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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사회주의로의 이행 전략
최근 유명을 달리한 미국 막시스트 사회학자 에릭 올린 라이트(Erik Olin Wright)는 21세기 반자본주의자들은 네 가지 전략을 조합해서 자본주의를 점진적으로 잠식하는 전략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잠식 전략은 사회주의 운동이 아래 사항을 동시에 시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a) 규제와 재분배를 통한 자본주의 길들이기;
b) 직원 소유 협동조합과 같은 대체 제도를 구축함으로써 자본주의에서 벗어나기;
c) 임금 인상과 근로 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으로 자본주의에 저항하기;
d) 자본가의 힘을 약화하는 구조적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자본주의 해체하기
이런 접근을 통해 기존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대체할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고 라이트는 주장한다.

지역공동체 금융 민주화를 통한 이행 전략
민주적 금융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프로젝트는 라이트의 이 사회주의로의 이행 전략에 완벽히 부합한다. 노동 없이 금융 투자 혹은 투기를 통해 부자는 더 부자가 되는 현 금융 자본주의에 신물이 나 새로운 탈 자본주의 사회를 꿈꾸는 이들에게 새롭고 다른 유형의 은행가가 되라는 제안은 환영받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은행가는 다른 방법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자원에 접근함으로써 개인과 집단의 삶을 보다 더욱 풍요롭게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공평하게 할 수 있다. 사회주의 은행가라는 개념은 모순이 아니며, 오히려 급진적으로 민주적 사회질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이다.
미국의 상황을 예로 들어보자. 현재, 미국 소비자 은행 예금의 90%가 시중 상업 은행에 보관되어 있고 그 대부분도 Citibank나 Bank of America에 속해 있는 반면, 오직 10%의 예금만이 1인 1표 그리고 비영리로 운영되는 신용조합이 보유하고 있다. 만약 신용조합이 반대로 90%를 그리고 시중 상업은행들이 10%를 보유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 보라.
공동체 기반의 신용조합은 수조 달러를 보유하게 되면서 이 자금을 저렴한 주택 프로젝트 그리고 대기업을 대체할 수 있는 지역 경제 개발 계획에 사용할 것이다. 급진적 지역공동체 조직가들은 이 지역 기반 은행가들과 긴밀히 협력하여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저비용 대출에 대한 접근을 도와줌으로써, 지역 수준에서의 권력 구축을 상상할 수 있다. 이렇게 지역 사회가 새로운 직업과 새로운 가치 창출을 위한 대안 전략을 가지면서, 지방 정부들이 대기업에 뇌물을 주어가면서 자기 도시에 사무실이나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서로 싸우는 시대는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그들의 돈을 나쁜 은행으로부터 지역공동체 금융 기관으로 옮기는 결정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 결정을 이끌어 내기 위해 급진적 변화의 비전을 가진 사회운동은 지역 그리고 국가 차원에서 활동을 조직하고 동원해야 한다. 이런 노력은 자본주의 기관들의 힘을 현저히 잠식하고, 사회주의로의 진전 가능성을 높일 것이다.
노동대중에 의한 민주적 이행
민주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꿈꾸는 사람은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지만, 반드시 사회주의로 이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수용하고 그들과 기꺼이 함께 일하려는 의지를 갖출 필요가 있다. 다른 말로, 가장 급진적 정치를 지향하는 사람이 가장 올바른 견해 혹은 그들이 몸담은 운동을 가장 잘 이끌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하고 싶은 유혹을 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21세기 민주사회주의자는 현 운동에 있어 폭넓은 연계의 중요성과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에 있어 민주적 지지를 강조한다. 따라서 지난 세기 좌파 내 상당수에 의해 문제없이 받아들여졌던 소수 혁명가 지도에 의한 폭발적 혁명 개념에 부정적이다. 기존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노동 대중의 비폭력적 운동이 궁극적으로 평등하고 민주적 사회로 우리를 이끈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주권 행사의 불참이 변명 될 수 없는 것처럼, 민주사회주의 실현의 비관적 전망이 자본주의 선거제도 불참의 변명이 될 수 없다. 그럴수록 이 대의 민주주의 제도 참여가 더 절실하다. 민주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초월한다는 장기적 필요성에 초점을 맞추지만, 필요한 개혁을 위한 구체적 단계별 정치적 프로젝트에 대중이 참여하는 것을 요구한다. 민주사회주의자는 노동자, 여성, 유색인종 혹은 성 소수자 불만의 시정을 위해 압력을 가할 모든 기회를 이용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민주사회주의자는 이 사회가 구조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의 틀 안에서 이룬 일정 성과가 궁극적 결실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면서 이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
민주사회주의는 선거를 위한 정당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운동 조직들의 주체적 활동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 운동 조직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전파하고, 선거에서 노동자 대표 정당이 승리하는 데 도움을 주며, 선거 승리 후 정부가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이전하는 것을 뒷받침한다. 이들 조직은 단지 정당의 산하 조직이나 외곽조직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들은 민주사회주의 사회의 주체이자 방위 세력이다. 이들은 다양한 조직 활동과 투쟁을 통해 선거 승리의 주역일 뿐만 아니라, 선거 승리 이후 민주사회주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역량을 축적한 민주적 시민이 된다. 각종 조직 활동과 투쟁에 주체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사회주의 사회가 수립되기 이전에 자체 통치의 경험을 한 덕분이다. 이처럼 경험, 비전, 조직 그리고 노동자들의 역량을 발전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 변혁을 위한 투쟁 과정이며, 로자 룩셈부르크가 누차 강조한 것이다. 이런 경험이 없는 사회구성원에게 이후 자체 통치를 맡기는 것은 시신을 통해 사전 연습하지 않은 의사에게 살아있는 환자의 심장 수술을 맡기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를 핑계로 엘리트는 대중으로부터 권력을 회수할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의 민주적 이행 전략
’공산당 선언’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가려졌던 내전이 기존 사회 내에서 더 격렬해지고 공개적 혁명으로 돌출되면서, 부르주아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폭력적 전복의 토대가 마련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것이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그들의 한 구상이었다. 그러나 같은 선언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노동 계급에 의한 혁명의 첫걸음은 민주주의 전쟁에서 이김으로써, 프롤레타리아를 지배 계급 위치로 끌어올리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더 나아가, 맑스는 말년에 일부 국가에서는 폭력혁명 없이 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형식으로 사회주의 정부가 집권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오늘날 민주사회주의자도 무력에 의한 자본주의 국가 전복 대신, 민주적 ‘선거 혁명’을 통해 좌파가 지배하는 ‘민주 공화국’ 체제 안에서 사회주의 이행 과정을 밟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맑스가 말한 것처럼, 계급 투쟁이 민주공화국 아래에서 종식될 수 있다면 민주공화국과 사회주의 국가 간 차이가 없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재’라는 말도 의미가 없어진다. 엥겔스도 나중에 민주공화국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같은 것이라고 부연 설명한 바 있다. 한편, 맑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선거제도를 통해 성립된 민주공화국에서 이루어질 사회주의 이행의 본질적 취약성을 경고했다. 그들 재산권이 궁극적으로 도전을 받는다면 부르주아가 무엇을 할 것 같으냐고 맑스는 묻는다. 이 질문에 그는 명확한 답을 제공한다: “부르주아 공화국은 즉각 부르주아 테러리즘으로 돌변할 것이다.” 맑스의 이 우려는 1973년 민주적 선거로 선출된 칠레 아옌데 정권이 미 제국주의와 국내 부르주아에 의해 폭력적으로 전복된 것에서 증명되었다.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훨씬 전부터 자본주의의 이전 생산관계를 잠식하기 시작했던 자본가 계급과 달리, 노동자 대중이 사회주의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을 먼저 획득해야 한다. 즉 선거에서 승리해야 한다. 그러나 선거 승리와 집권이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정치적 집권 이후, 이 이행 과정을 반동적 자본가와 외세로부터 지켜내야 할 힘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옌데 정권을 전복한 국내외 반동 세력처럼, 노동자 대중에게는 항상 민주적 절차를 요구하지만 자신들 존립기반이 위협된다고 판단하면 자본가는 언제든 테러리스트가 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사회주의자의 초점은 목전의 선거 승리 외에도,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후 외부 제국주의 세력과 내부 반동 자본가 세력의 위협을 어떻게 극복하면서 변혁을 현실화시킬 것인가에 맞춰져야 할 것이다.
정권 교체 그 이후
선거를 통해 좌파 정당을 집권당으로 선출했던 많은 나라의 대중은 이후 우파 혹은 권위주의적 정치 지도자들과 정당에 투표했다. 2015년 집권한 그리스의 Syriza(급진좌파연합) 정권이 구제금융을 둘러싸고 국제적 압력에 그들의 뜻을 제대로 펼쳐 보이지 못한 채, 2019년 선거에서 보수 정당에 정권을 빼앗긴 것은 최근 사례 중 하나이다. 집권한 사회주의 정부도 많은 경우 사회주의 비전의 핵심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 결정들을 내린다. 세계 시장이 주요 자본주의 열강에 의해 지배되어 있는 한, 좌파가 집권한 국가는 국민 생활 수준이 더 낮아지는 등 세계 자본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따라, 많은 지지를 받았던 ‘사회주의로의 이행’ 국가들이 자본주의로의 회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맑스 시대 이후, 거의 모든 혁명의 운명이었다. 이에 저항하듯 1세기 전에 레닌에 의해 제기된 일국사회주의 이론은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적 논리였다. 이후 집권한 스탈린도 일국사회주의 이론이 항구적 해결책이 아님을 인정했다. 그는 일국 사회주의는 ‘불완전한 승리’며 ‘완전한 승리’를 위해서는 최소한 몇몇 국가에서의 승리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지금처럼 자본주의가 촘촘한 세계적 네트워크를 형성하지도 않았음에도, 100년 전에 그는 일국 사회주의의 취약성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21세기 집권 좌파 정당에게 이런 적대적 환경에서 택할 선택지는 유감스럽지만 많지 않은 듯하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국제적 연대를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다. 좌파가 선거를 통해 이룩한 민주공화국은 사회주의를 향한 첫걸음이다. 따라서 일단 민주공화국이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수립되면 사회주의자들은 우파 정당 혹은 후보자들이 집권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야 한다. 집권 후에도 그들을 상대로 투쟁하기 위해 대중 운동을 조직하고 활성화하는 것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사회주의자가 사회주의를 대하는 자세
민주사회주의를 꿈꾸는 자들은 더 급진적이어야 한다: 보장된 기본 소득, 단축된 근무일, 더 많은 공원, 더 나은 보육원, 젊은이들을 위한 여행 기회, 노인들을 위한 돌봄 서비스 확대,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주거환경, 그리고 일상에서 더 자주 음악회를 가고, 시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잊혀진 문명과 마주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 프로그램을 요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선거에서 사회주의자를 지지하는 것에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너, 사회주의자야?’라는 상대방 질문에 찔끔 놀라면서 방어적 모드로 전환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21세기 민주사회주의자들은 유례없이 다양한 문화적 관점들로 촉발된 글로벌 시민사회의 도전에 정면으로 부딪쳐야 한다. 과거 노동운동이 황금기에 접어들었을 때, 계급에 관해 얘기하는 것은 간단했다. 노동계급은 (구조적으로) 노동력을 파는 계급이었고, 이들은 유럽 사회민주주의를 통해 그들의 연대(의식)가 구현되었던 산업 프롤레타리아로 명백히 전환될 수 있었다. 오늘날 노동력은 여전히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지만, 노동계급은 모든 면에서 계층화되어 있고, 산업 프롤레타리아 계급 개념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계급의식은 이제 에스닉, 성별, 인종 정체성에 자리를 내주었다.

사회주의는 형이상학이 아니다; 사회주의 윤리학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비록 계급의식이 에스닉 혹은 젠더 정체성 정치를 통해 왜곡되고 있지만, 사회주의는 정체성의 초 계급적 형식을 가로질러야 한다. 여성 사회주의자는 여성 그룹 내에서, 유색 인종은 자체 조직 내에서, 그리고 다른 정체성 그룹에 속한 사회주의자는 같은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를 하나의 형이상학적 프로그램으로 간주하는 것의 문제는 이 프로그램이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 나거나, 혹은 그 타당성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 승리가 연기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내가 지지하고 헌신한 프로그램이 결국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면, 나에게 영감을 주었던 그 모든 자신감은 증발할 것이다. 또 사람들이 내 신념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나는 그들을 기껏해야 개종자로 취급하거나, 많은 경우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것도 마다치 않을 것이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우리는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자와의 관계를 이데올로기와 그 신도라는 전통적 이해 방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둘 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자의 정치적 활동에 형태와 힘을 부여하는 헌신과 가치의 집합체, 즉 기풍(ethos)이라는 주장이다. 사회주의 기풍은 사회의 제도적 변화를 사회주의적 기풍에 내재한 가치들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적합한 수단이 필요한 목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하나의 기풍으로서 사회주의는 세계를 지배(뒤집어엎으라고)하라고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 머물 곳을 찾을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사회주의는 성공에 대한 전망이 아니라 헌신의 깊이에 의존한다. 변화를 위한 프로그램을 목적이 아닌 정치적 관계 육성을 위한 잠재적으로 유용한 수단으로 간주한다. 사회주의자의 역할은 직장 내 결정에서 노동자들이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바람직한 것은 특정 결정이 아니라 결정을 위한 민주적 과정이다.
사회주의의 최고 유산은 공통 경험에 기반을 둔 상호 존중의 동료애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반복되는 재발견이다. 동료애는 사회주의 전통보다 훨씬 오래된 개념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동료애에 대한 정치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주의를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동료애 기풍이다. 기풍으로서 사회주의는 패배뿐만 아니라, 승리 상황에서도 사회주의자들이 일상적 정치활동을 지향하게 한다. 21세기 민주사회주의를 꿈꾸는 자들은 ‘사회주의자’가 되기보다는 ‘사회주의적(Socialistic)’ 인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입으로만 살아있는 ‘종교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몸으로 실천하는 ‘종교적’ 인간이 필요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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