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한국 이야기

이재명 당선을 간절하게 바라며

김 무인 2022. 3. 8.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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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함의 역설

 

대선이 바로 내일이다. 지난 몇 주, 한국 유세 현장을 틈날 때마다 유튜브를 통해 시청하고 있다. 시민 인터뷰를 볼 때마다 눈가가 이미 촉촉이 젖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이재명의 당선을 기원하는 이들의 그 간절함에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한국을 떠난 지 수십 년 되어 투표권도 없는 뉴질랜드 국적 소지자인 나 역시, 3월 10일 최악의 시나리오가 한국에 펼쳐질까 봐 밤에 뒤척인다. 반세기 전 박정희식 독재 공포 정치를 당당히 예고하는 봉건시대 권위주의적 인물과 이재명이 박빙이라니, 디스토피아가 바로 건너편에서 문만 열리기를 기다리는 듯하다.

 

나 같이 외국에 사는 사람은 자신이 바라지 않는 선거 결과가 나오면 현실 직시의 고통을 아예 외면하면 된다. 인터넷에서 한국 뉴스 안 보고 한국 관련 유튜브 안 보면 된다. 하지만, 아무리 외면하고 싶어도 피할 곳 없는 한국에 있는 사람들은 그 참담함을 어떻게 감당할까? 그들을 생각하면 나 역시 간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동시에 결과에 따라 엄청난 정신적 충격과 정서적 피폐함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이 간절함을 대선 때마다 가지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지, 그렇다면 이 간절함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선거 국면에서 지지자들이 가지는 이런 간절함은 민주 시민의 미덕일까? 건강한 민주주의적 감성일까? 이 똥줄 타는 간절함을 축제처럼 즐기는 자도 있는가? 나는 이 간절함의 사회학적 이면을 들여다보고 싶다. 이재명은 이번 유세에서 정치개혁을 매번 얘기한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비례대표제의 강화를 얘기한다. 유감스럽지만 비례대표제가 강화되어도 이 ‘똥줄 타는’ 간절함의 반복을 막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결론부터 먼저 얘기하면,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작동하는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 즉 풀뿌리 민주주의 시스템이 정착하지 않는 한 한국의 민중들은 2027년도 추위에서 간절함에 여전히 발을 동동 구를 것이다.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

 

이전 포스트 ‘한국 대선 관찰 중간 소감’에 썼듯이, 나는 윤석열 등장 자체가 1987년 이후 한국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1970년대식 권위주의적 인간의 등장을 설명할 길이 없다. 한국 사회는 지난 35년간 대통령 직선제 외에 질적으로 진일보한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는데 실패했다. 진일보한 민주주의는 풀뿌리 민주주의, 다른 말로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다. 이 민주주의가 없었던 까닭에 한국 사회의 깨어있는 시민은 대선 때마다 간절할 수밖에 없다. 세계적으로도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못한 나라의 국민은 ‘위로부터의 정치적 민주주의’에 목을 맨다.

 

한국 사회에서 위로부터의 정치적 민주주의의 현실 모습은 대통령 선거다.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권력과 자원의 배분 방식이 결정된다. 민주 시민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대통령 선거에 올인하는 이유다. 이전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대통령 선거는 막강한 결정권을 가진 대통령을 내 편 사람으로 앉히기 위한 ‘깨어있는 수구 기득권의 조직된 힘’과 ‘깨어있지만 조직되지 못한 시민’ - 민주당은 시민의 조직된 힘의 표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 이 ‘깨어있지 못한 대중’의 표를 끌어모으기 위한 전투의 역사다. 수구/기생 미디어, 독자 권력화된 관료 검찰 그리고 수구 정치 브로커로 구성된 기득권 집단의 조직적 전방위적 공세에 깨어있는 시민 개개인이 행주치마를 두른 채 대항하는 양상이 반복되고 있다. 

 

반면,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가 정착된 사회에서 직장과 지역공동체에서의 풀뿌리 민주주의는 시민을 깨어있게 만듦과 동시에 조직한다. 이재명이 유세마다 목소리 높여 외치는 ‘주권자’ 국민이 바로 이 시민들이다. 모든 유권자(voter)가 ‘주권자’(citizen with sovereignty consciousness)는 아니다. 자신의 조직된 힘이 선거뿐만 아니라 모든 정치적 결정의 주체임을 인지하고 있는 깨어있는 시민만이 이재명을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시민은 깨어있을지라도 이재명을 ‘추종’할 뿐이며, 자신을 이재명 당선의 ‘도구’로 여길 뿐이다. 이 인식과 사회시스템의 전환이 한국 사회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는 대의제로 대표되는 정치민주주의로부터 ‘생활민주주의’ 그리고 ‘경제민주주의’로 전환되어야 한다. 직장 노조에서부터 아파트 반상회에 이르기까지, 이 생활민주주의의 작은 블록들이 모여 기반을 이룬 피라미드 민주주의 구조가 정착되어야 한다. 이 견고한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정치 지도자는 그저 대행인일 뿐이다. 이재명 표현대로 도구이자 일꾼일 뿐이다. 일을 좀 더 잘하냐 못하냐 차이일 뿐, 그 피라미드를 구성하는 깨어있는 시민 주권자의 뜻을 거역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진영을 대표하는 대통령 후보가 누가 되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다. 신중은 해야겠지만 머슴 하나 잘못 뽑았다고 가문이 흔들리지는 않는다.

 

이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 피라미드가 구축되었다면 윤석열 같은 시대착오적 인물이 등장할 수 없다. 전 세계를 둘러보아도 - 미국을 포함해서 - 이 민주주의 피라미드가 견고하지 않은 사회는 반동적 포퓰리스트의 등장을 허락하곤 한다. 민주주의 체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를 머릿속에 구상하는 이재명을 지지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그가 한국 사회에 풀뿌리 민주주의를 위한 사회 구조적 개혁의 초석을 놓길 바란다. 더욱 급진적인  민주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먼 그의 이념과 정책이지만, 그의 사회민주주의 비전의 실현만으로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충분히 진일보한 것이 될 것이다. 그가 유세에서 매번 언급하는 비례대표제의 강화를 통한 정치 개혁은 물론 의미가 있다. 하지만 여전히 위로부터의 정치적 민주주의에 그친다. 그가 진정으로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한국 사회 이식을 꿈꾼다면, 그 정치적 형식만을 따라 하지 말고 그 형식을 떠받치는 풀뿌리 민주주의에 집중할 것을 주문한다. 비례대표제는 비례해서 대표할 모집단, 즉 깨어있는 시민 조직이 있을 때 의미 있는 종속적 제도다.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한국 토양에서 어떻게 양성할 것이냐는 고민을 그나마 이재명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재명을 지지하는 이유다. 

 

이번 한국 대선 관련, 주변 교민에게도 종종 얘기하곤 한다.

 

 

한국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