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로그를 찾아주신 분께 안내드립니다. 좀 더 나은 교열과 가시성/가독성을 원하는 분에게는 '네이버 포스트(링크)' 를 권장합니다.
역자 머리말
‘전사의 후예’라는 뉴질랜드 영화가 있다. 20세기 후반 산업화와 더불어, 도시로 이주한 한 마오리 가족의 주변화되어가는 삶을 적나라하게 조명한 영화다. 영화 내내 마오리 사회의 고질적 문제로 지적되는 빈곤, 알코올중독, 가정폭력 그리고 마오리를 포함한 폴리네시안 사회의 전통적 가부장제가 폭력적 형태로 등장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를 외면하게 하고 싶을 만큼 ‘너무’ 적나라하게 도시 빈민 마오리의 피폐한 삶을 보여준 영화다. 이 영화의 영어 원제가 “Once Were Warriors”(한때 우린 전사였다)다. 바로 아래 에세이, “Once Were Communists”의 제목이 유래한 곳이다.
그렇다. 마오리는 유러피안이 이 땅에 발을 내딛기 전 마오리 부족끼리만 살던 시절에는, 비록 이상적인 정체성은 아닐지라도 마오리 남성은 자긍심이 듬뿍 담긴 ‘전사’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 자존감 넘치던 전사는 19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유러피안 식민화 과정을 통해 땅도 뺏기고 어쩌면 더 끔찍하게 자존감마저 뺏기며, 21세기 현재 전사의 모습은커녕 뉴질랜드 내 에스닉 그룹 중 가장 알코올 폭음을 하는 그룹, 가장 흡연을 많이 하는 그룹, 가장 높은 범죄율을 기록하는 그룹 그리고 결과적으로 뉴질랜드 전체 인구의 약 16%를 차지하는 마오리가 교도소 수감자의 53%를 차지하는 ‘가장 문제 많은 에스닉 그룹’으로 전락했다. 전사의 흔적은 이제 올블랙스 하카(haka)에서만 씁쓸하게 찾을 수 있을 뿐이다.
한때 늠름했던 마오리 전사가 이제는 오클랜드 남부 거리에서 술에 취해 담배를 구걸하는 존재로 전락한 것은 ‘왜일까?’라는 질문을 개인적으로 떠나보내지 못했다. 나의 잠정적 결론은, ‘부족 사회’ - 모든 것이 부족 공동체 소유 - 가 유일한 사회 개념이었던 마오리가 ‘자본주의 사회’ - 개인주의, 사적 소유권, 계급사회 그리고 경쟁이 주 구성 개념인 사회 -에 아무 적응 과정 없이 전격적으로 노출된 탓이라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엄마 젖을 떼고 일반 음식으로 넘어갈 경우 이유식이라는 과정을 거쳐 건강한 어린이 식단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이런 이유식 과정은커녕 이유식 대신 곧바로 맛을 본 것이 불량식품 사탕인 셈이다. 마오리들이 땅을 뺏긴 것도 결국 이 불량식품들 - 술, 담배, 총 등 - 을 사기 위해 지급한 대가였듯이.
이렇게 유러피안 등장 이전의 마오리 사회가 부족이란 공동체 사회 - 모든 재산이 부족 공동소유라는 의미에서 - 였을 것이라는 막연한 인식 상태였는데, 우연히 유튜브에서 현재도 존속하고 있는 세계 도처의 원시 부족 취재 다큐들을 보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으로 민주사회주의를 공부하는 도중이라 이 원시 부족들의 원시 공동체 생활 방식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한편으로는 이들 원시공동체 삶에서 21세기 민주사회주의는 어떤 영감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오리는 이들 부족과 같은 원시공동체 사회였을까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그래서 잠시 민주사회주의를 덮고 유러피안 도착 이전 마오리 사회는 어떤 사회였을지 사회주의적 시각에서 조명한 글을 찾던 차에 발견한 것이 아래 에세이다.
이 에세이는 ‘넓은 의미에서 공산주의자(a communist at large)’라고 자신을 소개한 뉴질랜드 전직 노동자 작가 James Robb의 블로그에 2014년부터 총 4회에 걸쳐 연재된 글이다. 원저자는 Terry Coggan인데 오랜 기간 공산주의 운동을 한 인물이란 것 외에는 다른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한때 우린 공산주의자였다 (Once Were Communists) - 1편
By Terry Coggan
1970년대, 마오리 인권운동가 시드 잭슨(Syd Jackson)은 유러피안은 마오리와 비교하면 “물질적으로는 우월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열등한” 문화를 가지고 뉴질랜드에 도착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비록 우월성에 관한 기준은 불명확하지만, 난 그의 물질적 정신적 문화에 대한 언급이 경제적 토대와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와 각 사회 고유의 사회의식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맑스도 엥겔스도 잭슨에 동의했을 것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재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 같은 이론가들이 그들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통적 마오리 사회에서 맑스와 엥겔스가 원시공산제(Primitive communism)라고 불렀던 사회의 증거를 찾으려 했지만, 얼마나 많은 글이 막시스트 관점에서 뉴질랜드 이전 역사(영국인이 들어 오기 이전 마오리 사회:역자 주)에 대해 쓰였는지 모르겠다. 이 글은 비록 포괄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전 마오리 사회를 원시공산제, 그 본질, 파괴 그리고 유산에 초점을 맞추어 조명할 것이다.
노동자 운동은 최초의 공산주의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현대 공산주의 창시자들은 생각했다. 이들이 이 최초 사회를 원시라고 표현한 것은 그것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며 이 원시공산제를 미래 공산주의 사회와 연관시켰다. 미래 공산주의 사회는 초기 단계의 존경할 만한 요소들을 포함하는 것은 물론, 노동생산성의 질적 향상에 기반을 두었다는 의미에서 “우월한” 사회 유형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원시공산제 사회 그리고 고대 노예 경제와 중세 농노 사회의 특징을 명확히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오늘날 왜 자본주의 사회가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역사적 지렛대를 제공하는지, 미래 사회주의 경제 세계와 원시 공산제 집단 간 근본적 차이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라고 썼다.
미국 막시스트 George Novack을 따르면, 미국 자본주의 발전에 필수불가결했던 공동소유 땅에 기반을 둔 인디언 부족들의 원시공산제의 파괴는 1차 미국 혁명으로 절정에 달했던 식민지 백인과 모국 백인 간의 충돌보다 더 극적 사회적 격변이었다. 뉴질랜드 식민통치자들은 모국 영국과 싸울 필요는 없었지만, 미국 식민통치자들이 인디언에게 했던 것과 같은 전쟁은 할 필요가 있었다. 19세기 초, 뉴질랜드로 알려진 땅은 공산주의 사회였다. 계급도, 국가도, 상품 생산도 화폐도 없었다.
땅의 유일한 주인이자 거주자였던 마오리에게 땅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주장한다는 생각은 기이하게 들렸을 것이다. 그들은 사냥, 낚시, 채집, 경작, 건축 등 주요 경제활동을 집단으로 수행했다. 세기가 끝날 무렵, 그들의 땅은 구레나룻을 한 백인 지배 계급 수중으로 떨어졌으며 사유재산에 기반을 둔 사회적 관계가 지배하는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 변했다. 조상의 설화가 지배했던 사회는 이제 가치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로 변모했다. 한 생산 양식이 다른 생산 양식을 대체하는 혁명이 일어났으며, 항상 그렇듯 이 과정은 격렬한 투쟁을 동반했다.
첫 번째 공산주의
모든 인류는 공산주의 유산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의 발견 중요성을 지적하면서 룩셈부르크는 “19세기 중반부터 1870년대에 걸쳐, 물질적 부는 사유재산과 그 존재가 영원할 것이라는 오랜 생각을 무너뜨렸다”라고 썼다. 농경 공산주의(agrarian communism)가 게르만 민족, 슬라브족, 인도인, 아랍-카빌족, 페루 잉카족 그리그 그 외 세계 모든 다른 지역의 더 많은 “특정” 그룹 사람들의 특성으로 발견됨에 따라, 마을 공산주의(village communism)가 특정 인종 혹은 특정 민족 혹은 세계 특정 지역의 “특성(peculiarity)”이 아니라, 문화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보이는 인간 사회의 일반적이고 전형적 형식이라는 결론은 불가피했다. 이에 대한 부르주아 학자들의 첫 반응은 완강한 저항이었다. 19세기 전반 유럽 전역에서 유행했던 Smith와 Ricardo의 영국 학파는 땅에 대한 공동재산 가능성을 단순히 부정했다.
이와 반대로 맑스와 엥겔스는 특히 선구적 미국 인류학자 루이스 모건(Lewis Henry Morgan)의 연구를 포함해서 이 새로운 지식을 역사에 대한 그들의 유물론적이고 진화론적 관점과 공산주의 미래를 확인해 주는 것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공식적 부르주아 학계의 반응”은 더 격화되면서, 19세기 말부터는 사회과학 전 범위에 걸쳐 커지는 막시즘의 영향력의 대항에 집중했다. Raymond Firth도 그 대항 세력 중 일부였다. 그의 저서 ‘Primitive Economics of the New Zealand Maori’(뉴질랜드 마오리의 원시 경제학)은 현재도 재인쇄될 정도로 뉴질랜드 이전 역사에 대해 가장 영향력 있는 책으로 남아 있으며, 와이탕이 재판소의 보고서에도 인용되었다. 그는 러시아 혁명이 국제 부르주아 계급을 공포로 몰아넣은 지 불과 10년 뒤인 1920년 말에 이 책을 썼는데, 이후 부르주아 사상가들로 하여금 더욱 절실하게 공산주의 사상을 부정하게 하였다.
그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그가 유러피안 이전 마오리 사회의 공산주의적(communist) 본질을 애매하게 하려고 일부러 간략하게 묘사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는 “명확한 정의 시도 없이 ”공산주의(communism)”라는 용어가 마오리 제도를 논할 때마다 막연하고 불필요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이 이제 충분히 입증되었다’라고 썼다. 그 자신의 정의는 희화적이다. 그는 매우 잘못되게 “적절하게 이해된 공산주의는 광범위한 사적 그리고 개인적 권리 시스템과 양립할 수 없다”면서 무기, 도구, 의류 그리고 다른 일반 물품에 대한 개인 소유와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권을 동일시했다.
Firth는 또 마오리들의 선물 교환(gift exchange)에 있어 호혜주의(reciprocity) 역시 공산주의가 아니었다는 증빙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는 대가로 아무것도 기여할 필요 없는 “재화의 완벽한 공동체(an absolute community of goods)”로 공산주의를 이해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부족장에게 “기업가(entrepreneur)” 역할을 부여하며, 부족장이, 만약 이 용어가 사용될 수 있다면, “공공사업(public works)”의 책임을 떠맡으며 일종의 자본가처럼 행동했다"라고 주장했다. 핵심 토지 관련 질문에 대해 그는, whanau(가족)가 특정 경작지 사용권을 부여받을 수도 혹은 개인이 새 덫을 놓거나 뱀장어 덫을 놓을 장소에 대해 독점적 접근권을 주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땅 사용에 대한 마오리 시스템에 대해 “공동체적(communal)” 혹은 “공산주의적(communistic)”이라고 단순히 묘사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라고 주장한다.
19세기 뉴질랜드 신흥 지배계급은 이 문제에 대해 더 강경했다. 그들의 날카로운 계급 본능에 따라 이들은 그들 중 한 명인 C.W. Richmond가 명명한 마오리의 “끔찍한 공산주의(the beastly communism)”를 명확히 인식했다. 19세기 뉴질랜드 토지 전쟁의 베르사유 조약(1차 대전 후 패전국 독일이 서명한 조약으로 모든 식민지를 다른 제국에 빼앗김: 역자 주)이라고 할 수 있는 원주민 토지법(Native Lands Act of 1865)의 설계자 Henry Sewell은 1870년 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원주민 토지법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원주민 소유인 북섬 땅의 대부분을 식민 통치 영역 안에 두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마오리 모든 제도를 관통하고, 마오리 사회시스템이 기반을 두고 있으며, 마오리 인종을 우리의 사회 정치 시스템에 융합시키려는 모든 시도의 걸림돌로 자리 잡고 있는 공산주의의 원칙인, 가능하다면 파괴하고 싶은, 부족의 해체(detribalization)입니다. 토지에 대한 소유권의 개별화를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동일한 개인소유권을 그들에게 부여함으로써, 마오리들이 그들 안에 있는 공산주의적 성격을 상실하고 그들의 사회적 위치가 우리 시스템 안에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정치경제학 입문’에서 룩셈부르크는 토착민을 상대로 한 식민 세력의 정복 전쟁과 그들 모국 노동자 운동을 상대로 한 그들의 계급 전쟁 간 연관성을 도출했다:
“우리가 본 것처럼 식민 정책은 부르주아 세계와 원시 공산주의 세계 간 물질적 이해관계의 충돌을 수반했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유럽에서 더욱 강력해진 자본주의 체제가 시작하고 1848년 2월 혁명이 휩쓸고 지나간 후 이 충돌은 더 첨예해졌다. 동시에, 정확히는 2월 혁명 후, 부르주아 사회 진영 내의 새로운 적인 혁명적 노동자 운동이 더욱 큰 역할을 했다. 1848년 6월 이후, 파리에서 “붉은 망령”은 대중 무대에서 다시는 사라지지 않았고, 1871년, 프랑스와 국제 부르주아에 대한 분노는 파리코뮌 투쟁이란 눈 부신 빛으로 다시 등장했다. 과학 연구의 최근 발견으로서의 원시공산제는 그 위험한 얼굴을 드러냈다. 명백히 자신의 계급 이해에 영향을 받는 부르주아는 이익에 굶주려 “유럽화”를 추진하는 식민 세력에 대한 원주민의 완강한 저항과 자본주의 모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새로운 혁명적 충동 간 애매한 연관성을 감지했다. 프랑스 의회가 1873년, 사유재산의 강제 의무적 도입을 골자로 한 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알제리의 불행한 아랍인들 운명을 결정할 때, 파리 코뮌을 피로 진압한 이 정복자들은 아랍의 고대 공동재산은 “사람들 마음속에 공산주의 성향을 지지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반드시 파괴되어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주장했다.”
유럽인 이전 마오리 사회는 단일 성격을 가진 사회가 아니었다: 마오리가 최초 정착했던 800년 전부터 1769년 유러피안이 발을 내딛기까지 변화들이 있었다; 지역별로는 그들의 음식 수요 절반을 경작을 통해 생산했던 공동체부터 채텀 제도(Chatham Islands)의 모리오리(Moriori) (모리오리족이 마오리족 이전부터 뉴질랜드에 거주했던 부족이라는 일부 통념이 있으나 사실과 다르며, 이들은 1500년경 뉴질랜드 본토의 마오리 일부가 채텀 제도로 건너와 수 세기 동안 살면서 언어도 다른 부족으로 진화했다는 것이 학계 정설이다:역자 주)처럼 사냥과 채집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부족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가 말했던 원시공산제를 뛰어넘는 사회로 진화한 적은 시공을 초월해서 없었다. 때때로 마오리 사회는 계급으로 나뉘었다고 기술된다: rangatira (chiefs:족장)와 tutua (commoners:평민), 혹은 rangatira(추장), tutua(평민) 그리고 taurekareka (slaves:노예). 그러나 이런 구분은 지위(rank)와 계급(class)의 개념을 혼동한 것이다. 계급 구분은 땅을 포함한 생산 수단에 대한 소유권의 차별화에 기본적으로 기반을 둔다. 전통적 마오리 사회에는 그런 차별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근본적 사실은 당시 마오리의 기술 수준 - 금속 도구가 없었다 - 과 그들이 직면한 환경 조건 - 고향 폴리네시아에서 가져온 작물이 잘 자랄 수 없는 - 때문에 노동 분업의 체계적 전문화와 계급사회의 발전을 가져올 만큼 충분하고 안정적인 경제적 잉여가 창출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일부 학자들에 의해 마오리의 가장 중대한 기술 발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세련된 식품 저장기술의 개발도 부족원들을 다음 수확기까지 연명시킬 정도였다. 족장을 포함해서 모두가 일해야 했다. “마오리 족장들은 물질적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더 많았지만, 족장의 고정재산은 일반 부족원들보다 많지 않았다. 족장이 접근한 자원은 축적되자마자 족장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재분배되었기 때문에, 족장이 지배계급으로 고착화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라고 한 학자는 말한다.
전쟁으로 포로가 된 사람은 “노예(slaves)”로 일하게 되었지만, 그들의 노동력이 자신을 건사할 정도 이상의 생산물을 생산할 수는 없었던 경제 환경이었기 때문에, 세계 다른 지역 다른 시기에 등장했던 것처럼 원시공동체로부터 노예제로 넘어갈 수 없었다.
전통적 마오리 사회는 하와이, 사모아, 통가 또는 타히티 같은 다른 태평양 제도의 폴리네시안 사회와 대조되는데, 이들 사회는 더 많은 인구와 경제적 잉여가 가능했다. Patrick Kirch를 따르면, 하와이는 공산제 사회 중 가장 넓은 균열이 생긴 곳으로 “추장 계급은 자신들을 신의 후손으로 간주하는” 단계까지 도달했으며, 내부적으로 7~8등급으로 구분되는 사회로서 추장 계급은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근친결혼을 했다; 사찰과 관개 공사를 위해 대규모 노동이 동원되었으며; 최고위 추장의 가족과 그 일행을 위해 일용할 음식이 바쳐졌으며; 깃털 망토와 같은 지위 표식과 정교한 그릇들이 세공되었으며; 평민들은 정기적으로 공물을 바치면서 땅을 경작할 권리만 있었지 소유할 수 없었다.
'뉴질랜드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오리의 공동체 정신은 21세기 어떻게 부활할까?' - 식민화 이전 마오리 사회를 생각하다 (3/4 & 4/4) (0) | 2021.09.09 |
---|---|
'마오리 사회는 모권사회였을까?' - 식민화 이전 마오리 사회를 생각하다 (2/4) (0) | 2021.09.04 |
2년 만에 우리를 다시 찾아온 'They are Us' (0) | 2021.06.24 |
다양성을 반영하는역사교육을 기대하며 - 역사교육 시리즈(下) (0) | 2021.05.27 |
역사적인 결정, 초중고 뉴질랜드 역사교육 의무화 - 역사교육 시리즈 (上) (0) | 2021.05.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