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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말
이번 에세이의 저자 Stephen Eric Bronner는 미국 뉴저지, 럿거즈 (Rutgers) 대학의 정치학 교수로 비판이론, 실존주의 그리고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에세이에서 인용된 ‘계급 이상(class ideal)’ 그리고 ‘세계시민적 감성 (cosmopolitan sensibility)’은 그가 생성한 개념이다.
개인적으로 서론 포함 지금까지 읽은 이 책의 에세이 중 가장 숨차게 읽은 에세이다. 숨차게 읽었다는 의미는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처음 접했기에 머리 속에서 이 새로 접한 개념들 그리고 그 개념들 간 관계에 대한 교통정리를 위한 숨 고르기를 해야 했다는 뜻이다. 그만큼 내 기존 생각 - 참으로 얄팍하다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 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할 소중한 에세이로 다가왔다. 앞으로 읽고 번역할 에세이들은 또 어떤 새로운 세계로 나를 안내할까 기대된다.
사회주의란 무엇인가(What is Socialism?)
Stephen Eric Bronner

One cannot have socialism, one is a socialist.
우리는 사회주의를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사회주의자다.
—Henry Pachter
과거, “사회주의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면 간단한 대답을 들었을 것이다. 사회주의는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는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tic) 정당들이 연합하여 구성한 단일 기구에 의해 주도되었던 노동계급의 운동이었다. 제2(혹은 사회주의)인터내셔널은 자유공화국(liberal republic), 복지국가, 경제적 계급의 우선순위 변화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세계시민주의, 개인주의, 세속주의 그리고 과학과 같은 계몽주의 가치들의 소개를 기치로 내세웠다. 노동계급은 그것을 알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그들의 적도 그 중요성만큼 그것을 알고 있었다.
유럽 사회주의는 17,8세기와 1848년 혁명(프랑스 2월 혁명: 역자 주) 기간 처음 제기되었던 급진적 자유주의(liberalism)에 대한 윤리적 제도적 요구를 통합했다. 위대한 학자 레셰크 코와코프스키(Leszek Kołakowski)가 “막시즘의 황금기(golden age of Marxism)”로 칭한 1890-1910년 기간, 유럽의 자유주의(liberalism)는 “내부(inward)”로 눈을 돌렸다.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 정당은 연정에 참여하는 기성 정당 사이에서 의회 브로커로 변신했으며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자유주의 정당은 구 왕정과 타협하면서 세속적 교육, 언론의 자유, 제국주의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도) 자유 무역에 집중했다.

자유주의가 부르주아 신사(gentleman)의 이데올로기가 되는 동안, 사회주의는 대중운동(mass movement)이 되었고 혁명적 정치적 가치들을 받아들이면서 사유재산과 “감시자(watchman)” 국가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 맥락에서 우리는 우선 3가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 운동은 가장 빈곤한 지역이 아닌 군주제가 존속하는 곳에서 가장 활발했다. 산업시대를 상징하는 꾸준히 성장하는 노동계급 운동이 사회주의를 진보시켰다. 그리고 구성원과 지도자들 모두가 “막시스트”는 아니었고 또 다른 파벌도 존재했지만,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는 당시 막시즘을 대표했고 노동자들도 압도적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간주했었다.

“과학적(Scientific)” 사회주의 - ‘자본론’에서 설명된 - 는 당시 실제 상황을 객관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자본은 맑스가 예측한 것처럼 유례없이 소수 손에 집중되어 갔고 산업 노동계급은 유럽 전역에 걸쳐 급속히 성장했다. 독일에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대표 기관으로 받아들여지던 사회민주주의당(Social Democratic Party:SPD)은 1890년 90만 명이었던 당원이 1912년 4백만 명으로 증가했다. 사회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가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경제 선진국에서 혁명이 먼저 발생하리라 예측했다. 사민당은 당원들에게 즐거운 사회적 문화적 활동을 제공하는 “노동자 세계(workers’ world)” (오늘날 “프롤레타리아 공공 영역(proletarian public sphere)”으로 불리우는)를 만들어 이를 미리 준비했다. 당 지도자들은 존경받았고, 대중의 자신감은 점점 커졌으며, 한 늙은 사회주의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현재로 등장하는 미래를 볼 수 있다(one can see the future appearing as present)”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 고조된 분위기는 유럽의 사민당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 자국이 참전하는 것을 승인한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널리즘의 “대 배신(great betrayal)”이 있던 1914년까지 지속하였다. 그들은 혁명적 레토릭을 내세웠지만, 실제는 개혁주의(reformism)를 수행했다. 이런 정당들이 성장함에 따라, 관료제도 성장했고 출세지향자들은 기득권세력과 더욱 강력한 파트너쉽을 추구했다. 노동자들 사이에 계급의식이 예상되었었지만, 그것은 착오였음이 드러났다. 심판의 날이 마침내 왔을 때,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자국의 1차대전 참전을 승인했다. 이 운명적 결정은 노동계급의 “강철단결(iron unity)”을 산산조각내었다. 참호전 속에서 매달 수십만 명이 무의미하게 죽어나갔다. 군인들의 좌절과 체념은 “동쪽으로부터의 바람(wind from the East),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계급 폭동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러시아에서는 혁명적 격변과 내전 상황에서 “적군(Reds)”과 반동적 “백군(Whites)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었는데 무정부주의자들과 이상주의자들(Utopians)은 “적군”편에 섰다. 참호에서 좌절하는 군인들처럼 많은 사람이 볼셰비키의 혁명적 대담성에 영감을 받았다. 레닌은 그의 저서 ‘국가와 혁명(the State and Revolution)’을 통해 “요리사가 국가를 이끌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국가는 단어적 측면에서 더는 국가가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그의 저서는 무정부주의자들과 극좌파 공산주의자들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했는데 이들은 단지 러시아 짜르의 권력에 대항할 뿐만 아니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평의회)에게!(All Power to the Soviets!)”라는 혁명 슬로건에 반대하고 공화제(republic)를 지지하는 러시아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도 반대했다.

1차 대전에서 패배한 국가들은 두 형태의 정부 형식 - 공화제(republic) 혹은 “소비에트(soviets)”(노동자 평의회) - 을 놓고 지지자들 간 충돌을 겪었다. 사회민주주의는 공화제 지지의 주 세력이었으며 이들은 곧 중부 유럽의 새 공화국으로 변신한 반면 무정부 공산주의자들(anarcho-communist)은 소비에트를 지지했다.

오늘날, 많은 지식인은 맑스의 1844년 경제철학 초고와 청년기의 인문주의적 저서를 선호하면서 “과학적 사회주의”를 일축한다. 그러나 유럽 노동 운동의 위대한 업적들은 ‘과학적 사회주의”의 기치 아래 이루어진 것들이다. 칼 카우츠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권력으로 가는 길(road to power)”에서 개혁은 노동계급의 자신감을 형성했고 더 많은 욕구를 자극했다. 사회민주주의는 궁극적으로는 1차대전 이후의 부르주아 혁명(때로는 “중단된 혁명(aborted revolutions)”으로 불린다)과 연동되었다. 이 기간 공화국에 평등선거권(여성 참정권 포함), 노동자에 대한 보상과 (일시적이지만) 하루 8시간 노동, 노동자를 위한 새 주택, 경제적 문화적 현대화 그리고 급진적 복지 국가가 도입되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반동주의자들의 증오를 심화시켰을 뿐이다. 그럼에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극좌파로부터 원칙 없는 타협, 관료들에 의한 통치 그리고 정치적 우유부단함이라는 비판을 들어야만 했다.
이런 비판은 학생들, 지식인들 그리고 보헤미안들에게 여전히 인기가 있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1932년 처음 발견된 경제철학 초고의 유토피안 비전을 결여했으며 노동운동에서도 실질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사회민주당은 노동분업, 소외 혹은 상품 형식을 철폐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종교기관의 권력 행사에는 반대했는지 몰라도 종교 폐지 혹은 “선사시대(pre-history)”의 종식에 대해서는 논의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회민주주의는 “공산주의(communism)” 혹은 “국가의 소멸(withering away of the state)” 개념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이 입장은 맑스가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On the Jewish Question (1843))”와 청년기 다른 저작에서 논의하였던 자유주의적 “정치적(political)” 해방보다는 “인간(human)”이라는 비전과 같은 것이었다. 사회민주주의 활동가들은 철학자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진정한 자생적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인간 - 혹은 맑스가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유적 존재(species-being)”라고 묘사한 것 - 답게 만드는 본질의 억압 상태를 회복하는 것보다 훨씬 구체적인 것에 관심을 뒀다.
젊은 맑스는 노동자들의 자발적 봉기를 암시하면서 이 카테고리들의 많은 부분을 모호하게 남겼고,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결사(free association of producers)”를 마음속에 그렸다. 자본주의의 심리적 영향에 대한 철학적 통찰과 선견지명으로 가득 차있는 맑스의 초기 저작들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다면적 개인과 자신의 운명을 직접 결정할 수 있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소외된 노동 조건을 철폐할 것을 요구한다. 청년 맑스의 저작들은 자신들이 사회주의를 실현했다고 주장하는 진부한 체제들 - 의희주의가 되었든 전체주의가 되었든- 과 부딪친다. 맑스 초기 저작들의 유토피안 특성은 맑스가 한 때 말했듯이 결정적 순간과 공산주의를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구체적인 것으로 등장’할 수 있도록 하는 일정 종류의 실천을 위한 자극을 제공한다.
Ⅰ
노동자 평의회(worker’s council)는 “자유 생산자 협회(free association of producers)”와 유사한 새로운 형식의 정치적 조직을 의미한다. 노동자 평의회는 원칙적으로 공장에 기반을 둔 분권적 조직 내 정부의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행정적 분과(branch)들을 통합함으로써 노동의 소외와 분업에 대응한다. 이 평의회(혹은 “soviet”)는 참여민주주의, 관직의 순환 그리고 관료제에 대한 공격이란 큰 틀을 유지한다. 돈은 기본적으로 폐지되고 군 계급이나 관직과 관련된 사회적 지위 역시 폐지된다. 무정부주의 전통에 영향을 받은 평의회 지지자들은 자신을 종종 새로운 공산주의 감성을 가진 “새로운 인간(new man)”의 자생적 출현을 위한 사전 조건이라고 종종 묘사했다.

이 무정부의적 관점은 ‘노동계급의 자체 통치”와 그 목적으로서 정치적 해방을 강조하는 막시즘의 특정 버전과 겹친다. 이런 전통의 예는 빅토르 세르주 (Victor Serge)의 Year One of the Revolution (1930), 조지 오웰 (George Orwell)의 카탈로니아 찬가 (Homage to Catalonia) (1938), 그리고 어거스틴 사우치 (Augustin Souchy), 헤르만 고르터 (Herman Gorter)와 헨리에트 롤란드 호스트(Henriette Roland-Holst)와 같은 잊혀진 인물들의 작품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1905년 러시아 혁명이 끝을 향해가는 시점에서 몇 폴란드 공장들에 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묘사는 특히 가슴을 아련하게 한다;
“노동자들은 곳곳에 모여서, 예를 들어, 실업자를 위해 자신의 하루 임금을 포기하는 것에 동의한다… 이 모든 것들은 순조롭게 그리고 간단히 진행된다. ...그들의 러시아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와 형제애는 비록 당신이 그 발전을 위해 개인적으로 일했다 하더라도 감동적이란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혁명의 인상적인 결과물들: 모든 공장에서 노동자들에 의해 선출된 위원회가 “자체적으로(on their own)”으로 결성되어 노동환경 관련된 모든 이슈와 노동자의 고용과 해고 등을 결정했다. 고용주는 자기 집에서 주인이 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내 생각에 이런 이미지는 ‘월가를 점령하라’ 그리고 남미의 지역 분권 통치 실험의 배경에 있는 “수평적” 조직의 비전에 영감을 주었다. 룩셈부르크의 편지를 보면 인민(people)이 마침내 엘리트와 관료로부터 권력을 쟁취했다는 느낌이 있다. 이제 대중은 자신의 투쟁 문화와 자기 정체성 정의를 통해 자신의 역사를 써내려 갈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이 모든 것들에는 분명 대중영합적 측면이 있으며 아마 간접적으로 새로운 사회 운동을 지지하는 보다 급진적 여성, 동성애 그리고 유색인종들에게 활력을 불어넣는지 모른다. 이들 중 아무도 조직, 규칙, 계층 혹은 기존 상태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는다. 이들의 관심은 그들 특정 그룹에 한정되어 있으며 기존 사회주의 정당이 쇠퇴하면서 대부분 사람(특히 미국)은 계급의식보다는 포퓰리즘과 정체성 감성에 영감을 받고 있다.

그러나 권력부여(empowerment)에 대한 열망은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열망은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표현을 빌리면 “혁명의 지하 역사”가 그 모습을 드러낸 (그리고는 사라진) 역사적 사건들을 촉발했다: 1792년 (프랑스 혁명 전쟁으로 공화국 설립: 역자 주), 1848년(프랑스 2월 혁명으로 제2공화국 설립: 역자 주), 1871년 (파리 코뮌: 역자 주),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을 발단으로 일어난 러시아 1차 혁명:역자 주), 1917-21년 (러시아 10월 혁명과 이후 내전: 역자 주), 1936년 (스페인 인민전선과 프랑코 우파 쿠데타 군대 간 스페인 내전 시작: 역자 주) , 1956년 (헝가리 혁명: 역자 주), 1968년 (프라하의 봄: 역자 주) 그리고 이후 사건들.

이 시기 유럽 여러 국가에서 전통적 혁명 시도를 동반한 자발적 봉기가 발생했다. 이 순간들은 극적이었고 우리에게 여전히 영감을 준다. 하지만 그것들의 역동성은 일종의 이론적 정체(stasis)와 섞여 있다. 무정부 공산주의의 이론과 실천은 시작부터 존재해 온 기본적 문제들을 다루는 데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들의 지역 선호주의(localism), 분권 통제 그리고 “수평적” 조직에 대한 집착은 노동계급 대다수로부터 지지를 받은 적이 없었다. 따라서 드는 의문은: Why not?
무정부 공산주의자들은 “이행(transition)”, 복지정책 혹은 그것들을 시행할 수 있는 제도(기관)의 필요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대신 그들은 제1인터내셔널을 종료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맑스 시대의 무정부주의자들처럼 그들의 후계자들도 여전히 국가가 사라지고 관료제가 없으며 상품이 사라진 자유의 세계로 곧바로 도약할 것을 지향했다. 그러나 이 좌파 무정부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들에게 세상 종말의 꿈 외에는 제공해 줄 것이 없었다. 당연히 그들은 권위주의와 개혁주의 모두에게 동등한 경멸감을 보냈다. 무정부 공산주의자들은 또 관료제가 자체 내부 역동성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현재 그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미래에 번창하리라는 것을 올바르게 감지했다. 공화국의 복지국가를 인정하는 것은 무정부 공산주의자로 하여금 그들이 달성코자 하는 목적과 배치되는 수단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실제, 이런 윤리적 강직함(sincerity)은 언제나 노동자 평의회 지지자들을 궁지로 몰았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윤리적 강직함은 쉽게 종파적 독단주의로 굳어진다. 이제 혁명은 인민이나 노동계급을 위해서라기보다 마치 이들 급진적 활동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활동가들은 그들이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로부터 깊이 분리가 된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결코 이해한 적이 없었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열악한 조건을 향상시킬 수 있는 구체적 제안들을 원했다. 그러나 분권화된 평의회는 갈수록 복잡해지고 팽창하는 시장에 대해 유의미한 대응을 전혀 하지 못했다. 실천을 조율하고, 지역 평의회 혹은 지역 공동체 간 분쟁을 해결하고, 결정 합의 절차를 뛰어넘어 다수의 횡포로부터 소수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기관)들이 없는 상황이다. 이런 문제들을 다룰 상위 단계의 새로운 평의회를 요구하는 것은 공화제에 존재하는 것 같은 소외(무정부 공산주의자 입장에서는:역자 주)를 다시 도입하는 것이 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지역 평의회는 지역 편견과 지방색을 재생산하려는 경향이 있다. 무정부 공산주의자들의 법원, 적법 절차 그리고 시민의 자유를 대중 집회의 “대중의 정의(popular justice)”로 대체하려는 의지는 기껏해야 순진하고 최악에는 폭도 통치를 초래했다.
반대편과의 타협은 극좌파에게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그들에게는 전부 아니면 제로뿐이다. 보수주의 혹은 네오파시스트와 사회주의 혹은 신자유주의 정당과 정치인 간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 따라서 종파주의는 그 전망에 내재되어있고 그 지지자들은 헤겔이 말한 “모든 소가 검은 밤(night where all cows are black)”(주관에 의한 동일시 사고: 역자 주)에 사는 것을 선택한다. 더욱 나쁜 것은, 이들 무정부 공산주의자들의 노동자 혹은 “인민(people)”에 대한 시각은 항상 낭만화되어 있어서 실체와 한 번도 일치한 적이 없었다. 러시아 혁명의 전성기 동안 발생한 유럽의 반란은 “인민(the people)”이 노동자와 그들 평의회 편에 섰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것은 결국 그 평의회를 파괴한 “인민”의 좋은 부분이었을 뿐이다.

특히 러시아 혁명(1917-1921)의 “영웅적 시기”동안 볼셰비키는 급진적 대안을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정권을 잡았고 사회민주주의가 말로만 떠들었던 것을 현실화했다. 그들은 돈(어차피 루블은 쓸모없었다)과 군대의 계급(트로츠키에 의해 나중에 복원되었지만)을 없앴고, 공동생활과 식사 시스템(집과 음식은 부족했지만)을 도입했으며, 활기찬 공공 영역( 실존적 소외와 전쟁의 트라우마에 대응하기 위해)을 창조했고, 아방가르드 예술을 수용했으며, 여성을 공공 생활로 안내했고, 낙태와 이혼을 합법화했으며, 교회(어차피 반동분자들을 도왔던)를 폐쇄했고, 모든 극적 사건들을 동반하며 내전을 치렀다.
무정부 공산주의 학자들은 “실패한 대의(lost causes)”와 공산주의 이상의 복원에 대해 얘기한다. 그러나 왜 이 대의들이 실패했는지에 설명하려는 노력은 거의 없다. 너무 자주, 무정부 공산주의자와 포퓰리스트들은 가난한 자와 엘리트 간 갈등을 부각하기 위해 계급 내 차이들을 무시한다. 계급 간 모순은 가난한 자들 사이에도 존재한다는 주장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예를 들어, 산업 노동자들은 그들이 생산하는 공산품에 대해서는 높은 판매 가격을 기대하는 동시에 자신들이 소비할 농산품에 대해서는 낮은 구매 가격을 기대하지만, 농부는 그 반대로 기대하는 소위, “가위(scissors) 위기”를 다룰 수 있는 제도적 형식이 무정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없다. 물론, 활동가들이 경제 이슈들에 대해서 노동자들에게 말만 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과장된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인민”의 고충을 단지 “균등의 체인효과(chain of equivalence)”로 치부하거나 문제를 조율할 제도, 정책 혹은 기관들의 필요성에 형식적으로 동조만 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무정부 공산주의자들은 현재 포퓰리스트가 “대중”의 이해관계를 잘못 판단하듯이 평의회 내 노동자의 이해관계를 과대평가했다. 하루의 힘든 노동을 마친 후 계속 이어지는 미팅에도 참석하려는 최초의 열정과 의지가 평온한 시기에도 지속될 것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비이성적이다. 실제로, 무정부 공산주의자와 포퓰리스트는 틀렸다: 정치는 삶의 목적이 아니라 삶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수단이다. 현실은 노동자 평의회는 소련에서의 지극히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어느 곳에서도 통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공화국은 평의회들 혹은 “부속 협회(secondary associations)”로 알려진 것들을 통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정당한 이해이자 관심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를 위한 것이다. 과거, 평의회와 공산주의자들과의 교차점은 실제라기보다는 신화에 가까웠다. 평의회는 당국가(party-state) 앞에서 제대로 된 기회를 가진 적이 없었고 1921년 “공산주의자 없는 평의회(soviets without communists)”를 요구하는 반란을 접하자 볼셰비키는 이 평의회를 분쇄해버린다.
Ⅱ.
사회민주주의 라이벌로부터 그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혁명적 탁월함에 스스로 도취해서 1917년 공산주의 명찰을 부착한 볼셰비키는 재빨리 그들의 모든 정적을 제거했다: 정당들, 노조들 그리고 독립 단체들. 볼셰비키 공산당은 대내외적으로 그들이 수행한 혁명적 행동으로 윤리적 특권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부르주아에 의한 테러 혹은 그들의 시민 자유에 대한 억압은 물론 허용될 수 없지만 공산주의가 같은 짓을 했을 때는 이는 전적으로 다른 문제였다. 목적론적으로 예정된 목표(teleologically guaranteed end)라는 명제는 가장 야만적인 수단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되면서 전술은 공산주의로 가는 길의 각 단계로 제시되었다. 이론과 실제의 분열은 일찍 찾아왔다. 그러나 이 분열도 모든 자생적 정치적 행위를 “유아기 장애(infantile disorder)”, “좌파 모험주의(left-wing adventurism)” 혹은 “객관적으로 반혁명적(objectively counterrevolutionary)”이라고 간단히 무시하는 당의 결정을 막지는 못했다. 1936년 스페인 무정부주의자들, 전후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의 자발적 봉기, 유럽 학생 봉기 그리고 1968년 프라하의 봄 등에 대한 소련 공산당의 대응은 그 예다.

소비에트 유니온(소련)에서의 사회주의는 사회의 야만적 현대화 그리고 집단학살과 숙청에 몰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였음에도 자신들이 새로운 유토피안 질서로 이행 중이라고 포장했다. 그 결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이를 계속 오가는 동요가 발생하는데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와 연관 지어지면서 여전히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레닌주의는 통치이론으로서 결코 성공적이지 못했다. 모든 공산 정권이 전체주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모두 권위주의적이고 독재적이었다. 이 문제는 자신들이 대표한다고 하는 대중으로부터 분리된 무책임한 정당의 위계적 군사 조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통치에 부적당했지만, 이 특징은 혁명적 기구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
정치적 변혁의 사고를 노동자(그들의 정의에 의하면 오직 “노동조합 의식” 수준만을 가진)에게 이식하는 것을 목적으로 추구한 잘 규제된 혁명적 지식인들의 “전위대(vanguard)”에 의지하여, 레닌의 정당은 대중, 특히 프롤레타리아, 으로부터 분리되었다. 당의 구조는 피라밋 구조였다. 정보는 당 하부와 비 당조직들의 활동적 동지들(comrades)로부터 위로 전달되었고 결정은 궁극적으로 상부의 중앙위원회(Central Committee)에서 내려져 하부로 전달되어 내려왔다. 동지(comrade)의 개인적 의견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당 정책에 대한 복종은 의무적이었다. 따라서 레닌의 “민주집중제(democratic centralism)”는 규율을 융통성 그리고 혁명적 목적을 위한 조직적 감각과 결합한 것처럼 보였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레닌주의에 대한 이런 해석은 너무 가혹하고 실제는 달랐다고 주장한다. 당 세포(party cells)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분리되었음을 알아차리곤 혁명적 상황의 혼란 상황에서 종종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그러나 이렇게 민주적 혹은 분권적 방식으로 옹호하려는 시도는 실제로는 레닌의 유산에 손해를 끼치는 것이다. 지역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혁명 기간 독자적으로 행동했는지는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레닌의 “전위대”는 지하에서 투쟁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고 하부의 계급 구성을 무관한 것으로 만들었으며 공산주의를 혁명과 동일시했고 따라서 식민지 세계에서 빛을 발했다. 시민의 자유는 진지하게 고려된 적이 없었으며 처음부터 다원주의는 테러에 위협받았고 당국가는 자신의 패권에 도전하는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았으며 1921년부터는 부르주아를 대신하여 현대화 대체 주역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레닌주의는 서구 노동계급 대다수에게 한 번도 매력적으로 다가선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레닌주의는 서구에 이미 존재하는 것보다 질적으로 더 해방적 모습의 정부, 경제적 삶 혹은 문화적 경험을 제공해 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제적 혁명 혹은 다른 리더십이 있었다면 역사의 흐름이 바뀌었지 않을까는 이와 무관한 가정이다. 진실은 1924년까지 11개의 소비에트가 과거의 존재가 되었고 혁명의 이상 역시 과거가 되었다는 것이다.
반파시스트 대중 전선의 등장과 함께 사실 공산주의 운동의 방향은 완전히 경제적 개혁으로 축이 옮겨갔다. 그리고 이것은 퇴보로 기록되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싸구려 오페라(The Threepenny Opera (1928))’의 유명한 대사 “먹는 것 먼저 그리고 나서 도덕(first comes eating and then morals).” 그러나 이 대사가 극 중 완벽한 쁘띠 부르주아 착취자로 나오는 Peachum에 의해 냉소적으로 내뱉어진 말이라는 것은 잊혀졌다.

레닌은 항상 “정치를 진두지휘”하고 “혁명의 현실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스탈린 치하에서 이 기조는 바뀌었다. 유럽의 어느 곳에서도 그와 그의 후계자들은 혁명 도박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집단학살 테러로 뒷받침된 경직되고 부패하고 무능한 당 계획을 통한 소련의 급속한 산업화에 집중되었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제국주의적이고 착취적이며 인종차별주의자였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경제적으로 더 발달했고, 다원주의와 개인주의를 수용했으며 종종 공산주의 경쟁국의 그것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포괄적인 복지국가를 소유했다. 그리고 그 위에, 그들에게는 강제노동수용소(gulag)가 없었다.
이미 혁명적 야망을 포기한 2차 대전 이후의 유럽의 공산당은 경제정책과 복지국가의 지지에서 사회민주주의당보다 좀 더 급진적이었을 뿐이다. 그들의 차별화된 점은 소련의 대외 정책에 종속되었다는 점뿐이다. 소련과 동구권이 1989년 마침내 내부 붕괴를 했을 때 그들은 정체성 혼란을 경험해야 했다. 노동자 평의회는 현대 포퓰리스트들에게 언젠가 실행 가능한 모델은 아닐지라도 유토피안 사회주의에 대한 꿈을 남겨주기라도 했지만, 공산주의는 폭정 하에서의 평등 그리고 정치로부터 경제로의 후퇴라는 이미지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레닌은 반제국주의와 민족자결을 사회주의 담론의 중심으로 가져왔다. 그것은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 그러나 그의 유산이 남겨놓은 위험한 교훈은 아직도 좌파의 많은 이들에 의해 무시되고 있다. 이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장하는 독재자들이 평등주의적 사회 경제 정책(졸속이고 대부분 무능한)이라는 미명하에 행한 권위주의에 처음에는 변명하다가 이후엔 본인들도 놀란다. 레닌주의는 로자 룩셈부루크의 유명한 격언 “자유는 오직 그리고 오로지 나와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유다(freedom is only and exclusively freedom for the one who thinks differently)”에 결코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위기”가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독재자 혹은 권력을 행사하려는 조직들에게 상황은 항상 끔찍하다.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의지로, 게오르그 루카치(Georg Lukács)는 한때 “최악의 사회주의 형식도 최선의 자본주의 형식보다 낫다”라고 주장한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한 에른스트 블로흐 (Ernst Bloch)의 응답은 적절하다: “최악의 사회주의 형식은 사회주의가 아니다.”
III
사회주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회주의는 결코 유토피아로 의도된 것이 아니며, 복지국가는 무국가(stateless) 무계급*classless) 사회로 이행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거나 부를 재분배하는 것 이상을 할 수있다; 사회주의는 삶을 더 살기 좋고, 더 안정되고, 더 풍요롭게 할 수있다. 자유를 만끽하려면 물질적 기반이 필요하고 복지국가는 이를 제공할 수 있다. 동시에 개인의 자유가 없는 복지국가는 모조품에 불과하다. 이런 생각은 사회주의를 자유주의(liberalism)와 연결하게 한다. 자유(freedom)는 오직 개인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개인, 정체성 그리고 주관성을 표현하는 것은 자유주의적인 법치가 시행되어야만 가능하다. 유토피아의 변형이 아니라 정치적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공화제 제도(republican institutions)의 지향이 혁명의 이상을 살아있게 한다. 불만에 대한 지속적 인식 혹은 공평한 해결은 이 공화제 제도 없이는 일어날 수 없으며 공화제 제도가 없으면 자유(liberty)도 정의도 없다. 자유-공화주의 제도들의 부재를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개혁만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전술이 아님을 보여준다.
공화적 제도가 이미 존재하는 곳은 상황이 다르다. 그곳에서 사회주의자의 선택은 혁명이냐 개혁이냐가 아니라 개혁과 반동 사이의 선택 문제로 보인다. 복지국가와 정부의 시장개입은 흔히 사회주의와 동일시된다. 좋은 이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공급과 수요 사이의 평형을 가져온다는 믿음 혹은 시장은 스스로 바로 잡는다는 믿음은 7년마다 발생하는 위기를 정상적 작동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복지국가는 이데올로기를 달리하는 여러 체제에 의해 지지받고 있다: 공산주의자와 파시스트들은 이를 축복했고, 캐나다와 미국의 리버럴들은 이를 수용했으며 포퓰리스트들은 남미에 복지국가 도입을 시도했고 2차 대전 이후 독일의 보수 정권은 이를 법제화했다. 복지국가가 오직 가난한 자와 노동자에 대해서만 관심을 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가령, 대규모 기업농은 가격을 높게 유지하기 위해 곡물 생산 대신 정부 보조금을 받으며, 첨단기술과 산업계는 방위 부서를 먹고 산다. 심지어 자유 시장은 존재한 적이 없으며 항상 국가의 지원에 일정 수준 의존했다는 주장도 있다.

사회주의는 생산과 정부 지원의 우선순위에 집중해야 한다; 사회주의는 복지국가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다루어야 한다. 자유주의 법치는 자유를 공식적으로 보장해 줄 뿐이다. 경제적 안전은 개인 자유의 초석이다. 이 상황은 모순을 낳는다. 루이 블랑(Louis Blanc)은 실업에 대한 해결책으로 “일할 권리”에 대해 얘기했었다. 그는 동시에 노동 시간 단축이 모든 노동운동의 기본적 요구임도 인지하고 있었다. 1845년에 쓰인 엥겔스의 ‘잉글랜드 노동계급의 환경(Conditions of the Working Class in England)’부터 맑스 자본론의 “The Working Day” 챕터에 이르기까지 이 두 절친은 끝없이 반복되는 끔찍한 노동일과가 어떻게 노동자들의 정신과 탐구심을 저해하는가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 기술발전은 이 끔찍한 노동을 제거할 수 있지만,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이것은 부차적 문제다. 연구개발은 공공선이 아닌 개인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직장을 잃거나 노동 시간이 감소하고 있다.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가 자본주의는 “창조적 파괴”에 의해 추진된다고 지적한 것은 분명히 옳았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정부로 하여금 파괴를 최소화하고 “시장의 채찍(whip of the market)”을 누그러뜨리고 엘리트들을 위한 이익으로부터 대중들의 쉽고 성취감 있는 삶을 위한 방향으로 시장개입과 생산의 중심이 이전하기를 요구해야 한다.

맑스의 사위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는 그의 고전 ‘게으를 권리(The Right to be Lazy (1883))를 통해 이를 명확히 했다. 그는 사회주의는 삶을 (통상 무의미한) 일에 종속시키는 개신교 윤리를 더욱 내면화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오히려 일을 삶의 즐거움에 종속시킬 것을 주장한다. 이를 위해 새로운 경제적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정부 내 세금부담과 통화재원을 이전하는 것은 이 요구의 일부다. 그러나 무료 의료, 사회 보장, 그리고 최저 임금은 앞으로 가야 할 길의 한 단계일 뿐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더 급진적이어야 한다: 보장된 수입, 단축된 근무 요일, 더 많은 공원, 더 나은 보육원, 젊은이들을 위한 유급 여행 기회, 노인들을 위한 도우미, "그린 뉴딜" 그리고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에메랄드 도시" 그리고 일상에서 사람들이 더 많이 알고, 음악을 듣고, 위대한 시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역사를 배우고, 그들의 관심을 넓히고, 잊혀진 문명과 마주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 프로그램을 요구해야 한다.
사회주의는 기술정치(technocracy)에 관한 것이 아니다. 사회의 모든 것이 “이익과 손실”로 환원되지 않는다: 자유주의적 교육은 이익을 생산하지 않지만,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헬스 케어는 대중 서비스를 목적으로 하지 제약회사의 호주머니를 의식하지 않으며 복지 정책들은 가장 취약 계층에 대한 보호 그 이상의 의미를 제공한다. 처음부터 이익을 목적으로 디자인되지 않은 복지 프로그램을 둘러싸고 인색하게 구는 현재의 관료제만큼 상상력이 없고 매력이 떨어지는 것은 없다. 그런 것들은 사회주의자가 싸워야 할 조건들이 아니다. 개혁을 위한 투쟁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지프스의 노동(labor of Sisyphus)”이다. 성공적으로 언덕을 오른 개혁의 돌은 다시 밑으로 굴러떨어질 수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사회의 유형 측면에서 그들이 성취한 것을 지켜야 하는데 바짝 경계해야 한다. 사실, 그것은 가치관의 문제다: 우선순위 변경, 공공이익 증가, 그리고 삶을 더 쉽고 인간적으로 만드는 것.
우파 포퓰리즘과 신파시즘이 부활하는 가운데 사회주의도 이른바 “세계시민적 감성(cosmopolitan sensibility)”을 수용해 정치적 자유와 복지국가를 활성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완해야 한다. 정체성에 대한 자의적 집착, 내재한 “편견”과 함께 하는 전통 그리고 “뿌리 깊은” 경험은 항상 고루한 반동세력을 도취시켜 왔다. 오늘날, 사회주의자들은 새롭고 유례 없이 다양한 그렇지만 또 포용적 문화적 관점들로 촉발된 글로벌 시민사회의 도전에 정면으로 부딪쳐야 한다. 사회주의는 노동계급을 타겟으로 하지만 이제 어떤 목적론적 보장도 없고 그 승리는 불가피한 것일 뿐이다.
맑스가 글을 쓰고 있었을 때, 그리고 노동운동이 황금기에 접어들었을 때, 계급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간단했다. 노동계급은 (구조적으로) 노동력을 파는 계급이었고 이들은 유럽 사회민주주의를 통해 그들의 연대(의식)가 구현되었던 산업 프롤레타리아로 명백히 전환되었다. 급속도로 성장했던 노동계급은 미래를 그들 손에 쥐었었다: 노동계급의 구조, 경험적 구성 그리고 의식은 모두 융합되어 있었다.
오늘날, 그 융합은 산산조각이 났다. 노동력은 여전히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지만, 노동계급은 모든 면에서 실증적으로 계층화되어 있고 산업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계급의식은 에스닉, 성별, 인종 정체성에 자리를 내주었다. 다양한 그룹의 경쟁적 로비와 이해관계가 무성한 가운데 노동계급 전체는 그들 실제보다 훨씬 작게 나타나고 있다. 주류 리버럴 정당 내에서는 여전히 사회주의의 분출이 있어왔다. 그렇지만 진보는 과거 목적론적 믿음이 새로운 윤리적 약속으로 대체될 때에만 지속할 것이다.
사회주의는 형이상학이 아니다; 사회주의 윤리학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비록 계급의식이 인종, 젠더 등의 지속적 특권화를 통해 왜곡되고 있지만, 사회운동은 활동가들을 끌어모은다. 사회운동의 각 로비 그룹은 제한된 자원을 위해 경쟁하고 따라서 연대는 이상에 그치고 있다. 사회주의가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는 정체성의 초 계급적 형식을 가로질러야 한다. 오로지 “계급 이상(class ideal)”만이 이것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계급 이상은 레닌주의 방식처럼 “밖으로부터” 정체성 기반의 사회 운동에 도입될 수 없다. 여성 사회주의자는 여성 그룹 내에서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유색 인종은 그 조직 내에서 그리고 다른 정체성 그룹에 속한 사회주의자는 같은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야할 것이다. 계급 이상은 객관적 참고 존재, 즉 의제와 이를 다룰 대중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운동에 한 발을 담그고 다른 한발은 그들의 요구를 현실화할 수 있는 정당에 발을 담근 상태에서 공적 영역에서 활동해야 한다.

모든 의미 있는 실천이론은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사회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사회주의 실천이론은 현재의 우리보다 우리는 더 나을 수 있다는 전투적 낙관론에 의지한다. 이 주장은 사실도 허위도 아니며 다만 역사적 실천에 의해 입증될 수도 무효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지지자들이 보고 싶어하는 세계의 감각을 투영해야 한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사회주의하에서 인간의 영혼을 생각했고, 에드워드 벨러미(Edward Bellamy)는 공포와 희망으로 뒤를 돌아보았으며,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는 선행 의식(anticipatory consciousness)을 소중히 여겼고,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일시성과 관능성의 새로운 경험을 추측했으며, 헨리 패처(Henry Pachter)는 개인주의의 최고 단계를 상상했고,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삶의 미학적 스타일을 가정했다. 사실 사회주의는 끝없는 회의 혹은 완벽한 제도를 찾는 것 혹은 어떤 조립식 변화 주체에 관한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는 과거도 그랬고 지금도 명확하지는 않지만, 확실히 중요한 것에 관한 것이다: 자유(freedom), 연대(solidarity), 너그러움(generosity of spirit) 그리고 더 인간적인 세상(humane world).
역자 요약 후기
보다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었던 20대에 읽었던 김학준의 러시아혁명사는 내가 그 책을 읽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는데, 그때와 비교하면 미래를 생각하기엔 물리적 유통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나에게 19세기와 20세기 초, 소위 ‘막시즘의 황금기’에 일어났던 대중과 노동자의 이상적 사회 건설을 위한 열정, 노력 그리고 헌신은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한다. 아마, 아니 분명히, 이후 다른 에세이들을 접하면서 초기 이해는 이후 변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머릿속 정리차원에서 간단하게 이번 에세이를 내 방식대로 요약해본다.
사회주의 사회로 일컬어지는 이상적 사회 건설을 위한 노동자와 대중의 열정, 노력 그리고 헌신은 레닌으로 하여금 러시아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지만, 레닌의 구체제를 뒤엎는 ‘혁명 기술’은 이후 민주적 ‘통치 기술’로 이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레닌의 공산주의는 혁명 이론이었을지언정 통치이론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21세기 사회주의는 러시아 혁명 이전 ‘혁명적 사회주의’ 이념을 간직하면서 사회주의 진영의 장손 역할을 수행한 초기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로부터 혁명적 이상을 포기한 채 자본주의 틀 내 개혁에 주력하는 현 유럽의 사민당 그리고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지만, 여전히 사회주의란 단어를 꺼낼 때마다 ‘그 짓을 봐놓고도 아직도 사회주의 타령여?’라는 핀잔을 듣게 하는 소련의 ‘공산주의(communism)’ 사이에서 미래를 향한 자체 혈로를 뚫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형상으로 나에겐 비친다.
이 에세이에서 내가 큰 흥미를 느낀 부분은 무정부 공산주의(anarcho-communism), 소비에트(soviets) 혹은 노동자 평의회(workers’ councils), 소련의 당-국가(party-state) 그리고 공화제(republic) 간 관계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서술했듯이 참으로 이상적으로 보였고 실제 짧은 기간이나마 현실화되었던 노동자들의 자치는 결국 순진한 이들의 순수한 시도에 그치고 말았다. 무정부 공산주의자들의 패착은. 저자를 따르면, 이상을 현실화하는 전략의 부재다. 즉 이들은 국가와 계급이 없는 사회로 곧바로 넘어갈 수 있다고 믿는 자신들에게 윤리적 정통성을 부여하며 독단주의로 빠지고 덩달아 혁명을 ‘인민’을 위한 것이 아닌 인민을 대표하는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런 낭만적 몽상적 독단적 무정부 공산주의자들은 현실에서 노동자들과 대중을 위한 현실적 도움과 안내 역할을 못함에도 노동자 평의회에 의한 국가 없는 자체 통치를 고집했다. 이에 1917년 10월 혁명 성공 이후에도 내전을 통해 반동분자들 척결 과제를 남겨두던 레닌의 볼셰비키에게 이전부터 눈에 거슬리던 슬로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평의회)에게! (All Power to the Soviets!)”를 외치던 무정부공산주의자들이 내전 와중에도 “공산주의자(볼셰비키) 없는 평의회(soviets without communists)”를 외치자 혁명 완수를 최우선 과제로 삼은 볼셰비키로서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1921년 마침내 소비에트(평의회)들을 분쇄해버리고 ‘당-국가’체제를 공식화한다.
사회주의의 이상처럼 보였던 평의회를 통한 자치는 이처럼 무정부 공산주의자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제도적 조직적 체계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 실체의 부재 덕분에 이들과 달리 ‘이상’ 단계에 머물렀던 혁명을 어떻게든 현실화시킨 자신들의 능력과 성취를 통해 윤리적 특권의식과 그에 따른 독단주의로 무장한 볼셰비키에 의해 완패하게 된다. 이에 저자는 이들 무정부 공산주의자들이 사회주의 이상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이행(transition)’ 단계의 필요성을 인식했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이 이행 단계에 필요한 정부 형태로 ‘공화제(republicanism)’를 지정한다. 레닌주의가 혁명의 성공에도 왜 서구 노동자에게 전혀 어필하지 못했는가를 설명하면서 저자는 서구 노동자는 소련 노동자보다 더 물질적 풍요를 누릴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개인의 자유를 누린다는 점을 지적한다. 모든 노동자와 대중이 자신의 불만을 해결할 수 있는 과정에 참여하는 민주적 사회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경제적 평등과 더불어 정치적 자유를 보장해주는 자유주의적 법치 - 평의회 통치에 대조되는 개념으로 - 그리고 이 법치를 가능하게 해주는 공화제 제도를 지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의 공화제 강조는 나로서는 예상치 못한 부분이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공화주의(republicanism)에 대한 이해가 너무 없어서 이 정도 이해 요약으로 그치고 추후 다시 들여다볼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저자는 마지막 부분에 지향해야 할 사회주의 운동 방향에 대해 조언을 한다. 경제적 측면에서 저자는 생존을 위한 물질 수준이 아닌 풍요로운 문화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수준이 그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이며, 다양하게 등장하는 정체성 운동은 사회주의 계급 운동을 자체적으로 수용하는 형식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끝으로 저자는 사회주의는 형이상학이 아니고 볼셰비키가 전가의 보도처럼 인용했던 목적론적으로 예정된 목표(teleologically guaranteed end)를 향해 가는 것도 아니다. 사회주의는 현재의 우리보다 우리는 더 나을 수 있다는 전투적 낙관론에 기초하여 자유, 연대 그리고 너그러움으로 가득 찬 보다 인간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너그러움(generosity of spirit)’ 덕목이 가슴에 와 닿는다. 내가 보기에 하위 계층 대중의 비극은 생존에 필요한 충분한 물질의 결핍이 물론 기본적으로 지적되어야 하겠지만, 궁극적 비극은 자신의 인간성으로부터 ‘소외’된 삶을 산다는 것이다. 소위, 각박한 삶을 사는 것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물질적 여유가 없다 보니 정신적 여유마저 없어지며 돈이 인격이란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게끔 너그러움, 특히 타인에 대한, 이 사라진다. 제한된 자원을 놓고 못사는 이들끼리 경쟁하다 보니 타인은 배려의 대상이 아니라 이겨야 할 대상이 되고 나의 노동을 착취하는 자본가 혹은 갑질하는 높은 분이라도 나에게 기회를 줄 것 같으면 아부를 할 줄 아는 소인이 되어 간다.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니었는데’라는 표현은 우리가 현 사회관계를 통해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소외되어가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타인에 대해 우리가 모두 너그러울 수 있는 사회가 물질적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사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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