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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사회민주주의냐 민주사회주의냐 - 민주사회주의 이야기 (7)

김 무인 2022. 1. 7.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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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민주주의의 태동

 

신실하다고 자처하는 일부 좌파에게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란 용어는 부정적 함의를 가진다. 사회운동을 위한 다른 형식의 조직 활동은 무시한 채, 선거 활동에 과도하게 집중하면서 사회주의 사회라는 궁극적 목표를 포기한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사회민주주의는 종종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진보적 개혁의 추구를 의미한다. 2020년 미국 민주당의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유세 기간 중, 버니 샌더스는 자기를 민주사회주의자라고 칭했지만, 그의 정책은 사회주의라는 목표를 추구하기보다는 개혁 중심의 사회민주주의 프로그램이라고 일부 좌파와 언론은 비판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다른 일부 좌파와 진보적 성향을 자처하는 일반 대중에게 사회민주주의는 이상적 사회주의를 추구하지만, 현실에서 가시적 성과를 보여준 적 없는 혁명적 사회주의(민주사회주의 포함)의 대안으로 다가간다.

 

’사회민주주의’라는 용어는 19세기 말,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과 함께 등장했다. 많은 경우 이들은 대규모 노조 혹은 노조 연합과 밀접히 연계하며 제2 인터내셔널 (1889~1916)을 구성하였다. 당시 영향력 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 정당은 ‘사회민주주의자’로 자신을 묘사하면서, 이 용어를 ‘사회주의자’와 같은 용어로 간주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용어는 서서히 이 두 용어가 다른 실체를 가진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더 이상 동일시되지 않게 된다. 동일시되지 않는 것은 물론 심지어 상호 적대적 개념으로까지 발전된다.

 

19세기 후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같은 일부 좌파는 자본주의가 붕괴하고 공산주의가 도래한다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대전제 중 하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가 무너지는 대신 대단한 자생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1870년대와 1880년대의 긴 불황을 뚫고 더 강한 모습으로 살아나 안정과 팽창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몇 선진 부르주아 국가들은 서서히 그리고 단발적이었지만 중요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개혁 정책을 실행하면서, 서유럽과 미국 노동계급 삶의 조건은 맑스 시대보다 훨씬 좋아졌다.

 

19세기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

다른 사회주의 정당과 마찬가지로 독일과 오스트리아 정당 지도자들도 노동자들의 파업, 대중 시위, 사회주의에 대한 대중 교육, 그리고 남성의 보편적 참정권이 나라별로 차례로 현실화함에 따라, 선거 참여를 통해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고 상상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독일 사회민주당(SDP) 등은 선거활동에 집중하면서, 다른 비사회주의 정당과 동맹을 맺고 노동계급뿐만 아니라 중산 계층 선거구에서도 선거운동을 했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목표는 공식적으로 포기된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 목표가 될 때까지 미루어졌다. 미국과 유럽의 노동계급 유권자는 여전히 사회주의 계열 정당을 지지했지만, 이들 중 다수는 이들 정당의 개혁 어젠다 지지 차원에서 투표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좌파는 세 진영으로 갈라졌다.

 

 

사회주의 운동의 분화

 

레닌주의로 대표되는 첫 번째 분파는 만약 새로운 사회질서가 스스로 도래하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이를 가져올 수 있고, 또 가져와야만 하며, 이를 위해 혁명 선봉대의 정치-군사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실천에 옮겼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이 그것이다.

 

두 번째 분파는 레닌주의가 보여주는 혁명 과정의 폭력성과 엘리트주의를 거부하고 민주적 과정을 고집했다. 초기 민주사회주의자들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카우츠키(나중에 사회민주주의로 입장을 바꿨지만) 같은 이들은 맑스가 자본주의 붕괴의 임박에 대해서는 잘못 이해했는지는 몰라도, 자본주의가 무한정 존속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옳았다고 믿었다. 그들이 보기에,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과 인적 희생은 너무나 커서 궁극적으로 더 나은 시스템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으며, 좌파의 임무는 이 이행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1919년,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키 큰 이 )과 칼 카우츠키

마지막 분파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본주의가 가까운 미래에 붕괴할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거부하면서, 자본주의의 장점을 활용하는 한편 단점은 고쳐 나가는 것이 가능하고 또 바람직하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본주의를 넘어서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엄청난 생산 능력을 장려하여 이익을 회수한 후, 그 이익을 진보적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전략을 택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민주주의다. 이 분파의 활동가와 정치인들은 철학자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자생적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철학적 과제보다는 노동자 삶의 조건 향상과 같은 훨씬 구체적인 것에 관심을 뒀다. 좌파는 혁명(revolution) 대신 개혁(reform)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흔히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라고 불리는 것은 나에게는 전혀 중요치 않다. 운동이 처음이자 끝이다.”

 

지난 한 세기 민주적 좌파 진영의 진정한 역사는 이 민주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라는 두 분파 간의 전투사다. 룩셈부르크가 인지했듯이,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자들에게 노골적 질문을 던졌다: “사회주의 변혁은 자본주의 질서의 객관적 모순 결과로….. 일정 단계에서 일정 형식의 붕괴로 발생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는 영감을 받은 다수의 노력으로 변혁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경우 사회주의의 객관적 필연성은 …. 땅바닥으로 떨어지는가?”

 

베른슈타인이 던진 이 질문은 특히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민주적 좌파로 하여금 그들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정면으로 조명하게 했다. 자본주의가 큰 위기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이 시기에 사회주의자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한편에서는 공황 탈출과 자본주의의 개혁을 위해 국가의 힘을 이용해야 한다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더 나은 세상의 등장은 오직 현 시스템의 붕괴를 통해서만 가능하므로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해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는 민주사회주의자들이 있었다. 당시 유럽의 주요 국가에서 집권하고 있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선동과 이론이 아닌 현실 속에서 정치적 경제적 통치 책임이 있는 자신의 지위를 새삼 자각하면서 자본주의를 길들이는 선택을 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당원수가 계속 감소하고 있는 와중에 2021년 제1당으로 복귀했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 부분적 승리에 그쳤던 사회민주주의 사상과 정책은 2차 대전 이후 좌파 진영 내에서뿐만 아니라 서유럽 정치권 전반에 걸쳐 승리했다. 1945년 이후, 서구 유럽 국가들은 자본주의를 관리하고 자본주의의 파괴적인 영향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것에 매진했다. 국가는 전반적으로 경제보다는 사회의 보호자로서 간주되었으며, 경제적 당위성은 자주 사회적 당위성의 뒷전으로 밀려나야 했다. 국가의 역할과 시장에 대한 이런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서구는 역사상 처음으로 경제 성장, 잘 작동하는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적 안정의 공존 시대를 만끽했다.

 

그러나 전후 질서의 명백한 성공에도 사회민주주의의 승리는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 일부 자본주의 사회는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노동조합 덕분에 다른 자본주의 사회 보다 좀 더 평등했지만, 이들 사회도 경제가 궁극적으로는 공익 추구가 아닌 이윤 추구에 의해 움직인 탓에 여전히 불평등한 사회로 남아 있다. 우파는 필요할 때만 새로운 시스템을 받아들인다; 일단 경제적 사회적 혼란에서 벗어나고 급진적 좌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 그들의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존중 의지도 사라진다. 케인스주의가 한계를 드러내 보이자 그들은 곧바로 신자유주의라는 그들의 카드를 꺼내 들었고, 결과적으로 지난 세기 사회민주주의가 이룩했던 많은 진보적 성과들이 퇴보하고 되었다. 대표적 예로, 자본주의 세계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스웨덴 대기업들의 부와 힘은 글로벌 시대에 증가하면서 정부와 사회에 대한 그들 권력은 이전보다 강화되었다. 공공 프로그램은 빡빡해졌고 소득 격차는 커졌다. 이제 자본주의 사회도 완전 평등 사회에 근접할 수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 스웨덴을 인용하는 것은 어려워졌다.

 

사회민주주의 문제점은 내부에서도 발생했다. 사회민주주의자들 중 일부는 궁극적으로 개혁이 목적을 위한 수단 - 자본주의라는 야수를 길들이기 위한 지속적 과정 - 이라는 것을 망각한 채, 현상 유지에 만족했다. 서구 대중도 지난 세기 사회민주주의가 이룩한 절충적 성공이 힘들게 얻어진 결과물이란 것을 망각한 채, 오늘날 신자유주의에 의해 그 절충적 성공이 훼손되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보고 있다. 이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힘들게 가두어 놓았던 시장은 국가라는 우리에서 벗어나 경제를 휘젓고 다니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의 혼합경제 모델,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의 경제시스템은 여전히 큰 틀에서 자본주의 안에서 작동하므로, 큰 틀 자체가 사회주의에서 작동하는 시장사회주의와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하지만, 단순하게 표현해서, 좌측으로 많인 기운 사회민주주의 형식과 우측으로 많이 기운 민주사회주의 형식은 중간 만나는 지점 언저리에서 적지 않은 특징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혼합경제 모델을 참조해본다.

1950년대 말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 치하의 스웨덴은 역사상 사회민주주의의 최고 모범 사례일지 모른다. 대공황 기간 실업이 만연했을 때, 사회민주당은 실업자들을 국가 주관 프로젝트에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핵심 가치로 완전 고용을 추구한 덕분에, 제2차 대전 이후 등장한 본격적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의 초석을 놓게 되었다. 사회민주당은 완전 고용, 저인플레이션, 고성장 그리고 소득 평등을 동시에 추구했다.

스웨덴의 경제는 혼합경제이지만, 미국이나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정부의 경제 개입이 훨씬 많다. 민간 기업이 존재했고 상당히 크게 성장할 수 있었지만, ‘요람에서 무람’까지의 복지 국가를 위해 훨씬 고율의 세금 체계가 적용되었다. 정부는 실업이 치솟는 지역 혹은 시기에 일자리를 제공하거나, 일자리가 있는 지역으로 실업자를 이동시키는 등 적극적 노동정책을 펼쳤다. 더 나아가, ‘연대임금정책’, ‘동일노동 동일임금’, 그리고 임금 평준화를 추진해 경기순환에 따른 부침을 안정화함과 동시에 노동자 간 임금 격차를 완화했다.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강한 복지국가 그리고 생산성 증가에 따른 임금 인상은 경기 주기 내내 내수를 유지하는데 성공해, 노동, 자본, 기업 그리고 소비자에게 안전과 안정을 보장해 주었다. 사회민주당과 긴밀하게 연계한 강력한 스웨덴 노조는 중앙집권적 임금 교섭을 이끌어 낸 이 프로그램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노사 간 전통적 적대적 관계는 노동자, 사용자, 그리고 정부 대표가 규칙적으로 만나 경제에 관한 주요 결정을 내리는 노사정 협정에 의해 줄어들었다. 이 모델의 다른 특징은 공공 부문 저축, 자본 시장 규제, 그리고 과세와 보조금을 통해 총 저축, 신용 공급 및 투자, 그리고 그 분배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였다.

사회민주주의의 이 모델은 지정학적 사건들과 이민의 압박으로 최근 몇 년 다소 퇴보하였다. 자본주의 세계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스웨덴 대기업들의 부와 힘은 글로벌 시대에 증가하면서 정부와 사회에 대한 그들 권력은 이전보다 강화되었다. 공공 프로그램은 빡빡해졌고 소득 격차는 커졌다.그러나 그 전성기에는 스웨덴 국민들에게 적절하게 높은 생활 수준, 훌륭한 국가 의료 시스템, 무상 고등교육, 출산과 양육에 대한 관대한 지원, 실업과 다른 예기치 못한 재난에 대한 완충 장치, 그리고 노후 안전을 제공했다. 그 결과, 불평등은 현저하게 감소했고 빈곤은 사실상 사라졌다. 오늘날에도 스웨덴은 다른 북유럽 국가들 그리고 스위스와 함께 행복지수에서 156개국 중 상위 7위 안에 든다.

 

맺음말

 

민주적 좌파 진영 내 민주사회주의 캠프와 사회민주주의 캠프 간 근본적 입장 차이는 21세기 현재도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민주사회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제공했던 복지국가가 자본주의로 말미암은 대중의 고통과 사회적 불평등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없다고 여전히 믿는다. 진정한 정의는 오직 자본주의가 사라질 때만 도래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민주사회주의자들은 암묵적으로(그리고 종종 노골적으로) 사회민주주의의 자본주의를 길들이려는 시도를 폄하하고, 따라서 좌파의 응집력과 호소력 그리고 중단기적으로 고통받는 대중에게 실질적 혜택을 주는 좌파의 능력을 제약하였다.

 

민주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간략 비교

한편, 많은 리버럴(오늘날 신자유주의자)은 자본주의의 혜택만을 보는 반면, 많은 좌파(민주사회주의자 포함)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결함들만을 보고 있다. 이들 사이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혜택과 결함 모두를 총체적으로 인식하려 노력했고, 실제 전후 타결을 통해서 많은 사회주의적 특성을 갖춘 자본주의 국가를 탄생시켰다. 자본주의를 억제 혹은 극복하기 위한 희망 없고 역 생산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타협 속에 작동하는 자본주의 창출이 사회민주주의 역사적 성과였다. 이런 사회민주주의적 사고방식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북유럽 국가들과 같은 나라는 사회복지와 경제적 역동성은 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동맹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들 국가는 더 나아가 형식적 평등을 본질로 하는 자본주의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경제 영역에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델도 창출했다. 이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그들 자유에 대한 권력자들의 침해에 저항할 만큼 충분히 자신감 있고 자생력 있는 자체 조직, 자체 협회 그리고 네트워크를 가진 공동체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는 맑스가 언급한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이었다.

 

19세기 말 그리고 20세기 초 사회민주주의 선구자들이 그들의 정치를 통해 21세기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어쩌면 가능성에 대한 감각(sense)이다. 일부 막시스트의 결정주의 그리고 리버럴의 자유방임주의에 맞서, 사회민주주의 선구자들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힘을 합하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현실화하였다. 이상은 원대하나 현실에서 무기력한 민주사회주의와 현실 속에서 종종 이상으로 향한 길을 잃어버리는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분법적 구분에서 벗어나는 길을 우리는 이 ‘가능성에 대한 감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이상적 민주사회주의를 위해 도움이 되는 개혁적 현실 운동에의 지속적 참여를 통해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다. 맑스 본인도 그 명백한 한계에도 사회주의 사회 건설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위해 부르주아의 정치적 민주주의를 최대한 이용하려고 했다. 지금 당장 실현이 되면 가장 좋은 시나리오이겠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면 다음을 기약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민주사회주의냐 사회민주주의냐라는 전통적 선택적 질문에 대해 우리는 모두 민주사회주의이자 사회민주주의자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답은 다음 슬로건과 같은 의미다: “이상은 높게, 현실은 낮게” 혹은 “Be realistic, demand the impossible“. 이 답은 티끌이 모여 태산이 만들어진다는 의미에서, 개혁의 양적 축적을 통해 혁명을 대신할 정도의 성과를 달성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티끌을 모으는 과정은 이상의 현실화를 위한 객체적 조건의 성숙에 필수적이다. 먼저, 노동 대중의 지금 당장 삶의 조건 향상을 통해 다음 단계를 위한 운동 에너지를 더 결집할 수 있다. 그리고 운동 참여를 통해 미래의 새로운 민주적 사회, 즉 경제가 민주화된 사회의 주체가 될 노동 시민으로서 자체 역량 축적이 그것이다. 더 나아가, 이 티끌을 모으는 개혁적 투쟁은 수동적 과정이 아니다.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최일선에서의 개혁 투쟁 과정은 자본주의의 모순과 사회적 불만이 어느 순간 갑자기 그 거대한 실체를 드러내게 하기 위한 연속적 두드림의 과정이기도 하다. 마침내 거대한 실체를 드러낸 적과의 본격적 전면전을 대비해서라도 현장에서 끊임없이 감각을 유지하는 것은 필수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