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뉴질랜드 이야기

남녀불평등은 과거의 일. 그래, 맞아! (Gender Inequalities Are a Thing of the Past. Yeah, Right!)

김 무인 2020. 1. 18.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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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불평등은 과거의 일. 그래, 맞아!

(Gender Inequalities Are a Thing  of the Past. Yeah, Right!)

 

Vivienne Elizabeth

 

 

 

젊은 처녀로서 나의 엄마는 2차 대전으로 더욱 황폐해진 Glasgow의 슬럼을 떠나 뉴질랜드 정부의 이민 정책에 따라 1950년대에 뉴질랜드에 도착했다. 이 이민 정책에 따라 1947년부터 1975년 사이에 대부분이 영국 사람들로 구성된 77,000명의 이민자가 뉴질랜드로 이주했다. 엄마는 이주 대가로  뉴질랜드 정부로부터 2년간 간호사 일자리를 보장받았는데  당시 간호사와 교사는 여성이 일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장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이런 직장에 다니는 것이 평생의 경력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저 아내와 엄마로서 진정한 삶을 시작하기 전까지 잠시 거쳐 가는 과정이었다. 나의 엄마는 아버지와 결혼하자마자 야간 조 고정 근무 발령을 받음으로써 여성들에게 고용조건으로서 깊숙이 자리 잡은 이 사회적 규범의 실체와 직면했다.  유능한 간호사였음에도 엄마는 간호사 직을 그만두고 대신 소매업에서 새로운 직장을 구하게 된다. 몇 년 뒤 엄마는 첫 번째 아이를 가지면서 그 직장도 그만두고 풀타임 주부와 엄마가 되었다. 

 

나의 엄마의 여정 - 결혼 전 여성에게 개방된 몇 안 되는 직장 중 하나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 일을 한 후 아이를 가지면서 풀타임 주부 엄마가 되는 - 은 그녀 시대의 여성, 특히 파케하 여성,에게는 상대적으로 전형적인 사연이다.  당시 여성들은 케인즈주의의 전성기에 성인이 되었는데 여성(특히 중산계급 파케하 여성)은 집안의 무급 가사노동을 하고 남자는 가장으로서 공공 영역으로 나가 돈을 버는 노동의 남녀 분업이 이루어지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흔히 케인즈주의를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복지와 연계시켜 생각하는데 이 시대는 상대적으로 엄격한 성차별화와 직장과 가정에서의 뚜렷한 젠더 불평등이 존재하던 시대이기도 했다. 이 불평등은 법제화되었었다; 교육과 노동시장 같은 핵심 사회제도의 공식 규정; 그리고 사회적 규범들.


이글에서 나는 사회적 구분으로서 젠더가 21세기 초반 뉴질랜드에 사는 여성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구할 것이다. 현대 젠더의 영향력은 나의 엄마나 할머니가 살았던 시기의 영향력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상당한 차이 - 오늘날 여성은 더 많은 기회와 덜 명백한 제한을 경험한다는 사실 - 가 젠더 평등에 이바지했을까?  우리는 젠더 정의를 달성했을까?

 

 

달성된 해방: 사회 제약에서 자유 선택으로 (Liberation Achieved: From Social Constraint to Free Choice)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여성운동 이전에 성인기에 접어든 뉴질랜드 여성들의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 간의 차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과거 그녀들의 선택이 법과 제도적 규정들에 뿌리박힌 사회 문화적 규범들(norms)에 의해 상당히 제약되었던 시절과 법과 공식 제도적 규정에서 성차별이 발견되지 않는 현대 시점과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로 젊은 여성들은 어떤 영역이던 어떤 단계이든 상관없이 그들의 참여를 가로막는 어떤 공식적 장벽이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미용사,배관공,간호사,의사,사무직,매니저 혹은 CEO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 여성들은 ‘학교, 대학 그리고 직장에서 목표한 바를 달성하도록 격려받고 있으며 이 각각의 영역에서 성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이런 세대 간 비교는 젠더 불평등은 과거의 일이라는 포스트 페미니스트의 주장에 이용됐다. 뉴질랜드를 포함한 서구 문화를 지배하는 이런 포스트 페미니스트 환경 속에서 젊은 여성들은 선택,자유 그리고 개인의 권리 강화를 쟁취한 성공적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 운동의 수혜 상속자들로 비추어진다. 표현을 살짝 달리하면 포스트 페미니스트 담론은 오늘날의 젊은 여성은 억압받는 카테고리인 ‘여성’의 소속 구성원이 아니라 사회적 구분으로서의 젠더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개인들이라고 단정한다. 포스트 페미니스트의 표현을 따르면 이런 해방 상황에서 젊은 여성들이 페미니스트 행동을 추구하는 것에는 더 이상 정당한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성적 계층화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증거(Roast Buster 스캔들과 ponytail 사건)를 젊은 여성들은 오늘날에도 직면하고 있음에도 페미니스트 정치는 금지되고 있다. 따라서 비판자들은 포스트 페미니즘이 현대의 서구 젠더 질서의 억압적 측면을 보이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포스트 페미니즘은 신자유주의와 함께 강력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포스트 페미니즘과 신자유주의는 모두 높은 단계의 개인주의로 특징지어지는 사회 질서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그들은 개인들이 외부의 ‘압력, 제약 혹은 영향’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다른 말로 포스트 페미니즘과 신자유주의는 둘 다 삶을 구성하는 젠더와 다른 사회적 구분들의 힘이 모두 사라진 사회 세계를 상상한다. 이런 관점은 개인들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합리적이고 자기 관리를 할 줄 아는 자주적 존재라는 사고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신자유주의와 포스트 페미니즘과의 시너지는 오늘날 여성들을 경쟁력 있고, 자신을 믿고 도전적인 여성으로 상상하게끔 한다. 결과적으로 여성성에 대한 규범적 사고는 재종합되어서 지금은 용기, 단호함 같은 과거 오직 남성성과 연관되어 반 규범적 여성성으로 치부되었던 특질들을 수용한다. 

 

자주적이고 사회적으로 속박받지 않는 개인들에 대한 유사한 이해는 Ulrich Beck, Elizabeth Beck-Gernsheim 그리고 Anthony Giddens 같은 개인화 이론가들의 이론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이들을 따르면 사회적 구분(젠더, 성적특질 그리고 ethnicity 등)과 사회제도(삶의 과정, 노동시장 그리고 가족 등)의 영향력은 소멸하였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의 삶은 그들의 계급, 젠더 그리고 문화적 위치에 의해 이미 결정된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공식에 구속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은 ‘선택’과 ‘스스로 해라(do-it-yourself)’를 조합해서 자신의 삶을 꾸려 나아갈 과제를 안게 된다. 표준적 전기(biography)와 선택 전기의 핵심적 차이는 선택 전기가 젠더, 계급 그리고 에스닉 구조에 영향을 받는 표준적 전기보다 ‘더 내부 지향적(more internally referential)’이라는 점이다. 결론은, Giddens에 따르면,  ‘우리의 모습은 현재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뉴질랜드 여성들(남성들도 역시)의 삶이 그들이 사는 사회-문화적 환경에 제약받음 없이 자기발명 과정의 결과물이라는 것이 실제 맞는 말인가? Brannen과 Nilsen 같은 개인주의화 이론비판가들은 이런 주장은 오직 가치 있는 사회적 경제적 자원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특혜받은 자들만이 자신들의 삶을 열린 선택의 장에서 펼칠 수 있을 뿐이라고 비판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특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다는 현실적 제약들에 직면하면서 자신들이 특혜 계층이 되지 못한 불운을 탓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이런 논리는 불공평함 혹은 현재 진행 중인 불평등에 대한 논의의 장을 닫아 버린다; 젊은 여성들은 ‘자 이제 너희는 모든 것을 가졌으니까 불만을 품을 아무 이유가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다음 섹션에서 나는 포스트 페미니스트와 신자유주의의 주장이 얼마나 현실을 반영하는지 뉴질랜드의 현재 노동시장에서의 젠더 차이와 젠더 불평등 정도에 관한 탐구를 통해 알아볼 것이다.

 

 

해방이 달성됐다고? 그래 맞아! (Liberation Achieved? Yeah, Right!)

 

2015년 8월 30일 Sunday Star Times는 ‘조산사들(midwives)이 임금 차별에 반대하여 소송을 제기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거의 100% 여성으로만 구성된 조산사 직업을 대표하는 기관으로서 뉴질랜드 조산사 양성 대학은 그들의 임금 차별 문제를 고등법원으로 가져갔다. 대학 측은 미디어 발표를 통해서 지역 공동체 소속 조산사는 그 임금이 ‘저 숙련 혹은 비숙련 노동자의 임금과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이 조산사 대학의 행동은 여성이 지배적인 다른 직종인 뉴질랜드 간호사 협회와 뉴질랜드 교육 협회를 자극하여 이들 역시 임금 형평을 위한 유사한 행동을 취할 것을 예고했다.

 

‘임금이 노동자들이 그들의 노동을 돈을 위해 파는 사회에서 그들 노동의 경제적 가치와 지위에 대한 가장 직접적 표현’이라고 한다면 현대의 젠더 동일 임금에 대한 요구는 뉴질랜드가 과연 가부장적 젠더 질서 - 여성과 여성적인 것들에 대한 과소평가 - 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대처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젠더 임금격차(Gender Pay Gap:GPG)은 남녀 간 임금 불평등의 정도를 측정하는 국제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수단이다. 통상 GPG는 ‘여성들 임금 수준을 남성 임금 대비 부족분을 비율로 표시한다.’ 이 간단한 정의 기술에도 정확히 어떻게 GPG가 정해져야 하는지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  시간당, 주당 혹은 심지어 연간 임금을 기반으로 해야 하는가? 풀타임만을 고려해야 하는가? 아님 파트타임 노동자도 포함해야 하는가? 그리고 비교 기준 임금으로서 중간(median) 임금을 표준으로 해야 하나 아니면 평균(mean) 임금으로 해야 하나? 

 

GPG는 이 계산 방식에 따라 결과 수치가 크게 달라짐을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2015년 6월의 뉴질랜드 소득 서베이의 결과를 가지고 남녀 ‘시간당 평균 임금’을 측정했을 때 GPG는 14.1%인 반면 ‘시간당 중간 임금’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11.8%로 줄어들었다. 흥미롭게 시간당 중간 임금을 기준으로 한 GPG는 지난 수년간 증가 추세에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비록 큰 폭은 아니지만 GPG로 본 남녀 임금 불평등은 악화하고 있다. 만약 GPG를 남녀 풀타임 노동자의 ‘주당 중간 임금’을 기준으로 계산했을 때 갭은 더 커져 17.0% (혹은 $189/주)가 되었고 파트타임 노동자를 포함할 경우 GPG는 26.6%로 치솟았다. 

 

GPG를 결정하는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기준은 노동자들의  시간당 중간 임금(뉴질랜드에서 일반적으로 쓰임) 혹은 풀타임 노동자들의 시간당 중간 임금(OECD)이다. 계산 기준으로서 중간 임금을 선호하는 이유는 이 것이 예외적으로 높은 수입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이 덜하기 때문이다.그러나 매우 높은 수입을 버는 사람들의 압도적 다수가 남자임을 고려했을 때 GPG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중간 임금을 사용하는 것은 남녀 차별적 직업 계층화가 임금의 남녀 차별에 기여하는 것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 또한 주당 소득 대신 시간당 소득을 계산하는 것은 무급 가사노동 때문에 남성들에 비해 보다 자주 파트타임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여성들의 기회비용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 이 기회비용은 의미가 크다: 당장 여성의 구매력을 떨어트리고 은퇴 이후를 대비한 저축 능력을 감소시키며 어떤 여성들에게는 남성 배우자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를 증가시킨다.

 

여성부의 발표에 의하면 30%의 GPG는 직업의 수직적 그리고 수평적 분리(segregation)에서 기인한다. 수직적 분리(조직 계층에서 고위직에 남성이 대부분인 현상)와 수평적 분리(남녀가 서로 다른 직업과 산업에 몰리는 현상)는 뉴질랜드 노동시장에서 지속하는  두드러진 특징들이다. 이 결과 노동시장은 이런 남성과 여성이 하는 일 측면에서 계속되는 젠더 차이와 그들이 받는 사회적 인정과 보상에서 지속하는 젠더 불평등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이 지속하는 여성 지배 직군에 대한 과소평가 문제는 뉴질랜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England는 미국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여성 지배 직군과 남성 지배 직군 간의 임금 격차는 ‘고용주가 여성이 지배적인 직장에 대해 편견으로 있기 때문이다’ 라고 지적한다.

 

남녀 차이와 불평등은 노동자 삶의 초반부터 등장한다. 뉴질랜드에서 젊은 여성의 비전통적 직종에서의 훈련생 비율은 놀랄 정도로 낮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2010년 기준 여성은 건축과 건설 분야에서 훈련생의 0.3%, 엔지니어링에서 1.2% 그리고 자동차 엔지니어링에서 2.5%만을 차지할 뿐이다. 비록 대학 교육 학생 수에서 여성이 남성을 능가하지만, 이들이 공부하는 분야에서 주목할만한 차이가 남녀 사이에 발견된다: 여성은 엔지니어링, 수학, 컴퓨팅, 건축 그리고 건설에서 남성보다 숫자가 적었지만 교육, 법, 사회과학 그리고 건강에서 남성보다 숫자가 많다. 

 

다양한 분야에 걸친 여성의 높은 대학 교육 참여에도 그들은 종종 그들의 학업으로부터 남성들이 받는 것 같은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학사 학위 취득 후 5년 뒤 여성 졸업생들은 그들의 동료 남성 졸업생 소득의 92%만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젠더 불균형은 심지어 여성이 지배적인 교육, 간호 그리고 법 영역에서도 명백하다. 2014년 자료를 보면 교육대학 졸업 후 5년 뒤 여성 졸업생의 GPG(연 중간 소득 기준)는 7.6%, 간호대는 14.4% 그리고 법대는 6.1%였다. 예외적인 분야는 공연예술, 엔지니어링, 수의학 그리고  정치학 및 정책연구로 이 분야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더 높은 수입을 기록했다.

 


선택의 시대에서 전통(Tradition in an Era of Choice)

 

노동시장에서의 남녀불평등은 무슨 과목을 공부할지, 무슨 일을 할지, 부모가 될지 그리고 ,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자녀를 돌볼지 등과 같은 문제에서 남녀 모두 자유롭게 선택한 결과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술했듯이 포스트 페미니스트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렇게 해석하는 것을 권장한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우리 삶의 선택이 사회화와 금전적 자원의 분배 그리고 젠더에 대한 문화적 기대와 믿음과 같은 남녀 차별적 사회 과정에 의해 제약되는 방식을 가리고 있다. 이런 사회 과정들의  관련성은 다음의 토론을 통해 명확해질 것이다.

 

생명선(Lifeline)은 고등학교의 마지막 학년을 남겨 둔 16~18세 사이의 학생들 100명- 23명의 남학생과 77명의 여학생 - 을 상대로 2007년 뉴질랜드에 행해진 연구 프로젝트이다. 이 연구의 목적은 젊은이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미래를 그려보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참가자들은 현재 자신의 삶, 80세가 되었을 때 자신의 삶 그리고 그 사이 기간 - 18-25, 25-40, 40-55, 55-80 - 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기술할 것을 요청받았다. 주목할만하게도, 이 젊은 남녀들의 사연은 매우 유사했다: 성인 초기는 자아발견과 자아개발의 시기; 뒤를 이어 배우자 선택과 가족 구성; 중년의 공고화; 마지막으로 말년의 그 간 노동의 대가에 대한 향유.

 

그렇지만 앞으로 일할 직장과 가정생활이 그들 삶에서 차지할 위치 등에서는 남녀 간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남학생들은 노동시장에서 계속 남아 있는 것을 전제로 그들의 미래 직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반면 여학생들은 향후 양육 책임을 염두에 두고 노동시장의 참여와 이탈이 상대적으로 쉬운 여성 지배적인 직종에서의 직장 생활을 다소 두리뭉실하게 기술했다. 남학생들이 자녀 양육을 거론할 때 - 다 그런 것은 아니다 - 는 명확히 엄마가 ‘집에 머무는’것을 단정했다. 

 

이 연구 발견 결과는 많은 젊은이들이 여전히 전통적 남성 여성 직업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을 가지고 있다는 다른 연구 결과와 일치한다; 남성이 밖에서 돈을 벌고 여성은 집에서 가사 노동을 한다; 일반적으로 그들의 미래 삶을 전통적 남녀 역할 구분에 기초하여 상상한다. 이처럼 뉴질랜드와 다른 서구 국가에서 보이는 젊은이들의 미래 삶 속에 존속하는 남녀 차이는 남녀구분이 되는 삶을 창조 그리고 재창조하는데 사회 문화적 규범이 지속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현대의 젠더 규범은 20세기 중반과 같이 엄격한 것도 아니고 제도적으로 강제되는 것도 아니며 사회적으로 의무적인 것도 아니지만, 여전히 남자와 여자는 각각 어떤 식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기대를 여전히 의식하고 있다. 이 규범의 힘과 이로부터 파생된 기대는  제도의 강제력만큼이나 우리가 무엇이 되고 싶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와 같은 우리의 바람을 형성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한다. Foucault가 말한 것처럼 실제로 권력은 거부권(veto)이나 ‘거절(no)’의 형식을 통할 때보다 우리의 바람과 그에 이어지는 선택을 통해서  행사될 때보다 효율적이다.

 

그러나 Schmidt의 누가 아이를 양육할 것인가를 놓고 첫 부모가 내린 결정에 관한 연구에서 보여지듯 사람들의 선택 과정에서 제약의 역할을 무시하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최근의 사회변화들은 막 부모가 되려는 이성커플은 전형적으로 누가 주 소득원이 되고 누가 주 양육자가 될 것인지를 서로 토론한다; 대부분의 커플은 이제 더는 남자가 돈을 벌고 여자가 자녀를 돌봐야 한다고 전제하지 않는다. 대신, 노동분업이 협상과 선택의 어젠다가 된다. 뉴질랜드를 포함한 많은 서구 국가들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전통적 노동분업의 현대적 버전이 흔하게 관찰된다. 왜 이런 사회적 패턴이 자꾸 재생산되는지에 대한 연구가 있다. 

 

2008년 Schmidt는 오클랜드에 살면서 처음으로 아기를 가진 중산계급의 이성커플을 인터뷰하면서 이들에게 아기를 돌보기 위해 누가 그리고 얼마나 직장을 쉬는지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이 커플들이 내린 결정의 이유는 그들의 선택이 뉴질랜드 노동시장의 구조적 조건 - 특히 남자의 더 높은 수입 - 에 의해 강하게 영향받았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여자가 (생물학적으로 기질적으로) 아기 양육에 더 적합하고 실제 많은 여성이 집에 머무는 것을 강하게 선호한다는 사회적 규범 역시 이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노동시장의 구조적 조건들과 문화적 육아 규범에 뿌리를 둔 부모의 선택은 Schmidt의 연구에 참여한 엄마와 아버지에게 많은 남녀 구별적 결과를 가져왔다. 엄마는 밤에 깨어나고, 의사를 만나고, 관련된 집안일을 하는 등의 대부분의 ‘아기 관리’를 맡아서 하는 한편 아버지는 조력자로 엄마를 돕는다. 따라서 누가 집에 머물고 누가 밖에서 일할지 여부에 대한 부모의 결정은 주 양육자로서의 엄마와 조력자로서의 아버지라는 전통적 남녀 역할 구분의 기초를 형성한다. 

 


결론 (Conclusion)

 

젠더가 여성의 삶, 남성의 삶 역시, 에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상당 부분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여성운동 덕분에 매우 중요한 방식으로 변해 왔다. 특히 비록 ethnicity와 계급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오늘날의 젊은 여성은 더 넓은 가능성의 지평을 경험하고 있다. 젠더의 구조적 영향은 여전히 젠더 차이(예, 남자와 여자가 하는 일의 종류)와 젠더 불평등(예,그들이 받는 사회적 인정과 금전적 보상에서 차이)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차이들과 불평등은 남녀 모두의 삶 그리고 물론 자녀의 삶에도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나라에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