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한국 이야기

매매혼을 위한 변명

김 무인 2019. 7. 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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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최근 한국에서는 남편에게 매 맞는 베트남 아내의 모습이 아내가 설치해 놓은 카메라를 통해 대중에 공개되면서, 큰 사회적 반향 속에 다시 한번 동남아 신부 매매혼의 부작용이 조명되고 있다. 한국인 신랑만 믿고 한국어도 잘 모르는 채 한국에 왔다가 남편의 폭력에 희생된 딱한 결혼 이주여성으로 사건 초반 인식되면서, 이 여성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지원이 언급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여성이 남편이 전처와의 결혼 생활 중 불륜 관계를 맺고 자식을 출생한 후 전처에게 이혼을 종용하였다는 증거들이 나오면서, 여론은 반전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우리네 일상사가 그러하듯, 이번 사건도 성급히 단순화하지 않고 일반화하지 않으면서 다면적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다른 형식의 타자화(Othering) 모습을 보여주는 한국 내 결혼 이주 여성 관련 주제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이 글은 동남아 여성들을 주로 대상으로 하는 국제 중매결혼에 대해 짚어보고자 한다.

 

용어에 대한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쉽게 매매혼 매매혼하는데 현재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동남아 여성들과의 이주를 전제로 하는 결혼은 매매혼으로 보기 힘들다. 매매혼은 통상 신랑이 신부 집에 금품을 지급함으로써 성립되는 결혼 형태이다. 즉 금품 수취인이 신부 측이다. 현재, 국제 중매결혼업체를 통해서 결혼할 경우, 대상 국가에 따라 또 업체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1천만 - 2천만 원의 비용을 신랑 의뢰인이 중개 업체에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돈이 신부 측 가족에게 전달되면 매매혼 성립 사유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비용은 중개 업체에서 수령하는 돈이고 신부 측은 이 금품에 관여하지 않는다. 지질한 신랑이나 남의 말 쉽게 하는 사람이 거금을 주고 신부를 사 왔느니 어쩌니 하면서, 신부라는 상품에 대한 소유권 의식을 가지는데 이는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수수료 및 경비 조로 중매업체에 지불한 돈일뿐이다. 한국에서 결혼정보 회사에 몇백만 원의 가입비를 지급했다고 매매혼이라고 하지 않지 않는가.

이런 통상 관념과의 배치 외에도, 정황적 측면에서도 현재 이루어지는 동남아 여성을 상대로 한 이주결혼 형태는 매매혼으로 보기 힘들다. 정황적 측면이라 함은 가령 심청이 공양미 300석을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지기까지 과정에서 드러나는 아버지 눈을 뜨게 할 수 있다는 거부할 수 없는 정황을 말하는데, 이 정도의 절박한 정황을 한국으로 시집오는 동남아 결혼 이주여성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고 본다. 물론, 아시아 특유의 강한 가족 지향성으로 많은 결혼 이주여성이 한국으로의 결혼 이주를 결정할 때, 한국에서 기대되는 부의 잉여를 통해 대를 이어 내려오는 지긋지긋한 가난으로 힘들게 사는 친정가족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분명 한 축을 차지할 수 있다. 실제로 일부 결혼 이주 여성은 본국 친정에 이런저런 형태로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한 부분일 뿐이며, 선택 과정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정도의 유일한 대안은 아니다.

결혼을 할 권리 혹은 자제할 의무?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 자료에 의하면, 한국 내 결혼 이주여성의 약 42%가 가정폭력에 시달린 경험이 있다. 또 다른 자료는 국제 중매결혼의 경우 4년 내 이혼할 비율이 79%로 내국인들끼리의 이혼율보다 3배가량 높으며, 약 3%도 안되는 다문화가정이 전체 이혼의 12% 이상을 차지한다는 통계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중년 신랑과 어린 신부 조합에서 보듯, 내국인들끼리의 결혼에 비해 배우자 간 많은 나이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아무튼, 이러한 모습과 실체 탓에 매매혼으로 비하되는 국제 중매결혼은 당사자들 혹은 그 주변인을 제외하곤 한국 사회의 따뜻한 시선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시선을 보내는 이들에게는 조기 파국에 이르는 국제 중매 커플의 결혼생활은 결혼 동기와 결혼 과정에서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다고 보일 것이다. 1,2주에 걸친 결혼 원정 기간, 한두 번의 만남을 통해 결혼을 결정하고, 그다음 날 곧바로 결혼식을 올리는 과정; 그리고 한국이라는 상대적 부자 국가에 진입해서 사회경제적 신분 상승과 더불어 부의 축적을 위한 교두보쯤으로 결혼을 생각하는 신부와 국내에서는 자기 삶의 고단함을 덜어 줄 배우자를 찾을 수 없는 한국 사회경제적 약자의 만남은 애초부터 동상이몽일지 모른다.

 


이 대목에서 묻고 싶은 질문들이 있다. 혼자만의 외로운 가사노동과 생계를 위한 고된 노동의 분담 그리고 성적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배우자를 찾는 한국의 농어촌 그리고 도시 빈민 신랑들에게 한국 사회는 그리고 국가는 어떤 대안을 제시해 주었고 또 해줄 수 있을까? 시간을 두고 서로를 천천히 알아가기에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느라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는 그들에게 한 두번의 만남이후 곧 바로 인생의 대사인 결혼을 결정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조언이 과연 그들에게 울림이 있을까?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상황에서 큰 맘을 먹고 생업을 잠시 중단한 채 해외로 나가 한 두번의 만남 후 자신의 향후 몇 십년 삶의 동반자를 찾아야 한다는 그 압박감 불안감 초조함에 숱한 불면의 밤을 보내었을 그 사람들의 입장에 조금이라도 근접한 적이 있는가?

 

반대로 바다 저편에서 날아 온 미지의 남자와 한 두번 만남 후 결혼 뿐만 아니라 한번도 가본적 없는 그의 나라로의 이주라는 인생을 건 도박을 한 20세 초반의 여성에게 돈 만을 쫒아 결혼을 했다고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첫 인상과 통역을 통한 몇 마디 대화만으로 이 사람이 나를 미지의 땅 한국에서 온전히 보듬어 줄 수 있는 품성을 가진 사람인지를 판단하고 결혼을 그 자리에서 결정해야만 하는 그녀들의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무서움 등은 무시한 채 한국 남자와의 결혼으로 일거에 사회 경제적 지위 상승이란 꿈에 그녀들이 한 껏 부풀어 있을 것이라는 냉소적 추정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일반화될 수는 없겠지만 이 두 남녀의 만남은 그 동안 각자 살아온 삶의 경험과 감각을 총동원하여 자신의 미래 행복을 위한 신의 한 수를 두기 위한 처절한 노력의 현장이다: 육체적 정서적으로 고된 나날들이지만 그 나날들을 함께할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있다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한 남자와 그 남자가 가진 것이 많지 않음을 알지만 한국이 자신에게 가져다 줄 수있는 잠재적 기회를 통해 행복의 추구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여자와의 만남. 결혼 이후 어떤 삶이 전개될지 모르지만 이들의 만남 시도 자체는 기본 인권 중의 하나인 행복추구권이기에 그 누구로부터도 비난받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국제 중매결혼 그 긴 역사 그리고 뉴질랜드

혹자에겐 매매혼이라고 불리는 국제 중매결혼은 어제오늘에 생긴 현상도 아니고, 한국에만 있는 결혼문화는 더더욱 아니다.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이루어진 전형적 매매혼은, 예를 들어, 고대 중국에서 매우 성행했고, 최근은 한국의 이웃 나라 일본과 대만 역시 한국과 비슷한 형식의 동남아 국가로부터의 신부 수입이 있어왔다. 상대적으로 잘 사는 나라의 사회 경제적 하위계층에 속하는 남성들이 상대적으로 못 사는 나라의 사회경제적 지위 상승 꿈을 가진 여성들을 자국으로 초청 결혼함으로써, 자국 배우자를 통해서는 이룰 수 없는 행복을 추구하는 이 결혼 방식은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다.

이는 상대적으로 고임금 국가의 고용주가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저임금 국가의 노동자를 수배하고, 저임금 국가의 노동자들은 이에 응답하여 고임금 국가로 이동하는 노동 인력의 세계적 이동과 궤를 같이한다. 이런 결혼 인력의 세계적 이동에 있어서 결혼의 의미는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랑과 같은 정서적 교감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고, 대신 경제공동체 혹은 생활공동체와 같은 현실적 부문들이 더욱 크게 작용한다.

 

 

뉴질랜드도 예외가 아니다. 18,9세기 뉴질랜드 정착 초기 파케하 남성들은 영국 신문에 신부 구한다는 광고를 내서, 이 중에는 신부와 신랑이 서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이 결혼하기도 했다. 소위 Mail-order brides다. 최근은 1980년대 이후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산업 무게중심이 넘어가고, 여권 신장이 되면서 고학력 고 스킬 여성이 증가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저학력 저 스킬 뉴질랜드 남성들은 국내에서 배우자를 찾지 못하고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특히, 아시아 국가와 러시아 동구권 여성을 중심으로 배우자를 골랐다. 직접적 인과관계를 증빙하기엔 어려움이 있지만, 2011년 현재 뉴질랜드에는 25세에서 49세 연령대에서 아시안 여성이 아시안 남성보다 26% 많다는 인구통계에서 어느 정도 뉴질랜드 백인 남성-아시안 여성 커플이 실존하는 현상이라고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해외에서 신부를 구하려는 움직임은 인터넷 발전으로 온라인 중매 산업이 형성되면서 더욱 활성화되고 있다. 이들 온라인 중매 사이트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한국 중매업체처럼 토털 패키지 금액을 정한 게 아니라, 기본 서비스에 옵션을 추가하면서 비용을 추가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그렇다고 뉴질랜드가 항상 신부를 해외에서 구하는 신랑 국가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이트는 뉴질랜드 여성을 해외에 신부로 프로모션하기도 하므로, 남성 소비자와 여성 신부 상품이라는 온라인 결혼 마켓의 소비행태는 누가 소비자가 되느냐에 따라서 신부 수출국이 될 수도 수입국이 될 수도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뉴질랜드 정부는 흥미롭게도 이 국제 중매결혼에 대해서 관대하(했)다. 대표적인 예가 Culturally Arranged Marriage Visitor Visa이다. 한국말로 ‘관습에 의해 중매 된 결혼을 위한 방문 비자’ 정도로 의역될 수 있는데, 신청자는 이 비자를 신청하고 뉴질랜드를 방문하여 3개월 이내 뉴질랜드 시민(영주)권자와 결혼하면 1년짜리 동거 비자를 받을 수 있다. 즉, 해외의 배우자와 중매가 이뤄졌으나 정식 결혼하지 않은 미래 커플을 위한 비자 제도인데, 만약 3개월 이내 결혼하지 못하면 출국해야 한다. 비자 타이틀이 말해주듯 이 비자는 인도의 집안 간 결혼 관습을 뉴질랜드 이민부가 받아들여 신설한 카테고리로 추정되는데, 초기 승인된 400건 신청서의 대부분은 역시 인디언이었다. 이 신청서에 대한 심사는 갈수록 엄격해져, 2018년 현재 약 200건의 신청이 있었고 이 중 1/3만 승인 났다. 악용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Don’t get me wrong

서두에 잠깐 언급했지만, 한국 정부의 동남아 결혼 이주여성 정착 관련 정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온정주의(paternalism)에 기반을 둔 타자화(othering)이다. 이들 결혼 이주여성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일한다는 상당수 한국 인권단체들 역시, 이 기본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폐지된 ‘러브 인 아시아’와 같은 티브이 프로그램은 열악하고, 심지어 이번 베트남 아내 폭력 사건과 같이 추악하고 폭력적인 동남아 여성과의 국제결혼 실체를 외면한 채, 극소수 잘 된 케이스만을 선별하여 방송함으로써 진실을 호도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비판의 반은 맞고 반은 그렇지 않다. 결혼을 이용해서 한국에 입국, 영주권을 취득한 후 한국에서의 결혼생활과 가족생활은 포기하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겠다고 처음부터 마음먹고 온 동남아 여성도 있을 것이다. 반면, 낮엔 힘든 농촌 일을 거들 일손으로 밤엔 자신의 성적 욕구를 풀 대상으로만 생각한 채, 배우자를 해외에서 데리고 온 한국 남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가 되었든 우리는 이민이 가지는 보편적 인본주의 가치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기가 태어나고 싶은 곳과 낳아줄 부모를 선택할 능력은 누구에게도 없다. 태어나 보니 밑으로 썩은 물이 흐르는 냄새나는 수상가옥일 수 있고, 차도 들어오지 못하는 고립된 산속일 수 있다. 물귀신처럼 자신 운명의 발목을 끊임없이 잡아당길 이 환경을 벗어나, 자신의 물질적 정서적 행복을 추구할 유일한 방안으로 자신의 배우자를 한번 만의 만남으로 선택해야 하는 앳된 동남아 여성 그리고 결혼이라는 행복의 기본적인 조건마저 본국에서 갖출 수 없는 한국 농어촌 및 도시 빈민 간의 이 절박한 만남의 본질을 우리는 외면해서는 안 된다. 물질적 풍요를 어느 정도 기대하고 한국 남자와 결혼했다는 신부의 동기와, 반대로 합법적으로 성생활을 하고 싶어서 동남아 여성과 결혼했다는 신랑의 동기는 숨길 일도 아니고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며, 더 나아가 누구로부터도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결혼은 이 모든 물질 정신 육체 감정 등의 조합체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두 동남아 결혼 이주여성을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첫 번째 여성은 베트남에서 이민 온 황티쿡. 남편과의 나이 차이 20세인 황티쿡은 다른 동남아 여성과 비슷한 이주 동기를 가지고 한국에 왔지만, 자존감을 지키면서 자신만의 꿈을 꿋꿋이 좇는다.

 

 

 

 

두 번째 여성은 캄보디아에서 온 스롱 피아비. 현재 대한민국 3쿠션 당구 챔피언이다. 남편과의 나이 차이가 28세인 이 여성은 결혼 이주하면서 자신이 당구에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곤, 남편의 적극적 지원으로 국제적 당구 선수로 우뚝 서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 캄보디아 국빈 방문 시 동석하기도 했다.

 

 

이들의 지혜로움과 숨겨진 재능이 과연 그들이 모국에 있었으면 지금과 같이 밝게 빛날 수 있었을까? 노동 이주가 되었든 결혼 이주가 되었든, 우리는 이들처럼 선천적으로 기회를 잡지 못한 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해 주고 그들의 자아실현을 도와주는 것이 이민의 순기능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버지뻘 되는 사람이 딸 같은 여성과 결혼했다고 비아냥거리기보다는, 이들이 이렇게라도 그들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음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의 도시 빈민층 그리고 농어촌 총각들이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가 개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경제 구조적 문제임을 인정한다면, 이에 대한 정면돌파적 해결책 역시 구조적이어야 하는데 이 거시적 해결 방안이 모색, 실행될 동안 이들의 자구적 행복 추구 방식에 대해 인본주의적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