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한국 이야기

우회전 공화국, 대한민국 - 한국 방문 감상문 (3)

김 무인 2022. 7. 16. 16:50

 

출입국-외국인사무소를 갔다 오다

 

한국에서 나의 주요 이동 수단은 자전거다. 아주 유용하다. 특히 내가 머무는 곳은 30여 년 전,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설 때 조성된 곳이다. 따라서 인도 그리고 그 안의 자전거 도로가 상대적으로 잘 정비되어서 자전거 이동이 매우 수월한 편이다. 나는 막연히 도시 전체가 비슷한 자전거 도로 환경을 가진 줄 기대했었다. 하지만 장기간 치료 요양을 위해 비자 변경 신청을 위해 출입국 관리사무소를 자전거로 갔다 온 뒤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방문한 출입국 관리사무소는 그 도시에서 상대적으로 개발이 낙후되었고 소규모 공장들이 모여있는 곳에 있었다. 아무래도 그 지역을 중심으로 ‘비전문취업(E-9)’과 ‘방문취업(H-2)’ 비자 소지자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모여 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지역은 최근에 개발된 지역이 아니라 이전부터 형성된 구도심이라고 할 수 있다. 낙후한 하수구 때문인지 냄새가 곳곳에서 풍겨 나오는 그 동네는 차도와 인도 모두 좁았으며, 좁은 인도에 박힌 오래된 보도블록은 서로 아귀가 맞지 않아 울퉁불퉁했다. 자전거 친화적 환경이 절대 못되었다. 자전거뿐만 아니라 차량 그리고 보행자 모두에게 쾌적한 환경은 아니었다. 내가 거주하는 동네에서는 보기 힘든 횡단보도와 인도 간 턱들도 곳곳에 있었다.

 

출입국-외국인사무소

 

그런데 출입국 관리사무소의 정식 호칭은 출입국-외국인사무소이다. 나는 외국인사무소라는 호칭이 궁금해졌다. 뉴질랜드에서 이민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는 과거 New Zealand Immigration Service로 불린 적이 있는 Immigration New Zealand(이민성)이다. 이 정부 기관은 기업혁신고용부(Ministry of Business Innovation & Employment: MBIE) 소속이다. 소속 부서에 알 수 있듯이 이민 정책은 다양한 성격과 의미가 있지만, 뉴질랜드 정부는 국내 경제의 활성화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이민 정책을 결정하고 이민성 운영 방침을 정한다.

 

한국 정부 담당 기관의 영문 명칭은 뉴질랜드와 유사하게 Korean Immigration Service이다. 상식적으로 한국 이민성 정도로 한국어 호칭이 정해질 법한데 다소 거창한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이다. 뭔가 대민 서비스보다는 공무 집행 냄새를 풍기는 호칭인데 소속 부서도 법무부다. 이민(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의지보다는 불법 이민(자)을 예방하고 법에 따라 처벌하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소극성이 느껴지는 호칭이다. 영문의 ‘Immigration(이민)’은 어느 순간 ‘Foreigners(외국인)’로 둔갑했다. 이민이라는 용어가 주는 내외 간 경계의 모호성 혹은 체류 자격의 가변성은 사라지고, ‘우리’ 아니면 ‘외국인’이라는 고착적 경계의 용어가 대신 자리를 잡았다. 역시 이민이라는 용어에 거부감을 느낄 한국 원주민들의 정서를 고려한 한국 정부의 용어 바꿔치기 아닐까 생각한다. ‘저 까무잡잡한 사람들은 외국인들입니다. 앞으로도 우리와 같이 살 사람들이 아니에요’라는 뉘앙스를 풍겨 원주민의 거부감을 조금이라도 덜어 볼 요량으로 선택한 것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우회전 공화국, 대한민국

 

한국에 온 지 두 달이 되어 가지만 한국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은 여전히 도전이다. 신호등이 있어도, 신호등이 없어도 비슷하다. 오랜만에 방문한 한국의 거친 운전 문화는 지금도 적응이 안 되는 문화 충격이다. 아마 출국할 때까지도 적응이 안 될 것이다. 내 눈에 비친 한국의 운전 문화는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면 문명이 아닌 야만에 가깝다. 얼마 전에도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자전거에서 내려 근접 차량이 없을 확인한 후 자전거를 끌고 건너가는데 저만치부터 접근하던 차량이 내 앞으로 계속 접근하면서 경적을 울리는 것이었다. 감히 차량님이 직진 중인데 그것을 인지했음에도 그 길을 ‘고의로’ 가로막은 무모한 보행자에 대한 짜증과 분노의 표출이었다.

 

이것이 2022년 대한민국 운전 문화의 현주소다. 도로교통법 개정 전이나 개정 후나 상관없이 횡단보도에서의 보행자 우선권과 안전 보행권은 개에게나 주어버린 형국이다. 그런 운전자는 소수에 불과하므로 일반화하지 말라고 누군가는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오해하지 마시라. 이 대목에서 내가 일반화하고 싶은 것은 그런 사람이 소수가 아니라 다수라는 숫자의 확장이 아니다. 소수이지만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에 대한 기정사실화이다.

 

그런 소수가 있다는 것 자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수치스러운 문화다. 소수라고 자위하고 항변할 것이 아니라 zero가 아님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다른 선진국을 여행해 본 분들은 공감할 것이다. 횡단보도에서 사람이 건너는 데 차량이 자신이 먼저 지나가겠다고 보행자를 위협하는 운전자를 본 적이 있는가? 전혀 보지 못했을 것이다. 선진국이라면 상상조차 못 할 일이 ‘K-선진국’ 대한민국에서는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하기야 새벽 아파트 단지 안에서도 경적을 울려대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니 횡단보도에서 차량 우선 통행은 그들에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한국 교통 문화에 대한 부정적 경험과 인식을 가지고 있던 차에 얼마 전인 7월 12일부터 시행된 도로교통법 개정안에 눈길이 갔다. 많은 미디어에서 이번 개정안으로 보행자의 권리와 안전이 향상될 것을 기대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내 눈에는 눈 가리고 아웅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번 개정안 중 눈에 들어오는 항목은 두 개다. 하나는 횡단보도에서 보행자가 횡단 ‘의지’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차량은 멈춰야 한다는 조항이며, 다른 하나는 신호등 사거리 우회전 차량이 보행인의 보행에 우선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조항이다.

 

첫 번째 조항부터 살펴보자. 보행자가 횡단보도 입구에서 횡단 의지를 보였다는 것만으로 운전자는 멈춰야 한다? 위의 내 경험처럼 횡단보도를 이미 건너고 있는 보행자에게도 경적으로 분노를 표시하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보행자를 살짝 비켜서 가던 길을 계속 가는 운전자들에게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낌새를 보이면 멈추라고? 과연 지킬 수 있고, 더 나아가 법 준수를 강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만든 법 조항인지 궁금하다.

 

교통에 관한 한 한국은 무법에 가깝다

 

내가 보기에는 탁상행정이며 보여주기식 정책일 뿐이다. 현재 내가 목격하는 한국의 교통질서는 법의 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인도와 횡단보도를 점령하며 주차한 차량들, 주차금지 구역에서도 버젓이 주차한 차들 등. 다른 사회구성원을 위해 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 너무 많다. 주차 단속 등에 걸리면 재수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시민의 이런 준법정신 부재는 필연적으로 교통 문화의 부재를 수반한다. 앞 차량이 법을 준수하면서 횡단보도 앞에서 일단정지하면 뒤의 차량은 경적을 울려대기 바쁘다. 타인에게 불법 행위의 공범이 되기를 강요하는 문화다. 천박하다. 

 

두 번째, 신호등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는 차량의 횡단보도 횡단 보행자 보호 의무 조항이다. 아래 그림을 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이것이 보행자 안전을 위해 개선된 것이라고?”라는 의문이었다. 과거의 법 조항과 비교할 필요도 없이, 내 눈에 이 조항은 보행자 안전 관점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게 만드는 조항이다.

 

세로운 우회전 규정

 

새로운 법 조항에 따르면 한국에서 우회전 차량은 진행 방향에 ‘보행자가 안 보인다고 판단되면 전방 적색 신호등 혹은 횡단보도 녹색 신호등과 관계없이 언제든지 우회전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은가? 이 신호등 원칙을 뛰어넘는 상위 원칙은 ‘보행자가 없으면’이라는 조건부 원칙이다. 위 그림에서는 이 조건을 ‘보행자가 없으면’이라는 객관적 표현으로 서술했지만, 현실은 ‘운전자가 판단하기에 없으면’이다. 즉 운전자의 주관적 판단이다.  

 

그림 1. 우회전 직전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녹색이어도 ‘보행자가 안 보인다고 판단되면’ 운전자는 이 녹색 신호등을 ‘무시’하고 우회전을 위해 횡단보도를 지나갈 수 있다.

 

그림 2. 우회전 직전 횡단보도의 보행자 신호등이 적색이고 우회전 직후 횡단보도의 보행자 신호등이 적색이면 우회전이 가능하다. 물론 이 경우도 가로지르는 도로의 차량 흐름에 끼어들기 위해 우회전 직전 횡단보도를 점유한 채 대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림 3. 우회전 직후 횡단보도의 보행자 신호등이 녹색인 상태에서 보행자가 횡단할 경우 ‘횡단 종료 후 우회전 가능’이라고 한다. 횡단 종료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 그대로라면 보행자가 맞은편 인도로 완전히 이동한 상태로 이해되는데, 그림 1번처럼 횡단보도 녹색 신호등에서도 ‘보행자가 안 보인다고 판단되면’ 차량 통과를 허락하는 이번 법 조항을 고려할 때, 보행자가 맞은편 인도에 완전히 진입할 때까지 길게는 수십 초가 걸릴 수 있는 그 시간을 과연 ‘빨리빨리’ 운전자들이 기다려줄까? 자기 차 범퍼 앞의 횡단 종료로 이해하지 않을까?

 

그림 4. 우회전 직후 횡단보도의 보행자 신호등이 녹색이어도 그 앞까지 가서 ‘보행인이 안 보이다고 판단되면’ 통과할 수 있다.

 

그림 5. 가로질러 가는 차량도 없고 우회전 직전과 직후 보행자 횡단보도 신호 모두 적색이므로 가장 마음 편하게 우회전할 수 있다. 뉴질랜드 신호등 사거리에서 유일하게 우회전(뉴질랜드 경우 좌회전)이 허락된 경우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한국에서 우회전 차량은 우회전 직전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적색이면 그 횡단보도를 점거한 채 우회전할 기회를 노릴 권리를 가진다. 실제로 모든 우회전 차량이 그렇게 하고 있다. 우회전 직전 횡단보도 신호등이 바뀌어 보행인이 건널 때도 이 우회전 대기 차량은 당당하게 횡단보도를 점거한 채 자기 차량을 피해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행자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무엇이 개선될 것일까? 보행자 신호등이 녹색이어도 운전자 눈에 ‘보행인이 안 보인다고 판단되면’ 차량이 진행할 권리를 주는 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보행자 횡단보도 녹색 신호등에서 횡단보도를 지나가는 차량과 횡단하려는 보행자와 접촉 사고가 나면 당연히 차량 잘못으로 결론이 나겠지만, 보행자는 이미 다친 상황일 것이고, 운전자는 당시 자기 눈에는 ‘보행인이 안 보인다고 판단되어서’ 차량을 진행했다고 항변할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억지적 상황이 아니다. 실제로 적지 않은 경우 킥보드나 자전거가 보행자 녹색 신호등의 후반부에 서둘러 횡단보도에 진입한다. 그들에게 녹색 신호등은 곧 안전 신호등이기 때문에 그 신호등이 켜져 있는 한 횡단보도에 진입할 권리가 있다. 조금 전까지 없었던 보행자였지만 갑자기 등장한 것이다. 보행자도 마찬가지다. 인터벌이 긴 교통 신호등 사거리에서 보행자는 녹색 보행 신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멀리서부터 달려와 횡단보도를 건너는 경우가 자주 있다. 마찬가지로 조금 전까지 ‘안 보이던’ 보행자였다. 새로운 우회전 법 조항에서는 이들은 횡단보도 신호등이 여전히 녹색임에도 불구하고 마음 놓고 서둘러 진입하지 못하고 좌우 진입 차량을 살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보행자 녹색 신호등은 ‘절대 지존’의 지위를 가져야 한다. 보행자가 없을 때 진입이 가능한 횡단보도는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만 허락되어야 한다.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에서는 녹색이 켜져 있는 동안에는 ‘무조건’ 차량은 진입할 수 없어야 한다. 차량 통행이 전혀 없는 사거리에서 전방 신호등이 적색일 때 ‘좌우 가로질러 가는 차량이 없으면’ 직진해도 좋다는 조항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횡단보도 신호등만 차별하는가?  

 

그리고 우회전하겠다고 우회전 직전의 횡단보도를 마치 대기 공간처럼 여기는 풍조도 바뀌어야 한다. 가로질러 가는 차량의 움직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나아가 기다릴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고, 해결해야 한다. 예를 들어, 횡단보도의 위치를 변경해서라도 횡단보도는 보행자를 위해 항상 비어 있어야 한다. 이 경우 첫 번째 우회전 차량만 횡단보도를 지나쳐 앞에서 대기하고 그 뒤의 우회전 대기 차량은 횡단보도 진입하지 않고 뒤에서 기다려야 할 것이다. 

 

우회전 대기 동안 횡단보도를 점거한다

 

또 우회전 가능 여부를 알려주는 신호등이 별도로 그리고 꼭 필요할 것이다. 뉴질랜드는 직진 신호등이 아니면 좌회전(좌측통행이므로) 자체가 안된다. 가로질러 가는 차량이 전혀 없어도, 좌회전 직후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적색이어도 좌회전이 허락되지 않는다. 비효율적이다. 하지만 안전하다. 한국에서 뉴질랜드와 똑같은 규정 - 직진 신호에서만 우회전 가능 - 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많은 경우 차량 직진 신호에 우회전 직후 횡단보도 녹색 신호가 동시에 켜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기술적 문제이자 운영의 문제다. 전부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행자의 안전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가운데 효율적인 차량 흐름을 위한 아이디어 발굴과 적용에 그리 큰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그 결론은 지금보다 차량 흐름이 느려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당연하다. 그전까지 보행자의 위험을 무릅쓰고 운전자와의 공유를 허락했던 횡단보도 녹색 신호등을 온전히 보행자에게 돌려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개악이라고 욕하는 운전자가 있을까? “아니, 사람도 없는 횡단보도에서 왜 시간을 낭비해야 한대요?”라고 볼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을까?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한국이 여전히 부정적 의미의 접두사 K를 붙인 K-선진국에 그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무엇이 선진국인가? 주어진 수명을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다가 죽을 수 있는 나라 아닌가? 안전하고 건강한 삶을 향해 법을 바꾸는데 지금처럼 빠르지 않다는 이유로 비효율적이라고 비난한다면 그 사람은 선진국 시민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여전히 약육강식이 주 사회 작동 방식인 천민자본주의의 노예에 불과할 뿐이다.

 

차량의 효율적 흐름 - 점잖게 표현했지만, 최대한 빨리 가기 - 에 초점을 맞춘 현재의 한국 교통 문화는 시대적 흐름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차량의 움직임이 보행자의 움직임보다 경제적 측면에서 생산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보행자는 비경제적 주체 혹은 비생산적 인구다. 반면 차량은 경제적 주체 혹은 생산적 주체다. 경제를 위해서는 차량을 우선시해야 하는 풍조가 여기서 출발한다. 또 많은 경우 보행자는 차량 운전자라는 상대적 사회적 강자에게 통행 우선권을 양보해야 할 의무(?)를 진 사회적 약자 계층이다. 노인, 주부, 학생, 어린이 등. 궁극적으로는 시민의 안전보다 경제적 효율성을 우선시하는 이 기품이 바뀌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맞이하여 서구의 합리성(rationality)은 경제적 효율성(efficiency)으로 축소, 변질하였다. 인간을 위한 합리성 대신 경제적 생산성 향상을 위한 효율성 개념이 전면에 등장했다. 전두환식 ‘다소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효율성을 추구하는 풍조 탓에 보행자의 안전은 팽개친 채 차량의 흐름에 우선권을 부여한 현재 한국 교통 디자인과 문화가 자리 잡았다. 효율성을 강조하지만, 합리성은 오히려 찾아보기 힘들다. 내가 머무는 도시만 그런지 모르지만, 신호등 전환에 센서를 활용하지 않는다. IT 강국이라는 대한민국인데 신호등은 깡통 기계식으로 정해진 시간대로만 바뀐다. 그러다 보니 차량 흐름이 한가한 낮, 아무 차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차량 직진 신호가 수십 초 주어진다. 그 시간에 보행인은 뙤약볕 아래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린다. 

 

뉴질랜드 신호등 인접 도로에는 루프 센서(loop sensor)가 매설되어 신호등 전환의 효율성을 높인다

 

IT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첨단과는 거리가 먼 뉴질랜드일지라도 오클랜드의 대부분의 신호등 사거리 도로 바닥에는 센서가 설치되어 있다. 사거리에서 직진 대기하는 차량이 감지되는 않는 도로 쪽에는 직진 신호를 주지 않는 대신, 다른 차도 혹은 평상시 가장 흐름이 많은 도로에 default로 녹색 신호를 준다. 또 많은 경우 횡단보도 입구에는 횡단보도로 건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신호등 시스템에 알려주기 위한 버튼이 있다. 이 버튼을 누르면 신호등 시스템은 각 방향의 원활한 차량 진행 흐름을 막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빠른 시간에 보행자를 위한 횡단보도 녹색 신호를 준다. 왜 한국은 이런 IT 같지도 않은 단순 로직 기술을 적용하지 않을까? 보행인은 뙤약볕 밑에 기다려도 괜찮은 비경제적 주체이고 그들은 차량처럼 컴플레인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효율성’에는 머리를 쓰고 싶지 않은 걸까?

 

뉴질랜드 신호등에 부착되어 있는 보행자 버튼

 

한국에서 보행자의 안전한 보행 권리를 위해 인도와 횡단보도에서의 불법 주차를 예방하고 신고하기 위해 시민에게 어떤 대안이 있을까 잠깐 둘러보았다. 혹시나 하면서 막연하게 기대했는데 휴대전화 앱을 이용한 신고시스템을 행정안전부에서 운영하고 있어 반가웠다. ‘안전신문고’라는 앱이다. 반가운 마음에 보자마자 앱을 깔았다. 그런데 안드로이드와 애플 앱 모두 좋은 후기는 안 보였다. 최근일수록 더욱 안 좋은 후기만 눈에 띄었다. 더욱 맘에 들지 않는 것은 아래 후기에서 보는 것처럼 무사안일 공무원 특유의 영혼 없는 앵무새 답변이다. 보행자의 권리 더 나아가 유권자 시민을 대하는 한국 관료주의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한국 시민은 교통 문화 개선에 관심이 있으나 정부와 공무원은 그렇지 않은 듯 하다

 

앞으로 한국에는 자주 올 생각인데 변화가 있기를 간절기 기대한다. 한국 사회의 변화를 나는 운전 문화의 변화에서 대표적으로 느낄 수 있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다음에 올 때는 덜 조마조마하게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