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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민주적인 판사: The Democratic Judge)
베르톨트 브레히트
1943년
미합중국의 시민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심사하는 로스앤젤레스의 판사 앞에
이탈리아 식당주인도 왔다. 진지하게 준비해 왔지만
유감스럽게도 새 언어를 모르는 장애 때문에 시험에서
수정헌법 제8조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받고
머뭇거리다가 1492년이라고 대답했다.
시민권신청자에게는 국어에 대한 지식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그의 신청은 기각되었다. 3개월 뒤에
더 공부를 해가지고 다시 왔으나
물론 새 언어를 모르는 장애는 여전했다.
이번에는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은 누구였는가 하는
질문이 주어졌는데, (큰 소리로 상냥하게 나온) 그의 대답은
1492년이었다. 다시 각하되어
세번째로 다시 왔을 때, 대통령은 몇 년마다 뽑느냐는
세번째 질문에 대하여 그는
또 1492년이라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판사도 그가 마음에 들었고 그가 새 언어를
배울 수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조회해 본 결과
노동을 하면서 어렵게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네번째로 나타났을 때 판사는 그에게
언제
아메리카가 발견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리하여. 1492년이라는 그의 정확한 대답을
근거로 하여
그는 마침내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출처 : 베르톨트 브레히트, 김광규 옮김,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한마당, 1985, 119-120면.
책을 번역하면서 자주 접하게 된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에 대해 알아보던 중 발견한 그의 시다. 다 읽고 나서 미소를 짓게 만드는 따뜻한 시 정도로 읽고 넘어갈 수 있는데 몇 대목이 나로 하여금 오지랖 떨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였다. 번역도 쉬었다 갈 겸 즉흥적 사회학적 혹은 시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짧은 감상문을 써본다.
그(녀)를 민주적 판사로 부르는 것이 맞는 걸까?
먼저, 제목이 ‘1492년’과 더불어 ‘민주적인 판사’ 두 가지가 혼용되는데 영어 번역본이나 한글 번역본이나 모두 ‘민주적인 판사’ 제목을 선호하는 듯싶다. 한 웹사이트에서도 ‘The Democratic? Judge’ 그리고 ‘Is the Title Ironic?’ 표현을 써가면서 이 제목의 배경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는데 유감스럽게 추가 설명이 없어 나와 같은 생각에서 그런 의문을 제기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 이 판사는 우리가 명백히 느낄 수 있는 그(녀)의 따뜻한 마음과 별개로 민주적인 판사가 아니라 자신의 재량권을 최대한 발휘한 온정주의 판사다. 현재 뉴질랜드 이민부도 그렇지만 1943년의 미국 이민 신청자의 영주권 혹은 시민권 부여 자격을 심사하는 판사 역시 이민법에 근거하여 결정을 내려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판사는 당시 미국 이민법 혹은 시민권법 그리고 이 법을 제정케 한 미국 시민의 뜻을 어쩌면 ‘기만’하고 자신의 자의적 판단을 사후 면피용 대책을 마련한 상태에서 적용한 것이다.
같은 교민들을 상대로 하는 비즈니스 공동체의 비중이 큰 뉴질랜드 한국 교민들은 두말할 필요 없이 더 많은 한국 이민자들이 유입되는 것을 환영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 뉴질랜드 이민법의 영어 조항은 눈엣가시 같은 항목이다. 1980년대 후반 이민을 비영어권 국가에 처음 개방할 때 뉴질랜드 정부는 이민정책 초짜이기도 했고 찬밥 더운밥 가릴 상황이 아니어서인지 신청자 - 심지어 주 신청자에게도 -의 영어 능력 요구 조항이 없었다. 그렇게 신규 이민자에 대한 영어 능력 필터링이 없이 받아들인 결과, 1990년대 Asian Invasion이라는 파케하들의 집단적 저항감이 표출되었었던 시기가 있었다. 이런 기존 사회구성원의 반발 그리고 영어 능력의 부재로 인한 신규 이민자의 직장 구하기로 대표되는 현지 적응에 어려움이 발생한다고 판단한 뉴질랜드 정부는 1990년대 이민자에게 일정 수준의 영어 능력을 요구하게 된다.
이처럼 이민 신청자에 대한 영어능력 요구는 신청자의 절박함 혹은 열망과 관계없이 이민 희망국 시민의 민주적 동의 혹은 요구로 생긴 법적 조항이다. 이 영어 능력에 대한 조국 시민의 ‘민주적 명령’을 거부하고 자신의 가슴을 따른 이 판사는 따뜻한 사람일지언정 민주적인 판사로 칭하는 것은 부적절한 용어 선택이 아니지 않을까?
영어 테스트, 지식 테스트 그리고 가치관 테스트
신청자가 영어 자체를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위 인터뷰는 신청자에게는 영어 테스트로 다가갔겠지만 위 인터뷰는 신청자가 미국 시민권자가 될 자격이 있을 정도의 미국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이해가 있는지에 대한 테스트다. 2018년 뉴질랜드 제일당이 새로운 이민자는 ‘뉴질랜드 가치 시험(New Zealand value test)’을 반드시 거칠 것을 제안한 적이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21세기 다국적 그리고 초국적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의 광풍 속에서 궁여지책으로 꺼낸 소위 다문화주의라는 카드가 제대로 먹히지 않는 서구권은 이 새로운 이민자들을 어떻게 ‘우리( we)’의 한 부분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가를 계속 고민한다. 그들이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것들을 그들도 ‘공유(share)’할 때 가능한 데 우리 것 중 하나가 바로 위 판사의 질문에 나타난 호스트 국가의 역사와 사회 시스템에 대한 지식의 공유다. 더구나 미국은 전통적으로 이민자에 대한 동화주의(assimilation)가 기본 원칙이었던 나라이고 때는 1940년대이다. 신청자가 미국 시민이 될 생각이면 미국의 중요한 - 최소한 백인에게는 - 역사와 현 사회/정치 시스템에 대한 이해는 기본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어쩌면 당연한 기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21세기에 뉴질랜드에 그리고 다른 서구에서 위와 같은 유형의 인터뷰가 앞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위 인터뷰처럼 호스트 국가의 역사와 사회 지식에 대한 단답형 질문이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뉴질랜드 영주권을 위해 인터뷰를 해야 하는 신청자는 ‘와이탕이 조약이 체결된 해는 1840년’을 달달 외워가서는 위 인터뷰에 나온 ‘민주적인’ 판사 같은 이민관을 만나도 성공적으로 패스할 가능성이 희박할 수 있다.
물론 호스트 국가의 이민부도 질문에 대한 모범 답안을 가지고 있지 않은 까닭에 이런 인터뷰가 조만간 실행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만약 시행된다면 인터뷰 질문의 상당 부분은 호스트 국가의 핵심 가치(core value)에 대한 이민 신청자의 공유 여부 혹은 공유 수준이 될 것이다. 이런 질문은 대단히 민감할 수 있고 사상 검증이라는 악마적 모습으로 일부에게는 다가갈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무슬림에게 종교적 다원성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물을 수 있을 것이며 아시안에게 마오리와 파케하 간 와이탕이 조약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지 그리고 원주민(Tangata whenua)으로서 마오리에 대한 특별 지위가 보장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브레히트는 판사의 영어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브레히트 자신도 1941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다. 그의 영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보가 없으나 위키피디아를 따르면 1947년 매카시 열풍이 미국 사회 전반을 휩쓸던 당시, ‘빨갱이’ 잡기의 선봉에 섰던 ‘비미(非美) 활동 위원회(HUAC: 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의 소환을 받았던 브레히트는 자신은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비꼬듯이 강조하면서 조사 기간 내내 통역사를 활용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그의 독일어 진술을 번역한 영어 문장은 이해할 수 없는 글이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고의로 영어 벙어리 행세를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남의 나라 미국에 발을 디딘 이민자 처지로서 다른 이민자의 입장에 어렵지 않게 공감하며 위 시를 썼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다른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예술인들과 달리 HUAC의 요구대로 공산당 멤버였던 적이 없다는 진술서를 쓴 브레히트는 바로 다음 날인 1947년 10월 31일, 브레히트는 미국을 떠나 다시 유럽으로 돌아간다. 나치의 탄압을 피해 향했던 브레히트의 미국 생활은 6년 만에 우파의 광기에 동승한 미국 정계와 사회로 인해 이렇게 끝나고 돌아간 그는 여전히 사회주의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많은 동료 좌파 작가들이 서독을 선택했을 때도 동독을 선택해서 1949년부터 동베를린에서 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동독 생활은 집권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SED)의 관료주의에 실망하고 1953년 시민의 봉기 진압에 대해 환멸감을 느끼며 삐걱대다가 1956년 심장마비로 향년 58세를 일기로 세상과 이별을 고한다.
기타
위 시에는 두 명의 이탈리아인이 등장한다. 한 명은 ‘민주적인’ 판사 덕분에 시민권을 받은 시의 주인공이고 다른 한 명은 그가 1492년이라고 ‘정확히’ 대답한 아메리카 발견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다. 브레히트가 콜럼버스가 유럽인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한 해를 시의 소재로 사용한 것에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최근 미국 시민권 인터뷰 예상 문제를 보아도 아메리칸드림이 실현될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 미국을 상징하는 인물들, 가령 링컨이나 워싱턴, 그리고 독립선언이 있었던 의미 있던 해인 1776년도 있는데 어쩌면 호스트 국가 미합중국과는 거리가 있는 대륙 아메리카가 발견된 해가 무슨 중요성을 지닌다고 이 이탈리안은 많은 예상문제 중 하필 이 질문을 찍어 답 ‘원 싸우전드 훠 헌드레드 나인티 투’를 달달 외워갔을까?
나의 시적 상상력 (?)을 발휘해보면 어쩌면 브레히트는 콜럼버스로 상징되는 유러피안 식민주의자들의 패권성과 잔인성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이 질문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상대로 한 비인간적 잔인성을 브레히트가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이다. 브레히트는 어쩌면 같은 이탈리아 후손을 등장시켜 미국의 추악한 이면을 되새기게 한 것은 아닐까 상상해본다.
그리고 두 번째 인터뷰에서, 이탈리안 신청자는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을 묻는 질문에서 ‘큰 소리로 상냥하게’ 1942년이라고 답을 했다. 왜 그랬을까? 큰 소리와 상냥함은 질문을 제대로 이해했을 때 보일 수 있는 자신감의 표현인데 그는 판사가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된 해를 물어보았다고 확신한 것일까? 질문의 리스닝이 제대로 안 되었다면 첫 번째 인터뷰 때처럼 머뭇거리는 것이 보통인데 그의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에서 근거할 것일까? 설마 영어가 더 퇴보하여 헛것이 들린 것일까? 아니면 판사가 정확한 답보다는 자신감을 더 중요시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인터뷰 전략을 수정한 것일까? 별 상상을 다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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