

 

물론 그녀는 그 숙달도에 도달하기 위해 그녀 말처럼 최선을 다해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의 최선이 업무 수행에서 ‘영혼이 없다는 것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라는 명제를 참으로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서비스 업종은 그녀의  쇼 같은 타입이 아니다. 개인적 대면 서비스이다. 그리고 친절이 기대되는 감정 노동이다. 문제는 감정은 반복 앞에서 심각하게 훼손되고 무뎌진다는 것이다. 감정의 가장 치명적인 바이러스는 반복이다. 반복이란 바이러스 앞에서 감정은 영혼이란 수액이 증발한 건조한 상태가 되면서 동시에 감정 소유자의 정신 건강까지 위협받는다. 이에 대해 대면 서비스 노동자 - 의사와 같은 전문직도 포함한다 - 들은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를 작동한다. 그것이 영혼 없는 대면 서비스 노동이다. 이 영혼 없는 노동은 갑과 을 모두에게 적용된다.

 

이번 한국 입국 때도 나는 자기가 갑이라는 생각으로 무장한 듯한 공항 출입국 관리사무소의 젊은 여직원의 고압적 영혼 없음에 직면해야 했다. 한국에서 사용할 휴대전화 심카드를 위해 들른 공항 내 편의점의 젊은 남자 직원은 내가 찾는 것이 자기 매장에 없음을 알고는 돈 안 되는 나의 추가 질문에 귀찮다는 반응을 보였다. 공항 밖 PCR 검사를 하는 곳의 직원은 간호사 박진주의 재판이었다. 결코 고압적이지는 않았지만 ‘지시 사항을 잘 듣지 않아 다시 질문을 하거나 어긋난 행동을 하면 환영받지 못합니다’라는 무언의 압력이 실린 잘 압축된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예약받지 않는 한국의 의원

 

나는 뉴질랜드에서 의사와 면담 약속을 하고 가서 클리닉 대기실에서 15분 이상 기다리면 카운터에 문의하는 타입이다. 15분 정도의 쿠션은 의사에게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상은 의사나 클리닉의 관리 미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와서 내과 상담을 위해 한 동네 의원에게 예약 전화했을 때 깜짝 놀랐다. 외래환자에게는 예약이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의원에게도 전화해 보았더니 같은 대답이었다.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싫어서 전화받은 직원에게 그나마 가장 한가한 날의 한가한 시간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그건 모르죠’라는 영혼 없는 짧은 답만 들었다. 결국 그중 한곳을 찾아가 접수하고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의사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예약은 환자 고객을 위한 서비스다. 한국 동네 의원들이 예약받지 않는다는 것은 환자 고객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할 필요를 못 느낀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아쉬운 쪽은 환자 고객이지 의원이 아닌 것이다. 역학 관계로 치면 동네 의원이 갑이고 환자는 을이다. 더 나아가, 갑은 의원 조직 내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의사(한국은 숫자와 관계없이 다 원장이다)뿐만 아니라 간호사 그리고 심지어 전화받는 직원도 모두 갑이다. 

 

왜 이런 진료 시스템과 갑을 관계(내가 느끼기에)가 형성되었을까? 그 단초를 진료비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출처: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내가 방문한 내과 의원 진료비가 약 1만 2천 원 그리고 처방 조제약 값도 비슷한 약 1만 2천 원이 나왔으니까 한국의 건강보험 가입자가 낼 비용은 진료비 3천6백 원(65세 미만 30% 적용) 그리고 약값 2천4백 원(65세 미만 20% 적용)을 낼 것이다. 총 6천 원. 스타벅스의 베스트 셀링 음료 돌체 라떼 그란데 사이즈(6천1백 원) 보다 싸다. 막말로 길 가다가, “아, 몸이 안 좋네” 하면서 아무 의원이나 불쑥 들어가 접수하고 기다리다가, 의사 만나 상담받고 아래층 약국에서 처방 약 받아 복용까지 1시간 안에 즉흥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대목이 K - 선진국 대한민국의 또 다른 단면이 보이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민영화되지 않고 국가가 운영하는 건강보험 제도 덕분에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이 경제적 부담 없이 쉽다는 점에서 매우 높은 점수를 받을 자격이 있는 선진국 한국의 의료시스템이다. 최고급 의료 서비스 혜택을 전 국민이 누릴 수는 없지만, 최소한 기본 의료 서비스 혜택을 받지 못해 건강하지 못하게 살거나 조기에 사망하는 경우는 없는 사회 인프라를 한국은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출퇴근에 이용하지 않아서 그렇지, 인도 내에서 혹은 전용으로 안전하게 조성된 자전거 도로와 함께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한국의 의료보험 제도이다. 하지만 의료 서비스의 질과 환자에 대한 대우를 생각하면 역시 K 자가 붙게 된다.

 

치과 다닐 때 이용하는 아름다운 자전거 전용 도로

 

내가 간 내과 의원은 접수처 직원부터 환자 고객에 대한 존중감을 느끼기 힘들었다. 내가 방문했을 때 기다리던 환자들 전부가 65세 이상 추정 노인 여성들이었다. 그들을 대하는 의원 직원의 태도는 불손하지는 않더라도 그들의 질환에 공감한다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의사 면담 후 진료비 계산할 때 카드 단말기에 카드의 칩 부분을 갖다 대기만 해도 되는 줄 알고 그렇게 했더니 카운터 직원이 휴대폰도 아닌데 왜 그렇게 하느냐며 핀잔을 주면서 내 손의 카드를 뺐다시피 가져가서 단말기에 꽂는 것이었다. 나이의 문제가 아니지만, 시쳇말로 딸 같은 나이의 그 직원에게 내가 핀잔받을 정도로 잘못 혹은 실수했는지 이해가 안 간다. 돌아서는 나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싼 게 비지떡이구나’였다. 

 

의원 직원들 입장에서는 최저 1,500원(뉴질랜드 2달러도 안 된다)만 지불하고 진료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잘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5일장에서 바닥에 깔아 놓고 3장을 만 원에 떨이로 옷가지를 파는 상인이 구매자에게 일일이 잘해줄 필요가 없듯이. 동네 의원을 찾아온 환자 고객들은 명품 백화점을 찾아온 부유한 고객이 아니기에 비위를 맞추고 눈치 볼 대상이 아니라, 적당히 고압적으로 찍어 눌러 귀찮게 하지 못하도록 기선을 제압해야 할 대상일지 모른다.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의료 문턱을 대폭 낮춘 덕분에 역설적으로 한국 의료 서비스 문화는 교통 문화와 마찬가지로 의술의 출발점이자 최종 목적인 인간 자체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 느낌은 내가 방문한 치과에서 틀리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