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뉴질랜드 이야기

'마오리 사회는 모권사회였을까?' - 식민화 이전 마오리 사회를 생각하다 (2/4)

김 무인 2021. 9. 4.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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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말

에세이 2편은 1편에서 제기된 ‘마오리 사회는 공산주의 사회였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의 마무리와 더불어, ‘마오리 사회는 모권사회였을까’라는 새로운 질문에 대한 답을 시도하는 글이다. 번역하면서 신경 쓰였던 부분은 ‘matriarchy’와 ‘matrilineality’의 구분이었다. 인류학적 기본 개념이 없는 결과인데, 한국어로 ‘모계 혈통 사회’와 ‘모권사회’ 혹은 ‘가모장제(家母長制)’로 번역되는 두 단어는 논리 전개 상 많은 부분 겹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다른 개념이다. 전자가 가문과 혈통을 가리키는 개념이라면 후자는 ‘권한’을 기준으로 한 개념이다. 따라서 남성 쪽에도 이 구분은 적용되어, 부계 혈통 사회(patrilineage)와 부권사회(patriarchy) 혹은 ‘가부장제’가 그것이다.

 


 

한때 우린 공산주의자였다 (Once Were Communists) - 2편

By Terry Coggan

우리가 루이스 모건 (Lewis Morgan)이 연구한 북미 이로쿼이 인디언(Iroquois Indians) 사회를 유러피안 식민화 이전 마오리 사회와 비슷한 발전 단계를 가진 사회로 간주한다면, 이로쿼이 부족의 “gen” 혹은 “clan”을 마오리 사회의 hapu(씨족)에 상응하는 친족(kinship) 모임으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엥겔스의 저서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The Origin of the Family, Private Property and the State)에서의 이로쿼이 부족에 대한 묘사에서 전통적 마오리 삶의 몇 요소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 광범위하고 복잡한 관리 시스템이 필요치 않다. 관련자들이 결정하고 대부분 경우 수백 년 된 관습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가난한 사람 혹은 궁핍한 사람이 있을 수 없다 - 공산주의적 가정과 씨족(gens)은 노인, 병자 그리고 전쟁 장애인들에게 해야 할 그들의 의무를 알고 있다. 모든 이는 자유롭고 평등하다 - 여성을 포함해서.”

 

이로쿼이 부족의 일상을 묘사한 삽화

이로쿼이 족장처럼 마오리 족장도 독재자가 아니었다. 엥겔스가 관찰했듯이, “문명국가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경찰도 부족사회의 모든 기관이 가진 것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권력” (authority)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명국가의 가장 강력한 왕자도, 정치가 혹은 지휘관도, 가장 겸손한 부족장에게 향한 강요되지 않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존경을 부러워할 것이다. 한쪽은 사회의 중심에 서 있고, 다른 한쪽은 사회 외부 혹은 상부에 있는 그 무언가를 대표하도록 강요받는다.” 엥겔스가 말하는 “부족 체제”(the gentile constitution)의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적 측면은 유럽피안들이 도착한 이후에도 마오리 사회에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오클랜드 최초 항만장이었던 David Rough는 1852년에 다음과 같이 평했다:” 참으로 뉴질랜드 사람들(마오리)(‘뉴질랜드 사람들(New Zealanders)’은 이전에는 백인이 원주민 마오리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역자 주)은 완전한 공화당원(Republicans)이고 최고 족장들도 상당한 영향력은 가지고 있었지만, 직접적 권력은 거의 없다….”

 

David Rough

맑스는 “원시 공동체는 셈족, 그리스인, 로마인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생명력(vitality)을 가졌었다”라고 언급했다. “오랜 부족 질서(the old gentile order)”에 대해 큰 존경심을 가진 채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런 사회에서 생성되는 인간 유형은 이로쿼이 인디언처럼 접촉한 백인들로부터 이들의 개인적 존엄성, 정직, 품위, 강건 그리고 용기로 말미암아 감탄의 대상이 되었다.” 초기 마오리와의 접촉을 다룬 역사적 문헌은 제임스 쿡을 비롯한 유럽인들의 유사한 감탄 표현을 담고 있다. 유러피안 정착민들은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에서 기인한 다른 종류의 도덕성을 가지고 식민지에 도착했다. 엥겔스가 지적한 것처럼, “저급한 이해관계 - 기초적 탐욕, 더러운 음탕함, 추잡한 탐욕, 공동 소유물에 대한 이기적 약탈 -는 새로운 형태의 문명화 계급 사회로 인도한다.” 이것이 시드 잭슨(Syd Jackson)이 말한 “열등한 정신문화”(inferior spiritual culture)다.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는 이 초기 공산주의를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것이 선사시대 인류의 제한적 경제적 상황에 따른 단순한 필요라는 것을 알았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가용한 자원에서 자기 몫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굶주릴 수 있는데, 이는 더 풍족한 사회에서는 일어날 필요가 없는 상황이다. 룩셈부르크는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했다: “원시공산제의 근간을 이룬 것은 추상적 평등과 자유 원칙에 대한 헌신이 아니라, 낮은 단계 인간 문명의 냉혹한 필요성과 외부 자연 앞에서 무력한 인간 현실 때문에, 이들은 더 큰 동맹에서 긴밀하게 뭉쳐야 했고 생존을 위해 체계적이고 집단으로 노동을 해야만 했다.”

이 지적은 마오리 민족운동을 반대하는 우파에 의해 전통적 마오리 사회를 깎아내리기 위해 상투적으로 동원된다. 그들은 특히 19세기 초, 마오리족이 유럽 무기를 획득한 후 통제 불능 상태로 확대된 “고질적(endemic)” 부족 간 전쟁을 지적한다. 한 저자를 따르면, “마오리를 마오리 자신으로부터 구한” 것은 영국에 대한 주권 이양이었다. 이런 관점은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와 재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가 제기한 주장 - 모든 전통 사회의 고질적 폭력을 종식한 것은 특히 근대 “민주적” 형식 국가의 등장이다 - 을 반영한 것이다. 이들 전문가는 1,2차 세계대전의 제국주의적 대량 학살을 포함한 근현대 국가 간 전쟁은 인구 대비 사망률을 고려했을 때, 부족사회의 끊임없는 투쟁과 비교, 수용 가능한 수준이라고 주장하면서 질적 차이를 양적 차이로 전환시켜 버린다.

 

George Forster

1733년 제임스 쿡의 두 번째 항해에 동반한 박물학자 George Forster 역시 이런 선입견을 품었을지 모른다. 동시대 일부 유러피안들이 그린 야만적이고 호전적인 마오리 그림을 되돌아보면서, 그는 저널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식인종이 되기에는 너무 문명화되었지만, 우리는 왕자나 그 정부(情婦)의 야망을 위해 일으킨 전쟁에서 수천 명의 목을 베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야만적이거나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현대 역사가도 같은 균형 감각을 유지한다: ”최악이라도 마오리 전쟁은 20세기 유럽과 아프리카를 포함하여 일부 국가, 대륙 및 시대에서 볼 수 있는 전면전, 대량 학살 또는 초토화 전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전통적 공산주의적 마오리 사회에 전쟁이 존재했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래 공산주의 사회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마찬가지로 물질적 이유 때문이다: 유러피안 이전 마오리 부족 간 전쟁의 궁극적 원인은 희소 경제적 자원을 놓고 벌인 경쟁이었다. 맑스와 엥겔스가 말했듯이, “... 생산력의 발전은 공산주의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현실적 전제이다. 왜냐하면, 생산력의 발전이 없다면 궁핍과 욕구(want)는 일반화될 것이고, 욕구와 더불어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투쟁은 재개될 것이며, 이에 따라 모든 오래된 더러운 관행이 필수적으로 복구될 것이다.”

마오리 모권사회(母權制)? (A Maori matriarchy?)

위에서 인용한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The Origin of the Family, Private Property and State)에서 엥겔스는 전통적인 미국 이로쿼이 인디언 사회의 여성들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라고 기술했다. 전통적 마오리 사회의 여성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몇 가지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The Origin of the Family, Private Property and State)

 

아마도 출판 이후 130년 동안, 엥겔스의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논의된 부분은 여성과 가족의 역사에 대한 그의 설명일 것이다. 루이스 모건과 다른 학자들 앞에서, 엥겔스는 여성 억압의 기원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을 전개했다. 수천 년에 걸친 원시공산제 동안, 세계 도처 인간 사회의 압도적 다수는 모계 씨족(maternal clan) 이었다.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인간의 거주지가 처가 쪽(matrilocal)(자녀와 그들의 아버지가 여자의 씨족과 함께 살았다)이었으며, 모계 혈통(matrilineal)을 따랐다. 양육은 여성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집단적 책임이었다. 여성은 자유롭고 평등했으며, 사회적이고 생산적인 삶의 많은 부분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선사시대 어느 시점에서인가 “여성의 세계적-역사적 패배”가 일어났다. 엥겔스는 이 패배가 오랜 원시 공산주의 질서 안에서 사유재산과 사회 계급의 등장과 어떻게 얽혔는지를 보여준다. 노동생산성의 비약적 발전으로 얼마간의 영구적인 경제적 잉여가 창출되면서 잉여를 생산한 자와 잉여를 통제하는 자 간 계급 분열이 시작되었다. 오늘날 신석기 혁명(Neolithic Revolution)이라고 불리는 이 과정의 중심에는 새로운 형식의 이동 가능한 부 (엥겔스는 특히 소를 지칭했다)를 창출한 농업과 목축업의 발전이 있었는데, 기존 노동분업 탓에 이 양도 가능한 재산이 “남성에게 떨어졌다(fell to the man).”

 

1864년 맑스 가족과 함께 한 엥겔스

“따라서”, 엥겔스는 이어서 말한다: “ 재산이 늘어나면서 한편으로 이 부는 남성에게 여성보다 더 중요한 지위를 부여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녀에게 유리한 전통적 상속 질서의 타파를 위해 강화된 지위를 활용하도록 남성에게 자극을 주었다. 그러나 모계 혈통제가 지배하는 한 이것은 불가능했다. 모권은 전복되어야 했고 전복되었다.” 여성의 활동 영역은 집안으로 줄어들었으며 가부장제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태곳적부터 가부장적(원문이 ‘patriarchal’이라 직역해서 옮겼는데 문맥상으로는 가모장적( matriarchal)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역자 주) 가족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거나, 생물학이 여성의 운명이 아니었다는 생각은 원시공산제 자체만큼이나 정치적 이유로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레이먼드 퍼스 (Raymond Firth)의 멘토인 브로니스와프 말리노프스키 (Bronisław Malinowski)는 1931년 한 라디오 방송에서 노골적으로 말했다:

“바코펜(J.J.Bachofen)을 필두로 한 무리의 인류학자는 모계 씨족이 원시적 가족제도였다고 주장해왔습니다… 내 생각에는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는 전적으로 잘못되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현재 상황에 적용되면 매우 위험해집니다. 현대의 혁명적 경향에 가장 파괴적 요소는 어버이 역할(parenthood)이 집단적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만약 우리가 개별 가족을 사회의 중추적 요소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면, 프랑스 혁명의 정치적 격변과 볼셰비키의 경제적 변화가 무색할 만큼 사회적 재앙에 직면해야 합니다. 따라서 집단적 엄마 역할(motherhood)이 실제 존재했던 제도인지, 인간의 본성과 사회 질서에 부합하는 제도인지에 대한 질문은 중요한 현실적 관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세기 대부분, 주류 인류학은 보편적 모계 중심(matrilineal) 인간관계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는 고대 모권사회(matriarchy) 개념을 거부했다. Evelyn Reed와 같이 모계성을 옹호한 작가들은 무시되었다. 심지어 저명한 막시스트 인류학자 모리스 고들리에(Maurice Godelier) 조차 ”우리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일반적 현상임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 형식과 정도는 사회마다 매우 다름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돌려쓴 바 있다. 그러나 유전적 증거를 포함한 축적된 혹은 새로운 증거와 함께 최근 몇 년, 변화의 조짐이 있어 왔다.

 

모리스 고들리에 (Maurice Godelier)(1934~present)

인류학자 크리스 나이트(Chris Knight)는 “나는 2005년 한 학술회의에서 엥겔스가 본질에서 옳았으며 우리는 초기 인류의 친족관계가 모계(matrilineal)였다는 강력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발표했는데, 기쁘고 놀랍게도 그 워크숍에 참여한 대부분 전문가 동료들은 동의하는 경향을 보였다"라고 말한다. 사라 블래퍼 허디(Sarah Blaffer Hrdy)는 자신의 저서 ‘어머니와 다른 사람들(Mothers and Others)’에서, 최근까지 “초기 인류가 처가 거주제(matrilocal) 환경에서 살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진화론자들에 의해 모권(Mother Right) 옹호 혹은 여신 숭배교(Goddess Cults)를 떠올리게 한다며, 인간 진화 과정에서의 모권사회(matriarchy) 단계 주장은 시대에 뒤처진 관점에 대한 이단적 회귀로 간주되었다”라고 쓰고 있다. 몇 구절에서 허디는 가부장제 사회로의 전환을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용어로 묘사하고 있다.

 

크리스 나이트(Chris Knight)(1942~present)

이미 본질은 파악했지만, 엥겔스는 이런 이행에 대한 그의 설명이 그 주제에 대한 최종판 설명이 아니라는 것을 가장 먼저 인정했을 것이다. 경제적 토대의 변화 그리고 친족 제도의 변화와 사회 젠더 관계의 변화가 꼭 맞아떨어질 필요는 없다. 이 이행 과정의 복잡하고 고르지 못한 성격을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는 상대적으로 낮은 단계의 경제적 발전과 계급 차별성을 가진 유러피안 이전 마오리와 같은 일부 전통사회에서의 부계 혈통(patrilineal) 체계의 출현이다. 마오리족의 혈통은 모건과 엥겔스가 연구한 이로쿼이족 혈통처럼 모계 혈통(matrilineal)으로 존속되지도, 또 부계 혈통으로 변하지도 않은, 두 계통을 모두 가진 것으로 분류된다; 여성이 되었든 남성이 되었든 초점이 되는 조상의 혈통을 따라갔다. 순수 모계 혈통 사회(matrilineality)로부터 멀어지려는 움직임은 후손이 아오테아로아에 도착하기 전부터 마오리족 조상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한 가설은 마오리를 포함한 모든 폴리네시안의 모태가 된 오스트로네시아족(Austronesian people)이 5000~6000년 전에 흩어져 나온 동아시아에서 그 과정의 시작을 찾는다. 동아시아는 신석기 혁명을 훨씬 이전에 겪었기 때문에, 오스트로네시아족은 계급사회와 부계 혈통 사회의 씨앗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최근 연구에 의해 제기된 또 다른 가능성은, 3000~4000년 전 비스마르크 군도를 중심으로 아시아에서 태평양으로 오랜 발전을 거듭해 온 오스트로네시아족의 하나인 Proto Oceanic Society가 여전히 모계 혈통(matrilineal) 그리고 처가 거주제(matrilocal) 사회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사모아, 통가, 타히티와 같이 인구가 많은 태평양 제도에서 경제적 잉여 그리고 신생 계급사회의 출현과 섞이면서 모계 혈통 사회의 붕괴를 다소 늦게 늦출 것이다. 아마 동아시아에서 온 씨앗들은 적당한 조건을 찾은 곳에서 싹을 틔웠을 것이다.

 

오스트로네시아족 시대별 확산도

유러피안 이전 마오리 사회의 여성 지위와 역할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지만, 몇 가지는 명확하다. 그 사회는 모권사회(matriarchy)는 아니었지만, 여성도 완전히 발달한 가부장제의 종속적 성도 아니었다. 성별에 따른 노동 분업이 있었지만, 여성은 사회적 생산에 전적으로 참여했다. 여성이 리더 역할을 맡는 사례도 있다. 이 상황을 한 학자는 동시대 파케하 여성과 다음처럼 비교했다: “19세기 파케하 세계에서 계속된 남성 지배 패턴은 마오리 사회의 여성 지위와 매우 달랐다. 지도적 마오리 여성들은 다른 플랫폼을 통해 정치 무대에 진출했다. 그 플랫폼은 그들이 나온 공산주의 사회였다.

 


 

역자 후기

마오리 사회는 공산주의 사회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마오리 사회가 공산주의 사회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저자는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공산주의 기본 개념에 대한 주장자들의 이해 부족을 탓한다. 가령, 그들은 사회 내 직위(rank)와 계급(class) 간 본질적 차이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했으며, 공동 생산 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일상생활을 위한 개인 물품에 대한 사적 소유권으로까지 확대한 오류 논리로 마오리 사회의 공산주의적 성격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아니, 그럼 공산주의 사회인데 왜 그렇게들 박 터지게 싸우며 서로 죽인겨? 뭐라고 구시렁대도 우리가 중앙정부를 설립해 통치해 주니까 너네 부족 간 살육 전쟁은 사라졌잖아. 그건 인정해야 하는 거 아녀?’라는 식민 파케하의 논리에 대해,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놓고 벌인 전쟁을 왕실 혹은 자본가의 탐욕을 위해 일으킨 학살과 전쟁과 같은 선상에 놓으며 제국주의적 살육을 합리화시킨다고 반박한다.

마오리 사회는 모권사회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어쩌면 평등이 가장 중요한 목표인 공산주의 사회는 이 평등 사회의 실현을 위해 계급 철폐 슬로건을 제일 앞에 내세우지만, 다른 한편으로 젠더 간 평등도 못지않게 강조한다. 그렇다면 사회경제 시스템 측면에서 원시공산제였던 유러피안 이전 마오리 사회는 다른 원시공산제 사회에서 발견되면서 엥겔스의 관심을 끌었던 모권사회였을까? 모권사회였다면 남녀평등 기풍과 관습이 차다 못해 넘치기 때문에 유러피안 이전 마오리 사회를 이상화시킬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답은 조심스럽다. 유러피안 이전 마오리 사회는 모권사회는 아니었지만, 가부장제하에서 종속된 성은 아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