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세상 이야기

차이 나는 개인 능력과 평등의 원칙 - 민주사회주의 이해하기 (6)

김 무인 2021. 7. 14.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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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머리말

이번 에세이의 저자 Philip Green은 미국의 정치이론가로서 매사추세츠 주 Smith College의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미국의 자유주의적 다원주의 그리고 대의 민주주의의 퇴보에 대한 많은 저작을 남겼다. 다른 에세이에 비해 많은 문단과 문장이 이번 번역에서 생략되었다. 이유는 첫째, 영어 능력의 문제인지 지적 능력의 문제인지 몰라도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억지 번역을 하느니 과감히 생략하였다. 두 번째, 저자가 말하려는 바는 알겠지만, 자의적 판단에 주제의 집중화에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부분 역시 생략하였다. 애초 이 책에 실린 30여 편의 에세이를 번역하는 목적이 커다란 코끼리의 이모저모를 만져보면서 대체적 윤곽을 잡으려는 의도인 만큼 한 에세이의 완벽한 이해와 번역에 시간을 투자하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반영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민주사회주의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이들은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의 원인 - 가령, 심화하는 불평등의 근본 원인으로서 노동의 소외 그리고 환경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서 통제되지 않는 자본축적의 관성 -에 대해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강조해왔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과연 민주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이를 극복하는 대안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구현될 것이며 그 대안의 실행에 따른 새로운 잠재적 부작용은 어떤 것들이 될지에 대한 생산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와 관련 저자는 이 에세이를 통해 그 논의의 필요성과 범주에 대한 자기 생각을 밝히고 있다.

참고로 에세이의 제목 ‘사회주의 혹은 야만(Socialism or Barbarism)’은 우리에게 로자 룩셈부르크의 슬로건으로 잘 알려졌지만, 이 저자는 이 경구가 엥겔스로부터 유래했다고 본문에서 언급했다. 하지만 한 주장을 따르면 이는 근거가 부족하며 엥겔스보다는 오히려 칼 카우츠키로부터 유래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수 있다고 한다.

 


 

사회주의 혹은 야만(Socialism or Barbarism)

Philip Green

 

서론: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유령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도,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탄생한 공산당도 아닌, 자본주의 모순의 나머지 반대편인 ‘자본주의 붕괴의 전망’이란 유령이다. 이 유령은 전 세계적 경쟁, 기술 변화 그리고 유럽과 미국 자본주의의 잔혹한 팽창 - 그리고 이 팽창에 대한 원주민들의 지속적 저항 -으로 야기된 이민 물결에 직면한 복지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전반적 실패,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앞에 다가온 환경 재앙에도 여전히 요지부동으로 이에 개의치 않는 자본에 의해 풀려났다.

엥겔스는 선택은 “사회주의와 야만(barbarism)” 사이의 선택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한때 유효기간이 지난 것처럼 보였던 이 말은 이제 선견지명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의 무자비한 상품화를 통한 자본 축적의 논리가 아무런 제약 없이 지구의 기본적 자원을 포함해서 창조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예언 형태도 아니고 입으로만 떠드는 불확실한 갈망이 아니라 진지한 대안 논리로서 사회주의에 대해 재고를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먼저 우리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는 사회주의의 변종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변종이다. 우리는 사회민주주의를 미국식 무자비한 자본주의와 중국 혹은 러시아의 폭압적 자본주의와 비교했을 때 가장 온화한 형태의 자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른다. 어쨌든, 20세기 개혁주의(reformism)가 수백만 명의 삶을 향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개혁의 힘은 이제 소진된 것처럼 보인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사회주의”를 또 다른 피상적 개혁 혹은 자본주의의 인간화가 아닌 자본주의의 거부라는 것으로 이해할 때 이 개념은 혁명적인 것이 된다.

세 다리 의자처럼 사회주의는 긍정적 비전을 지향하는 세 원칙에 의존한다. 1) 상품을 생산 혹은 재생산하는 생산자들의 복지(well-being)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혹은 주 수입원인 임금 노동을 통해 착취 그리고 생산적 잉여를 처분할 수 있게 하는 사적 이익의 철폐; 2) 단순 소유권을 뛰어넘는 근본적 권리로서 사유재산의 폐지; 3) 이 획기적 두 변화를 위해 자본주의의 도덕 질서를 뒤엎고 좋은 삶의 다른 버전을 단단히 뒷받침하는 문화적 변혁이 그것이다.

(1) 자본 축적은 역사적으로 지구 자원의 착취를 위해서는 주로 강압적 혹은 노예 노동,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서는 무급 가사 노동 그리고 자본가와 투자자의 이익을 위해서는 임금 노동을 이용해왔다. 첫 두 유형은 자유롭지 않은 노동에 대한 강압적 착취를 통해 자본축적과 부를 추구한다; 세 번째 경우, 노동의 젠더 구분은 대부분 여성을 열등한 계급 혹은 계층 그리고 특히 원시적 축적의 시기에는 재산 형태로 전락시켰다. 심지어 지금도, 여성 가사노동자와 케어기버는 대부분 남성이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선택의 자유에 대한 제약에 직면하고 있다; 이들의 무급 혹은 저임금 노동이 없다면 노동력 재생산에 드는 비용을 줄여야만 가능했던 기업의 축적은 사라지고 덩달아 자본주의 사회질서 역시 무너질 것이다.

사회주의의 전망은 이 자유롭지 못한 노동 - 오늘날 “자유로운 노동(free labor)”이라고 불리지만 맑스가 정확히 “소외된 노동(alienated labor)”라고 정의한 노동 - 을 적법하게 만든 제도를 뒤집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노동이란 어떤 모습인가? 관련되어 똑같이 중요한 질문은, 과연 우리의 생활과 소비는 임금 노동과 비슷한 것처럼 보이게 될 수입에 어느 정도 의존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이는 소외된 노동인가 아닌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필수적 서비스에 대한 공공 제공과 보장되는 연간 수입액이 개인이 노동을 통해 버는 수입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처럼 개인이 일을 통해 번 돈이 생활과 소비에 결정적이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당연히 드는 질문은 어떻게 이 자금을 조달한 것인가인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는 비생산적이고 그렇지 않아도 부유한 자들에게 몇십억 달러를 보조금 형식으로 지급하는 불균형적 배분에 천문학적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낭비는 또 기업과 개인의 부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초고소득도 포함된다: 마이클 해링턴 (Michael Harrington)(미국 민주사회주의자(DSA)의 설립자 중 한 명: 역자 주)의 표현을 빌리자면 “부자들을 위해서는 사회주의, 하지만 가난한 자들에게는 자유 기업.” 우리는 여기에 환경보호를 위한 비용을 더해야 하는데 많은 경우 이 비용은 미국이 제국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군비는 물론 산업과 농업 자본의 일상적 활동에 드는 비용보다 훨씬 적다. 어떻게 이것이 작동할지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충분히 명확하다.

마이클 해링턴 (Michael Harrington) ​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더 복잡하다. 고타 강령 비판에 나온 맑스 자신의 사회주의에 대한 정의는 ““from each according to [their] ability, to each according to their work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자의 일에 따라)”다. 추상적 개념의 이 정의는 많은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무엇이 “일(work)”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인가? “능력(ability)”은 어떻게 평가되며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 이 정의에서 생산주의(productivism)의 냄새가 나는 데 이 느낌은 자본론 1권에서 언급된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목적과의 긴장 관계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그러나 자본론 1권 4장 “The Fetishism of Commodities and the secret thereof (상품의 페티시즘과 그 비밀)”에서 맑스는 대안에 대한 결정적 설명을 제공하는데 아래는 그 일부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모여있는 공동체를 상상해보자… 이들은 공동 생산수단을 통해 그들의 일을 하는데 이곳에서 각자 다른 개인들의 노동력의 합은 내가 의식적으로 칭하는 공동체의 노동력이다.... 우리 공동체의 노동력 총합은 사회적 생산이다. 이 사회적 생산의 한 부분은 생산을 위한 신선한 수단의 역할을 하며 사회적 성격을 유지한다. 그러나 다른 부분은 생계유지 수단으로 공동체 구성원에 의해 소비된다. 따라서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이 부분의 배정이 필요하다….. 그들의 노동과 생산물을 둘러싼 개인들의 사회적 관계는 완벽히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생산뿐만 아니라 분배 역시 마찬가지다.”

 

반대로, 이른바 “자유로운(free)” 임금 노동의 문제는 무엇인가? 임금 노동의 문제는 임금을 지급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노동력을 통제(command) 한다는 것이다. 이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생산력과 자기 자녀의 잠재적 생산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것을 뛰어넘는 잉여를 생산한다. 어떤 종류의 노동이 잉여를 생산하는지 또 잉여는 단지 소비만 해야 하는지와 같은 해답 없는 질문은 차치하더라도, 잉여는 어떻든지 간에 배분되던지 처분되어야 한다. 누가 그 잉여의 용도와 분배를 통제하는가에 따라 사람들은 그 사람이 설정한 조건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실제 현실에서 인간에게 발생하는 “착취” 혹은 “소외”의 모습이다.

착취를 할 수 있는 힘과 권한을 가진 사람들은 따라서 범접할 수 없는 권력을 가진 채 별도의 삶을 사는 계급을 구축하는 한편,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의 필요가 다른 사람의 행위에 종속되는 노동자라는 계급이 형성된다. 맑스가 노력했던 것은 진정으로 “자유로운(free)” 노동, 즉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은 그들 중 누가 무엇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스스로 결정할 것이다. 복잡한 민간 혹은 공기업은 순수한 협동조합으로 설립되고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에 소유자/관리자로서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잉여물도 “이익(profit)” 혹은 CEO 보너스라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배정되지 않는다. 그것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와의 차이다. 무엇보다도, 기술의 발전은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살아있는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는 자본가의 무기로 사용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실직된 노동자를 포함하여 모두를 위한 사회적 삶의 향상 수단으로써 이용될 것이다.

존 롤스(John Rawls)

 

이 모든 것들은 맑스가 말한 “계획(plan)”을 의미한다. 민주사회주의 사회에서 합의로 도출된 결정은 어떤 추상적 기준 - 우리는 이를 “시장(the market)”이라고 부른다 -에 비추어 보았을 때 “공평(fair)”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결정은 “의식적(conscious)” 선택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사회의 기본적 가치 중 하나인 평등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아마 존 롤스(John Rawls)’의 “정의의 두 번째 원칙(second Principle of Justice)” - 가장 약자에게 가장 많은 분배 이익이 돌아갈 때만 불평등을 허용한다 - 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소유자/관리자도 결정을 위한 표결에서 단 한 표만 행사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개인 소유의 기업형태는 폐지되거나 인위적 사람의 형태로(오늘날처럼) 개별 종업원의 투표를 넘어서는 경제적 권력을 행사하는 형식의 “투표”는 없을 것이다. 이것이 직장 “민주주의”의 구체적 모습이다.

(2) 이런 관점에서, “사유재산의 폐지”가 실질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본 것처럼, 자본가의 “소유권(rights of ownership)”은 가장 중요하게 생산자본(productive capital)의 합법적 소유 “권리”를 포함한다. 이들 소유자는 공장 기계를 작동시키고 멈추게 하며 사무실의 문을 열고 닫는 법적 권리를 가진 유일한 사람이다. 이들은 기업의 지분을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수익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권력을 가지게 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회주의 기업에서는 어떤 구성원이 특별히 관리, 혹은 필요 자금 조달, 혹은 기업 확장에 특출한 능력을 보이면 그 사람이 추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결정할 수 있겠지만, 이 보상은 그 구성원에게 추가 권력을 부여하는 형식은 아니다. 중요한 점은 평등이란 규범에서 벗어난 실용적 혹은 능력 중시라는 예외적 상황은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물론 사회주의 사회의 이런 상상이 된 모습에 대해서 우리는 의문을 가지는 부분이 있다. 민간기업 형식의 폐지 혹은 축소 그리고 이에 따른 자본과 노동 간 분리 폐지와 축소는 자연스럽게 생산 수단 혹은 서비스 제공 수단에 대한 공공 혹은 협동조합 소유권 형식의 해결책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러나 공공(the public) - 즉 “소유자(owner)”로서 국가 혹은 공동체 - 은 노동자가 아니다; 공공은 노동자로부터 그들 위로 분리된다. 따라서 자본에 대한 국민 권력의 소외는 잠재적으로 다른 형식으로 변환한다: “공공”을 대변하는 관료제. “노동자의 통제(workers’ control)”(유고슬라브의 경험이 보여주듯)는 구체적 알맹이가 없는 슬로건이다. 다양한 형식으로 인간의 권력은 소외될 수 있다: 엥겔스가 간단명료하게 표현했듯이, 공장(병원도 학교도 대학도)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두 번째, 사회주의 사회는 분명 미국 헌법 수정 제5조를 포함할 것이다: “사유재산은 정당한 보상 없이 공공 용도로 전용(taken)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taking”이란 개념은 단어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이해를 훨씬 뛰어넘어 몰수(seizure)로부터 단순히 보호하는 것을 포함할 뿐 아니라 작은 비즈니스를 파괴하고, “시장에서 형성된 렌트(market rents)”를 낼 수 없는 세입자를 퇴거시키고, 수천 명이 집이 없을 때 필요 없는 호화 주택을 짓고, 이웃 혹은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고, 부족한 필요 상품의 가격을 인상하고, 대중의 접근은 거부한 채 새로운 자원의 발견으로 혜택을 누리는 “권리(rights)” 등등을 포함한다.

(3) 사회주의의 1차적 목적은 자유의 평등(equality in freedom)이다: 공산당 선언의 맑스의 표현을 따르면, “개인의 완전한 발전은 모두의 완전한 발전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 반대가 전체주의임을 목격했다.) 여기에서 최대한도로 자신을 발전시킬 개인의 기회를 강조하는 것은 대신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자본 축적의 도덕성을 보증해 주는 것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사실, 이런 모든 어구는 사회적 실제에서는 완벽하게 실현될 수 없는 추상적 개념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목표다. 사회주의의 어떤 버전에서도 자유의 평등과 모두를 위한 사회적 정의는 도덕적 인간의 공통된 목표로 간주한다. 사회적 질서의 핵심으로서 자본 축적은 이 목표와 양립할 수 없다: 축적은 이 목표를 초월하고 무시한다. 사회주의는 이 축적의 초월적 지위가 사라질 때만 존재할 수 있다.

단순한 슬로건이 아닌 “자유(freedom)”는 당신의 의지가 미치지 못하는 타인은 역으로 당신도 의지의 대상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당신의 일에 대한 조건과 보상이 당신에게 결정권이 없는 시장에서 결정된다면, 혹은 만족스러운 사회적 그리고 개인적 존재를 위한 기본 요구에 대한 접근이 시장에서 결정된다면 자유는 달성될 수 없다. 자유의 평등은 기본적 경제적 안정성을 통해 가능한 만큼 현실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사적 재화와 부의 축적보다는 공공 재화의 제공에 대한 강조가 필요하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그것을 전반적으로 원하므로 민주사회주의에서는 자본 축적보다 시민 평등(civic equality)이 더 높게 평가되는 공공재다. 이와 같은 역전이 이루어지 않는다면 민주사회주의 정치 경제의 지속적 창조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여기에서 기본 원칙은 모든 사람이 사회적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동등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든, 가치 있다고 인정되는 것을 생산할 수 없다면 사회 보장제도 혹은 공동체 연대 형식이 그 공백을 메울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그 자체로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것이다; 언제나 평등하다. 서로 다른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 그리고 고도의 훈련이 있어야 하는 차별화된 노동 혹은 기술에 대해 어떻게 보상하여야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며 사회주의자들에게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원칙은 같다: 공동체가 결정한다.

고군분투하는 시인은 어떤 이에게는 잠재적 보배이겠지만 또 다른 어떤 이에게는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해라”라고 말해주고 싶은 대상이다. 어떤 사람들은 트와일라 샤프(Twyla Tharp)를 보기 위해 공연장에 집결하고, 리오넬 메시나 비욘세를 보러 온 사람들로 경기장이 매진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 프로 운동선수들과 공연 아티스트들에게 돌아가는 엄청난 수익은 그들 뒤에 있는 기업과 억만장자 후원자들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배후의 이들 존재가 없다면 그들의 수입이 천문학적이라도 그 수입이 다른 누구의 자유를 위협하지는 않는다; 바로 그것이 위기에 처한 원칙이다.

제프 베이 조스(Jeff  Bezos)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자의 일에 따라” (업무와 훈련 시간 그리고 생산적 혁신에 대한 보상으로 측정) 원칙은 결코 빌 게이츠의 부 혹은 제프 베이 조스(Jeff Bezos) 권력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이 원칙하에서 빌 게이츠는 대신 더 높은 수준의 소비 그리고 사회로부터 감사의 표시로 명예 훈장을 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심지어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정당들은 그런 질문에 대한 다양한 답을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기본 원칙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며 시민의 자유와 인권이 기본적 자유 가치라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결론: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적 가치의 전달 매개체로서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사유화를 거부한다 해도 정치 경제에 대한 기본적 질문을 놓고 우리는 격렬한 갈등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기업에 대한 재투자 및 환경보호와 관련하여 생산 수익은 현재를 위한 지출과 미래를 위한 저축 사이에서 어떻게 나눌 것인가? 이것은 미국에서 오랫동안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의 주된 갈등이었으며 이 문제는 사회주의 정치질서에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외에도 진지하게 고민할 것들이 많다: 가사노동과 간병노동은 어떻게 인정되고 보상되어야 하는가?; 통신 미디어의 적절한 내용, 소유권 그리고 자금조달 방식은?; 민족주의 혹은 국제주의?; 지역 분권주의 아니면 중앙 집권주의?; 기술 변화의 범위와 속도는?; 노동의 직업적 분화 관련 보수의 편차는? 등등.

사회주의는 우리가 원한다는 이유로 현실화되지는 않으며 내가 위에서 묘사한 것들은 현재로서는 유토피아일 뿐이다. 이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투쟁이 필요한데 이 과정은 예측할 수 없다. 미국에서 민주사회주의 유토피아의 구체적 실현 모습은 다음을 포함할 것이다: 최소한의 기본 소득 지원과 필수품의 공공 제공; 매매차익과 양도소득에 대한 과세 소득의 재분배; 경찰력의 비무장화; 공공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독점, 특히 대중 매체를 지배하는,의 규제 혹은 해체; 제국주의 정책과 해외 군사 지배로부터 퇴각;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진정한 보편적 참정권을 위한 선거에 대한 공적 자금 제공.

이 목표를 벗어난 중앙 계획 혹은 “선도 산업”에 대한 국유화 조치는 사회주의에 필요한 전제조건이 될 수 없다. 주요 과제는 생산적 재산의 소유자들에게서 다음의 “권리”들과 권력을 폐지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을 맘대로 고용하고 해고하며; 파업을 분쇄하며; 생산 자본을 원하는 대로 이전시키고; 환경을 오염시키며; 교육 기관을 통해 거짓말에 기초한 대중문화를 창조하기 위한 광고,로비 그리고 선전에 이익을 사용하는 행위 등. 이런 모든 권리는 입법부, 임명직 관료제, 법원, 군대에 의해 주어지기도 빼앗기기도 한다. 오르기에 매우 가파른 언덕이지만 그 꼭대기에서 민주사회주의는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