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세상 이야기

코로나바이러스, 미국 자본주의 그리고 의사당 난입의 연결고리

김 무인 2021. 1. 1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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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지난 1월 6일 트럼프 지지자들이 미국 국회의사당(the Capitol)에 난입하는 장면을 나중에 뉴스로 보면서 순간 눈을 의심했다. 2016년 거칠기 짝이 없고 비상식적이기 조차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도 미국 사회 구체적으로 미국의 패권적 자본주의가 이런 막가파 행동대장을 고용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위기 상황에 봉착하지 않았냐는 느낌을 가지는 한편 역사가 필요할 때는 자신의 민낮을 이렇게 과감하게 드러내는구나  생각했었는데 이번 난입 폭동은 역사가 훨씬 더 드라마틱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는 느낌이다.

 

 

2020년 선거 결과에 대한 불복종 운동을 집요하게 추진할 때도 참 가지가지 하는구나 생각하던 차에 종방 직전 막장드라마의 정점을 찍은 것이다.  일부 미디어와 정치인으로부터 이번 폭동의  상징성 그리고 트럼프의 사주와 공화당의 배후 지지를 이유로 ‘반역(insurrection)’ 혹은 파시스트 쿠데타(fascist coup)’란 호칭을 듣는 이 폭동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가운데 접한 아래 글은 이 폭동이 일어나기 전인 1월 4일 WSWS(World Socialist Web Site)에 올라 온 글이다. 따라서 폭동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있을 수 없는 시차이지만 그 사건에 대한 서술만 없다 뿐이지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미국의 사회 경제적 배경을 이번 팬데믹과 연계시켜 잘 설명하고 있어 선별 요약한다. 참고로 WSWS는 미국 내 트로츠키 사회주의자들의 온라인 모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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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의 정치적 교훈과 2021년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 (The political lessons of the pandemic and the fight for socialism in 2021)

 

Joseph Kishore, David North

 

4 January 2021

 

새해가 시작되었지만 팬데믹은 여전히 지구를 휩쓸고 있다. 이 팬데믹은 역사적 중요성을 가진 세계적 위기다. 팬데믹은 집약된 형식으로 세계 자본주의의 모순을 명확히 드러낸 “촉발제(trigger event)”로서 오랫동안 억눌려져 있던 사회개혁의 힘을 전면에 부상케하고 있다.

 

팬데믹은 단순한 의료적 위기가 아니다. 작년에는 세계 자본주의의 반동적 특징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사회적 비용을 개의치 않는 기업의 이익 추구, 소수 부자들의 엄청난 부 축적에 대한 탐욕 그리고 생명과 세계인의 안녕에 대해 비인간적 무시들이 서로 어울려 전세계적 재앙을 만들어 냈다.

 

제 4인터내셔널(트로츠키 사회주의자들의 국제연대기구:역자 주)에서는 이번 팬데믹을 1차 세계대전과 자주 비교했다. 1914년의 전쟁과 그 후속 여파로 세계는 정치적 격랑에 빠져들었다. 노동계급과 빈곤대중은 정치적으로 급진화했다. 1914년 연초만 해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해 보였던 제국 - 러시아, 오스트로-헝가리 그리고 프러시아 - 들은 이후 수년 내에 사회적 혁명으로 전복되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그리고 남미 식민지에서 반제국주의 운동에 수억명의 인민들이 참여했다.

 

작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팬데믹은 전 세계의 노동계급과 청년들의 의식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2020년 - 대규모 사망, 경제적 혼란 그리고 유사 민주주의이건 노골적 독재이건 상관없이 전통적 정치구조에 위기와 해체를 가져왔다 - 은 20세기 역사에서 1914년이 그러했듯이 21세기 역사에 치명적 전환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완화되기는 커녕 팬데믹의 영향력은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새롭고 더 감염력이 강한 바이러스의 변형이 발견되기 전부터도 코로나의 확산 속도는 가속화되고 있었다. 새해가 시작되기 직전 세계적으로 거의 2백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아시아에서 305,000명, 아프리카에선 63,000명, 유럽에선 552,000명 아메리카에서 848,000명.

 

개별 국가의 사망자 수를 보면 놀랍다. 브라질에서는 거의 200,000명이 사망했고 영국은 71,000명, 이탈리아는 72,000명, 프랑스는 63,000명이 사망했으며 스페인은 50,000명 그리고 독일은 30,000이 사망했다.

 

 

가장 재앙적 상황의 국가는 팬데믹이 통제 불가능해진 미국이다. 작년 한해 사망자가 340,000명이다.   12월에 약 70,000명이 죽었는데 하루에 3,500명이 죽기도 했다. 1월에는 약 115,000명이 죽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각종 미디어에서는 백신 개발로 대중의 관심을 돌리려고 하나 현재 미국은 가장 치열한 전쟁보다 더 많은 숫자가 사망하고 있는 현실이다. 

 

화이자(Pfizer)와 모더나(Moderna)에서 개발한 백신은 12월말까지 2천만명 분이 투여될 예정이었으나 3백만명 분만 투여되었다. 한 의학 협회에 따르면 정부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사망자는 4월까지 770,000명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되는데 현재로선 연방 정부도 주 정부도 대책이 없는 상황이다.

 

대통령 당선자 조 바이든은 사상 유례없는 이 재앙을 맞이했지만 그가 취임 후 첫 100일간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모든 미국인이 마스크를 착용할 것을 당부하는 것 말고는 없다. 바이든의 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선택은  독과점 자본가들의 인간 생명에 대한 무시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지배계급은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한 필수조치들의 시행을 거부했다: 비필수적 직장의 봉쇄, 학교 폐쇄 그리고 위기가 종식될 때까지 국민들에게 비상자금 지원 등. 이런 미국의 조치는 사망자를 5,000명 미만으로 막은 중국과 비교된다.

 

이번 팬데믹의 충격이 가장 큰 국가들이 서구 그 중에서도 세계 제국주의의 중심이자 가장 부유한 자본가 지배계급이 존재하는 미국이라는 사실은 민족국가 체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그리고 인간노동력의 착취를 통한 이익추구에  기반한  사회경제시스템의 역사적 몰락을 보여는 것이다. 펜데믹 초기 단계부터 지배계급은 인명을 구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개인의 부 축적 혹은 그들 민족국가의 지정학적 이해와 충돌한다는 이유로 거부하였다.

 

국가 안전, 제국주의자들끼리 충돌과 힘의 균형 그리고 경쟁 우위를 점하기 위한 다국적 기업들의 암투때문에 처음부터 국제적 공조와 팬데믹에 대한 과학적 대처를 하지 못했다. 인류 공통의 위협에 직면해서 단결을 지향하기보다 오히려 자본주의 민족국가들간 적대감만 강화되었다. 

 

2020년대 중반 미국, 유럽 그리고 중국과의 관계는 지난 수십년 사이 최악이었다. 러시아와 서구의 관계도 여전히 의혹에 쌓여있었고 중국과 인도는 국경을 둘러싸고 충돌을 거듭했다. 공조를 위한 기구들, 법과 기준들이 모두 퇴보하였다. 미국은 WHO를 비롯해서 여러 기구와 조약들을 비난하거나 탈퇴했다. 영국은 EU를 떠났으며 중국은 홍콩의 특별 지위를 변경했다. 

 

IISS(International Institute for Strategic Studies:국제 전략연구소)가 서술한 “tolerance warfare(‘인내심 테스트 도발’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이 개념은 기존 국가들에 다른 형식의 개입을 통해 이들 국가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지속적인 도발 행위를 말한다: 역자주)”는 쉽게 핵무기를 동반한 전면전으로 전환할 수 있다. 군사적 도발을 포함한 미국의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자극은 치명적 정치적 논리를 갖고 있다. 이 위험은 국내 계급 갈등을 외부 전쟁으로 돌리려는 지배계급의 필요에 의해 강화되고 있다.

 

끊임없이 세계적 차원의 지정학적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엘리트 자본가들은 기업의 이익과 개인 부의 축적에 방해가 되는 그 어떤 팬데믹 대응도 거부한다. 2020년 3월부터 12월 사이 월스트리트 주식의 깜짝 상승과 한편으로 치솟는 사망자 숫자는 평행선을 그리는 보완적 현상인 것이다. 자본가들을 부유하게 하는 정책들은 대규모 사망을 필연적으로 동반했다. 2020년 1월부터 미국과 유럽의 지배계급은 인명을 구하는 것보다 금융시장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결정을 내렸다. 도널드 트럼프가 나중에 저널리스트 Bob Woodward와의 인터뷰에서 시인했듯이 팬데믹의 위험은 대중들에게 숨겨졌으며 대신 월스트리트와 대기업의 구제에 수십조 달러를 투여할 준비가 막후에서 진행 중이었다. 

 

2020년 초부터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500명의 부는 약 1.8조 달러가 증가하여 7.6조 달러에 달했다. 이 팬데믹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본 아마존의 CEO Jeff Bezos(1천 9백억 달러)와 테슬라의 CEO Elon Musk(1천 7백억 달러)를 포함한 5명은 각각 평균 1천억 달러가 증가하였다. 

 

지배계급의 이 깜짝 놀랄 부의 증가는 전적으로 연방준비은행이 끊임없이 디지털 머니 - 실제 가치의 창출과는 전혀 무관한 “의제자본(fictitious capital)” -  를 금융시장에 공급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투기자산 - 그리고 이 자산을 소유한 자들의 부 -의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암호화폐 비트코인의 가격은 2020년에 $7,194에서 $34,000으로 360퍼센트 상승했는데 크리스마스와 새해 휴가 기간 사이에 거의 두배 가까이 폭등했다(1월 12일 현재, 약 $47,000: 역자 주). 이런 부자들에 대한 연방준비은행의 선물은 모든 자산 가격을 상승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문제는 이 연방준비은행 정책의 모든 부담이 노동자 계급에게 간다는 것이다. 대규모의 국가와 기업의 부채는 이들 기업의 지속적 수입과 이익을 보존하기 위해 구제금융을 필요로 한다. 이 구제금융이 없다면 투기 거품과 이 거품에 의존하는 부는 유지될 수 없다. 이 경제적 논리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계급의 노동력을 거침없이 착취해야만 한다. 마치 1차 세계대전에서 참호에 있던 군인이 자동화기와 독가스가 난무하는 전장터로 강제로 내몰리듯 오늘날 노동자는 바이러스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어 있는데 공장과 근무 현장으로 출근해야만 한다. 이들 부모가 직장을 나가기 위해서는 어린이가 바이러스의 전염의 주 숙주임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을 위해 학교는 문을 열어야만 한다.

 

이 무대책 통제불능 상황을 정당화하기 위해 등장한 논리가 바로 “집단면역(herd immunity)” 이론이다. 이 정책은 스웨덴에서 시작되고 2020년 구제금융이 개시된 이후 나머지 유럽과 미국으로 전파되었다. 이 반사회적 정책은 바이러스 확산을 멈추게 하기 위한 봉쇄와 학교 폐쇄는 감당하기 어려운 금융적 비용을 야기한다는 주장으로 정당화되었다. 뉴욕 타임즈의 Thomas Friedman은 “치료가 질병보다 나빠서는 안된다(The cure cannot be worse than the disease)”라는 슬로건으로 스웨덴의 정책을 옹호했다. 이 슬로건의 진정한 의미는 인명을 구하는 것이 기업의 이익과 월스트리트 주가의 희생 속에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지배계급의 이런 경제 정책의 정치적 결과물은 파시스트 운동에 대한 노골적 홍보, 부르주아 민주주의 전통적 제도의 해체, 그리고 권위주의적 정권의 수립 노력이다. 헌법을 뒤집어 엎고 대통령 독재를 실현하기 위한 음모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히틀러식의 야망을 완성하기 위한 외로운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2020년 선거 결과에 대한 그의 불복은 상원의원을 포함해서 다수 공화당원의 공개적 지지를 받고 있는것은 얼마나 지배계급 내에서 헌법을 무시하고 권위주의적 정권을 창출하려는 움직임이 강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트럼프의 “급진좌파(the radical left)”와 사회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혐오는 파시스트 갱들에 대한 그의 집착과 더불어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대규모 대중운동이 단순히 가능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불가피하고 임박했다는 과두 지배계급의 공포를 보여주는 것이다. 트럼프의 말과 행동은 저명한 좌파 역사학자 Arno J.Mayer가 말한 ‘선제적 반혁명(preemptive counterrevolution)’의 준비와 같다.

 

“각종 의심, 불확실성 그리고 유보된 폭력으로 가득찬 분위기 속에서 반혁명 지도자들은 임전태세를 갖춘 엘리트들에게 혁명가들이 이 상황을 그들의 목적에 맞게 이용할 것이라고 납득시키려 하고 있다. 이들은 이 과열된 분위기를 진정시키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부채질하고 있다. 이들은 혁명 움직임을 억누를 수 있다는 그들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이런 대치 상황을 즐기는 한편 혁명이 임박했다는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난 해 경찰폭력 반대 시위에 대한 트럼프의 공격 뒤에 존재하는 정치적 계산을 이해할 수 있으며 2020년 9월 3일 Antifa( Anti-Fascist Action의 준말로 파시즘을 반대하는 그룹으로 파시스트 그룹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역자 주)지지자로 알려진 Michael Reinoehl(2020년 8월 한 극우파 트럼프 지지자가 살해되었는데 이 사건의 혐의자로서 경찰은 그에게 사전 경고없이 발포해서 사망했고 트럼프는 그의 죽음은 응보(retribution)라고 표현했다: 역자 주)의 국가 살인에 대한 잔인한 선동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  

 

Michael Reinoehl

 

트럼프 정권의 이런 행동들은 그의 정권 획득의 정치적 의미를 미국 내 자본가 계급의 사회적 기반에 대한 막시스트의 분석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4년 전인 2017년, 트럼프 취임식 2주전 WSWS는 아래처럼 경고했다: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은 미국 과두 지배계급의 역겨운 본모습과 실체를 모든 면에서 드러낸 사건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2016년 전까지 다소 결함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괜찮은 사회에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트럼프 - 범죄와 부동산,금융,도박 그리고 유흥업의 병적 결합의 산물- 는 미국 지배계급의 진면목인 것이다.

 

집권할 트럼프 행정부는 구성원과 그 목표에서 보이듯이 과두정치의 반역적 특징을 갖고 있다. 한 쇠락하는 사회계급이 종말에 접근함에 따라 그 계급의 역사 조류를 견뎌내기 위한 움직임은 종종 그들의 권력과 특권의 장기간 침식으로 이해되는 현상을 뒤집으려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 몰락하는 사회 계급은 강력한 경제적 사회적 변화의 힘이 그들 지배의 기초를 잠식하려고 하기 전에 그들이 한때 만끽했던 ( 아님 그랬다고 상상하는) 상태로 돌아가려고 한다.”

 

1월 20일 조셉 바이든의 대통령 취임 - 트럼프의 쿠데타가 성공하지 못한다는 가정 하에 (이 글이 발표되고 불과 이틀 뒤에 의사당 난입이 있었다:역자 주) -은 되돌리기 커녕 미국 민주주의의 붕괴를 막지 못할 것이다. 권위주의를 향한 움직임은 개인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1)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 형태로 나타나는 미국 자본주의의 사회경제적 모순; 그리고 2)지정학적 지위의 침식을 되돌리고 세계적 패권을 다시 확보하려는, 하지만 그 노력의 결과는 형편없는, 미국 제국주의의 내재적이며 통제되지 않는 시도에 의해 주도되기 때문이다. 

 

미국 자본주의 지배의 이런 필수적 요소들 - 유례없는 사회적 불평등 정도와 독보적 제국주의 권력으로서 국제 무대에서 미국 이익을 위한 권리 행사-은 민주주의와 병행될 수 없다. 증가하는 국내 저항과 계급 투쟁에 대항하기 위한 불평등의 방어전략은 경찰국가화 하는 것이다. 국제 무대에서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자원을 전쟁의 준비와 수행을 위해 퍼붓는 것이다.  이 전략은 어쩔 수 없이 미국 내 그리고 국제 무대에서 바이든 정부가 취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적 필요는 단지 지배 계급의 정책을 통해서만 표출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필요는 대중의 의식에도 지대한 변화를 가져온다. 올해도 지속되는 2020년의 재앙은 자본주의 질서 하에 있는 노동자 계급의 신뢰를 심각하게 되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손상시켰다. 이번 팬데믹의 기본적인 교훈은 노동자 계급의 이익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단지 집단 면역 정책에 대한 저항만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사회구조의 변화에 대한 요구가 증가할 것이다. 대중의식의 좌경화와 계급투쟁의 격화는 사전 혁명 상황 초기 발전의 명백한 지표가 될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사망자 숫자의 기하급수적 증가가 월스트리트와 다른 주요 증권거래소 주가의 기하급수적 상승과 맞물려있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중환자실 병동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 쉬고 있을 때 팬데믹 수혜 계급은 반사회적 부의 축적을 자축하고 있다. 이들 개인의 터무니없는 부의 축적이 진행되는 동안 사회적 분노도 같이 축적되고 있다.

 

이 분노는 계급투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 전개는 사회주의 평등당(Socialist Equality Parties)과 제 4인터내셔널의 지원을 받을 것이며 자본가의 착취에 저항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모든 노력을 억누르기 위한 기업의 부속 기관처럼 된 노조는 배제할 것이다. 

 

이제 노동자 계급은 혁명적 투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유럽 귀족과 북미 노예주들의 부와 특권이 이전 지배계급의 부와 권력이 기반한 경제적 사회적 관계의 전복을 요구했듯이 현대 세계화된 지구는 특정 소수 자본가 엘리트들에게 사회적 부가 집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과두제 집권층의 부에 대한 몰수 요구와 인류의 이익을 위한 세계 경제의 사회주의적 재조직이 이번 위기로부터 탄생할 것이다. 이 사회적 진보의 객관적 논리에 대한 인지야말로 세계 트로츠키 운동의 정치적 전망과 실천의 진정한 기초일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은 본질적으로 국제적 투쟁이다. 팬데믹은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인류가 직면한 모든 주요 문제는 전 지구적 해결책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인명에 대한 똑같은 무시, 똑같은 무능과 무조직, 개인의 부와 지정학적 이해를 사회적 필요보다 언제나 우선시하는 태도는 그것이 기후 변화가 되었든, 세계 전쟁이 되었든 혹은 대량 빈곤이 되었든 지배계급이 항상 문제를 대하는 방식이다.

 

자본주의를 상대로 한 공동투쟁을 위한 국제적 노동자 계급의 연대는 극우파의 민족주의 혹은 사이비 좌파의 인종에 기반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와 같이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는 모든 시도에 대한 반대를 필요로 한다. 지난 해 민주당과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근본적 분열은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간 분열이 아닌 “백인 미국”과 “흑인 미국” 간의 분열이라면서 인종적 분열을 계속 조장했다. 이것은 사회적 불평등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상위 10% 내에서 부와 특권의 보다 공평한 분배를 지향하는 중산계급의 반동적 정치에 불과하다. 

 

이런 인종주의적 정치의 장려는 사회적 저항을 민주당의 프레임에 가두어 두려는 지배계급의 전략 중 하나다. 이것은 2020년 봄에 시작되고 미국과 국제적으로 확산된 경찰 살인에 대한 대중의 저항 과정에서 획득된 정치적 교훈의 핵심이다. 민주당과 사이비 좌파인 그 외곽 지원 조직들은 모든 인종의 노동자들과 청년들에게 충격을 준 경찰 폭력의 확산에 대해 ‘백인 특권”이란 프레임에 가두어 이를 비난했다. 뉴욕타임스의 1619 프로젝트(미국 역사에서 노예제와 흑인의 기여에 대해 재조명을 하자는 기획: 역자 주)로 시작된 역사에 대한 인종주의적 왜곡은 미국의 두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미국 혁명과 내전)의 지도자 동상을 해체하려는 반동적 캠페인으로 이어졌다. 

 

미국 민주사회주의(DSA)와 다른 사이비 좌파 조직의 지지를 받은 상원 의원 버니 샌더스는 다시 한번 민주당 간판 뒤에서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힘을 분산시키는 반동적 역할을 했다.  2016년과 마찬가지로 2020년에도 그는 자신이 “정치적 혁명”을 이끈다고 했지만 결국 민주당 우파 후보를 지지하고 말았다. 샌더스는 바이든 행정부가 사회 개혁을 위한 “공간”을 창출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바이든 취임 이전부터 반박되고 있다. 바이든은 이미 우파 인사로 구성된 내각을 구성했으면 끊임없이 “단결(unity)”을 강조했고 선거를 훔치고 반헌법적 대통령 독재를 시도한 트럼프를 지지한 인물들을 “공화당원 동지들”이라 칭하면서 같이 일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결국 Joe Biden의 지지를 선언한 Bernie Sanders

 

미국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민주적 권리를 지키고 파시즘과 싸우는 것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동원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2020년의 핵심 교훈은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응하는 진정으로 진보적인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면 20세기의 모든 공포가 더 피비린내 나는 잔인한 형식으로 21세기에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