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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머리말
이번 시리즈 3편과 4편은 한 포스트에 같이 담는다. 각 편의 분량이 길지 않은 탓과 더불어 이어지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한때 우린 공산주의자였다 (Once Were Communists) - 3편
By Terry Coggan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마오리 원시공산제를 찾아오다
“특정 발전 단계에서 사회의 물질 생산력은 기존 생산관계와 충돌하게 된다. 따라서 생산력의 발전 형태에서 이 생산관계는 속박으로 변한다"라는 맑스의 역사적 유물론 ‘지침(guiding principle)”이다. 이 지침은 오늘날 사회주의 혁명의 정당성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 사회적 노동과 현대 기술의 생산 잠재력을 고려했을 때, 문화의 보편적 진보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인간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안정적 물질적 삶이 보장되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존속 때문이다. 한편, 이 원칙은 역사를 통틀어 적용되어, 왜 원시공산제가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생산력의 발전은 경제적 잉여를 낳았지만, 모두가 아닌 일부만 풍요롭게 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생산력이 확장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풍요로운 일부가 공공재산의 증가 부분을 그들의 사유재산으로 전환시키며 그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게오르기 플레하노프(Plekhanov)는 이렇게 표현했다:

“동산과 부동산에 대한 사회적 소유권은 원시적 생산 과정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기 때문에 등장한다. 사회적 소유권은 원시 사회의 존재를 유지하고, 생산력의 추가 발전을 촉진하기에 사람들은 사회적 소유권을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재산 관계와 내부 생산력 덕분에, 개인의 노력을 적용시킬 수 있는 더 넓은 분야가 열릴 정도로 생산력이 발전했다. 이제 사회적 재산은 어떤 경우, 사회에 해가 되고 생산력의 추가 발전을 방해하므로 개인 전유( private appropriation)에 자리를 양보한다.”
선사시대 세계 도처에서 수천 년에 걸쳐, 원시공산제에서 벗어나 개인 전유에 기반을 둔 다른 새로운 생산 양식에 도달한 다양한 경로들이 있었다. 주 경로는 노예제, 아시아식 양식 그리고 페루와 하와이에서 등장한 것과 같은 다른 속류(tributary) 양식들이다. 세계 일부 지역에서 이들 새로운 양식은 그 자체도 대체되었다. 처음으로 광범위하게 연구된 서유럽의 경우, 고대 노예 문명은 봉건제로 대체되었으며, 이후 근대 자본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처럼 ‘폭넓은 개략(broad outlines)’을 파악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맑스의 말대로 실제 역사적 과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도 있다. 만약 경제적으로 더 발전한 사회가 여전히 발전 초기 단계의 사회와 조우할 경우, 불균등한 복합 발전 법칙이 작용하면서 다양한 혼성 형태를 생성한다.

이것은 확실히 1769년 이후, 뉴질랜드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모든 변화의 밑바탕에는 생산력의 폭발적 성장이 있었다. 18세기 말, 뉴질랜드 조건에 적합한 감자와 돼지가 금속 도구와 함께 도입되었을 때, 많은 역사가가 농업 “혁명”이라고 불렀던 것이 발생했다. 이 농업혁명의 결과물과 아마(flax)와 같은 다른 품목들이 방문하는 배와 교환될 기회가 열렸다. 1840년 이후, 최초로 도착한 유럽 정착민들은 마오리가 생산한 식품- 곡물, 특히 밀, 과일 그리고 야채 포함 -에 의존해 생존했다. 마오리 농업은 1840년대와 1850년대에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시대로 접어들면서 꽃을 피웠다.
마오리 사회, 노예제의 등장과 쇠퇴
마오리 사회의 전통적 생산관계는 이 새로운 생산력을 가두어두기 위해 애썼다. 자본주의가 문을 밀고 들어오려는 상황에서 역사는 생산양식 건설에서 실험을 반복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마오리 사회도 여러 경로 중 하나를 따라가려고 시도를 했는데, 그 첫 번째는 노예제도였다. 엥겔스는 노예제의 기원을 이렇게 설명했다:
“축산업, 농업, 가정 수공업 등, 모든 부문에서 생산의 증가는 인간의 노동력 유지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생산의 증가는 동시에 모든 세대 구성원 혹은 가정 공동체 혹은 독신 가족 구성원에게 매일 쏟아지는 노동의 양을 늘렸다. 보다 많은 노동력을 끌어모으는 것이 필요해졌는데 이 노동력은 전쟁에 의해 제공되었다; 포로는 노예가 되었다. 주어진 역사적 조건에서, 노동 생산성(부)의 증대 그리고 생산 영역을 확대함으로써, 노동의 첫 거대한 사회적 분업은 필연적으로 노예제를 수반했다. … 이전 단계에서 산발적이고 초기 단계였던 노예제는 이제 사회 시스템의 필수 부분이 되었다.”

노동력 수요의 급격한 증가에 부응하기 위해 마오리 경제의 노예제는 “머스킷 전쟁(musket wars)’(19세기 초 마오리가 서양 총기, 머스킷을 구입하면서 부족 간 총기를 이용한 대량 학살 전쟁으로 이 기간 2만~4만 명의 마오리가 죽었다:역자 주) 기간 짧지만 급격한 팽창을 겪었다. 그러나 이 노예들은 이제는 폐쇄된 시스템에서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시대 미국 남부의 목화 농장과 같이 무역이나 판매를 위한 상품을 생산하기 위함이었다.
한 역사학자의 말을 따르면, “농업 생산물 증가의 동기를 제공했던 대외 무역의 기회는 1810년대와 1830년대의 전례 없었던 폭력 사태(머스킷 전쟁:역자 주)의 주요 원인이 되었을 것이고, 특히 노예 소유를 늘리려는 북부 족장들의 욕구를 자극했을 것이다. 그래서, Polack(1830년대 Bays of Island에 살았던 유럽 상인)은 돼지 사육, 씨앗 심기, 목재 베기 그리고 아마 청소 등으로 그 유용성이 검증되면서, 족장이 죽었을 때 같이 노예들을 희생시키는 관습은 멈추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Ngati Toa의 전사 족장인 Te Rauparaha는 북섬 남부 지역과 남섬에서의 전쟁을 통해 한때 최소 2천 명의 노예를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팽창하는 자본주의의 “자유로운(free)” 노동에 비해 노예는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임이 드러나면서 장기적인 미래가 없었고, 이를 인정한 영국 통치자들은 1833년 영제국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마오리 경제에서 노예제의 쇠퇴는 그 팽창만큼이나 빨랐는데, 심지어 폐지라는 법적 장벽에 부딪히기 전부터 그랬다.
마오리 사회의 농업 공동체 실험
우리는 19세기 마오리 경제에서 이전에 다른 곳에서 느껴졌던 또 다른 충동, 즉 일부 개인들이 스스로 농사짓고자 하는 욕구를 감지할 수 있었다. 원시공산제에서 새로운 생산방식이 등장했을 때, 이 생산방식은 기존 생산방식과 공존하면서 어떤 경우에는 통합되며 기존 생산방식을 뒷받침하는 형식을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기존 생산 방식 역시, 공동재산과 생산의 균등 분배에 기반을 둔 마오리 사회와 같은 친족 기반 그룹으로부터, 혈연만으로 묶이지 않은 시골 정착촌에 이르기까지 내부 분화와 변화의 대상이 되었다. 이 시골 정착촌에서는 숲, 목초지 그리고 다른 공유지는 여전히 공동 재산으로 남아있었지만, 경작지와 그 생산물에 대해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적 소유권 주장이 이루어졌다. 맑스와 엥겔스는 아시안 마을, 게르만 마르크(Mark)(중세 독일의 촌락 공동체: 역자 주), 페루 마르카 (Marca(Ayllu)) 그리고 러시아 미르(Mir or Obshchina) 등 진화의 다양한 진화 단계에서 발견되는 “농업공동체(agricultural communities)”의 특징들을 규명하면서, 이들이 최소 근대 자본주의 등장 때까지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이원적 특성(dualism)”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들 사회는 땅의 공동 소유라는 “견고한 기반(solid foundation)”위에, 개별 가구의 통제하에 구획 별 농사를 가능하게 하는 “개인 영역(a scope of individuality)”을 조합했다.

위에서 인용한 플레하노프의 전반적 요점을 반복하고, 이 요점을 오래된 공산주의 농업 공동체의 내부 변화와 관련시키면서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쌌다:
“철저하게 조직된 경제의 기반으로서 생산수단에 대한 공산주의적 소유는 가장 생산적인 사회적 노동 과정과 많은 시대에 걸친 연속성과 발전에 대한 최상의 물질적 보증을 제공했다. 그럼에도, 노동 생산성의 진전은 느리기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필연적으로 공산주의적 조직과 충돌하게 되었다. 쟁기를 사용하여 더 높은 형태의 농업으로 결정적 진보가 이루어지고, 그 공동체가 이를 기반으로 견고한 형태를 일정 기간 유지하다가 다음 단계의 생산기술 발전으로 더 집약적 토지 경작을 해야 했다. 이 집약적 토지 경작은 보다 집중적 소규모 소유와 개별 노동자와 토지 간 더 강력하고 긴밀한 관계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었다. 한 농민 가족이 같은 토지를 더 오래 사용하는 것은 집약적 토지 경작의 전제 조건이 되었다…”
19세기 초의 마오리 “농업 혁명”에서도 이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한 예는 한 현대 관찰자에 의해 “영국 마을(an English village)”로 비유된 Rangiaowhia (Waikato에 있으며 Te Awamutu 근처)이다. 1850년에 이 마을에는 1,320에이커의 곡물 경작지가 있었으며 오클랜드 시장에 100톤의 밀가루를 팔았다. 1851년, 이 마을의 일부 마오리는 경작지를 개별 구역으로 나누자고 제안했었다. 남섬의 한 마오리 공동체는 “모두를 평등하게 만드는 이 새로운 관습”에 따라 개별적 경작지 사용권과 생산을 실험했다고 말했다.
마오리 경제의 자본주의로의 편입 시작
역사가 Paul Monin은 The New Oxford History of New Zealand에 다음과 같이 썼다:
“... 마오리와 유러피안 접촉 초기에 마오리는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그들의 자본주의 이전 생산/교환 양식을 기반으로, 잉여 식량을 생산하여 이를 유럽인들에게 판매할 수 있었다. 이는 마오리족의 토착적 가치와 제도가 시장 경제로의 참여 요구와 병립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겉모습을 현실로 착각하는 것이며, 마오리 공산주의와 정착민 자본주의가 본질에서 양립할 수 없었던 19세기 뉴질랜드 역사적 상황에 대한 초점을 흐리게 한다. 유럽피안 이전 마오리족의 자연경제에서는 사용 가치만이 생산되었고, 노동은 미래 공산주의 사회에서와 같이 직접적으로 사회적이었다. 그러나 “시장 경제에 참여하는 것”은 그 후속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마오리 생산자들이 자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장 경제가 작동하려면, 사적 재산권과 이윤 동기를 위한 간섭 받지 않는 통치가 필요한데, 이 두 개념 모두 마오리 공산주의와 적대적이다. 또한, 상품 생산, 교환 가치, 화폐 사용 그리고 마오리와 유러피안 간 교역이 확대되면서 물물교환을 대체하기 시작했던 교환 가치의 독립적 존재를 요구한다. 마오리가 이 길을 따라간 것은 사회적 관계가 “사물 간의 관계라는 기이한(fantastic) 관계”로 구성된 자본주의의 상품 페티시즘 세계로 가는 미끄러운 경사로의 첫 스텝이었다.
‘아테네 사람들 사이의 문명의 즐거운 여명’에 대해 언급하면서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 … 화폐 시스템의 발전은 독성 질산을 부은 것처럼 자연 경제에 기반을 둔 농촌 공동체의 전통적 삶에 침투했다. 부족 제도는 화폐 시스템과 결코 양립할 수 없다.”
엥겔스가 지적한 것처럼 화폐 시스템 실체 중 하나는 채무자로부터 채권자를 보호하는 국가법의 지지를 받아, 땅 소유자로부터 땅을 빼앗으려는 지렛대로 부채(debt)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식민 자본가나 식민 정부에 대한 부채 때문에 많은 마오리가 유러피안 접촉 초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그들 땅을 팔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악명 높은 사실이다.
한때 우린 공산주의자였다 (Once Were Communists) - 4편
변칙적 혼합경제의 시기
이전 글에서 나는 마오리족 공동 생산 시스템은 그 시스템의 치명적 훼손 없이는 시장을 위한 생산으로 재정립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이 두 적대적 시스템이 공존하는 과도기가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19세기 전반, 뉴질랜드 경제는 사실 새 자본주의 교환 관계가 공동 생산 시스템과 융합된 혼합 형태였다. 이러한 본질에서 모순적 형태는 유럽 자본주의가 전통사회와 접촉한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되는데, 이런 혼합 형태는 자본주의의 그 사회 침투 정도에 따라 그 생존 기간이 달랐다. 전통적 마오리 사회처럼 사회적 관계가 강하게 뿌리내린 지역에서는 그들의 밑바닥이 움직이자마자 무너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변칙적 상황이 일정 기간 지속하였다. 교환가치와 생산가치를 동시에 생산하던 토지는 여전히 공동으로 소유되고 사용되었다. 제분소와 무역선과 같은 새로운 생산수단은 집단으로 소유되었다. 증가한 부는 종종 선교사들의 개신교 윤리와 달리 전통적 오락, 잔치, 선물 형식으로 분배되었다. 임금노동이라는 새로운 현상은 처음에는 비록 과도기적 형태이긴 했지만, 일부 마오리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단으로 유러피안의 농장이나 공공사업에서 일하면서 등장했다. 예를 들어, 1846년부터 1849년까지 웰링턴-포리루아(Porirua) 도로 건설에 참여한 350명의 Ngati Ruakawa 부족원들은 그들의 수입을 부족을 위한 도구와 항해용 선박을 사기 위해 집단적으로 사용했다. 총독 조지 그레이(George Grey)는 그런 공사에 마오리족을 고용하는 것을 선호했는데, 이를 통해 그들에게 “유럽인의 노동 규율”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 포리루아 도로 건설 기간에 자본주의 노동관계로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설 작업은 그들 hapu(씨족)와 그 노동력을 감독하는 족장들로 시작하였으나, 여러 hapu가 섞인 그룹과 유러피안 감독으로 끝났다.
일부 마오리가 독자적으로 농사짓고자 하는 바람에서 암시된 것처럼, 족장들의 권위와 지도력에 대한 그러한 도전은 경제 변화에 의해 전통적 방식이 훼손되고 있다는 신호였다. Petrie는 “마오리의 tapu(신성불가침적 존재: 역자 주)에 대한 태도 변화를 이끌어낸 것을 자축하는 선교사들과 마오리 전통적 지도자들의 mana(권위)를 분쇄하려 했던 정부는 이 자연스러운 과정의 목격자들이었다"라고 정확하게 관찰하였다.

본격적 원시적 축적의 개시
그러나 이 ‘자연스러운 과정’은 1860년 이후 부자연스러운 충격으로 단축되었다. 1860년은 자본주의 시행의 전환점이 되었다. 마오리 경제의 발전은 어느 쪽을 향해가더라도 폭력적으로 탈선되었다. 정착민 식민지가 성립되려면, 북미, 호주, 남아프리카, 이스라엘 등 세계 다른 나라들처럼, 원주민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야 했다. 이 목표를 향한 진보가 1860년 이전에도 정부의 토지 매입으로 많이 이루어졌는데, 이후 전쟁, 몰수, 분쟁 해결 핵심 조항, 땅 소유권의 개인화를 위한 법 제정 혹은 한 역사가가 적절하게 표현한 “구매에 의한 박탈(dispossession by purchasing)”을 통해 가속화되었다.
맑스는 말했다: “원시적 축적의 역사에서 모든 혁명은 자본가 계급이 형성되는 과정을 촉발하는 획기적 사건이지만, 무엇보다도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갑자기 그리고 강제적으로 그들 생계 수단을 박탈당하면서 노동시장에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unattached)”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로 내던져지는 순간들이다. 농업 생산자, 즉 농부를 땅에서 분리하는 것이 이 모든 과정의 기본이다. 이 토지 박탈의 역사는, 각 국가에서 각각 다른 측면을 가진 채 다양한 단계를 거친다. 영국은 그중 고전적 형태이다.”
많은 역사가는 마오리 땅에 대한 몰수의 한 부분으로 뉴질랜드 식민 정착민들이 수행한 “tenurial revolution(보유 혁명)”의 전례를 영국에서 자본주의 등장에 반드시 선행해야 하는 공공 토지의 긴 수용의 과정에서 찾았다. 맑스는 자본론 1권에서 이 과정을 나름 길게 묘사했다. 내가 아는 한 맑스 혹은 엥겔스는 뉴질랜드의 토지 전쟁이나 그 이후 토지 법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쓴 적이 없지만, 그는 세계 곳곳에서 비슷하게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분개했다. 그는 인도에서 공동 토지 소유권을 억압하는 것은 “원주민을 전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퇴보시키는 영국의 파괴행위일 뿐이다”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이후 룩셈부르크처럼 알제리 토착 부족들이 소유한 땅의 공동 재산을 해체하기 위해 프랑스 국회에서 통과된 법을 비난했다. 맑스는 이것이 1871년 파리 노동자들이 설립한 코뮌을 억압했던 “치욕의 집합(assembly of shame)”였으며, 그 행동의 동기는 “땅을 훔치는 것” 외에도 아랍인들을 그들의 땅에 대한 자연스러운 결속으로부터 떼어내어, 씨족 연합의 마지막 힘을 분쇄함으로써 “반란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전히 활동적인 마오리의 반란에 직면하면서, 이것은 확실히 뉴질랜드 식민지 정착민 국가 지도자들이 마음속에서 고려하는 사항이었다. 1860년의 토지 전쟁에서 그들의 목표는 단지 땅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와이탕이 조약 체결 이후, 20년 동안 이 나라를 지배했던 이중권력(식민정부와 마오리 족장들:역자 주)의 상황을 벗어나 권력을 그들 편으로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1865년부터 1873년 사이에 마오리 토지 당 소유권자 수를 10명으로 제한하는 새로운 토지 명의 개별화 법이 시행되었다. 이것은 식민 통치자들이 국가 운영에 협력할 수 있는 마오리 귀족 집단을 키우기 위한 의도적 정책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이것은 인도 자민다르(zamindar)와 피지 족장들을 상대로 실행했던 영국 식민지 정책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마오리 사회에는 이 전략이 먹힐 만큼 현저한 계급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도는 포기되어야 했다. 자본주의 지배계급은 한 세기 후 와이탕이 조약 정착(와이탕이 조약에 근거, 마오리가 당한 역사적 부당한 대우와 피해를 보상하는 결정과 절차:역자 주) 덕분에, 자원 접근이 가능한 마오리 부르주아 계급이 출현하면서 이 전략을 실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마지막 몇십 년 동안 마오리 대부분은 시골 프롤레타리아가 되었고, 이들 생계는 그들에게 그나마 남아있는 땅에서 이루어진 농업, 사냥, 어업 등에 의해 유지되었기에 고용주들은 이들의 노동력을 헐값에 살 수 있었다. 공동소유권을 해체한 ‘tenurial revolution’은 영국 자본주의와 마오리 공동체의 가장 나쁜 점만을 가져왔다. 이 새로운 시스템은 Monin이 말하듯, “오직 매각을 통한 이익만이 가능하고, 소유자들이 노동과 자본을 투자해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형태의 개별적 토지 보유가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개인주의’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번창하는 마오리 자작농의 발전을 격려하는 것은 이 새로운 자본가 계급이 의도했던 바가 아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은 착취할 노동 계급이었을 뿐이다. 자본가 계급은 1870년대에 시작된 대규모 이민 계획을 통해 노동 계급의 상당 부분을 수입할 계획이었지만, 새롭게 프롤레타리아화된 마오리족이 뉴질랜드 자본주의 형성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과소평가되어 왔다.
마오리의 프롤레타리아화와 부분적 생계형 농업으로의 회귀는 마오리 공동체에 완고하게 지속하여 왔던 오랜 공동체 생활방식의 요소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Richmond, Sewell 그리고 McLean과 같은 동시대 식민 자본가들이 마오리의 경제적 기반을 공격한 후, 마오리 공산주의가 조속히 사라질 것을 희망했다면 그들을 실망했을 것이다. 20세기가 될 때까지 그들의 후계자들은 여전히 그들이 그 야수(마오리 공산주의:역자 주)를 죽였다고 확신하지 못했다. The Northern Advocate(북부 도시 황가레이 기반의 일간지: 역자 주)는 1917년 10월, “민주주의 한가운데에 존속이 허락된 공동 시스템은 간단히 말해 총체적 변칙이며, 정치 전반에 해를 끼치고 국가 발전을 위한 완전한 능력에 영구적 장애가 된다. 따라서 마오리로 하여금 그들에게 부과된 의무를 수행하게 하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마오리 공산주의의 전면적 폐지를 옹호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라고 훈시했다. 1934년, 원주민 위원회(Native Affairs Commission)의 판사 Smith는 Apirana Ngata (20세기 초 저명한 마오리 지도자이자 정치인:역자 주)의 토지 개발 계획에 다음과 같이 우려를 표명했다: ”... 개별적 농부들의 일을 훼손할 수 있으므로, 공동체 기반을 마오리에게 제공하는 데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원시 공산제의 유산
맑스와 엥겔스는 “만약 러시아 혁명이 서구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신호가 된다면, 그래서 이 둘이 서로 보완한다면, 현재의 러시아 공동 토지 소유권이 공산주의 발전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판단을 앞장서서 지지하는 일부 남미 혁명가들은 잔존하는 남미 원주민 농업공동체에서 비슷한 역할을 보았다. 그렇다면 마오리의 토지에 대한 공동소유권 전통이 뉴질랜드에서 “공산주의 발전의 출발점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간접적으로 이 전통은 오늘날 마오리 소유 경작지 대부분의 소유 형식인 신탁과 법인 형식으로 살아 있지만, 이 조직들은 맑스와 엥겔스가 러시아 미르(Mir)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전통적 공동소유권과 유기적 연속성은 없다. 이들 신탁과 법인은 19세기 마오리 공산주의 붕괴 이후, 토지 명의의 개별화로 야기된 경제 발전 장애물을 극복하려는 방편으로 다양한 단계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소개되어 왔다. 일부는 전통 방식을 보존하는 방법으로 이것들을 인식했다. 예를 들어, 1930년대 와이카토 마오리 의해 추진된 Apirana Ngata의 법인화 계획 도입에 대해 글을 쓴 마이클 킹(Michael King)은 “Ngata와 Te Puea를 포함해서 마오리들은 마오리 가치에 기초한 공동체적 삶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한 방법으로 이를 보았다"라고 기록했다.

협동조합과 공동 주식회사와 같은 다양한 형식의 집단 소유권처럼 신탁과 법인은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틀 내에서 사회적 생산과 사적 전유 간 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도 속에서 역사적으로 다소 무의식적으로 나타났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것들은 새로운 사회의 맹아가 오래된 자궁에서 자라는 모양이지만, 맑스가 협동 공장에서 말했듯이, “지배하는 시스템의 결함이 존속하는 한 그것들은 자연적으로 재생산되고 또 재생산되어야 한다.”
1987년, 뉴질랜드 계획 위원회 보고서(New Zealand Planning Council Report)가 지적했듯이, “법인, 신탁, 부족 신탁위원회 및 다른 형태의 집단 관리가 부족 거주지를 다시 공동체화하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공상적(utopian)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맑스와 엥겔스가 러시아 공동체의 미래 발전 과정에 대한 그들의 전망에 첨부한 조건이었다.
나와 함께 정치적 토론을 했던 한 마오리 노동자는 몇 번에 걸쳐 나에게 ”아시다시피, 마오리는 타고난 공산주의자들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한 가지 의미에서 틀렸다: 마오리족으로서 마오리는 그들이 타고난 기업가처럼 타고난 공산주의자는 아니다. 공산주의는 유전적 특성이 아니라 사회적 과정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이 마오리 노동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마오리 인구 상당수의 도시화 그리고 최근 수십 년에 걸친 마오리 사회의 계층 차별화를 포함해 지난 1세기 반에 걸친 주류 자본주의 경제로의 편입에도, 마오리 공동체에 살아남은 그런 공동체적 활동과 태도를 언급하고 있다.
엥겔스는 옛 마르크(Mark) 공동체의 전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북유럽 지역에서도 비슷한 유물이 남아있다고 지적하면서, “현대에 들어서도 휘두를 수 있는 무기를 억압받는 자들의 손에 남겨두었다”다고 말했다. “우리는 한때 공산주의자였다, 우리는 다시 될 수 있다"라는 의식은 모든 노동자가 현대 계급 투쟁에서 휘두를 수 있는 무기이다. 이러한 의식은 마오리 노동자들에 의해 더 쉽게 얻어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그들은 노동 계급의 다른 구성원보다 뉴질랜드 첫 번째 공산주의의 살아있는 세계와 덜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마오리족이 뉴질랜드와 국제 노동자들에게 남긴 뛰어난 유산은 토지 전쟁으로 알려진 자본주의의 폭력적 맹공에 맞서 싸운 것이다. 1989년 뉴질랜드 공산주의자 연맹(Communist League)의 결의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 세계 노동자와 농민들의 투쟁을 바라보면서 그들과 함께 공동의 대의명분을 만들고, 우리 앞에 펼쳐진 모든 국제 노동자 계급 투쟁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배우는 한편, 착취와 억압에 맞선 이 나라 노동자들의 첫 번째 투쟁으로 땅 약탈자에 대한 무장 마오리 저항을 되돌아보며 우리는 영감을 얻는다. 그들의 저항은 이 나라에서 현대 노동자 계급 발전의 시작을 알린다.” 토지 전쟁 이후, 마오리는 한 전선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다른 전선에서, 그들의 민족 자결권을 위해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오리 노동자들은 그들의 풍부한 투쟁 경험을 노동 운동에 가져왔고, 19세기 말 노동조합에 가입하기 시작한 이래로 계속 그렇게 해오고 있다.
마오리는 타고난 공산주의가 아닐 수 있지만, 프롤레타리아는 타고난 공산주의자이다. 그들은 계급 사회 폐지를 역사적 사명으로 하는 보편적 계급을 구성한다. 마오리 노동자들이 그들의 공산주의 유산을 되찾을 수 있는 곳은 자본주의 지배를 전복하려는 노동자 투쟁의 선봉에 있다.
역자 후기
최근에 본 유튜브 영상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호주 국영 티브이 방송국 ABC News의 탐사 보도 프로그램 중 하나인데, 바로 뉴질랜드 남섬 캔터베리 지역의 담수 생태계가 지역 낙농업 비즈니스로부터 배출되는 오염물질 때문에 심각히 훼손되고 있다는 취재 내용을 담고 있다.
Behind New Zealand's '100% Pure' Image lies a Dirty Truth | Foreign Correspondent
New Zealand’s clean, green image hides a dirty truth. Polluted by intensive dairy farming, its waterways are some of the most degraded in the world. Will the Ardern government clean it up or will the Maori step in? It’s a toxic brew of dirty water a
youtu.be
여기에 마오리 학자가 등장해서 자신의 관점 더 나아가 마오리의 시각을 전달하는데, 담수에 대한 마오리의 권리, rangatiratanga(자주권)를 와이탕이 조약에 근거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즉, 자신을 포함한 지역 마오리 부족이 거주하는 자연환경의 파괴를 현 정부와 낙농업 자본가들은 해결할 의지가 없으므로, 마오리의 자주권 행사를 통해 막겠다는 취지인 셈이다. 마오리는 부족 신화의 형태로 자연에 대해 범신론적 태도를 가지고 있기에, 이들에게 있어 환경 파괴는 부족 공동체 더 나아가 자연 공동체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1990년대 후반, 마오리가 해저(seabed) 소유권을 주장했을 때는 내막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너무 나가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가졌었는데, 이번 프로그램을 보면서는 ‘아, 어쩌면 마오리의 자주권이 이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도 있겠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충분한 자원의 부족이라는 환경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는 원시공산제를 유지했던 유러피안 이전 마오리 사회는, 시간을 가지고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생산관계의 자생적 변혁 - 가령 농업공동체 형식 - 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채,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으로 강제적으로 그리고 폭력적으로 편입되었다. 서구에서 자본주의의 등장은 일부는 부르주아라는 이름의 승자로 일부는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름의 패자를 동시에 역사 무대에 올렸는데, 식민지 뉴질랜드 자본주의의 원시적 축적 과정은 영국 백인 부르주아와 원주민 마오리 프롤레타리아/빈민이라는 양극화 형식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자원 쟁탈을 위해 각 부족 간 살육전을 벌이기도 했던 마오리이지만, 부족 내에서만큼은 콩 한 알도 나눠 먹는 공산주의 기풍이 살아있던 마오리 사회는 거의 와해하여 역사의 뒤편으로 완전히 넘어갈 뻔했다.
그러나 마오리 공동체 정신은 와이탕이 조약을 포함한 여러 요소 덕분에, 2021년 현재도 biculturalism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상징적으로 말해주듯이 뉴질랜드에 여전히 어떤 형식이 되었든지 간에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와이탕이 조약 정착의 결과, 적지 않은 - 물론 유러피안 이전 상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아졌지만 - 자원이 이들 마오리 부족에게 돌아갔다. 그 자원이 현재 마오리들에 의해 어떻게 활용되는지 또 어떻게 그 이익이 분배되는지에 대해 대략적 이해는 있지만, 과연 그 과정이 마오리 원시공산제에서 나타났던 공산주의적 형태인지는 확신이 없다. 오히려 저자의 표현대로 마오리 사회 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빈민 계급으로 자체 분화하였는지도 모른다. 공부가 필요한 대목이다.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모색하는 이 과정에서, 마오리의 자연환경까지 보듬어 안는 공동체 정신이 21세기 뉴질랜드에 긍정적으로 발휘되기를 기대해본다.
첨언: 마오리 사회와 역사에 대해 더 포괄적 이해를 원하는 분은 이전 포스트 ‘자주권, 통치권 그리고 헌법 - NZ 이해하기 시리즈 (2)’를 참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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