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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와 어르신의 Dynamics
머리말
이번 주초 미국 LA에서 열린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주요상이라 할 수 있는 각본상 감독상 작품상을 거머쥠으로써 한국 영화뿐만 아니라 세계 영화계에서도 기념비적인 사건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같은 영화를 두 번 보지 않는데 기생충은 이미 두 번보았고 아마 한번 쯤 더 볼 것 같다. 이날 시상식 중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는 장면은 감독상 수상 소감 때 봉준호 감독이 자신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영화계 선배이자 영화 ‘ The Irishman’으로 같은 감독상 후보에 오른 노장 감독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를 치켜세우는 장면이었다.
봉준호가 마틴 스콜세지를 역사적 순간에 제대로 대접한다
이 화기애애한 장면은 예정에 없이 나로 하여금 꼰대와 어르신을 소재로 한 이 글을 쓰게끔 하는 촉발제가 되었다. 가끔 들르는 한국의 온라인 커뮤니티에 이 훈훈한 장면이 소개되면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Marvel Studios에서 제작하는 슈퍼히어로를 주인공으로 하는 연작영화(MCU:Marvel Cinematic Universe)들에 대한 비판으로 역풍을 맞고 있다는 소식도 함께 전했다. 이 포스트의 댓글에서도 마틴 스콜세지가 꼰대 발언을 한 것이 맞다라는 주장하는 이도 있어 흥미로웠다. 평상시 꼰대의 기준은 무엇이냐는 생각을 하던 차라 과연 마틴 스콜세지의 주장이 꼰대질을 한 것이었는지 전문을 읽어 보았고 그리고 다소 길지만, 번역을 해보았다. 아래는 마틴 스콜세지가 2019년 11월 4일 New York Times에 기고한 글이다.
이게 과연 꼰대질일까?
마틴 스콜세지: 마블 영화는 영화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설명할께요
10월 초 영국에 있을 때 Empire 잡지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마블 영화들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대답했죠. 그 영화 중 몇 개를 보려고 시도했는데 그것들은 제 취향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고 평생 사랑해왔던 영화들이라기보다는 테마공원에 가깝게 보였기에 저는 그것들이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몇 사람들은 제 대답의 마지막 부분을 가지고 모욕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제가 마블(Marvel)을 증오하는 증거로 여기려는 것 같은데 제 말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다면 저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네요.
많은 프랜차이즈 영화들이 상당히 재능있고 예술성 있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스크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 영화에 관해 관심 없는 것은 제 개인 취향과 성격의 문제입니다. 만약 제가 젊었다면 그리고 만약 제가 후세에 태어났다면 제가 그런 영화를 좋아하고 더 나아가 제가 직접 만들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 지구가 알파 센타우리(Alpha Centauri)로부터 떨어진 만큼 마블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 MCU) - 월트디즈니(Walt Disney)의 자회사 마블 스튜디오(Marvel Studios)에서 제작하는 슈퍼히어로 프랜차이즈(캐릭터와 세계관을 공유하며 내용에 연계성이 있는 시리즈) 영화물 (역주) - 와 는 관계가 먼 영화 감각을 키워오면서 자랐습니다.
저에게,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영화제작자들에게 그리고 나와 같은 시기에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던 친구들에게 영화는 미적, 감정적 그리고 영적 계시(revelation)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등장 인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 사람들의 복합성과 그들의 모순적이며 때론 역설적 본성,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다 갑자기 서로 진실을 보는 방식 등.
영화는 스크린에서 기대치 못 한 것들을 직면하는 것에 관한 것이자 생활 속에서 극화되고 해석되는 것이며 무엇이 예술 형식으로 가능할 것인지에 관한 감각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겐 핵심이었습니다: 영화는 예술의 형식이었습니다.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습니다만 우리는 영화가 문학 혹은 음악 혹은 춤과 같은 것이라고 반박했죠. 그리고 우리는 예술은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 가령 Sam Fuller의 “The Steel Helmet”, Ingmar Bergman의 “Persona”, Gene Kelly and Stanley Donen의 “It’s Always Fair Weather”, Kenneth Anger의 “Scorpio Rising”, Jean-Luc Godard의 “Vivre Sa Vie” 그리고 Don Siegel의 “The Killers”.
혹은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영화에서 - 아마 여러분은 히치콕 역시 연작 영화 제작자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히치콕이 우리의 프랜차이즈였을지도요. 히치콕의 모든 영화는 나오는 것마다 사건이었죠. 오래된 극장에서 가득 찬 관객들과 함께 “Rear Window”를 보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그것은 관객들과 영화사이의 케미스트리에서 창조된 사건이며 우리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몇 히치콕의 영화들은 테마공원 같기도 했습니다. 가령 실제 놀이공원의 회전목마에서 클라이맥스가 전개된 “Strangers on a Train” 그리고 개봉 첫날 자정에 보았던 “Psycho”는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놀라고 전율을 느끼기 위해 영화를 찾았고 그들은 실망한 적이 없었습니다.
6,70년 후에도 여전히 우리는 이 영화들을 보고 또 감탄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영화들을 다시 찾는 이유가 전율과 충격 때문일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North by Northwest”의 세트피스는 대단하지만 서사의 중심에 있는 고통스러운 감정 혹은 극 중 Cary Grant의 상실감 없이는 이 세트피스는 역동적이고 우아한 구성과 컷의 연속에 불과할 것입니다.
“Strangers on a Train”의 클라이맥스 역시 대단한 것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여운을 남기는 것은 두 주인공들의 상호교감과 Robert Walker의 심오한 불안정 연기입니다.
일부 사람은 히치콕의 영화들도 반복적이라고 말하는데 아마 맞을지 모릅니다 - 히치콕도 그런 생각을 했었고요.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오늘날 프랜차이즈 영화의 반복성은 다른 것입니다. 영화를 정의하는 많은 요소가 마블 영화들에도 있습니다. 거기에 없는 것은 계시(revelation), 미스터리 혹은 진정한 감정적 위험입니다. 위험해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 영화들은 특정 형식의 수요를 만족하게 해주기 위해 만들어졌고 제한된 숫자의 주제들의 변형들로 구성되었어요.
마블 영화들은 명목상 속편이지만 정신적으로는 리메크입니다. 그리고 영화 내 모든 것들은 공식적으로 제약을 받는데 다른 방식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게 현대 연작 영화의 본질입니다: 시장조사, 관객테스트, 검사, 수정, 재검사 그리고 소비될 준비가 될 때까지 재수정되죠.
다른 말로 하면 이 마블 영화 시리즈는 Paul Thomas Anderson 혹은 Claire Denis 혹은 Spike Lee 혹은 Ari Aster 혹은 Kathryn Bigelow 혹은 Wes Anderson의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 영화 감독들의 영화를 볼 때 나는 전혀 새로운 것과 기대치 못한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명명할 수 없는 경험의 영역을 볼 것이라는 기대를 합니다. 움직이는 이미지와 소리로 전달할 수 있는 서사에 대한 지평이 넓어집니다.
그렇다면 아마 여러분은 뭐가 문제냐고 물어보고 싶을 것입니다. 슈퍼히어로 영화들과 다른 연작 영화들 그냥 두면 안되냐고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미국과 세계의 많은 곳에서 여러분이 커다란 화면을 통해서 뭘 보고 싶을 때 이들 연작 영화들이 여러분들의 첫 번째 선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영화 전시공간의 위기이며 어느 때보다 독립극장이 적습니다. 방정식은 뒤집혀 이제 스트리밍이 주 전달 수단이 되었습니다. 극장의 관객을 위해 커다란 스크린을 위한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영화감독을 전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그 감독 중에 최근 넷플릭스를 위한 영화를 만든 저도 포함됩니다. 그 영화 덕분에 저는 우리 방식에 따라 “The Irishman”을 만들 수 있었고 저는 그 사실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감사하게도 상영관을 확보했습니다. 제 영화가 더 큰 스크린에서 장기간 상영되길 원하느냐고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누구와 함께 영화를 만들지 간에 대부분 멀트플렉스의 상영관들은 연작 영화들로 채워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The Irishman
만약 여러분이 이런 현상이 간단히 수요와 공급의 문제이고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한 것뿐이라고 말한다면 이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건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문제입니다. 만약 사람들에게 한 가지만 주어지고 그것만 계속해서 팔 때 사람들은 당연히 같은 것을 이후에도 더 찾게 됩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또 그렇다면 그냥 집에 가서 넷플릭스 혹은 아이튠즈 혹은 훌루(Hulu)에서 원하는 것을 볼 수 있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가능하지만, 영화감독이 애초 의도한 빅 스크린은 아니죠.
다 알다시피 지난 20여 년간 영화 산업은 전방위적으로 변화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섬뜩한 변화는 밤에 아무도 모르게 일어났습니다: 위험의 점진적인 그러나 지속적인 제거. 오늘날 많은 필름은 즉각적 소비를 위해 완벽히 제조된 상품입니다. 그것 중 많은 것은 재능있는 개인들로 구성된 팀에 의해 만들어졌고요. 하지만 그들은 영화에 필수적인 것을 빠뜨리고 있습니다: 개별 창작자들의 합쳐진 비전. 왜냐하면, 물론 개별적 창작자(artist)들은 모든 것들 중 가장 위험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영화가 보조금을 받는 예술 형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이 잘 유지되고 있을 때 창작자와 투자자 간에는 지속적이고 묵직한 긴장이 있었지만, 이 긴장은 우리로 하여금 역대급의 영화를 만들게 한 생산적 긴장이었습니다 - 밥 딜런의 표현을 따르자면 그것들 중 최고는 “영웅적이고 선견지명적”이었습니다.
오늘날 그 긴장은 사라졌고 영화 산업에는 예술에 대한 질문에 무관심하고 영화의 역사에 대해 투자자로서의 거만한 태도를 보인 자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슬프게도 현재 우리는 두 별도의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 시청각 오락 그리고 영화. 때로 이들은 겹치긴 하지만 그런 일은 갈수록 드물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한 쪽의 경제적 지배가 다른 한쪽을 소외시키고 더 나아가 경시하는 데 이용되고 있음을 우려합니다.
언젠가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거나 막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현재 상황은 예술에 잔인하고 비우호적입니다. 이 단어들을 쓰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저를 끔찍한 슬픔에 빠지게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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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마블시리즈를 비판하는 사람은 올해 77세인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만이 아니다. 영화 타이타닉과 아바타를 만든 James Cameron(66세)도 두 시간 동안 도시를 파괴하는 초인적 남성들 말고도 할 이야기가 많지 않으냐면서 이런 류 영화의 피로감을 말했으며 영화 버드맨(Birdman: Or (The Unexpected Virtue of Ignorance))과 레버넌트(The Revenant)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2회 연속 수상했고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받은 2019년 칸느영화제 심사위원장으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멕시코 출신 영화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Alejandro González Iñárritu)(56세)도 이런 수퍼히어로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힘 있는 자들이 자신들과 다른 것을 믿는다는 이유로 힘없는 다른 자를 제거하는 우경화 철학을 바탕에 가지고 있는 문화적 집단학살(cultural genocide)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황금종려상 수상 후 칸 심사위원장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와 봉준호
꼰대에는 동서양이 없다
다시 마틴 스콜세지의 기고문으로 돌아가자. 그의 마블시리즈 영화는 영화가 아니라는 주장은 꼰대질일까? 그의 기고문에 달린 1,950개의 댓글(2020년 2월 13일 현재) 중 뉴욕타임스 편집자가 뽑은 댓글 중 첫 번 째는 이렇게 시작한다.
Lyle Greenfield New York, NYNov. 5, 2019 Times Pick
“이 주장은 구세대의 말 머리를 연상케 한다: “내가 젊었을 때는 말이야…우리는 쓰레기가 아닌 ‘진짜’ 음악을 들었고,,, 하루종일 유튜브나 쳐다보는 대신 ‘진짜’ 책을 읽었고, 침대에서 중국에 있는 누군가와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밖에’ 나가 운동을 했지”
(This pretty much reminds me of a generations-old opening line: "When I was your age..." ("...we listened to REAL music, not this crap...we were reading ACTUAL books, not staring at YouTube all day...we went OUTSIDE and played games, not locked in our bedrooms playing video games with someone in China..."))
개인적으로 마블 영화시리즈를 본 적이 없으며 - 한 두 편 정도 봤을 수 있는지 모르지만, 기억이 없다 - 영화 애호가도 아니기에 마틴 스코세지의 지적이 ‘꼰대질’에 해당하는 것인지 아니면 적법한 문화평론에 해당하는 의견 개진으로 봐야 하는 지에 대해 판단을 할 수 없다. 제한된 지식으로는 모더니즘 시대에는 예술이 자본의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자본의 영향력으로 일정 부분 독립하여 독자적 예술성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했던 당시와 비교하여 자본에 종속되어 파편화된 이미지의 조합만 생산하는 것처럼 보이는 천박한 포스트모던 영화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되기는 하다.
하지만 확실히 나이 든 사람이 과거 자기 살던 때의 회상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비판하는 모양새가 되면 동서양 구분 없이 꼰대 소리를 듣는 것 같다. 김광석의 노래를 좋아하는 나같은 세대가 맥락 없어 보이는 영어와 한국어 가사의 혼합에 억지로 혀를 굴려 영어 랩처럼 들리게 하려는 한국어 랩이 혼재된 보이그룹의 노래를 좋아하는 십 대 소녀에게 그것도 노래냐고 한마디 한다면 정말 100% 꼰대 소리를 들을 거는 같다.
교민들도 뉴질랜드에 살면서 꼰대질의 경험을 한다. 한편으로는 꼰대질을 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꼰대질을 당하는 처지로서. 예를 들어, 뉴질랜드에 이민와서 자녀 다 성장해서 분가할 때까지 한국의 사회적 지위에서 두어 단계 내려온 위치에서 자영업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느라 이민 오기 전 한국 내 성공한 동기 혹은 친구들과 달리 딱히 내세울 장년기의 업적이 없는 교민은 자신의 낮아진 자존감과 존재감에 대한 보상심리에서 주변 교민들과의 인적 교류에서 오지랖을 떨다 일정 선을 넘어 오버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주관적 관찰에 의하면 이들은 지인과의 모임에서 듣는 역할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들이 자기 얘기를 들어주는 것에 집착을 보이는 인터넷 용어로 소위 ‘관종(관심 종자의 준말로 남의 이목을 끄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칭함)이 되며 이들은 많은 경우 꼰대화 된다.
반대로 꼰대질 당하는 경우는 소수민족 이민자 차별과 맞물리는 경우가 많다. 가령 현지인들과 접촉을 할 때 많은 경우 그들은 대화 말머리를 ‘In New Zealand, 블라 블라….(뉴질랜드에서는 말이야,,)로 시작하면서 자신과 대화하는 아시안이 뉴질랜드에서 몇 년을 살았는지 뉴질랜드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있는 지에 대해 파악할 생각을 아예 하지 않고 무조건 가르쳐야 하는 대상으로 스테레오타입화된 인식을 하고 접근한다. 또한, 자신은 친절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패권적 온정주의에 기초해 마치 물가에 노는 3살 어린이 아이처럼 아시안 이민자들을 밥상머리에 앉혀놓고 미주알고주알 가르치려는 현지인 역시 꼰대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꼰대질은 절대적 진위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는 불가지론자와 같은 철학적 통찰을 통해서 벗어날 수 있는 난이도 있는 증상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타인이 나와 다른 처지에 놓여있고 따라서 그 처지에 놓였던 경험이 없는 내가 모르는 타인의 생각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간단히 말해 타인과 나는 다를 수 있다는 것만 인정할 수 있으면 된다. 이글은 따라서 꼰대에서 벗어나기 위한 비교적 간단한 비결에 대한 글이 아니라 꼰대와 연계되어 ‘어르신’ 호칭이 어떻게 한국 내 민주주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한 나의 평소 지론을 밝힌 것이 주 초점이다.
꼰대와 어르신
꼰대와 달리 어르신이란 호칭 그리고 그 호칭에 담긴 의미를 포함한 어떤 사회적 관습(practice)도 뉴질랜드에는 없어 보인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공적 영역(public sphere)에서 어르신이라는 용어가 보편화화는 것에 대해 질색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어르신’이라는 호칭의 규범성(normativity)때문이다. 어르신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나이를 먹었다는 노인이라는 중립적 개념을 떠나 그 나이에 걸맞게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윤리적(ethical) 판단이 개입(embedded)된 용어이다. 즉 어르신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그 순간 그 호칭을 한 상대적으로 연하의 사회구성원은 그 ‘어르신’과 비교, 정치적 권력의 열세에 놓이게 된다. 일반 사회생활에서 이 권력의 열세는 쉽게 드러난다. 가령 ‘어디서 젊은 놈이 꼬박꼬박 말대꾸여?’식이 바로 그것이다.
미풍양속으로서의 노인 공경은 철저하게 사적(private) 영역에 머물러야 할 문화적 관습이다. 이것이 한국의 전통적 유교문화와 맞물려 마치 이 문화가 공적(public) 규범에 이식되는 것이 진보적인 것처럼 혹은 이상적으로 여기는 것은 착각이자 실수이다. 20세기에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식인 자유민주주의를 도입했든지 공산주의의 정치적 형식인 공산당 일당 민주주의를 도입했든지 상관없이 민주주의가 실패한 국가들의 문제는 수직적 권위주의(hierarchical authoritarianism)이다. 특히 아시안 국가들은 21세기인 지금도 리버럴 사회의 단계를 오랜 시간을 가지면서 탄탄하게 경험하지 못한 탓에 아시안 국가 특유의 전통적 수직적 문화가 지금도 호시탐탐 리버럴 민주주의의 평등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어르신 호칭은 이처럼 어렵게 뿌리를 내리려는 한국 내 사회구성원 간 횡적으로 평등한 사회구성원 구조를 위협하는 존재이다. 정책 이름 자체에 어르신을 위한 정책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이를 반대하는 이들은 그럼 노인들을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란 말인가? 정책의 입안 과정은 정치 세력 간 한정된 자원을 놓고 벌이는 치열한 경쟁의 장이다. 만약 한 정책에 대해 세대 간 이해관계가 엇갈린다면, 가령 노후 연금 정책과 청년들의 실업 수당, 젊은 유권자와 노인 유권자 간의 힘겨루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같은 사회구성원으로서 젊은 구성원과 나이를 먹은 구성원간의 경쟁인데 이 대목에서 뜬금없이 ‘어르신’이라는 윤리적 무기를 들이미는 것은 반칙 중에서도 아주 심각한 반칙이 아닐 수 없다.
이 어르신 호칭 문화는 전술한 꼰대 문화의 이복형제라 할 수 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노인들은 ‘어르신’ 호칭에 어울리려면 곱게 늙어야 한다는 규범적 자아의식(normative self-consciousness)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자기가 꼰대는 아닌지, 어르신답게 행동하는지, 자신 주위를 계속 성찰하게 되며 심한 경우 강박감을 느끼게도 된다. 반면 젊은 세대로서는 물리적으로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사회구성원인 자신들보다 이들 그룹이 윤리적으로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는 황당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면 전술했듯이 민주적 토론 혹은 게임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불만은 비제도권에 머물면서 꼰대 문화를 양육한다. 나이 먹었다는 이유로 시민권 이상의 대접을 받는 이들에 대한 불만은 이들 사회 경험이 풍부한 ‘어르신’의 나름 사심없는 조언에도 이를 꼰대질로 치부하며 반발하는 경향을 보인다. 더 나아가 불과 5년 뒤인 2025년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초고령 사회 (super-aged society)에 한국이 진입한다. 꼰대질하지 않더라고 이들 노령인구에 지원되는 재정을 위해 자신 노동의 결과물이 상당 부분 이들에게 이전이 되는 상황이 되면 이런 갈등은 증폭될 것이며 대놓고 ‘어르신’에 대한 비판은 못 하겠지만 자신들의 잣대에 벗어난 어르신 같지 않은 어르신은 가차없이 꼰대로 몰아붙일 것이다.
이들은 꼰대일까 어르신일까? 아님...?
맺음말
개인적으로 어떻게 어르신이라는 호칭이 한국 사회 공적 영역(public sphere)에 들어왔고 왜 그 사용이 당연시되는지 이해가 안 되던 차에 마틴 스콜세지 논란 관련하여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른 공경 문화 차원에서 사적 영역에서 어르신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은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지만 동등한 민주주의 시민임에도 특정 시민 그룹에게 윤리적 우월성을 부과하는 호칭을 공공연하게 사용하는 것은 인종차별만큼 용납될 수 없는 차별이다.
비 가치적 객관적 호칭을 써야 한다. 전통적인 용어인 노인이 되었든 아니면 이 어감이 싫다면 영어 senior를 차용하든지 간에 중립적 호칭이 필요하다. 그랬을 때 젊은 시민도 동등하게 자신의 부모 혹은 조부모세대와 국가 자원의 분배를 놓고 계급장 떼고 맞짱 뜰 수 있는 민주적 아고라(agora)가 열릴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도 나이를 무기로 어르신이라는 완장을 차고 선글라스를 낀 채 도심 한복판에서 법규를 무시한 채 막가파식으로 행동하는 노인 시위대는 여전할 것이며 이들의 행동에 쓴소리를 던지는 젊은 시민에게 ‘너는 애비 애미도 없냐?’라는 반민주적 언행을 서슴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 젊은 세대는 꼰대의 양산을 통해 반격을 가할 것이며 이는 한국과 같은 수직적 권위문화의 전통을 가진 사회가 모든 사회구성원이 나이와 성별과 관계없이 횡적으로 평등한 시민권을 행사하는 리버럴 시민 국가로 탈바꿈하는데 걸림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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