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세상 이야기

물질적 평등, 그 이상의 것 - 민주사회주의 이해하기 (1)

김 무인 2021. 6. 21. 08:03

(네이버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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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머리말

저자 Michael J. Thompson은 책의 공동 편집자로서 미국 뉴저지에 있는 William Paterson University의 정치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대 사회가 개인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형성하는지를 탐구하는 철학자이자 비평 이론가이다. 이 에세이는 철저한 고증과 논리에 입각한 학문적 논문이라기보다는 저자의 지론을 의식의 흐름에 따라 서술한 형식으로 나에게 비추어졌다. 따라서 독자는 저자의 의식 흐름을 잘 따라가야 그의 논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데 나와 같은 입문자에게는 쉽지 않은 과제이며 따라서 종종 유려하게 이어지지 않고 툭툭 끊어지는 듯한 글의 전개는 독자의 인내심을 요구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번역되는 용어들을 참조할 시간이 없어서 내가 생각하기에 적합한 한국어 단어를 사용했다. 따라서 기존 번역서와 다른 용어 사용이 있을 수 있기에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혼란 여지가 있는 단어들은 영어 단어를 함께 적었다. 그럼에도 어색하고 의미의 전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부분은 아마추어 번역의 한계로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역자 주석이 필요하다 싶은 부분은 링크로 대신했다. 한국어 버전이 있으면 한국어 위키피디아를 그렇지 않으면 영어 위키피디아를 주 레퍼런스로 했다. 

 


 

 

민주사회주의의 세 영역 (The Three Spheres of Democratic Socialism)

Michael J. Thompson

 

 

사회주의의 주목표는 개인의 자아실현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적 세계(social world)를 만드는 것인데 이렇게 실현된 자아는 궁극적으로 공동체를 풍요롭게 발전시킬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개인 그리고 사회의 힘, 능력 그리고 창의성을 동시에 계발시킬 수 있는 사회의 조직을 주목적으로 한다. 그러하기에, 사회주의는 행정적 국가 권력에 관한 이론도 아니며, 계획된 국영 경제 이론도 아니며 개인을 무시하는 정치 형식도 아니다. 사회주의는 고도로 발달한 복지국가를 의미하지 않으며 또 어떤 경우에도 자유를 철폐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구성원들의 공동 이익을 위한 사회적 세계를 조직하려는 뚜렷한 염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회주의에 있어 각 구성원 최고의 선은 자아실현이며, 이 자아실현은 결국 공익(common good)을 결정하는 기본 원리이다.

우리가 사회주의를 얘기할 때 우리는 새로운 가치(values)와 원리(principles)의 체계들 - 차별화된 정치를 가져오는 가치와 원리 -에 대해 얘기한다. 이 가치들은 협동적(cooperative)이고, 협조적(assiative)이며, 창조적(creative)인 동시에 상호의존적(interdependent)인 우리 인류 종족의 실제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가치들은 리버럴 사회와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개인을 이해한다: 개인은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타인과 분리된 원자(atom) 같은 존재가 아니다. 개인은 사회적 관계, 즉 개인을 형성하는 힘을 가진 사회적 관계망에 속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는 단지 서로 ‘연관(related)”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사실 ‘상호 구성적(mutually constitutive)’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주의는 모든 형태의 권력이 공동체 전체의 공동 이익에 책임을 지는 정치적 프로젝트를 말한다. 사회주의의 조직 원리는 우리의 필요와 자기 개발을 가장 잘 충족시켜줄 수 있는 권력의 형성이다.

이 생각에 살을 붙이고 사회주의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이 가치들의 급진적 차별성을 명확히 하기 위해 나는 사회주의에 내재한 민주적 특성의 두드러진 면들을 탐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나의 용어로, 민주사회주의의 세 영역(three spheres of democratic socialism) - 사회주의 전통의 핵심을 구성함과 동시에 사회주의가 민주적 원리들을 ‘구체적 삶의 형식(concrete form of life)’으로 구체화하는 방식 - 을 추적할 것이다. 핵심 주제는 이 세 영역의 각자 영역은 다른 두 영역과 상호의존적이라는 점이다; 각 영역은 사회주의의 완전하고 적절한 구현을 위해 서로 필요로 한다. 각 영역은 사회적 실체의 차별화된 면을 반영하며 자신만의 핵심 원리를 가지고 있다. 민주사회주의의 정치는 이 세 영역과 원리들을 중심으로 조직되며 이 원리들은 어떤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청사진이 아니라 사회적 실체의 새로운 형식을 묘사하면서 세계에서 현실화되어야 하는 인간적이고 자유로운 공동체를 추구하는 생성력(generative power)을 가진 원리들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 영역들은 실제 삶의 형식들을 바꾸는 정도만큼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 영역들은 가능한 것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차원에서 유토피아적이지 않으며 또 우리가 노력하지만, 결코 실현하지 못하는 형식적 사고라는 차원에서 자유주의적이지도 않다. 이 영역들은 ‘생성 원리들(generative principles)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원리들의 효율성은 세계에서 이 원리가 구체적인 실체로 모습을 드러내는 정도에 따라 측정된다. 따라서 변혁에 관한 한 이 원리들은 새로운 현실을 창조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 세 영역은 서로 결합하여 있고 잘 맞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두 영역의 중요성을 낮추고 특정 한 영역에 대해 강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물질적 영역(material sphere)

첫 번째로 다루고 싶은 영역은 우리가 서로에 대해 그리고 자연에 대해 물질적 경제적 관계를 조직하는 방식들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이를 민주사회주의의 ‘물질적 영역(material sphere)’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물질적 영역은 자연과 연관된 경제제도와 방식들 그리고 우리가 인류의 창조적 노동 행위를 관리하고 이끌어 나아가는 방법들을 다룬다. 물질적 영역은 이익과 경쟁의 원리를 쫓아 조직될 수도 있고 협동적 상호의존 원리에 맞추어 조직될 수도 있다. 전자는 우리의 인격을 실추시키지만, 후자는 우리의 공동이익(common interest)을 충족시키고 풍요롭게 하기 위한 환경을 제공한다.

우리는 먼저 경제, 즉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할 수 있는데 임금 예속(wage servitude)의 철폐는 사회주의의 첫 과제로 들 수 있다. 이 과제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많은 급진주의자의 사고를 지배했었다. 임금 예속의 철폐는 단순한 재분배가 아닌 생산활동과 생산 목적의 새로운 형식으로서 경제구조의 변혁을 의미한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운동은 경제활동 영역으로까지 민주주의의 확산을 추구했다. 노동자들은 직장의 민주화뿐만 아니라 자본 자체의 민주화도 요구했다: 즉, 착취가 목적이 아닌 공통된 사회적 필요를 위한 자본의 활용. 가혹하고 격렬한 남용과 착취에 노출된 노동자들의 운동은 노동(labour)을 근대사회 갈등의 중심축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노동자들 운동이 또 깨닫게 된 것은 산업 노동 생활(industrial working life)의 근대적 방식이 인간 삶(human life)의 결정적이고 핵심적 진실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즉, 우리의 서로에 대한 협동적 상호의존성이다. 자본가들은 통제자이자 착취자일 뿐 사회적 생산의 근대적 형삭에 필수적인 존재가 아닌 것으로 간주하였다. 자본주의가 한 일은 실제 개인들 간 존재했던 상호의존성을 다수의 소수에 대한 수직적 위계질서 형식의 의존으로 전환한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 사회(market society)의 문제점 -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물품 교환 기능을 가졌던 시장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 은 개인과 사회로부터 단지 잉여를 추출하는 것을 뛰어넘어 지배와 착취의 형식을 상시화한다는 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권력 형식들이 공통 목적을 위한 우리 활동의 상호의존적 협동적 형식들을 왜곡할 수 있는 방식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주사회주의의 첫 번째 물질적 영역의 원리를 ‘협동적 상호의존성의 원리(principle of cooperative interdependence)’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원리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경제적 활동에서 평등한 사람들 간 근본적이고 필수적 협동 시스템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협동적 상호의존성은 본질에서 도구성(instrumentality)과 착취(exploitation)라는 두 원리에 뿌리를 둔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 생산과 조직 현실을 겨냥하고 있다. 이 도구성과 착취 원리는 경제적 관계가 어떻게 공동체 구성원의 능력과 힘을 유도, 정확히 말한다면 아마 ‘왜곡(mis-direct)’, 하는지 보여준다.

협동적 상호의존성(cooperative interdependence)은 현대 경제적 삶의 도구적-착취적 논리를 파괴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결함 있는 사회조직 양식이다. 왜냐하면, 이 사회는 사람들 간 - 특히 계급과 사회적 그룹 간- (일방적) 의존 관계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협동적 힘, 노동 등을 어떻게 이용하고 조직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개인의 권력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는 이 협동적 힘들을 단지 자신의 이익과 잉여의 확대를 위해 활용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사회 전반에 대한 혜택도 개인의 발전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의 노동과 창의력은 그들의 계획과 의도를 위해 이용될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타인으로부터 이득(이익 혹은 다른 용역 형식으로)의 추출 목적을 위해 의존 형식(form of dependence)을 창조하는 한편 이런 인간의 도구화를 일상화(표준화) - 우리는 타인의 이익을 위해 우리가 이용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 한다. 이것은 사회적 유대(social bond)에 대한 학대와 다르지 않다; 이 인간의 도구화는 타인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협동적이고 상호의존적 활동의 기형(deformation)이다.

우리는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착취는 산업 시대의 “지옥 같은 공장(satanic mills)’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착취는 이익의 반대로서 임금에 의존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언제든지 발생한다; 이익의 확대를 위해 소비와 낭비(waste)는 당연히 필요하다고 받아들일 때 발생한다; 그리고 타인 노동에 대한 소비와 긴 체인의 생산으로부터 수십억 달러를 버는 사람들의 존재를 받아들일 때 발생한다. 착취는 추출(extraction)의 한 형태다: 착취는 사람이 더 큰 잉여 이익을 위해 타인으로부터 빼앗아 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관계이다. 여기에 몰수, 강탈, 약탈 그리고 타인 혹은 타 그룹으로부터 가치를 약탈하여 자신에게로 옮기는 권력이 더해진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이런 사회는 상호의존이 아닌 일방적 의존 관계의 시스템을 구성한다; 이런 사회는 모두에 의해 창출된 부를 일부가 소비하고 즐기고 처분하는 것을 허용한다.

협동적 상호의존성은 자본주의 사회를 특징짓는 기생(parasitism)과 명령(command)의 형식들을 제거한다는 점에서 추출적 의존성(extractive dependence)과 확연히 다르다. 사회주의는 협력적이며 관계적 특성을 인간 생활의 사회적 관계의 본질적 실체로 보기 때문에 자본주의 경제적 사회적 삶의 형식들을 일탈로서 그리고 우리 인간 상호의존성에 대한 오염으로 간주한다. 사회주의에게 사회적 노동의 집단적 힘과 그 힘으로 생산된 부에 대한 개인의 통제는 단지 도덕적 부당성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중요하게 우리가 함께하는 삶이라는 목적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또 인간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의미의 기본적 특징을 잘 요약한다: 인종, ethnicity, 혹은 젠더에 관계없이 우리는 협동적 종족(cooperative species)이다. 이것을 부정하면서 고립, 계층 그리고 불평등 속에서 사는 것은 우리 사회의 중심 병리 현상이다. 사회주의는 추상적 원리가 아니다. 우리가 모두 완전히 협동하고 참여할 때 공동체의 공동 재산(common wealth)은 증가한다. 이 협동적 상호의존성의 부정은 인류 진보의 가능성에 대한 상처만 남길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와 도구화라는 이중 문제는 현대 사회에 부와 권력의 총체적 불평등을 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소외와 개인으로서 우리 능력의 퇴보를 초래했다. 삶의 물질적 영역이 이 두 원리에 지배되는 한 완전한 사회 그리고 개인의 해방은 없을 것이다. 사회주의는 삶의 모든 형식 그리고 모든 사회적 관계의 민주화를 주장한다.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것은 우리 사회적 생산력에 대한 민주적 책임감이다; 사회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민주적 사회적 부의 확대 그리고 과두적 부(oligarchic wealth)의 잠식과 궁극적 제거다. 이것들 없이는 인류의 발전은 계속 타인의 권력에 의해 끌려다니며 이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어떤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에도 절대 반대되는 것이다.

정치적 영역(political sphere)

경제에 대한 민주적 접근(democratic account)은 민주사회주의 첫 번째 영역의 필수적이자 핵심적 원리다. 물질적 권력은 결국 사회적 정치적 권력을 향한 주요 자원이다. 본질에서 경제의 민주화 원리는 실제 서구 정치에서 폭넓은 정치적 전통 안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름하여 ‘공화주의(republicanism)’다: 공동체 전반의 공익을 위한 자치로 해석되는, 시민의 자유를 최대화하도록 디자인된 특정 정치적 제도이다. 따라서 공익(common good)은 자치 정부 그리고 어떤 종류의 종속, 통제 혹은 지배가 없는 것과 더불어 사회주의 전통이 추구하는 사회 재조직의 핵심 개념이다.

이에 따라, 민주사회주의의 두 번째 영역은 ‘정치적 영역(political sphere)’으로 정의될 수 있다: 계급과 경제적 삶을 뛰어넘어 연장되는 사회적 권력의 관계 영역이다. 현대 리버럴리즘은 기회와 존중에 기반을 둔 평등을 물질적 혹은 경제적 차원의 실질적 평등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에 열중한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미약하고 불충한 형태의 자유를 허락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런 면에서, 정치적 문제는 단순히 우리의 경제적 생활뿐만 아니라 ‘일부 소수가 다른 개인 혹은 그룹을 상대로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모든 활동 영역’에 해당하는 문제다. 종속(subordination), 배척(exclusion) 그리고 지배(domination)를 할 수 있는 능력은 따라서 민주적 정치적 삶(political life)이 투쟁을 통해 제거해야 할 대상들이다. 민주사회주의는 현대 민권 투쟁과 인권 투쟁의 중심에 있었던 비종속(non-subordination)과 포용(inclusion)의 원칙에 충실한 것이다. 그렇지만 민주사회주의는 그 이상을 추구한다: 민주사회주의는 각 구성원의 이익을 지향하고 공동의 이익에 책임을 지는 사회적 권력 형식들을 갖춘 사회를 추구한다. 정치적 영역은 19세기 산업사회 동안 등장했던 위에서 서술한 물질적 영역의 필수적 부속물이다.

이 영역에 등장하는 원리는 타인이 당신의 활동, 노동 그리고 사회적 선택 더 나아가 공동체를 통치하는 규범과 가치들을 통제, 종속 혹은 지시할 수 없도록 하는 비지배(non-domination)로 정의되는 원리다. 비종속(non-subordination) 혹은 비지배의 원리들은 그 자체 물질적 영역에 의해 발전된 통찰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인간의 사회성은 협동적 상호의존성에 따라 형성돼야 하므로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행동 혹은 삶의 방향을 통제하고 형성하고 지시할 수 있는 권력이나 부(wealth)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부가 실제로 사회적 권력과 지배의 가장 견고한 자원이지만 부만이 사회적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only)’ 수단은 아니다.

민주적 사회, 즉 사회주의 사회는 종속과 지배 관계 자체가 약화하여 소멸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할 것이다. 물질적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자본을 통제하는 자들은 비물질적 영역에서도 통제되어야 한다: 자신의 목적과 수단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데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는 자들, 타인을 퇴보시키는 자들, 그리고 타인을 배척하는 자들은 반드시 공권력(public power)의 제재를 받아야 한다. 진정으로 상호의존적인 사회는 또 ‘연대주의적(solidaristic)’ 사회다. 타인을 종속시키거나 통제하거나 배척하는 그룹들의 모든 능력 - 인종, 젠더 혹은 그 외 모든 것도 마찬가지로 -은 비종속 그리고 비지배 원리가 초점을 맞추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이 원리의 지향점은 네거티브한 자유(liberty) 혹은 “기회의 평등(equality of opportunity)”과 같은 추상적 자유주의 원리가 아니다. 사회주의에서 말하는 비지배는 연대 측면에서 세계시민주의적 사회적 세계의 육성과 유지를 의미한다 - 다른 말로, 타인의 다양성이 더욱 풍부하고 보다 만족스러운 사회 전반과 조화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모두가 참여할 수 있고 모두가 이바지할 수 있을 때에만 공동 이익은 최고치에 도달할 수 있고 우리 개인 각자도 결과적으로 완전한 혜택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타인을 종속시키고 통제하고 배척하는 것은 단지 타인에게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다치는 것이다.

1913년 파리에서 시민을 상대로 연설하는 장 조레스 (Jean Jaures) ​

 

이것의 반대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인종과 젠더 그리고 다른 형태의 차이에 의해 배척과 종속이 우리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이런 권력관계를 고려하되 민주화를 유지하기 위해 무정부주의적 공산 사회 식의 자치 대신 입헌적 공화국 수립을 주장한다. 이것은 20세기 초반의 민주사회주의자들 - 가령, Karl KautskyJean JauresLeon Blum -로부터 배운 교훈이다. 이 사회주의자들은 레닌주의의 Jacobin 전술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들은 민주주의는 입헌적 공화제 형식으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주주의는 자본의 사회화를 의미한다 하더라도 시민의 참여를 의미한다. 그들은 사회 부의 민주화를 추구했음에도 모두를 위한 권리의 확산을 주장했다. 민주사회주의의 급진주의는 낭만주의가 아니라 정치적 성숙함에 기반을 둔다. 공화주의 제도들은 ‘시민(demos)’의 능력 - Henry Pachter의 말을 빌리면 “통제자를 통제(control the controllers)”- 을 보존한다. 포퓰리즘 혹은 무정부주의 혹은 레닌주의도 사회주의 민주적 공화주의가 제공하는 것과 같은 민주적 삶의 진정한 형식을 위한 틀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

헨리 패처( Henry Pachter )

 

이 원리에 의해 활기를 띠는 정치는 무정부주의적 유토피안 계획과 달리 새로운 발전 단계를 위한 정부 제도, 헌법주의 그리고 법의 진화를 촉진한다. 정치권력은 언제나 공동의 이익과 공공선을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다. 협동적 상호의존성은 비종속과 비지배의 원리와 함께한다. 이들은 새로운 종류의 개성(individuality)과 새로운 종류의 문화 - “더는 개인의 이익이 아닌 사회적 연대에 기반을 둔 새로운 법적 사회적 질서”로부터 탄생한 -의 등장을 위한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는 공동체의 쌍둥이 원리들이다.

문화와 자아의 영역(The sphere of culture and the self)

이 새로운 개성과 문화는 나로 하여금 개인 영역인 문화와 자아의 영역으로 이끈다. 사회의 경제적 조직과 권력의 정치적 구조는 개인의 발전 그리고 그 개인의 발전이 표현하는 자아와 개성을 위한 환경(context)을 설정한다. 위에서 탐구한 협동과 비지배의 원칙은 따라서 세 번 째이자 중요한 ‘자아실현의 원리(principles of self-realization)’와 연결된다.

민주사회주의의 세 번째 영역은 문화, 즉 개인의 발전을 강화할 수도 억누를 수도 있는 가능성과 역량의 영역이다. 이 영역에서 개인의 중요성 그리고 창의적 자기표현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게 된다. 이것들은 전통적으로 시대마다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 소외되지 않는 노동에 대한 맑스의 생각부터 20세기 초 예술의 미학적 실험주의 그리고 1960년대의 문화적 실험에 이르기까지. 이 문화와 자아의 영역은 주관의 해방과 개성의 새로운 형식을 강조한다. 1960년대 풍요로운 사회의 공허함뿐만 아니라 행정적 자본주의의 규범적 순응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이 운동은 불가피하게 첫 두 영역을 희생하면서 과잉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리버럴 문화 카테고리와 강요된 정체성과 의미의 형식들을 초월하고 분쇄하는 이 새로운 개성을 찾기 위한 움직임은 민주사회주의 프로젝트의 중요한 측면이다.

실제 자기표현과 개성의 원리가 협동(cooperation)과 비지배(non-domination)라는 위 두 원리 속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사회주의 사회의 목적은 복지국가를 확대하거나 부를 재분배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지평을 넓힐 수 있도록 사회적 세계를 개혁하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한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란 완전한 조건에서 발전하는 사람; 상처받지 않거나 걱정하지 않거나 불구가 되지 않거나 위험에 처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의 사회적 관계가 착취, 도구, 종속 그리고 배척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의 개성 역시 천박하고 공허하고 지루한 것으로 남을 것이다. 고립된 자아도취, 소외, 윤리적 허무주의 그리고 기계적 순응은 자아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 개성은 무익하고 활력 없는 원자주의(atomism)로 계속 퇴보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자아에 대한 강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견고하게 발전해 왔다.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세잔(Cezanne)과 칸딘스키(Kandinsky)와 같은 화가들, 휘트먼(Whitman)과 말라르메(Mallarme)와 같은 시인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경험에 있어 주관적 힘의 확장을 도모했다. 주관의 창의적이고 자발적 형식에 대한 강조는 기술 세계 - 인간성이 그저 타인의 도구로 전락하는 세계 -의 충격을 기록했다. 이 자아표현의 추구 노력은 전 세계적 자본주의 공황과 2차 세계 대전이란 쌍둥이 위기를 거쳐 1960년대 반체제(counterculture) 운동을 통해 다시 등장했다. 일상생활이 순응 그리고 “풍요로운 사회(affluent society)”의 멍한 공허함에 대한 반감은 미적 경험의 확대, 성의 탐구 그리고 다른 문화 형식에 대한 인식의 고양을 불러일으켰다. 사회적 풍요가 정점에 달했어도 뭔가 부족한 것이었다. Port Huron 성명은 개인적 구매나 물질적 소비와 같은 문화적 경제적 목적의 협의성을 폭로하는 사회 비전에 대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신자유주의 반동적 혁명의 등장과 함께 부의 상류층으로의 집중과 더욱 제한된 형태의 순응 문화가 다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우리는 그들의 지배에 놓여 있다.

포트 휴런 선언 (Port Huron statement)

 

이와 대조적으로 개성에 대한 사회주의 개념은 한 개인은 다른 개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개념이다; 개인의 이익은 공동체 전반적 이익의 한 기능이다; 나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와 연동된다. 이는 또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를 다른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의미다. 사회적 의무에 부담을 느껴 자신만의 사적 공간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된 개성은 새로운 의무와 이해를 공동체의 공동 부(common wealth)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새로운 의식은 인간의 필요와 발전을 위해 자신을 조직하는 사회의 결과물이다. 개성은 확장되고, 협조적이고 사회화될 것이다. 사생활은 사라져서는 안 되지만 일과 경쟁의 갉아먹는 형태로부터의 도피처는 아닐 것이다. 사생활은 타인의 희생 없이 자기를 강화하는 영역으로 남을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문화가 우리의 이런 자아의 힘을 잠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험, 문의, 호기심, 이 모든 것들이 과잉 소비와 과잉 자극의 안갯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지속적이고 깊어지는 권태(ennui)는 여러 방식으로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 상업화된 문화는 기분전환, 마약, “정체성(identity)”에 대한 자아도취적 탐구를 제공하는데 이런 것들은 진정한 형식의 개성이 의미에 대한 추상적 탐색과 교환, 계층화 그리고 무의미한 노동과 소비 논리에 의해 찢기는 다양한 방식을 의미할 뿐이다. 이에 반해 사회주의의 자아와 개인에 대한 개념은 지금의 소비 자본주의에서 보이는 협소한 형태의 개념과 다르다. 자아실현의 원리는 위 두 영역의 정점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 두 영역에 차원과 깊이를 주는 영역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가 자아실현의 원리를 완전히 이해했다면 협동적 상호의존성과 피지배의 원리에 곧바로 접근하게 된다. 모든 공동체의 공동 이익은 각 멤버가 완전히 개발된 자기 역량을 공동체에 기여할 때 강화될 수 있는데 단 이 공동체가 이런 목적을 위해 조직되었을 때에 한한다. 따라서 진정한 개성은 다른 원리들에 활력을 불어넣는 원리다. 진정한 개성 없이는 다른 영역들은 단순한 그림자 제도로 전락할 뿐이다 - 인간적 내용이 빠진 규정들의 삐걱거리는 행정적 틀 뿐이다. 참된 개성은 위 두원리들을 흡수한다. 진정한 개인 - 단순 특정 사람의 반대 개념으로서 - 은 물질적 그리고 정치적 영역이 그들의 자아발전과 자유를 위한 본질적 특성임을 인식한다.

따라서 새로운 시민의식(civil conscious)과 시민권(citizenship)은 자신의 자유가 타인의 시민 정신(civic mindedness)과 도덕적 지성에 달려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뿌리를 내린다. 연대(solidarity)는 단순한 도덕주의의 한 부분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공통 목적, 필요 그리고 타인에 대한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반영하는 방식에 구체적으로 뿌리를 두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낡은 사회적 관계가 평등하게 상호의존하는 협동적, 비종속적 관계로 해체될 때 등장하는 연대주의(solidarism)의 결과로서 우리 개성은 억제되지 않고 확장하게 된다. 연대주의는 견고한 개인들의 생산 주체이자 동시에 생산품이다; 연대주의는 인간 해방의 핵심이다.

이것은 리버럴 자본주의에 의해 묘사되는 “개성(individuality)”의 결함 형식과 극명한 대조가 된다. 급진적 개성은 극단적 형태의 자립 혹은 독립이 아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할 권리가 있다는 유의 개성이 아닌 것이다. 자본주의하에서는 사회적 유대가 불평등, 원자화된 개인주의 그리고 위계적 통제 때문에 해지고 찢기면서 사회 해체의 원심력이 작동하게 된다. 이런 사회적 관계의 결과물인 소외(alienation)는 자아를 공격적이고, 불안하고, 우울하며 무의미한 삶의 형태로 몰고 간다. Adam Schaff는 이렇게 썼다. “개인은 자신이 위협받고 있으며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사회의 한 부분이 아니라고 느낀다. 그 결과 외로움과 고립감은 깊어간다.”

아담 샤프 (Adam Schaff) ​

 

상호의존적 협동과 비종속적 사회적 관계의 원칙에 의해 형성된 개인은 공동의 이익에 기여하는 개인이 되기를 추구한다. Herbert Spencer는 이렇게 말했다: “이상적인 인간(ultimate man)은 자신의 사적 요구가 공적 요구와 일치하는 인간일 것이다. 그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본성에 충실했지만 동시에 사회 단위 차원에서 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개인의 힘 그리고 창의력과 실험 정신을 발휘하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상호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타인의 발전과 역량을 통제하고 왜곡하는 개인 권력이 없는 가운데 자신의 자아실현을 가능하게 했던 공동 이익의 자원을 강화하고 확장해야 하는 의무를 발견할 수 있는 곳에서 새로운 사회 기풍(social ethos)은 떠오를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의 개성은 타인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개성이 될 것이다. 현재의 매춘과 마약을 합법화하려는 움직임들은 사업가와 사유 재산의 자유 의지론자 모델을 보다 과장된 등록부에 올리는 결함 있는 자아(selfhood)의 왜곡된 표현에 불과하다. 이런 것은 사회주의가 상상하는 그런 개성이 아니다. 사회주의는 인간의 목적을 더 넓고 확장된 지평을 가진 것으로 이해한다.

결론

지금까지 민주사회주의의 세 영역 그리고 그 영역에서 생성된 세 원리들에 관해 탐구한 결과, 이제 우리는 민주사회주의의 원리들과 정치에 대해 더 일관성 있는 이해를 할 수 있다. 서로 결합하여 있는 세 영역과 원리 중 한 영역 혹은 원리만을 강조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온전한 결실 대신 사회주의 프로젝트의 기형만을 초래할 것이다. 우리는 인종, 젠더 혹은 계급 투쟁을 이 세 영역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존중의 평등은 물론 가치 있는 목적이지만 공동체의 물질적 권력관계가 계층적이고 착취와 축적의 논리에 여전히 묶여있다면 본질에서 무의미하다. 부의 재분배 역시 칭찬받을 만한 목표이지만 사회적 변혁은 공동체의 사회관계 구조 자체가 이익을 위한 생산을 벗어나 사회적 필요를 위한 생산으로 대체되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인종 혹은 젠더 투쟁의 업적은 무시될 수 없지만, 이들은 새로운 공동체를 착취하고 현 상태를 유지 확산하려는 자본의 문화를 막는 데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위에서 설명한 세 원리는 반드시 다른 원리와 병행되어야 한다. 세 원리 중 하나를 다른 두 원리에 대한 상대적 무시 속에 강조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 세 영역 중 하나가 독립적으로 되는 것을 초월하는 정치를 세 영역이 함께 구성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우리는 목표로서 재분배, 보편 의료 혹은 무료 대학교육과 같은 사회복지 혜택의 확장에 안주할 수 없다. 이것들은 자본이 존속하는 것을 여전히 내버려 둔다: 이런 것들은 사회주의 민주주의(socialist democracy - 저자는 여기에서 democratic socialism(민주사회주의) 대신 사회주의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물론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와는 다른 개념이지만 고의적으로 민주사회주의 대신 이 용어를 선택했는지 확신이 없다: 역자 주 -의 가치를 연장하고 우리의 사회적 관계와 우리의 기관(agency)을 변혁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

좌파 운동이 자주 저지르는 실수는 이 세 영역 중 하나 혹은 두 개를 위해 나머지 영역을 희생하는 것이다. 물질적 영역을 강조하면서 사회적 지배와 종속의 측면을 놓치고 자아와 문화의 발전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한 예다. 유사하게, 물질적 영역에 대한 거론 없이 인종과 젠더의 종속만을 강조하는 것은 자본 권력과 착취는 건들지 않은 채 형식적 자유주의만 고집하는 셈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아와 개성의 확장을 포기하게 되면 억압과 비인간화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셈이며 이 투쟁들로부터 생기를 부여하는 정신을 빼앗아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사회의 모든 면을 관통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는 개인과 사회 전반에 다른 영향을 미친다. 평등한 협동적 사회는 창의성과 독창성을 장려한다. Matthew Arnold는 통찰력 있게 관찰했다: “평등한 사회에서 사는 것이 일반적으로 사람의 정신을 확장하고 그들의 능력을 쉽고 능동적으로 활용하도록 해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는가?; 한편 우열 사회에 사는 것은 정신을 길들이고 능력 발휘를 덜 안전하고 덜 능동적으로 만든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는가? 심하게 그늘에 가려지고 심히 하찮은 존재가 되는 것은 전반적으로 개인에게 우울하고 무감각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는가?”

매튜 아놀드 (Matthew Arnold) ​

 

위 모든 것들은 핵심적이고 중심적 논제라고 내가 생각한 것을 강조한 것이다: 사회주의의 민주적 본질은 내가 위에서 탐구한 세 영역과 원리들의 상호의존을 통해 구성되어야 한다: 협동적 상호의존, 비종속 그리고 자아실현의 원칙들은 우리의 정치적 도덕적 사고가 반드시 거쳐 가야 할 다이아몬드 네트다. 사회주의 기풍은 타인에 대한 우리 관계의 협동적 의존성을 최대화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기풍이 이것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자아가 실현되고 완전히 인간화될 수 있는 비옥한 환경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인간의 필요를 모든 제도와 활동의 중심에 놓는다. 사회주의는: 우리가 함께 사는 본질적 목적이 우리 협동력(cooperative powers)의 증대를 통한 우리 공동 자유(common freedom)의 확장이며; 이 협동력의 목적은 공동체의 공동 부(common wealth)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이며; 이 공동체의 공동 부는 구성원 각자의 자기발전을 위한 것이다.

사회주의 하에서는 ‘진정한 진보’가 존재할 수 있지만, 자본주의하에서는 그렇지 않다. 진보의 정도에 대한 측정은 기술적 숙달이나 부와 재산의 축적으로 평가되지 않을 것이다. 진보는 인간 존엄성과 창의성의 확장 그리고 개인 역량의 번창으로 측정될 것이다. 이런 가치에 대한 새로운 틀은 우리 노동의 목적과 타인과의 관련성에 계속 초점을 맞추게 한다. 과학과 기술은 이런 사회에서 위축되지 않고 대신 더 높은 목적을 위해 해방될 것이다: 인간 잠재력의 확대이다. 자본의 이익과 맞물려 기술은 자연, 우리 사회적 관계 그리고 우리의 신체적 건강에 우려할 수준의 파괴적 효과를 가져왔다: 과학과 기술이 이익이 아닌 사회적 필요를 위해 존재할 때에만 통제(control)는 인간화될 것이다. 현대 사회와 자연 세계에 대한 기술적 조작은 자본주의 그 자체의 착취적 추출적 논리를 보여준다. 그것은 퇴행적이며 비인간적인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런 새로운 진보 가치에 대해 목소리 높여 반대하는 - 이런 가치가 실현되면 사회적 파괴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 대신 현존 실체를 방어하려는 자들은 실제로는 자신들 자유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들의 이런 치졸한 생각은 우리 세계를 지배하는 계층적 논리를 합리화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것은 거부되어야 한다. “미래에 대한 발전된 의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재에 대한 비판으로 안내한다"라는 Mihailo Markovic의 말이 맞는다면, 민주사회주의의 원리들은 단지 추상적 생각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에서 구현하고 싶은 정치의 형태와 삶의 형식들을 이야기하는 것들이다.

미하일로 마르코비치 (Mihailo Markovic) ​

 

사회주의 기치를 내건 사회운동은 이 세 영역과 원리들에서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풍부한 틀을 발견할 것이다. 사회적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는 아직 이성적이지 않고 비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아직 Gracchus Babeuf의 말을 기억할지 모른다: “우리 후손들이 믿지 않으려는 이 엄청난 스캔들이 이제는 끝나기를! 부자와 가난한 자, 대인과 소인, 주인과 종, 통치자와 피통치자 간 끔찍한 구별을 이젠 사라지게 하라.”


역자 후기

흔히 자본가, 다른 표현으로 기업 소유주 혹은 주주,는 리스크를 안고 자본을 투자했으므로 그에 상응하는 ‘투자이익’을 가져갈 자격이 있는 반면, 자본- 기업 존재에 결정적인 역할로 여겨지는 - 을 투자하지 않은 사람은 ‘대신 그리고 안전하게’ 노동’만’을 그들에게 제공하기 때문에 그들 노동의 생산적 가치와는 관계없이 자본가와 비교하면 ‘작은’ 급여 형식의 소득을 가져가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노동을 통한 수입이 가능한 것은 그 노동자가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기 때문이며 그 직장은 바로 자본가가 ‘캐피털’을 투자해서 설립한 것이므로 자본가가 우리 경제의 ‘핵심’ 에이전트가 된다는 논리다. 결국, 피켓을 들고 소리 높여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는 노동자도 결국 자신의 생계를 자본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귀결적 논리가 성립된다.

새로운 사회를 꿈꾼다는 것은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단순히 경제적 물질적 평등화 차원이 아니라 위와 같이 현재 당연시되는 논리를 포함한 전방위적 개혁을 의미한다.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를 위해 이와 유사한 공약을 내건 정치인과 정당을 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것이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러나 선출된 정치인이 그 이후 우리의 뜻을 반영하는 것은커녕 공약을 지키지 않아도 이를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 변변한 제도적 장치가 없다. 오히려, 최근 국회의원 임기를 3년에서 4년으로 늘리자는 논의와 갈수록 작동이 제대로 안 되는 Official Information Act에 대한 수정을 현 집권당이 차일피일 미루는 등 시민의 ‘직접’ 그리고 ‘참여’ 민주주의와 역행하는 반동적 움직임이 소위 좌파를 표방하는 현 집권당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새로운 사회는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협동적 상호의존성의 원리에 기반을 둔 물질적 생산, 인간 본성인 연대주의에 입각한 정치권력의 민주화 그리고 민주사회주의의 궁극적 목적인 개인의 자아실현을 통한 행복 추구가 가능한 사회다. 이는 말 그대로 ‘전면적’ 사회 그리고 개인의 개조 프로젝트다. 서구의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본주의 그리고 이런 환경에서 자신의 영달 추구가 개인의 지배적 가치관이 된 현재 우리는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리버럴리즘과 자본주의 그리고 개인의 이기적 행태 모두 서구의 뿌리 깊은 개인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통적 개인주의 개념의 해체 혹은 개인과 사회 간 새로운 관계 설정과 그 새로운 관계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모든 사람에게 어쩌면 가장 필요한 급선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