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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민주사회주의는 부활하는가? - 민주사회주의 이해하기 (서론)

김 무인 2021. 6. 15.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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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Inheritance for Our Times: Principles and Politics of Democratic Socialism

(우리 시대의 유산: 민주사회주의의 원칙들과 정치학)

 

 

Introduction (소개말)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지금처럼 소수 권력이 다수를 상대로 해진 적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어떤 왕도 교황도 그리고 (미국) 남북전쟁 후 호황기 산업계의 어떤 거물들도 우리 시대의 경제 엘리트들처럼 전 세계적 차원에서 인류의 운명을 재조직하고 결정하는 권력을 가져 본 적이 없다. 20세기, 소수를 위한 끝나지 않는 잉여 창출과 다수의 정치적 침묵을 목적으로 한 대량소비사회가 전 세계적 삶의 형식으로 퍼져 나아갔다: 이 소비사회는 사회뿐만 아니라 자연의 완전 파괴라는 벼랑으로 인류를 몰고 갔다. 전 세계적으로 환경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증가하는 사망률, 약물중독 그리고 정신 질환은 심지어 가장 부유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발견되는 새로운 실체다: 또 오랜 역사를 가진 편견에 대한 새로운 환호가 세계 정치계에 야비하게 다시 돌아오고 있다. 보다 민주적이고 의미 있는  삶과 문화의 형식들을 향한 사회의  재편성 전망은 점점 더 물질적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편협한 기술발전과 갈수록 알 수 없는 수단들에 자리를 빼앗긴 것처럼 보인다. 국내적으로  공공투자의 감소에도 빈부격차가 갈수록 벌어지는 와중에도 경제 엘리트들은 더 높은 이익을 추출하기 위해  전 세계 경제를 재편했다. 이와 동시에, 전 세계적 독과점 체제가 성장했으며 반대급부로 민주적 삶과 민주적 제도들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 위기 속에서 민주사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지각과 관심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가 기껏해야 역사적 호기심 정도로 치부되었던 서구에서 이제 사회주의는 선거정치에서 실질적 토론 주제가 되었다. 이런 열망은 후기 자본주의의 대규모 불평등 때문에 촉발되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 불평등이 재분배 차원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새로운 가치체계에 기반을 둔 새로운 종류의 사회가 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사회조직 방식만이 우리의 사회적 관계, 우리의 문화 그리고 우리의 자연환경에 가해진 깊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새로운 인식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소비자 사회의 강한 사회화 경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일의 본질, 기술의 민주적 사용 그리고 물질의 양보다는 삶의 질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이 필요할 것이다. 공동의 선, 일의 존엄성, 자연과 타인에 대한 존중 그리고 경쟁이 아닌 협동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가치들은 근시안적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타인의 희생 위에서 부의 생산 확대를 위해 인류의 진보를 무너뜨린 우리 시대의 지배적 가치 시스템에 대항할 것이다.

 

이 민주사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우리는 과거 사회주의 염원의 연속 선상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2차 대전 후 자본과 노동 간에 맺어진 사회계약은 복지국가의 법적 정치적 뒷받침으로 형성된 중산계급 사회를 인위적으로 창출할 수 있었다.  이 사회계약 틀 안에서 산업사회는 대다수 국민의 요구에 따라 규제되었다. 공공 프로그램, 고등교육 그리고 연구개발을 위한 예산 배정이 포함된 경제정책들 그리고 주택 담보대출과 노조 결성권에 대한 보호가 도입되었다. 

 

이 모델은 점진적으로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잠식해갔다. 그 결과, 자본가들은 이 리버럴 복지국가를 신자유주의 사회 질서로 전환하기 위한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프로젝트에 집중했다. 자신의 부를 지키기 위한 그들의 정치 프로젝트는 불평등을 증가시키고, 부의 축적을 가속하고 다수를 위한 사회적 프로그램을 실질적으로 삭제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설립했다.

 

따라서 이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은 좌우 가릴 것 없이 주류 정당의 프로젝트가 되었다. 유럽의 Social democrats (사회민주주의자), 영국의 New Labour(신 노동) 정치인들 그리고 미국의 New Democrats(신민주주의자)들은 이제 어떤 정치적 전망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한때, 진보적으로 사회를 자유화하고 사회적 권리를 확대하며 경제적 불공평을 해결한다는 자신 있던 전망 덕분에 탄력을 받았던 리버럴 프로젝트는 복지국가와 그 복지국가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가져가는 것에 반대하는 신자유주의 반란으로 분쇄되었다. 1990년대 이들 정당의 재건은 보다 “진보적(progressive)” 문화적 가치를 가진 신자유주의 정당의 부활에 불과했다.

 

영국의 New Labour(신 노동)의 Tony Blair

 

탈산업사회로의 이전은 사람들을 일 그리고 불평등의 황폐함으로부터 해방해 주지 못했다. 오히려 정반대다. 이제 젊은이들은 기술을 가진(technocratic) 부르주아(만약 그들이 할 수 있다면) 대열에 합류하거나 무의미한 서비스 노동을 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나머지 노동인구도 탈산업화, 단순 기술화 그리고 자본의 전 세계적 이동으로 임금과 직장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증가함에 따라 비슷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소수를 위한 이익은 급증했지만, 대중들은 자신의 임금으로 필요 물품을 구매하는데 부족한 부분을 대출(credit)을 받아 채워야만 한다. 학자금 대출부터 의료비에 이르기까지 새 노동 계급은 이전에는 리버럴 사회 계약 일부였던 재화와  서비스 구매를 위해 이제 갈수록 빚에 의존해야만 한다.

 

도시들은 이 새로운 자본주의의 추악한 모습이 집중된 현장이다. 바리스타부터 우버 운전 그리고 음식 배달에 이르는 비천한 서비스 노동은 세련된 레스토랑과 눈에 띄는  소비의 화려한 주인공들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새로운 서비스 기반의 경제 등장은 실리콘밸리의 엘리트들이 사람들을 유례없이 불안정한 형식의 노동으로 몰고 가는 앱(apps) 개발을 통해 돈을 벌게 되면서 자본가들은 두드러지게 창조적 개인이라는 그간의 속설을 잠재운다. 

 

문화산업 역시 대중의 태도와 욕망을 형성하는데 공모하고 있다: Sex and City부터 Kardashians에 이르기까지 천박하고 물질주의적이며 자기도취적 부르주아 삶의 가치들이 거의 전방위적으로 침투하고 있다. 대다수 사람에게는 여가가 주어지지 않음에도 부와 화려한 삶은 대중문화에 의해 그 이전 어느 때보다도 축복받고 있다. 윤리적, 지적 가치들은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성공(success)”해야 한다는 시장의 강조로 대체되었다. 

 

Sex and City

 

사회적 관계도 임금의 감소에 따른 시간 압박 때문에 단절되었다. 가족, 친구, 사회적 모임 - 이 모든 것들이 자본주의 시장의 세분화 논리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 현상은 시장의 지배력, 탈산업화 그리고 탈 기술화가 지역사회와 가족들을 무너트리고 그 자리를 대량소비를 향한 허무주의적 재편으로 대체하는 다양한 방식과 궤를 같이한다.  

 

많은 이들에게 이들 다양한 현상 간 연결고리는 추상적이고 불명확할 것이다. 이 현상 간 인과적 관계의 근원으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를 보는 대신 어떤 이는 자신의 미래 전망이 암울해진 원인을 이민, “리버벌 복지국가(liberal welfare state)” 혹은 다른 환상에서 찾기도 한다. 바로 이 대목이 자본주의의 진단 이론으로서 사회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는 중산계급으로부터 상류계급의 가치와 열망으로 문화의 축을 이동시키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이 열망의 달성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경제를 구축했다. 대량소비는 선진국이 아닌 국가의 싼 노동력의 확산 그리고 갈수록 증가하는 준-노예노동이 있기에 가능했다. 동시에 자본주의 “혁신(innovation)”의 선봉은 페이스북, 구글 그리고 다른 비생산적 가치 형태로 전락했다.

 

민주사회주의는 하나의 이론으로서 자본주의 자본의 힘과 논리를 본질에서 반민주적이라고 이해한다: 자본주의의 공익에 대한 무책임감, 경제적 불평등의 생산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수직적 권력 계층, 자본을 통제하는 자들의 사회 전반의 어젠다를 설정하는 권력 등, 이 모든 것들이 민주사회주의를 현 상태에 대한 견고하고 비판적 대안으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처음부터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근대 정치 역사의 대부분에서 쌍둥이 개념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중심에는 사회적 권력은 항상 공공의 필요와 공공의 이익에 책임을 져야 하고 지위, 재산 그리고 다른 권력 자원을 가진 사람들의 임의적 권력 행사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면, 제한해야 한다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회주의의 중심에는 사회의 권력은 개인의 자유를 신장하고 확장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프로젝트가 항상 있었다. 그러하기에 사회주의는 민주주의 확산과 심화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었다. 

 

사회주의 기업을 “명령경제(command economy)”로, 사적 자유에 대한 국가 통제로, 혹은 망상적이고 편집증적인 “노예로 가는 길(road to serfdom)”로 그리려는 보수주의자들의 집요한 반동적 진부함과 달리, 사회주의는 사적, 자의적 권력을 공공선으로 전환하고 자본가와 엘리트들의 이익을 위해 조직된 사회를 공동이익이 최대화되고 진정한 개인의 자유가 드러날 수 있는  사회로 전환하는 것을 추구한다. 민주사회주의를 형성하는 정치와 원칙들은 풍부한 사상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다 - 이 전통은 우리로 하여금 사회 변혁을 위한 전망을 제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고 또 반드시 도움을 줘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는 처음부터 민주적 사회는 근본적으로 ‘협동적(cooperative)’이고 인류는 근본적으로 ‘상호의존적(interdependent)’ 종족이라는 주장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사회주의는 공공재의 사적 소유와 사회적 조직의 협동적 본질을 통제할 수 있다는 개인의 권한에 대한 자유민주주의(liberal-democratic) 사상을 반박했다. 이 주장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자본주의 비판자들에게 민주적 깊이를 더해 주었다. 자본주의는 개인에게 공권력을 허용했기 때문에  협동적 사회관계의 실현이라는 목적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사회주의는 또 자본주의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설명적 비판적 이론은 물론 어떤 종류의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를 대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전망도 제공했다 - 그 전망은 유토피아적 계획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규범과 새로운 제도를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원칙들의 체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가치와 원칙들은 자본축적과 부르주아 개인주의 세계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중세 봉건의 위계질서, 지위, 지배 그리고 통제 형식에 대한 계몽주의의 공격으로 모습을 드러낸 민주적 사회 전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점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계몽운동 촉발에 영향을 미친 폭정과 계급사회에 대한 원칙적 반대의 연속 선상이었으며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새롭고 차별화된 형식을 가질 것임을 인식해 왔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비전은 서구 사회를 형성했던 중세 영주 권력과 속박 그리고 협동을 억누르는 위계질서를 표현하는 모든 사회적 관계에 대한 봉기와 반항을 했던 “민주혁명의 시대(age of democratic revolution)”에 항상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불평등과 노예 상태를 없애고 협력적 평등 사회를 창출하려는 이 진정한 민주공화국 비전은 “자본(capital)” 혹은 더 많은 부를 생산할 수 있는 일종의 수단적 부를 가진 신흥 계급에 의해 점차 밀려났다. 자본이 산업 생산에 전폭적으로 투자되고 기술발전이 집약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노동자와 농부 대 새로운 재산 엘리트 간의 투쟁이 국민 대 귀족 간이라는 낡은 투쟁 구도를 대신했다. 

 

이 새로운 자본주의는 또 개인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부여했다. 자본주의는 그 불평등과 공동체에 대한 비대해진 사적 권력 때문에만 비난받는 것이 아니었다. 생산과정 역시 인간들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목적 그리고 그들이 누릴 수 없는 이익을 위해 인간 존재를 이용하는 소외의 과정이었다; 창조적이고 자기계발적인 일의 존엄성을 단순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시켰으며 비인간화를 만들어냈던 사회시스템의 복잡한 메커니즘에 개인을 끼워 맞추려고 했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는 사회, 개인 그리고 문화에 대해 더 협동적이고, 상호의존적이고, 창조적이며 인간적인 비전과 항상 긴장관계에 있었다. 공동체 구성원의 공동 이익을 위해 조직되는 사회 형식이 따라서 사회주의 개념의 근간이 되었다. 사회주의의 기본은 노동 없는 사회의 구축 혹은 기대를 벗어나는 “호사스러운 공산주의(luxury communism)”와 같은  이상이 아니라 보다 민주적으로 조직된 사회다. 이 사회에서는 공동체의 노력과 능력의 결과 잉여물은 개인이 아닌 공공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며 개인의 창의력과 자발성은 사회 전체의 공동이익과 조화될 수 있다.  

 

 

물론 공산주의 소비에트 모델의 등장은 사회주의 개념과 이미지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의 정치적 실체 - 국가 지배, 계층적으로 조직된 명령경제, 무자비한 산업화, 반민주적 정치제도 등등 - 가 드러남에 따라 실제로 민주사회주의는 처음부터 자신들을 차별화해야만 했다. 인간 사회에 대한 엘리트 통제의 또 다른 형식(부르주아 대신 당 간부 계급)에 반대하여 민주사회주의는 사회주의의 인도주의적이고 민주적 뿌리에 접근함과 동시에 보다 포괄적 해방의 형식으로서 사회 변혁을 지향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면에서, 소련과 그 반민주적 사회가 붕괴한 후에야 진정으로 민주적이고 해방적인 사회주의의 비전이 마침내 중심 무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소련의 강제노동 수용소, Gulag

 

사회주의에 관한 관심이 되살아나면서, 사회주의 전통 안에서 무엇이 의미 있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이것은 단지 사회주의 지지자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응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우파 권위자들과  정치인들 또 자칭 중도주의자들은 어떤 약간 좌파적인 정책 제안도 사회주의로 몰아붙이면서 Gulag(소련의 강제노동 수용소:역자 주)를 들먹거린다. 물론, 이런 것들은 사회주의 전통에 대한 실제적인 이해에 기반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대중의 집단적 정치적 히스테리를 유발하기 위해 택하는 쉬운 전술적 책동이다. 그러나  비록 우파의 주장이 잘못된 것일지라도 사회주의 전통이 우리에게 무엇을 제공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더 많이 이해해야 할 이유가 있다. 사회주의가 식빵 배급 줄과 동의어라는 식상한 격언이 그 표면적 윤기를 상당 부분 잃은 듯해도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속에 무엇이 살아 있는지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저 간단히 전체주의 실험과는 무관한 민주적 사회주의 전통이 있었다거나 전체주의는 사회주의의 민주적 약속의 왜곡이었다고 단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소련의 식빵 배급 줄

 

사회주의 정치는 그것들이 냉정하고 이론적으로 세련되고 실천적 행동에 가담했을 때 그리고 그 운동이 그룹 권리가 아닌 공공 재화와 민주적 삶의 증진이라는 성격을 가졌을 때 가장 번성했다. 사회주의 정치는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 조건들에 반응할 때 번창한다. 아마도 사회주의 전통에 가해진 가장 큰 타격은 좌파 내부로부터일 것이다. 사회주의가 정치무대에서 퇴각하면서 사회주의는 현실적 정치에서 멀어짐과  동시에 상상 속 사이비 이론의 영역이 되었다. 우파가 사회주의를 희화화한 것처럼 좌파 역시 사회주의를 만병통치약으로 만들어버렸다. 비록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 - 그의 글은 진지한 사회분석이라기보다는 공상과학소설(하지만 훨씬 재미없다)에 가깝다 - 같은 자칭 공산주의자들의 인기가 떨어지긴 했지만, 사회주의가 어떤 실체 없이 자유라는 추상적 개념을 의미한다는 그들의 생각은 불편하게 여전히 남아있다.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

 

사회주의는 모든 사회적 해악과 부당함에 대한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사회주의는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도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아니다. 정치는 구원(salvation)이 아니다. 민주사회주의는 현대 사회의 구체적이고 만연된 병폐인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적 대응이다. 구체적으로, 사회주의는 본질에서 비민주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에 대한 반응이다.

 

더 나아가, 모든 사회 운동이나 정치적 불안이 사회주의의 전조인 것은 아니다. 좌파는 너무나 자주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관계없이 모든 시위를 사회주의의 전조로 간주했다. 물론, 실천적 행동의 목적이 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투쟁과 일치한다면 축하받을 일이지만 잘못된 승리 의식은 종종 좌파가 단기적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장기적 비전을 놓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는 결국 결론 없는 무정부주의적 사회적 비전으로 전락하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정당화될 수 없는 축복이 되어버린다. 

 

사실 사회주의 전통은 강건하다. 이 전통 안에는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많은 이론가와 행동가들이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한때는 이론이 구체적 문제에 대응하고 행동이 명확한 목표를 추구했을 때였다. Occupy 운동이 신세대 사회주의자들 - 나이와 관계없이 -의 급진화에 이바지했다는 많은 사람의 지적은 맞다. 그러나 공익을 파괴하는 1%의 사회세력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다시 집중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Occupy' 역시 이후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는 것 (absence of demand)을 미덕으로 취급해버리면서 빛이 바랬다.

 

 

아마도 좌파 정치 내에서 가장 우려되는 중요한 경향은 -  우리가 이미 지적한 특정 문제들을 포함해서 -  사회주의의 염원(aspiration)과 이미 존재하는 조건을 혼동하는 것이다. Kenneth Warren and Adolph Reed, Jr가 주장한 것처럼 “형성이 안 되어있고, 시작 단계이며, 일관성이 없고 심지어 결정적으로 급진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정치적 표현들의 혁명적 잠재력”이란 표현은 좌파의 흔한 오류다. 사회주의자들이 항상 나은 세상을 의한 비전을 장려해왔지만 그런 세상이 이미 존재한다는 징후를 찾으려는 것은 헛수고로 끝나는 실수다. 이런 이유로 이론이 중요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현재 상황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결여하고 있다면 우리의 실천 행동을 왜곡할 위험에 노출된다. 우리는 가능성을 실제와 혼동하고 실제 세계의 진흙탕물을 우리의 염원과 혼동한다.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본다고 주장하는 거짓 예언자의 예언이 실현되지 않았을 때 많은 급진파는 환멸을 느꼈다. 비전을 뒷받침하지 않는 현실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얹히려는 시도들은 합리적 정치라기보다는 선전에 가깝다. 실용적 정치를 동반한 원칙에 입각한 정치적 입장이야말로 망상 속에 현실을 끼워 맞추려는 노력보다 더 긴 수명을 정치 운동에 부여할 것이다. 이제 위험은 사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사회와 개인의 진정한 갱신과 변혁이 아니라 단지 자본주의 소비 혹은 복지국가에 대한 가치를 투여할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처럼 조심스럽게 말하기 했지만, 이 책에는 민주사회주의에 관한 현재의 관심의 부활이 사회주의 전통을 재건하고 되찾는 기회라는 인식이 담겨있다. 이 책의 논문들은 저자들이 자기 자랑하는 선언문들이 아니다. 저자들은 무엇이 민주사회주의를 차별화하고 민주적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각 저자는 각각 다른 배경, 경험 그리고  전문분야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또한 넓은 사회주의 전통 안에서 서로 다른 사조에서 지적 영감을 발견하고 그 전통 중 어떤 특징이 가장 대표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종종 가려지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간 불가분 상호 관계일 뿐이다.  저자들은 또한 위대한 사회주의 전통의 역사적 유산의 일부이기도 한 자기비판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다. 사회주의의 타당성을 고려한다는 것은 관련 없는 논쟁, 부당한 향수, 그리고 새로운 입에서 나오는 낡은 독단주의를 버릴 것을 요구한다.

 

사회주의 해악에 대한 진부한 비판은 과거 전체주의적 사회주의가 만들어낸 사회 보다 더 퇴보한 사회를 현재 자본주의가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호기심에 대해 만족할 만한 답을 주지 못한다. 더욱 많은 사람이 물건 구매를 빚에 의존함에 따라 그들이 소유하는 것은 갈수록 적어진다.  대중문화가 사회를 어린애 취급함에 따라 우리의 문화는 갈수록 순응적이 된다. 기업들이 생산성의 효율성을 추구함에 따라 사람들의 여가는 줄어든다. KGB archives에서 소셜미디어와 가제트 생산회사들은 우리의 일상 습관에 대한 정보를 사고판다. 기근을 만들어낸 주범인 당 간부들이 그 기간 파티를 즐겼던 것처럼 부유한 엘리트들은 그들의 회사가 지구를 파괴하는 동안 많은 것을 즐기고 있다. 사람들이 정체된 임금 탓에 살기가 어려워지자 선동가들은 오래된 편견을 끄집어냄과 동시에 새로운 것을 발명하여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구성원을 공격한다. 직장문화가 권위에 대한 존중을 장려함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권위주의적 독재자들은 개인숭배 문화를 키운다. 민주주의는 그 쌍둥이 없이는 훨씬 더 취약하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민주주의를 사회주의로부터 분리한다. 이 책의 논문들에서 탐구될 원칙들이 점차 성장하고 있는 민주사회주의에 대한 초기 관심을 형성하고 풍부하게 할 수 있다면 현재의 편견과 불평등이 먼 기억처럼 존재할 해방된 세계를 꿈꾸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역자 후기

저자들마다 글을 쓰는 방식이 다르다. 어떤 이는 나 같은 아마추어에게 편하게 읽히는 글을 쓰는가 하면 어떤 이의 글은 저자의 논리와 의식의 전개를 제대로 쫓아가기 힘든데 윗글은 후자에 가깝다. 물론 민주사회주의의 배경에 대한 제대로 된 학습 경험이 없는 나의 탓이 결정적일 것이다. 이후 논문들을 하나씩 하나씩 번역해가면서 감각이 생길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이번 서론의 번역은 내가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번역한 부분이 있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