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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Fay 그리고 1987년 아메리카 컵
Michael Fay는 금융브로커였다. 1970년대 그는 높은 세금을 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특정 프로젝트에 투자를 유도하여 IRD에 이들의 투자금을 비용으로 처리하도록 알선하는 업무를 통해 돈을 벌었다. 국민당 Robert Muldoon 정부(1975~1984년)의 경제개입정책하에서도 위와 같은 방식으로 백만장자가 된 Fay에게 금융시장 규제 철폐와 외환거래의 상당 부분을 민간 영역에 위임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시장 자유화 정책을 가지고 등장한 노동당 정부의 로저노믹스는 Fay 말에 따르면 ‘a godsend, a gift from Heaven’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즉 그는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비즈니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금융시장 자유화 기조 속에서 어쩌면 일개 금융브로커에 불과했을 Fay는 노동당 정부의 Business Roundtable에 당당히 참여하면서 국제 금융시장에서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금융인으로 성장했다. 노동당 정부로서는 로저노믹스가 지향하는 새로운 형태의 신자유주의적 기업가의 모범으로 Fay가 등장한 것이다. 노동당 정부의 이런 기대와 신뢰를 등에 업는 Fay는 뉴질랜드 국영기업의 이름으로 해외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저금리로 빌릴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 돈을 굴리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 Fay의 회사는 1986년에 시드니와 런던에 지사까지 내면서 직원 수가 100명을 넘게 된다.
Fay가 개인적으로 이렇게 잘 나아가고 있을 때 1987년 호주 Perth에서 열리는 제26회 아메리카 컵은 뉴질랜드 요트인들에게는 각별하게 다가왔다. 그때까지 머나먼 미대륙에서 모든 대회가 열렸고 그 컵의 주인공은 초강대국 미국인 상황이기 때문에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었다. 하지만 1983년 대회에서 영원히 난공불락인 것처럼 보였던 미국팀( 1851년 초대 대회부터 136년간 컵을 한 번도 빼앗기지 않았다)을 무너뜨리고 옆 나라 호주가 컵을 차지하고 그 컵을 호주로 가지고 오면서 다음 대회가 Perth에서 열리게 되자 뉴질랜드 요트인들은 진지하게 참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뉴질랜드 요트 클럽들의 좌장 격이자 그나마 유일한 능력이 있어 보였던 Royal New Zealand Yacht Squadron(RNZYS)에서는 참가 신청 마감 이틀 전에 미디어를 통해 1987년의 호주 대회에도 뉴질랜드 참가팀은 없을 것이라고 발표한다. 그러나 이를 반박하듯 참가비 $16,000을 낸 신청팀이 뉴질랜드에 있다고 대회 주최 측인 Royal Perth Yacht Club이 발표한다. 참가 신청서를 낸 이는 시드니에 거주하는 다이아몬드 중개상으로 뉴질랜드 시장 진출을 염두에 두고 신청한 것이다. 그는 이때 장관을 역임했던 전 국민당 의원 Aussie Malcolm에게 프로젝트를 담당해서 성사시켜 달라고 부탁한다.
Malcolm은 발에 땀이 나도록 스폰서를 찾아 나섰으나 푼돈 - 몇십만 불 기부자도 있었으나 아메리카 컵의 전체 비용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에 그치면서 참가 무산 위기에 빠진다. 그런데 이 스폰서 찾는 과정에서 Fay도 간접적으로 접촉되었는데 그는 몇 개월에 걸친 ‘feasibility study(사업타당성 조사)’끝에 메인스폰서/프로젝트 매니저가 될 것을 결심한다. Feasibility study란 용어는 전형적으로 비즈니스 세계에서 사용되는 용어인데 이 용어는 Fay가 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직접 사용한 용어다. 즉 그는 몇 개월간 요트 경기에서 상대 팀 선수를 과연 이길 수 있을까에 대한 study를 한 것이 아니라 대회 참가를 통해서 투자 수익을 낼 수 있을까에 대한 study에 시간을 보낸 것이다. 아무튼 그는 단기 수익성 외에도 장기적으로 아메리카 컵을 통해 국제 금융 무대에 자신의 회사를 알릴 기회라고 판단했다.
이 판단은 정확했다. 아메리카 컵 결선에 진출하기 위한 챌린지 대회 준결승에서 프랑스 팀 French Kiss를 물리친 다음 날 주당 $0.25에 불과했던 그의 회사 주식은 $8.60까지 치솟는 초대박을 기록했다. 이 스폰서 결정으로 그와 그의 비즈니스 파트너 Richwhite는 1년 사이에 각각 3억 달러의 자산 증가를 가져오게 된다.
Fay, 키위 애국심을 자극하다
아메리카 컵 참여를 새로운 비즈니스 프로젝트로 간주하여 심사숙고 후 투자를 결정한 Fay는 미리 생각한 목표와 전략을 행동에 옮긴다. 그 중 하나는 아메리카 컵에 대한 뉴질랜드 대중의 관심을 끌어올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회사를 뉴질랜드 경제계에서 단단히 입지를 다지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아메리카 컵에 대한 뉴질랜드 대중의 관심을 끌어올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Fay는 뉴질랜드 대중의 ‘애국심(nationalism)’을 활용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이 전략은 여러 트랙으로 이루어진다. 그 중 하나는 현실적 기대감의 고취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 컵은 뉴질랜드 국민에게 ‘30억 달러 노다지’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꿈의 주입이었다. 통일은 대박이다를 외치면서 정부의 일방적 대북 정책에 대한 이의 제기를 사전에 원천차단하려 했던 한국의 모 정치인을 연상시키는 구호다. 이 구호는 스포츠의 아마추어리즘을 소중히 여기며 Fay처럼 자신의 돈벌이 목적으로 스포츠를 이용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진 일부 뉴질랜드 대중들로 하여금 ‘국가의 이익(national interest)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통해서 이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일개 요트 클럽 간 경기에 왜 국민의 세금을 투입하느냐는 반복되는 불만에 지금까지 모든 정부는 ‘아메리카 컵 유치 경제효과론’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꺼내 들면서 이 불만들을 가벼이 무시해 왔을 만큼 여전히 효과적이다. 결과적으로 이 대박 논리는 21세기인 지금 ‘스포츠’와 ‘비즈니스’의 연결이 더는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일이 아닌 정상적인 현상처럼 인식되게 만들었다. 하지만 과연 컵 유치를 통해 ‘유의미’한 경제적 효과가 있는 것인지는 별도로 살펴볼 대목이다.
다른 하나는 뉴질랜드 대중의 애국 정서(nationalistic sentiment)를 고양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은 1987년 아메리카 컵의 스폰서 중 하나인 BNZ(당시에는 국영기업이었다)의 티비 광고 ‘Sailing Away’였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마오리 민요 ‘Pokarekareana’를 개사한 곡을 파케하와 마오리 유명 연예인들이 marae에서 같이 불렀다. 아시안 이민자의 본격적이 유입 전이었기 때문에 와이탕기 조약에 근거해서 Biculturalism에 근거 뉴질랜드 국민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파케하와 마오리 두 에스닉 그룹 그리고 남성과 여성을 같이 동원해서 뉴질랜드 전 국민이 1987년 뉴질랜드의 아메리카 컵 도전을 응원하는 이미지를 연출했다. 이는 1985년 아프리카 기아에 대한 인식 제고와 도움을 주기 위해 미국의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대거 등장하여 ‘우리는 하나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We are the world’와 같은 형식이다. 하지만 아메리카 컵에 참가한 뉴질랜드 팀의 요트 승무원(boat crew)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백인 남성’뿐이었다.
이 애국심 호소 전략이 뉴질랜드 대중에게 먹혀들어 갔을까? ‘We are the world’가 2천만 장이 넘는 앨범 판매를 기록해 초대박을 쳤듯이 ‘Sailing Away’도 6만 장이 넘는 싱글 앨범이 팔려 당시까지 뉴질랜드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싱글 앨범이라는 사실은 이 전략이 완벽히 맞아떨어졌음을 증명한다.
또 다른 하나는 ‘다윗과 골리앗’ 프레임 설정이다. 즉 뉴질랜드의 아메리카 컵 경쟁 참여는 미국이나 호주와 같은 초 갑부 ‘골리앗’ 팀 대 이런 초 갑부가 없는 뉴질랜드 국민 ‘다윗’ 팀 간의 싸움이라는 프레임이다. Fay의 말로는 “...this is a New Zealand effort.” 이 프레임의 지향 목적과 별개로 뉴질랜드에 이런 초 갑부 스폰서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스위스 알링기나 미국 오라클 경우 소유주의 세일링에 대한 열정 그리고 그 열정을 현실화할 수 있는 부가 그들에게 있어서 아메리카 컵에 참여했고 우승까지 일궈냈지만, 뉴질랜드에는 최초 참가부터 2021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런 유형의 스폰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Fay, 미디어를 장악하다
뉴질랜드 팀이 처음으로 정식 아메리카 컵 결선에 진출한 1995년에는 국영미디어 TVNZ이 팔을 걷어붙이고 아메리카 컵 취재에 시작부터 끝까지 주도적으로 관여했지만 1987년에는 그렇지 않았다. 처음 출전하는 챌린지 대회에서 자신의 팀을 다루는 뉴질랜드 미디어의 기사 내용과 방향을 Fay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끌고 싶어했다.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은 촌지는 아니지만, 촌지에 해당하는 경비의 보조였다. 많은 기자가 부분적으로 혹은 전적으로 Fay와 스폰서인 BNZ 그리고 Lion (Steinlager 맥주 제조회사로 1987년부터 2021년 올해 대회까지 계속 아메리카 컵 출전 뉴질랜드 팀을 스폰서해왔다)으로부터 Perth에 가는 비행기 요금부터 숙박비 그리고 체류 비용을 보조받았다.
챌린지 대회 결승에서 패해 아메리카 컵 결선 무대에 서 보지 못한 뉴질랜드 팀이었지만 귀국 후 오클랜드에서 대대적 카퍼레이드 환영행사를 받았다. 그리고 미디어에서는 ‘the sailors who carried home New Zealand’s hopes’등의 레토릭으로 우승 실패가 비즈니스의 실패로 이어지지 않고 또 뉴질랜드 대중의 애국심이 경기 후에도 식지 않기를 기원했다.오클랜드 퍼레이드에 나타난 오클랜드 시민의 숫자는 Fay의 전략들 - ‘스포츠’와 ‘비즈니스’ 결합이 뉴질랜드 대중 사이에서 자연스러이 받아들여져 국민이 궁극적으로 이 비즈니스를 성원하게 하는 전략 - 이 성공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B, Evans, (2004). Commercialising national identity: a critical examination of New Zealand's America's Cup campaigns of 1987, 1992 and 1995. Auckland, NZ: Auckland University of Techn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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