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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가는 1.5세대들
2001년부터 2011년 기간, 뉴질랜드 출신 해외 체류 한국인의 숫자는 29배 증가했으며 2011년 기준, 6,004명의 Korean New Zealander가 한국에 살고 있는 것을 밝혀졌다. 뉴질랜드 거주 교민 대비 해외 체류민 비율은 옆 나라 호주 교민에 비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 중 상당수는 1.5세대로 추정되는데 왜 이렇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증가하는 것일까?
1세대가 한국에서 뉴질랜드로 이민 올 때 push factors와 pull factors가 있었듯이 이들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때도 같은 동인들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본질적인 동인은 아니지만 Koreanness라는 ethnicity를 글로벌화 되어가는 자본주의 환경에서 재외 동포를 한국이 가질 수 있는 일종의 capital로 전환시키기 위해 1988년 도입한 한국 정부의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특례법(안)’ (Overseas Korean Act 1998)이 이런 동인을 현실화시킬 수 있게끔 제도적으로 뒷받침한 것도 한 몫을 차지한다.
왜 한국에 돌아가는가?
짧은 답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일 것이다. 여기서 더 나은 삶은 단순히 경제적 물질적 풍요로움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물론 1.5세대가 한국에 돌아갈 때는 대부분, 반드시가 아니라면, 직장이 있는 상태에서 돌아간다. 따라서 뉴질랜드에서 직장을 구하지 못한 1.5세대가 한국으로 돌아갈 경우 이런 경제적 이유가 크게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좁은 한인 공동체 특성상 원하는 한인 배우자를 뉴질랜드에서 찾기 힘들거나 꺼려하는 1.5세대는 한국에서 배우자를 찾기 위해 돌아가기도 한다.
허나 이런 직접적 이유의 배후에는 보다 근원적인 push factors들이 존재한다. 간단히 말해 뉴질랜드에 진절머리가 나 ‘내가 왜 여기서 이렇게 살아야 돼?’를 외치듯 한국으로 떠난 것이다. 뉴질랜드에 진절머리를 나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은 ‘차별’과 ‘소외’의 경험이다. Bullying과 같은 학창 시절의 노골적 차별을 경험하지 않았어도 백인 학생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항상 교실 혹은 운동장의 한 귀퉁이를 서성일 수 밖에 없었던 까만 머리 아시안은 소외감을 느끼며 끝없이 추락하는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었으리라.
이는 단지 뉴질랜드 1.5세대에게만 해당되는 관찰 결과가 아니다. 미국의 1.5 그리고 2세대들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같은 push factors를 가지고 있다. 미국에서 동아시안은 많은 경우 ‘model minority’로 통한다. 미국 백인 주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흑인이나 라티노처럼 사회 경제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지도 않고 심각한 사회적 문제도 야기하지 않는 집단이기 때문에 이런 명칭을 붙인 것인데 이게 결코 칭찬이 아니다. ‘Model citizen’이 아닌 ‘model minority’라는 호칭은 결국 이들은 ‘forever foreigner’라는 카테고리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미국의 한국 출신 이민자들도 외모로 인해 2세대라도 여전히 인종화된 정체성(racialized identity)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중국으로 돌아가는 중국 출신 2세대들은 한국 이민자들과는 다른 관찰 결과를 보인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런 호스트 국가의 push factors보다는 중국이라는 경제 대국이 유혹하는 경제적 기회(pull factors)가 훨씬 결정적인 동인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뭏든 이렇게 1.5와 2세대가 학창시절부터 겪었던 차별과 소외 그리고 졸업 이후 취업 과정에서 겪었을 인종차별, 예를 들어 CV의 이름만 보고 탈락시키는, 그리고 취업 이후 직장에서 겪었을 또 다른 인종차별, 예를 들어 glass ceiling, 의 경험들이 누적되어 마음속 깊이 응어리가 되어 남아 있던 차에 한국의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높아진 위상은 이들로 하여금 한국에 가면 이런 차별과 소외없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 혹은 부모의 모국을 이상화(romaticization)하면서 돌아가자는 결심을 하게된다.

한국에 돌아가서 행복한가?
짧은 답은 ‘yes and no’일 것이다. 잡오퍼를 준 한국의 회사로부터는 ‘변화의 사도(agents of change)’가 되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향한 한국행, 그런 기대 속에 시작된 한국에서의 직장 생활은 기대한 만큼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 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유창한 영어와 유럽문화에 대한 익숙함 덕분에 회사에서 기대한, 특히 해외 비즈니스 관련 부분에서 한국 토종 직원 - 설사 영어가 유창하더라도- 에 비해 월등한 업무 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뉴질랜드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장시간 근무 혹은 추가 근무를 기꺼이 수용할 정도로 mindset이 바뀐다. 이는 뉴질랜드 직장에서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성취감 그리고 직장 내에서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가능한 것이다. ‘士爲知己者死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를 연상시킬 정도의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한 ‘소속감(sense of belonging)’이다. 따라서 기대한 것처럼, 혹은 그 이상으로, 뉴질랜드에서 낮아진 자존감을 한껏 끌어올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밝은 면이 있다면 어두운 면이 있듯이 모든 이(returnees)가 그리고 모든 면이 다 장미빛만은 아니다. 한국의 수직적 위계문화, 동료들의 질시 그리고 교포는 특권 그룹이라는 시선 속에서 또 다른 의미에서 차별과 소외 경험을 한다. 혈연적으로는 분명 한국인이지만 문화적으로는 외국인이 되는 경험을 하게된다. 한국은 나와 같은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차별과 소외가 없는 진정한 Home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이곳에서도 여전히 자신은 ‘other’임을 발견하는 것이다. 짝사랑의 파국적 결말이라고나 할까? 이 부정적 경험을 심하게 겪은 사람들은 다시 뉴질랜드에 돌아오기도 한다. 뉴질랜드에 살 때는 자신이 한국인인 것 같아 한국에 왔는데 막상 와보니 자신이 그렇게 싫어해서 떠난 뉴질랜드 사람인 것 같아 다시 돌아온 것이다.
다시 뉴질랜드에 돌아오는 선택을 하지 않고 여전히 한국에 남은 1.5세대의 정서도 다시 뉴질랜드에 돌아온 1.5세대(re-returnees)와 일정 부분 겹친다. 참고한 책 중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이들에게 Home이 어디라고 생각하냐는 연구자의 질문에 이들은 한국이라고 대답했지만 ‘고향(Gohyang)’이 어디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뉴질랜드라고 답했다. 혈통적 의미(genealogy)에서 한국은 Home이지만 언젠가 돌아가고 싶은 곳으로서 고향은 조금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뉴질랜드인 것이다. 뉴질랜드에 있을 때는 이상화된 Koreanness를 그리워했는데 한국에 와 관념상에서만 존재했던 Koreanness의 실체를 접하면서 꽁깍지가 벗겨지는 경험을 하는 한편, 역으로 좋은 기억이라고는 없었던 것 같은 New Zealandness를 마치 꽃 잎이 지고 나서야 봄인 줄 안 것처럼 재평가하게 된다. 더 나아가 뉴질랜드에서 자신이 차별받았다고 생각했던 것 중 많은 경우는 객관적으로 실체가 있는 차별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세운 마음 속의 벽(wall)이었음을 깨달은 어떤 re-returnee는 뉴질랜드에 다시 돌아와서는 뉴질랜드 주류 사회에 먼저 다가가는 변화된 태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이처럼 한국에 돌아간 혹은 돌아가서 생활을 한 경험이 있는 1.5세대는 그렇게 하기 이전과 다른 자신의 정체성에 눈을 띄게 된다. 즉 자신 안에 Koreanness와 New Zealandness가 공존하는 하이브리드(Hybrid) 정체성의 소유자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또 속된 말로 한국 혹은 뉴질랜드 어느 한 쪽에 자신의 정체성을 ‘몰빵’할 수도 또 해서는 안되는 지혜를 얻게 된다. 혈연적 Home인 한국의 장단점 그리고 좋은 추억이든 악몽같은 추억이 되었든 자신의 찬란했어야 할 10대를 보냈던 곳이기에 고향처럼 다가오는 뉴질랜드의 장단점 - 물론 자신의 입장에서 - 을 조감도적 시선으로 그리고 자기 성찰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새로운 형식의 하이브리드 정체성은 조금은 외로운 정체성이다. 한국인의 전통적 정체성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소속감(sense of belonging)’을 상당 부분 포기해야하는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한국인 혹은 아시안 특유의 자기가 속한 집단, 그것이 가족이 되었든 직장이 되었든,에는 강한 소속감을 느껴야 마음이 편해지는 집단주의 특성을 고대로 간직한 1세대 부모로부터 1.5세대는 2세대와 달리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기에 이런 류의 정체성은 조금은 고독하게 다가간다.
어쩌면 정체성을 집단적으로만 이해하려는 관성이 우리에게 있기에 이처럼 집단 내에서 더 쪼개진 정체성은 아직 낮설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Korean New Zealanders 혹은 New Zealander Koreans (이런 조합의 용어가 사용된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하이브리드이긴 하지만 여전히 집단적 정체성을 일컫는다. 뉴질랜드에 사는 한국 사람들이 한인 교회나 마트 등을 이 집단 정체성을 유지하고 확인하는 공간으로 활용하듯이 한국에 사는 뉴질랜드 출신 1.5세대들 역시 유사한 백그라운드와 경험을 가진 뉴질랜드 출신 한인 혹은 키위들과 모임을 통해 이 하이브리드 정체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초국가주의적 이민자의 정체성(Tansnationalsit Immigrant's Identity)
초국가주의(Transnationalism)는 다국적주의(Multinationalism)만큼 현대 세계를 묘사할 때 자주 인용하는 단어다. 특히 글로벌 캐피탈리즘에서 이 단어는 명징성을 드러낸다. 투기 혹은 투자 금융 자본이 이익 추구/실현을 위해 국가간 경계를 개의치 않고 넘나드는 모습은 초국가주의의 명확한 사례이며 세계 각국에 자회사 혹은 생산 기지를 두며 비즈니스를 하는 다국적 기업에서 다국적주의의 대표적 사례를 목격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개인의 하이브리 정체성은 이 두 용어의 특징을 다 가지고 있으나 정체성의 본질상 특정 물리적 공간에 기반을 둔 유형의 것이 아니라 개인의 mindset이고 또 개인은 시공간적으로 특정 시간에 한 곳에 있을 수 밖에 없기에 이동을 염두에 둔 초국가주의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20세기 전반까지 민족국가(nation-state)는 많은 경우 nation이 곧 state였다. 단일 민족에 가까운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마오리라는 원주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뉴질랜드 역시 브리티시 민족으로 이루어진 단일 민족국가를 표방하고 지향했다. Nation과 state 사이에 놓인 하이픈(-)은 20세기 후반 전 세계에 불기 시작한 전방위적 글로벌라이제이션 바람으로 인해 분리가 되기 시작한다. 뉴질랜드도 예외가 아니어서 영국계 뿐만 아니라 아시안들도 이 state에 들어와 nation의 작은 한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상황에 서툴기는 이민자인 1.5세대도 이들을 받아들인 호스트 국가 뉴질랜드도 마찬가지였다. 왜냐면 새로운 아시안 이민자들은 과거 조상 영국 이민자처럼 돌아갈 다리를 불태우고 뉴질랜드에 뼈를 묻을 각오로 온 영구적 정착민(permanent settler)과 다른 형태의 이민/정착 형태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민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새로운 이민 패턴은 ‘초국가적 이민(transnational migration)’ 혹은 ‘유목민(nomad)’형식이다. 1.5세대는 부모가 좋다고 생각한 오아시스에 와봤지만 자기랑은 맞지 않고 오히려 부모가 떠난 오아시스가 자신과 어울릴 것같다고 생각하여 부모없는 그 곳이지만 혼자서 다시 그 오아시스를 찾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오아시스는 한국과 뉴질랜드, 두 곳 뿐일까? 두 곳 다 자신의 부모와 연관되어 ‘주어진’ 공간이었기에 1차적으로 탐색하기 좋았을 뿐 이들은 원하고 가능하다면 더 풍요로운 제 3의 오아시를 찾아 언제든지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지금 많은 1.5세대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종류의 하이브리드 정체성을 가지며 살아가고 있을까? 가령 한국에서 태어나 뉴질랜드에서 교육받고 호주에서 직장 생활하며 자리 잡은 이들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할까? Korean New Zealander Australian? 너무 길다.
사회적 융합(Social cohesion)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민족국가의 정치인들에게는 씁쓸하겠지만 전통적 의미에서 ‘소속감’에 기반을 둔 사회적 융합을 위와 같은 유목민 패턴의 이민자에게 기대하는 것은 힘들다. 어쩌면 그들은 체류하는 국가(state)와 사회계약을 맺고 계약 기간, 계약 내용만큼 의무를 이행하고 권리를 주장할 뿐 사회적 공간은 자체적으로 창출하기 때문이다. 뉴질랜드 한인 이민자들이 자체 교회, 마트와 취미 모임 등을 형성했듯이 이들 노마드 이민자들 역시 자신의 상황에 맞는 ‘초국가적 사회 공간(transnational social field)’를 체류하는 국가 내에 형성한다. 위에서 언급한 한국에 체류하는 키위들이 한국에서 자체 사회공간을 창출하듯이, 또 더 세분화되어서 뉴질랜드에 살았던 1.5세대 한인들만의 사회공간을 창출하듯이 말이다. 더구나 이 초국가적 사회공간은 단지 두 국가- 가령 한국과 뉴질랜드 - 만 넘나드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을 통해 유사한 정체성 환경을 가진 세계의 모든 이들이 모이는 디지털 초국가적 사회 공간도 만들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유목민처럼 세계를 떠돌아 다닐 수 있는 초국가적 이민자들에게 국가정체성(national identity) 혹은 ethnic identity는 ‘버려도 되는 가벼운 추억’처럼만 가슴에 새기는 걸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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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K, Wang. (2016). The benefits of in-betweenness: return migration of second-generation Chinese American professionals to China. Journal od Ethnic and Migration Studies. 42(12), 1941-1958.
S, C, Suh. (2020). Racing “return”: the diasporic return of U.S.-raised Korean Americans in racial and ethnic perspective. Ethnic and Racial Studies. 43(6), 1072-1090.
A, Bartley. (2010). 1.5 generation Asian migrants and intergenerational transnationalism: Thoughts and challenges from New Zealand. National Identities. 12(4), 381-395.
J, Y, Lee. (2018). Transnational Return Migration of 1.5 Generation Korean New Zealanders. London: The Rowman & Littlefield Publishing Group, 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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