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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있는 자들의 정체성은?
1.5세대와 2세대들은 자신들이 부당하게 차별받는 것은 물론이고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반복된다고 생각할 경우 다른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 머무는 곳에 큰 불만이 없어도 나은 조건의 근무환경이 제공되면 이주를 결심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비즈니스의 공용어라 할 수 있는 영어 구사능력과 유러피안 사고방식과 비즈니스 관행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1.5세대라면 1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활동 반경이 넓어진다. 따라서 해외로부터 잡오퍼를 받아 몇년의 계약을 맺고 그곳으로 이주해 생활하면서 영주의 가능성을 탐색하다 탐탁치 않으면 다시 다른 나라로의 이주 혹은 뉴질랜드로 돌아오는 옵션을 탄력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nomad가 될 수 있다. Nomad 이주민 형태는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곳 파케하 사이에 오래전 부터 보편화되어있는 OE(Overseas Experience)가 그 한 유형이다. 유러피안에게 이런 유목민적 삶의 방식은 역사적 DNA로 이미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돌아다니며 유목민의 삶을 사는 사람보다는 여전히 뉴질랜드에 영주하며 생활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한인 이민자 1.5세대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앞으로 해외로 떠날 계획도 상황도 안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꼴리면’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된 초국가주의적 유목민 정체성이 아니라 이곳에 사는 동안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지속적으로 ‘다름(differecne)’을 주지받는 가운데 반발적(reactionary) 정체성을 뛰어넘어 자존감을 지켜줄 수 있는 ‘지속가능한(sustainable)’ 정체성이 필요하다. 다른 말로 파케하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든 일치시키려 자신 내에 있는 Koreanness를 고의적으로 외면하는 유형의 정체성 그리고 ‘너희들이 나를 차별했으니까 나도 너희들을 무시할꺼야’식의 마인드로 한인공동체로 들어 앉아 주류 사회를 아예 ‘생까는’ 정체성 유형 모두 지속가능하지도 않고 건강하지도 않을 뿐더러 결국 자신을 다치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 이런 유형의 정체성으로는 ‘in-betweenness’의 위치에 놓여있는 1.5세대가 이 사회에서 앞으로 치고 나아가는 추진력을 얻기 힘들다.
필요한 정체성, 세계시민(Cosmopolitan)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1.5세대뿐만 아니라 소수민족 이민자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정체성은 방어적이고 필요하다 싶으면 언제든지 퇴각하여 빗장을 걸어 잠글 수 있는 ethnic identity도 아니고 주류 파케하가 패권을 차지하고 있는 한 선뜻 동의하기 힘든 national identity도 아니다. 정서적 익숙함과 편안함을 위해 ethnic identity에 매달리다 보면 파케하가 주도하는 직장을 포함한 사회 무대에서 의미있는 활동과 성취감을 느끼기 힘들게 된다. 반면 national identity를 중시한다는 것은 결국 파케하 정체성을 쫒아간다는 의미인데 낮에 직장에서는 파케하처럼 생각하고 활동하고 어울릴 수 있을지언정 밤에 집에 돌아와 혼자 있을 때조차 파케하처럼 휴식을 취하지는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을 초월하면서 파케하와 같이 있는 공간이든 한국인이랑 같이 있는 공간이든 아니면 혼자만 남겨진 공간이든 관계없이 나를 나답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정체성이 필요하다. 그 정체성은 세계시민주의( cosmopolitanism)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해동포주의로 번역되기도 하고 코스모폴리타니즘이라고 한국식으로 영어발음을 하기도 하는 cosmopolitanism(세계시민주의)은 전쟁과 불평등으로 가득찬 세상을 바라보며 모든 세계인이 평등하게 또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는 염원을 가득담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세계시민주의는 상이함과 다양성에 대한 개방적 태도와 행위의 집합을 말하는데 미디어를 통해서 이런 세계시민의 표상처럼 비춰지는 사람들은 대부분, 전부가 아니라면, 부유한 계층 아니면 엘리트 계층이다. 그리고 그들의 세계시민주의는 가진 자가 못가진 자에게 베푸는 온정주의 형식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따라서 현실 생활에서 주류 그룹으로부터 자기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입장에 있는 주변인 위치의 소수민족 이민자들에게 과연 세계시민주의라는 정체성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또 어떤 역할을 행사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게 된다.
일단, 경계선에 서서 두 문화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는 1.5세대는 세계시민이 되기 위한 여정에서 비록 그 배경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부모에 의한 것이지만 남들보다 앞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1.5세대는, 10대 때는, 학교에선 영어와 유럽문화에 온전히 노출되고 집에 돌아와서는 한국어와 한국 문화 속에서 생활함과 더불어 때로는 이 두 언어와 문화의 중개 역할을 하면서 세계시민이 되기 위한 실전 상황을 매일 겪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1.5세대는 globalization으로 지구촌(global village)이 되어가는 세계가 기대하는 바람직한 세계시민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전위대 (vanguard)의 맹아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전위대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불균형적 역학 관계와 실생활에서 새로운, 종종 적대적, 환경에 적응하고 타협하면서 자신에게 가해지는 다양한 압력을 이겨내야 하는 과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 경계선에 위치해있다는 이유만으로 저절로 세계시민으로서 정체성이 갖춰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예를 들어, 학교 상황같으면 bullying 상황까지는 아니어도 주류 백인 동료 그룹에 끼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상황 그리고 거리에서 만나는 백인 혹은 마오리로부터 인종 차별적 발언을 듣는 상황 등을 극복해야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세계시민이란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은 위와 같은 상황들에 대해 슬기롭게 대처하는 ‘실천적 행위’를 의미하며 이를 위해서는 성찰적 자기이해(reflexive self-understanding)와 더불어 내가 속해 있는 두 문화의 상호 관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창의성이 필요하다.
공격적 실천을 통해서만 가질 수 있는 정체성
실천적 행위가 동반되지 않는 소위 ‘정신승리’ 모양새의 차별과 소외를 극복하는 방식은 자위에 불과하다. ‘너희가 나를 차별했어? 그럼 나도 너희들을 차별할꺼야’ 다짐하면서 역차별 그래서 결과적으로 쌍방차별이므로 나만 손해보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웃픈 결론이다. 차별은 ‘다수가 소수에게만 할 수 있는 사회적 행위’이고 소수가 다수에게 행하는 것은 ‘저항’으로 불린다. 과거 남아공의 소수 백인이 다수 흑인에 대해 행한 것은 차별이 아니라 식민지배이므로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참고 논문에서 인용된 아래 인터뷰들은 뉴질랜드의 중국 1.5세대 이민자들이 세계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 현실에서 자기 주변을 부단히 엄습하는 비세계시민주의적 환경에 대해 대처하는 실천적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보여준다.
“나는 사람들과 얘기하는 것을 좋아해요. 심지어 수화로라도 얘기를 해요. 이 과정에서 난 친구도 만들고 적도 만들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재미있고 즐거워요. 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지금까지 별 어려움이 없었어요. 물론 문화적 차이같은 문제가 있고 때로 인종차별 상황이 벌어지지만 내 머리는 그런 것들을 차단(block out)시켜 버립니다. 난 그런거에 그렇게 신경쓰지 않아요. 어떤 사람이 ‘칭챙 차이나맨(Chingchang Chinaman)’이라고 떠들어도 난 그런거 무시해버려요.” (Grace 24세 여성)
“때때로 파케하들은 좀 불친절한 때가 있는데 그건 우리가 자기네 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그날 안좋은 일을 겪었기 때문이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중국인이기 때문에 다르게 대접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만약 당신이 백인들만큼 착하고 그들만큼 이 나라에 속해있다고 믿으며 그들은 우리 중국인이 열등한 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보이는 것들이 달라질 거예요. 때로 벽(barrier)은 당신 안에 있어요. “ (Emily 23세 여성)
“나는 사람들에 따라서 대하는 방식이 달라요. 예를 들어, 내 플랫메이트는 백인 키위예요. 그녀가 뭔가에 대해 얘기할 때 항상 빈정거리는 식으로 얘기를 하는데 나도 그녀에게 얘기할 때는 그녀 방식으로 조크하고 그녀의 유머 코드를 따라하지만 다른 아시안 친구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아요. 나는 내가 얘기하고 있는 상대방과 더 잘 어울리기 위해 얘기하는 방식을 바꾸는데 익숙해졌어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나의 학교 친구들이 영어를 사용하는 것을 알고 나는 개네들의 언어를 흉내내면서 점차 영어를 배우게 되었어요. 허지만 중국어는 더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어요. 그래서 내가 부모님과 얘기할 때는 다시 그들의 말을 따라할 필요가 있었어요.” (Sarah 27세 여성)
1.5세대 뿐만 아니라 나같은 1세대 중에서도 많은 이민자들이 외모 그리고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한 차별과 소외 경험으로 인해 마음 속에 벽을 설치하곤 한다. 세계시민은 이런 상황에 대해 조감도적 이해를 통해 자신의 마음속에 벽을 설치하는 대신 이 이해에 기반한 성숙한 하지만 공격적 대처 행동 양식을 정립한다. 예를 들어, 위 응답자 Grace 처럼 차별적 행위를 당했을 때 속으로 ‘아이고, 피부색이 하얗다는 것말고는 자랑할 것이 없나보다 이 찌질한 놈아. 나는 너같이 찌질한 얘가 하는 말에 상처를 받을 만큼 그렇게 약해 빠지지 않았어. 난 네가 뭐라 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조금은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조금은 더 자랑스러운 내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라고 코웃음치며 가볍게 넘겨버리는 것이다..
세계시민(cosmopolitan)이 된다는 것은 결코 마음의 수양으로 세상의 모든 인간을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사해동포 - 형제 자매란 의미에서 - 로 여기는 깨우침의 경지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세계시민의 시민증은 일상 생활속에서 세계시민이란 정체성을 가슴에 새긴 채 융통성과 적응성을 위 인터뷰 응답자 Sarah처럼 상황에 맞게 전략적으로 활용하려는 의지와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세계시민이란 정체성을 통해 한국인도 파케하도 아닌 어정쩡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1.5세대는 '강해져야' 한다. 그리고 정치적이고 실용적이어야 하며 목적과 필요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것을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차별과 혼란이 난무하는 경계인적 생활 환경에서 자신의 중심을 잡아주고 자존감을 지켜주는 정체성으로 세계시민주의는 이렇게 일상 생활 속에서 이어지는 도전을 하나씩 하나씩 물리치고 나중에는 이런 도전을 도전으로 여기지 않는 경지에 도달했을 때 공식적 세계시민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지만 뭔가 불공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기서 태어난 파케하는 이런 생고생을 할 필요가 없는데 아시안으로 태어나 이 땅으로 왔다는 - 그것도 자의라기 보다는 부모의 의지때문에 - 이유만으로 이런 극기훈련을 감수해야되니 말이다. 이 불공평한 느낌에 대해 공감은 하나 만약 위안을 원한다면 진부하지만 이렇게 답할 수 밖에 없을 것같다. 세상이 원래 그렇다고. 이 블로그를 통해서 누차 강조했지만 인간 사회가 동물 사회와 다른 점은 ‘인위성’이다. 인간사회는 기본적으로 동물사회와 같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정글법칙을 가지고 출발했지만 역사가 흐름에 따라 약육강식의 법칙을 인위적으로 억제하는 규칙들을 만들어 냈다. 이 규칙들은 ‘육肉’을 제공하던 ‘약弱’들의 반란과 저항을 통해 이루어졌다. 세계시민주의는 결국 인간사회에서 이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을 완전히 밀어내기 위한 이념일 것이다. 우리는 그 이념을 완성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당연히 불공평한 세상에 아직 살고 있는 것이고 이 땅에서 우리는 아직 약자이기에 이 불공평함은 이 시대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의 몫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이것의 시정을 위해 노력 역시 우리의 소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맺음말
1.5세대는 in-betweenness로 표현되는 경계인이다. 이전에 혼혈 2세의 경계인적 위치에 대해 ‘능선인(A person on the ridge)’으로 비유한 적이 있다. 1.5세대에게도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싶다. 한국과 뉴질랜드라는 마을이 한 능선을 사이에 두고 양쪽 분지에 각각 자리 잡고 있으며 1.5세대는 이 두 마을을 한꺼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능선에 서있다. 이 능선에 서 있으면 한국과 뉴질랜드 마을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조감도적으로 보게 되면서 왜 그들이 그렇게 사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능선인은 이런 조감도적 이해를 얻기 위해 힘들게 능선까지 올라왔고 - 성찰적 자기 이해를 통해 - 언제까지 능선에만 머물 수 없기에 양쪽 중 한 마을로 내려가 그 속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 약간은 다른 능선인의 모습에 분지 마을 사람은 경계를 하나 능선인은 씩씩하게(confidence) 그리고 때로는 싹싹하게(flexibility and adaptability) 이들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생활을 해 나아간다.
그러나 능선인은 안다. 이 분지를 벗어나면 또 다른 마을을 만날 수 있으며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또 다른 외모와 문화를 가지고 있음을 그리고 또 그 다른 문화를 가진 미지의 사람들도 결국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그러하기에 능선인은 아직 만나보지 못한 미지의 마을, 미지의 사람들에게도 손을 먼저 내밀 수 있는 열린 사람이 되고자 하며 이를 우리는 세계시민이라고 부른다.
참고문헌
B, Wang and F, L, Collins. (2016). Becoming cosmopolitan? Hybridity and intercultural encounter amongst 1.5 generation Chinese migrants in New Zealand. Ethnic and Racial Studies. 39(15), 2777-2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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