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뉴질랜드 이야기

파케하가 사랑했던 그 남자 - 아메리카 컵 이야기 (5)

김 무인 2021. 3. 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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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케하가 사랑했던 남자, Peter Blake

 

피터 블레이크는 뉴질랜드 사람 - 파케하,마오리, 퍼시피카 그리고 아시안을 포함 - 치고 좋아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국민적 호감도가 높은 사람이다. 그가 운을 가져다준다고 믿어 시합 때마다 빨간 양말을 신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TVNZ은 1995년 챌린저 대회인 루이비통 컵에서 뉴질랜드가 우승해서 아메리카 컵 결선 진출이 확정되자 빨간 양말 신기 캠페인을 벌여 1주일 만에 11만 켤레의 양말을 팔아 50만 불을 모았을 정도였다. 얼굴 자체도 사람 좋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그가 이처럼 에드먼드 힐러리 경과 같은 반열에서 뉴질랜드 국민적 영웅 취급을 받는 것은 단지 그가 아메리카 컵에서 보여준 뛰어난 성적 때문만은 아니다. 





당시 미디어에선 그를 신자유주의의 화신(personification of neo-liberal axioms)으로 묘사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신자유주의에서 이상화하는 자신의 이익을 합리적으로 유능하게 추구하는 개인주의자의 전형적 모델은 아니다. 물론 그는 매우 유능한 프로페셔널 (practical professional)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팀 맨(team man)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시대의 사조 신자유주의가 기대하는 신자유주의적 개인의 모습도 지니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파케하들이 간직하고 있는 전통적 ‘mate’ 정서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 이상적 ‘파케하 남성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전 포스트 ‘남자답다고? (Man-Up?)’에서 파케하의 남성성은 초기 정착민 시절의 거친 개척자 남성성과 그 이후 가정적 도시인 남성성으로 구분 혹은 이들의 혼재로 설명될 수 있다고 했다. 피터 블레이크는 정착민 개척자로서 강인함, 끈기 그리고 투지와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세련된 중산층 도시인으로서 가정적인 온화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피터 블레이크의 모습은 뉴질랜드 사회의 ‘파케하’라는 에스닉 그룹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다는 생각이다.

 

이민을 와보니 마오리라는 원주민이 이미 존재해 있고 비슷한 정착민 국가인 호주나 캐나다처럼 아예 원주민을 국가건설(nation building)과정에서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과의 공존을  biculturalism을 통해 공식적으로 인정한 상황에서 ‘우리끼리만’의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확인할 마땅한 사회적 문화적 공간이 파케하에게는 그동안 없었다. 파케하, 마오리 그리고 퍼시피카 등 ‘모든 뉴질랜더’를 아우르는 All Blacks라는 국가적 스포츠 아이콘이 있지만 올블랙스는 파케하’만’의 아이콘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다중의 정체성 - 예를 들어, 가족, 직장, 국가 내에서 우리는 각각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다 - 을 가지고 있듯이 올블랙스는 ‘우리 파케하’ 만의 올블랙스는 아닌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착민 시절 개척자 조상의 강한 남성성과 20세기 후반을 사는 자기와 같은 도시적 부드러움을 같이 가지고 있는 동료(mate) 파케하가 (어쩌면) 자기들(파케하)만이 할 수 있고 실제 하는 엘리트 스포츠 요트를 통해 세계를 제패한 것에 그들은 열광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아메리카 컵의 우승은 뉴질랜드의 승리라고 보다는 파케하의 승리로 다가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피터 블레이크이지만 그 역시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한 듯싶다. 그의 언행을 기록한 자료들을 보면 그는 부자들에 대해 거부감을 갖기 보다는 그저 ‘열심히 살아서 부를 축적한 사람들’ 정도로 인정하고 넘어가는 스타일이다. 또 지금까지 신자유주의적 영향을 받은 아메리카 컵 후원자들이 주장하는 ‘아메리카 컵 대박론’을 피터 블레이크 역시 수용한다. 그도 아메리카 컵 유치로 최소한 1억 달러 유입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 바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느낌으로 피터 블레이크는 날카로운 사회의식이 없는 사람이다. 사회의 큰 흐름에 순응하면서 상대방이 부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호의를 가지고 대하면서 자기가 관심을 두는 일 그리고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여 온 힘을 다하는 스타일의 사람처럼 보인다.    

 

오클랜드 도메인에서 열린 추모식에 3만명이 운집했다

 

아메리카 컵 유치는 대박?

 

2007년 제17대 한국 대통령 선거 당시 이명박을 뽑은 유권자들 - 아마도 내 가족과 친척 중 상당수도 포함되어 있을 것 같다 - 들 대부분은 아마도 그의 747 공약을 혹시나 하면서도 기대감에 그에게 투표했다고 추정하는데 궁극적으로 그들 마음속에는 먹고 사는 게 나아지기만 하다면 다른 것들은 좀 잘못되었어도 용납할 수 있다는 타협적 태도가 그들 안에 있었다고 본다. 뉴질랜드의 그간 정부는 아메리카 컵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같은 논리로 합리화하면서 국민을 설득 혹은 반대를 무시해왔다. 아메리카 컵 대회를 뉴질랜드에 유치할 때마다 천문학적 경제효과가 발생하므로 민간 조직 혹은 기업 차원에서 행해지는 요트 대회에 왜 국민의 세금으로 국가가 이를 지원해야 하느냐는 반대를 ‘국가적 이익(national interest)’이 있기 때문에 누가 주도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태도로 무시 혹은 찍어 눌러왔다. 그렇다면 원초적 질문과 이에 대한 답을 시도해보자. 

 

아메리카 컵은 뉴질랜드에 진정 부(wealth)를 가져다주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부의 수혜 대상이 뉴질랜드(the nation)라면 구체적으로 뉴질랜드 내 어떤 그룹인가? 이 질문에 대해 정부도 친 아메리카 컵 캠페인 미디어도 구체적으로 답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 오클랜드 시장  Phil Goff는 이번 대회를 통해 관련 산업 매출이 10억달러에 달하고 8,300개의 직업이 창출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매출의 이익이 누구에게 가며 창출된 직업이 양질인지 아니면, 가령 몇 개월 한정 파트타임 식당 종업원인지 모르는 상황이다. 더 나아가 이번 대회를 위해 오클랜드 시와 중앙정부는 합해서 약 2억 5천만 달러를 투자했다. 이중 1억 4천만 달러가 정부 부담인데 오클랜드는 신 인프라 개선에 이 돈이 쓰이고 직업도 양질이든 아니든 어쨌든 오클랜드 내에서 창출되므로 수혜자라고 할 수 있는데 다른 지역에 사는 국민들은 자신들의 세금이 오클랜드를 위해서 쓰이는 것을 쳐다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유감스럽지만  아메리카 컵은 여타 시장 상품처럼 자본가의 자본 축적의 한 수단에 불과하다. 아메리카 컵 관련 비즈니스로부터 직접 발생한 수익은 대부분 이미 특혜를 누리고 있는 백인 남성 엘리트층의 부를 증가시켰을 뿐이다. 뉴질랜드 대중은 아메리카 컵 대회 기간 ‘대표팀’에게 성원을 보내달라고 촉구받았지만, 이는 결국 자신의 노골적 이익에만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충성’ 하라는 의미에 불과할 뿐이다. 현실적으로 아메리카 컵 유치를 했을 때 대부분의 뉴질랜드 대중은 관광업 혹은 하이테크 분야에서 떨어지는(tickle-down) 부의 콩고물을 주워 먹었을 뿐이다.



올블랙스와 팀 뉴질랜드가 다른 점

 

신자유주의와 함께 시작한 팀 뉴질랜드와 달리 올 블랙스는 한 세기가 넘는 기간 뉴질랜드 nation building에 함께 했다. 럭비는 뉴질랜드의 도시와 시골, 파케하와 마오리뿐만 아니라 퍼시피카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사회경제적 지위와 관계없이 모든 사회구성원이 직접 그 스포츠를 즐기는 전통적 아마추어 참여형 스포츠였다. 지금도 올블랙스에 들어가는 것을 궁극적 꿈으로 하는 10만 명의 아마추어 선수들이 매주 토요일 아침마다 뉴질랜드 전 지역 럭비 구장에서 클럽 대항전을 치른다. 



Peter Blake와 Red socks



이에 반해  아메리카 컵 수준의 요트경기는 대부분의 뉴질랜드 대중이 참여할 수 없으며 이들이 아메리카 컵 수준의 요트 대회에 참여하는 유일한 방식은 미디어 혹은 바닷가에서 ‘참관(spectatorship)’ 그리고 ‘소비(consumption)’ 밖에 없다. 빨간 양말 구매는 그 소비 중 하나이다. 대회가 열리면 TVNZ에서 제공해주는 티비 중계를 steinlager 맥주를 마시면서 관람하고 통 큰 시청자는 레이스 승리 후 기분 좋다고 토요타 새 차를 계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대중의 참관과 소비를 통한 ‘피동적’ 참여는 단지 아메리카 컵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득세 이후 현대 사회의 통상적 풍경이다. 중요한 대부분 결정은 기업들에 의해 이루어지며 민간 참여는 이 기업들이 판을 이미 짜놓은 방식을 통해 소비하는 것으로 한정된다. 이는 나중에 다시 논의할 기회가 있겠지만, 신자유주의 혹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자리 잡는다. 주권의식을 가지고 의사 결정에 적극 참여하는 모던 시대의 자유인 시민(citizen)은 사라지고 피동적으로 소비에 있어 선택의 자유만을 자유의 전부로 받아들이는 포스트 모던 시대의 소비자(consumer)만 존재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B, Evans, (2004). Commercialising national identity: a critical examination of New Zealand's America's Cup campaigns of 1987, 1992 and 1995. Auckland, NZ: Auckland University of Technology

 

Russell, A. (2017, June 20). Why the America’s Cup pushes our patriotic buttons. newsroom. www.newsroom.co.nz/why-the-americas-cup-turns-us-into-flag-waving-nationali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